[세계의 장애우]미얀마의 장애우 실태
본문

비행기를 타고 5시간이나 걸리는 곳에서 「함께걸음」을 읽게 될 줄 몰랐는데, 이수지간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정책실)의 배려로 「함께걸음」을 거르지 않고 읽게 되었네요. 「함께걸음」은 제가 92년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만나, 지금까지 좋은 친구입니다. 매달 나오는 「함께걸음」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함께 걷는 세상을 꿈꿔보고, 그 꿈이 더디지만 함께 이루어 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함께걸음이 주는 큰 행복이라 생각하는데 여러분의 느낌은 어떠신지 모르겠네요. 그 행복을 나누기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고 싶어 몇 자 적어봅니다.
태국에 있는 미얀마(버마) 인권 단체인 평화재단 버마이슈(Peace Way Foundation Burma Issues)에서 3개월간 미얀마의 인권에 대해 배울 기회를 얻게 되어 온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방콕 국제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아~! 뜨거워, 여기가 태국이구나’하면서 두려움과 떨림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석 달이 되어가네요.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돌아보니 아쉽고 안타까운 그러나 희망을 주는, 복잡한 심정으로 떠오르는 장애우들이 있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장애우는 미얀마에서 생활고와 군사정권의 이주 정책에 시달리다 밀림을 지나 태국으로 오다가 미얀마 군인들이 심어놓은 대인지뢰에 발목을 잃고 칸차나부리 태국 국립 병원에 입원해 있던 미얀마 소수민족 카렌(Karen)족 이주 장애우 노동자이고, 다른 장애우는 일주일에 한 번씩 사무실 근처 거리 식당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시각장애우입니다.
1. 버마 카렌족 장애우 이주 노동자
(국립병원에서 수술 후 치료를 받고 있는SAW COW POW)
미얀마의 역사는 우리가 걸어온 역사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아웅산 장군과 그 동료들의 독립투쟁을 통해서 2차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일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었지만, 150개가 넘는 소수민족과 다양한 언어, 종교를 한 나라로 묶기에는 여러 장벽이 있었습니다. 복잡한 정치적 상황에서, 1962년 버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네윈 장군 주도의 군사정권의 쿠테타가 일어났는데, 그 군사정권은 80%가 넘는 미얀마족이 주도권을 장악하고, 미얀마족의 종교인 불교로 통일하는 정책을 최우선에 내세우게 됩니다.
지금까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군사정권의 이런 정책은 소수민족을 원래 자신들의 땅에서 몰아내고, 종교와 언어를 빼앗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런 미얀마의 상황이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태국 국경에는 수많은 미얀마 소수민족의 난민촌이 형성되었고, 미얀마에서 넘어와 살길을 찾는 수많은 이주노동자를 양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치적, 사회적 문제가 SAW COW POW(소우 코우 포)의 한 쪽 다리를 앗아갔습니다.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저를 보면서 연실 ‘미얀마! 노우~~ 노우~~’ 라고 하면서 자신이 왜 위험을 무릎 쓰고 넘어 왔는지 아주 절실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 서로 교감할 수 있었으며, 미얀마 안에 있는 가족에 대한 걱정과 퇴원 이후에 태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걱정스런 마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잘려진 다리를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의 손을 잡거나 이불을 덮어주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나오면서 마지막에 그와 나는 서로 합장을 하면서 서로의 평안을 빌었습니다. 그때 그가 저에게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했더니 “같네(same)”라고 편안해 했습니다. 굳이 종교를 묻지 않아도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어디서나 같았는데 말입니다.
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같은 종교를 가진 종교인이 아니라 옆에 있어 줄 ‘사람’이란 사실이 더욱 가슴을 아리게 했습니다.
한쪽 다리를 잃은 그가 장애우로 태국에서 일을 구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돌보고 있는 같은 카렌족 인권 활동가는 이 점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앞으로 이 사람을 어떻게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카렌족이고, 지금 우리가 없으면 이 사람은 다친 채로 어디서 죽어가고 있을 지도 모르지…” 라고 말하는 활동가를 보면서 민주화되지 않은 나라, 다른 민족에 탄압을 받으면서 자신의 땅을 떠나야 하는 민족의 설움과 그 민중들의 아픈 현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장애우라는 사실이 태국에서도 여전히 취업과 삶의 문제에 주요한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도 제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태국인이 아닌 미얀마 사람으로, 미얀마에서도 탄압 받는 소수민족의 농민으로, 이제는 장애우가 된 이주 노동자로 살아야 하는 그에게 저는 나오면서 그가 좋아하는 사탕과 과자봉지를 전해주는 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병원을 나오면서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다 장애우가 된 분들의 사진과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2. 노래하는 시각장애우들
<거리 식당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각장애우들>
또 한 명의 장애우 이야기를 해야 겠네요.
그 전에 태국에서 본 장애우들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드리면, 제가 지내는 곳이 방콕 중심가라 그런지 모르지만, 제가 본 시각장애우 대부분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노래를 듣는 정안인들에게 노동의 댓가를 받고 있었고, 지체장애우들은 복권이나 간단한 물건을 가지고 나와서 노상에서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장사를 할 수 없는 장애우들은 거리에 앉거나 누워서 자비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늙은 지체 장애우는 저를 보자 “헬로! 헬로! 하와 유~” 하면서 깡통을 들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거리를 지나면서 태국 장애우들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갑자기 아시아의 관광산업에 대해 언급했던 충격적인 글이 생각났습니다.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 관광상품으로 파는 것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한가지는 여성의 성(性)이고 또 한 가지는 안타깝게도 구걸하는 민중이라고 합니다. 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잘 사는 나라에서 온 관광객이 자신의 자비로움(?)을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통로 중 하나며, 아시아를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사는 곳으로 이해하게 하는 관광상품이라는 요지의 글이었는데, 그 앞에 저도 자유로운 사람이 아님을 느꼈습니다.
이제 저에게 깊은 인상을 준 장애우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 제가 자주 이용하는 거리 식당 앞에는 정확히 언제 공연하는지 모르지만 일주일이나 이주일에 한번은 볼 수 있는 시각장애우 노래연주단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지하철 등에서 노래를 하거나 음악을 틀어 주면서 구걸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지만, 이렇게 여러 사람이 자신의 재능을 가지고 연주단을 결성해서 직접 거리 공연을 하는 건 보기 힘들지요. 물론 한국에서는 단속반이 그냥 둘 리도 없지만,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아마도 태국에서 유명한 가수의 노래인 것 같았고, 정말 가수라고 생각할 만큼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듣는데 마치 어느 콘서트 장에 와 앉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사진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중간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각장애우가 저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분입니다. 왜냐구요? 거의 가수 빰치게 노래를 잘했던 이 분은 노래하는 순서가 되면 일단 앉아서 노래를 시작하지만, 노래 중반이 지나가서 클라이막스가 되면 벌떡 일어나 마이크 든 손을 제외하고는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몸을 흔들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태국의 그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저절로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래가 끝나면 그 분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히 앉아 자신의 자리를 지킵니다. 당연히 저는 노래에 대한, 그 더운 한 낮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그 분의 노동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게 되었구요.
누가 보고 있는가가 중요하기보다는 자신의 노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제가 이 분을 계속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두 달 사이에 만난 이 두 장애우의 모습을 보면서 삶의 치열함과 인권의 소중함,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는 일에 즐거워야 한다는… 어떻게 보면 참 상식적인 깨달음(?)일지 모르지만…저에게는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타국 땅에서 장애우로, 노동자로 아니, 장애 이주노동자로 살아가는 분의 삶 앞에 너무 많은 것을 누리고, 또 가지고 있는 한 인간을 보았고, 땀 흘리며 자신의 노래에 취한 그 장애우 앞에서 가지고 있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면서 더 가져야 한다는 자본주의적인 한 인간을 보았습니다.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어떤 분은 장애우를 대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물어 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애우를 대상으로, 시혜나 동정의 대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말에 100% 동의합니다. 그러나, 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느끼는 인간적 유대감과 그의 삶이 주는 치열함을 장애우라고 해서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 공감에 또 다른 조건을 붙여서 그 장애우와 비장애우인 저를 갈라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제 경험을 말한다는 것이 어느 새 저의 입장을 강변하는 어설픈 지식인의 우월감을 또 보여 주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그냥 그 두 장애우가 생각나는 이유와 제가 받은 인간적 공감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멀리 태국에까지 와서 더군다나 미얀마라는 먼 나라 민중들의 인권에 대해서 생각한다는 제가 두 달 동안 느낀 것은 ‘인권은 인간에 대한 감동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작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어설프게 보일지 모르지만, 두 장애우의 삶이 제가 인권을 공부하고 열악한 미얀마 민중의 인권을 경험해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제 남은 한 달은 버마와 태국 국경지대에 있는 난민촌을 둘러볼 계획입니다. 난민촌에 있는 대부분의 남성이 미얀마 군인의 폭력으로 인해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비무장지대나 휴전선 일대처럼 대인지뢰의 피해가 아주 심각하다는 보고서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들을 보면서 또 어떤 회초리를 얻게 될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정리합니다.
박스 처리 해주세요.
오늘 신문에 나온 기사인데요. 참 어이가 없습니다.
혹시 미얀마의 소수 민족 중에 ‘파다웅 족’이 있다는 것은 아시죠? 장신구를 통해 여성들의 목과 발을 길게 만드는 전통이 있다고 소개된…
그 ‘파다웅 족’의 여인들과 소녀들을 납치해서 동물처럼 가두고, 한 명의 여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태국에서 아주 잘 나가는 사업가가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기사입니다.
사진은 그렇게 살던 ‘파다웅 족’이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구요. 이 기사의 제목은 ‘인간 동물원’입니다.
관광 수입이 된다고 국경을 넘어 납치를 해서 자신의 배를 채운 사업가는 이렇게 이야기 하네요. “이건 사업입니다. 그 수익을 그 사람들에게 돌려줬습니다. 일부는 자신의 오토바이가 있을 정도예요…”
미얀마 상황이 날로 어지러워지고, 소수 민족의 자치와 독립이 어려운 상황에 돌입할 수록 소수 민족의 민중들은 태국인들의 돈벌이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미얀마 민주화의 문제는 미얀마 안의 소수민족의 생존권과 인권과 직접 관련된다는 상식과 더불어 민주화의 문제와 함께 같은 가치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민족의 독립에 대해, 자치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갈 권리가 있고, 그 곳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권리죠…”
- 미얀마의 소수 민족인 ‘카렌 족’ 난민이 한 말입니다-
글·사진 도임방주(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원)
10여년이 넘게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함께걸음 독자모임의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불교 단체인 원심회에서 수화를 배우고 한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졸업은 성공회에서 했다. 어떠한 이념보다도 소중한 것이 ‘사람’임을 그를 만나면 알게 된다.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