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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세계의 장애우] 티벳의 앞 못보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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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처음 타쉬를 만난 건, 지난해 봄이었다. 버스를 타고 대학로를 지나다가 샘터극장 붉은 벽돌에 걸린 말을 탄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짧게 깎은 머리에 장난스럽고도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은 남자아이. 하지만 그뿐이었다. 버스는 정류소에 잠깐 섰다가 다시 달려고, 나는 곧 그 아이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한 달쯤 지나서 신문을 보다가 나는 또 그 아이를 만났다. 그 아이의 이야기를 엮은 책, 「타쉬」의 광고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타쉬. 광고는 타쉬를 영혼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티베트 소년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그 책을 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티베트 사람들 중에는 아직도 눈이 안 보이게 된 것이 나쁜 짓을 한 데 대한 신의 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겨울, 어머니가 집 뒤 노간주나무를 꺾은 뒤로 타쉬는 심하게 앓아누웠다. 심한 고열에 시달리다 다시 의식이 돌아왔지만 눈을 떠도 주위는 어둡기만 했다. 그동안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이듬해, 친구들이 학교에 들어갔지만 타쉬는 갈 수 없었다. 타쉬는 마을 어귀의 죽은 나무뿌리 위에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곤 했다. 아침저녁으로 그 앞을 지나 들로 나가는 야크와 염소 들을 만났다. 각기 다른 발굽소리를 듣고, 그들 특유의 냄새를 맡고, 그들의 목에 달린 어둡고 밝은 여러 가지 종소리를 들었다.
마을을 조심스럽게 탐험하며 여름 우기 때에는 많은 웅덩이가 패고 농부 남카 씨 집 근처에는 작은 조약돌이 많이 깔려 있어서 사람들이 그 위를 걸어다닐 때 자박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것도, 학교 앞에는 갈림길들이 나 있어 거기서부터 작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시작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강둑 또한 타쉬의 탐색지였다. 미끌미끌한 바위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기어올라갔다. 그리고 다음 바위로 건너가기 전에 그것들이 흔들거리는지를 항상 신중하게 확인했다. 서서히 타쉬의 감겨진 눈꺼풀 너머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리와 냄새의 세계, 기억 속에서보다 더욱 빛나고 있는 색깔의 세계가.
어느날 학교 앞 바위 위에 앉아 울고있는 타쉬에게 마을 촌장님이 제안을 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갔기 때문에 산에서 염소를 돌볼 사람이 없구나. 우리의 목동이 되어주지 않을래?"
그날로부터 소리와 냄새만으로 염소를 구별할 줄 아는 목동 타쉬의 인도를 받으며 염소들은 산에서 풀을 뜯었다. 그러던 어느날, 타쉬는 종이에 뚫린 작은 구멍을 만져 글을 읽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라싸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분해서 몸이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두해 뒤, 유목민을 따라 타쉬는 라싸로 왔다. 마침내 티베트 시각장애우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나는 듣지 못하는 선생님 한 분을 알고 있다. 열일곱에 청각을 잃고 이제 일흔이 된 그분은 여전히 열일곱 인양 깨끗한 눈과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 여럿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집이 여간이 아닌 선생님 흉이라도 볼라치면 정말 귀신같이 알아채곤 해서 혀를 내두르기도 한두 번이 아니다. 언젠가 북소리를 느낄 수 있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선생님은 귀로 들리지는 않지만 가슴이 울린다고 했다.
두눈, 두귀, 두손, 두발 다 멀쩡해서 하찮게 지나쳐버리게 되는 모든 것이 장애를 가진 이들에겐 세상을 느끼는 소중한 것임을 선생님과 타쉬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하나가 아니란 걸 알았다. 각자가 느끼는 대로 50억 지구인에게는 50억 개의 세상이 있는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나는 타쉬의 세상을 들여다보게 되어 기뻐서 눈물이 났다. 그리고 그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또 그뿐이었다. 바쁜 일상은 계속 되었고, 나는 다시 타쉬를 잊어버렸다. 달마다 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7년째로 접어들었다. 재미있는 일이었고, 보람있는 일이었고, 좋은 사람들이 늘 곁에 있었다. 하지만 난 자꾸 지쳐갔다. 내가 내가 아닌 어떤 것으로 자꾸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마음은 끝없이 쫓기고 내 속에 흐르는 강물이 바싹 말라 바닥이 갈라지고 있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지난해 여름, 직장을 그만두었다.
집에 틀어박혀 끙끙거리거나 가끔 서점에 나가보는 것이 생활의 전부인 날들이 지나갔다. 두어 달이 지난 어느날, 나는 서점 구석진 책꽂이에서 책 한 권을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뻤다. 마치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이 한순간에 기억을 찾은 것처럼 생각들이 밀려왔다. 그것은 바로 타쉬가 다니는 티베트 시각장애우학교에 관한 책이었다. 놀랍게도 그 학교는 독일인 시각장애우 여성이 만든 것이었다. 그 책에는 그녀가 혼자 몸으로 중국 정부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에 시각장애우학교를 만들기까지의 힘겨운 여정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나는 밑도 끝도 없이 티베트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그 아이들을 만나고 싶었다.

2월 17일에 서울을 떠나 중국을 떠돌다 라싸에 도착한 것은 3월 17일이다. 1950년, 중국 공산당이 무력 침공한 뒤로 티베트는 중국의 영토가 되어있으므로 중국 비자를 받고 또 거금의 허가서를 받아야 티베트에 들어올 수 있다. 고산병으로 머리가 깨어질 듯 아프고 구토와 현기증 때문에 2박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물어 학교의 위치를 알아놨다. 내일이면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겠지.

3월 18일
오늘, 드디어 시각장애우학교를 찾아 나섰다. 펜톡호텔 지배인이 일러 준대로 갔더니 골목길 안쪽에 어여쁜 이층집이 나타났다. 올커니, 여기가 분명해. 마당에는 커다란 개가 누워있고 빨래를 하던 발그레한 볼의 락쥰이 궁금한 표정의 미소로 맞아주었다. 자, 침착하게 준비한 말 시작!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사람인데요, 여기서 일을 돕고 싶어요. 청소, 설거지, 빨래,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내일부터 매일 오후에 올 수 있구요, 한 달 동안 할 수 있어요. 한국에서 이 학교에 대한 책을 읽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내 말을 반도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지만 학교의 살림살이를 돌보는 락쥰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좋다고 했다. 야호!! 티베트의 명절기간이라 아이들은 다들 시골집으로 갔고 일찍 돌아온 아이들 몇은 모두 사원에 갔다고 한다.
쨔시가 학교 안내를 해주겠단다. 쨔시도 시각장애우지만 그는 이 학교의 음악선생님이다. 내 팔짱을 끼고 미로처럼 재미나게 연결되어 있는 여러 방들을 소개해 주었다. 게다가 쨔시는 수업 자료를 모아놓는 창고에서 티베트 전통 현악기와 피리, 하모니카를 멋지게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 주었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다섯 살바기 꼬마에서 스물 다섯까지, 현재 이 학교의 학생은 모두 서른 명이라고 한다. 대부분 시골에서 온 아이들이라 숙식까지 모두 여기서 하고 있어 학교는 하나의 공동체 같았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이 돌아왔다. 아, 그 가운데 타쉬가 있다. 타쉬가. 여기서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은 칠레다. 나는 마음이 뜨거워져 아직은 서먹한 아이들 곁에 가만히 서있었다.

3월 22일
이제 옆에 가서 서있기만 해도 아이들은 나인 줄 알아챈다. 처음 며칠은 나를 만지는 것으로 나를 알아가는 것 같았다. 손과 팔과 얼굴과 안경과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질문을 해댄다.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졌을지 궁금하다.
아이들은 틈만 나면 잡기놀이를 한다. 얼마나 재빠르게 뛰어다니는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아이들이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게다. 청소며 빨래며 설거지며 모두 아이들이 알아서 척척 한다.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락쥰에게 날마다 물어봤지만 아무 것도 없다고 그냥 쉬라고만 해서 할 수 없이 찾아낸 일은 바로 화장실 청소와 마당쓸기다. 아이들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내가 나서서 하는 것도 옳지 않고, 아무래도 아이들은 구석구석 깨끗하게 하기 힘든 곳이 화장실과 마당이니까. 그래봤자 큰 일도 아니고 나는 여전히 아이들 간식이나 축내면서 노는 게 고작이다.

3월 25일
날마다 두세 명씩 아이들이 돌아오고 있다. 아이들은 저마다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와서는 보잘 것 없는 먹을거리를 부끄러워하며 선생님 앞에 내놓는다. 어떤 아이는 꼬깃꼬깃한 1위안 짜리 몇 장을 내밀기도 한다. 그네들에게는 정성을 다한 나름의 수업료인 셈이다.
학교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티베트에는 유일한 시각장애우학교인데도 말이다. 학교를 만든 사브리예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앞 못 보는 아이가 있다는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학생을 모았다. 어떤 아이들은 하루종일 침대에 묶여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 아이들이 이제는 점자를 익혀 읽고 쓰고 노래한다. 아이들이 거의다 돌아와 수업을 시작했는데 오전 오후 두 시간씩 하루 네시간 공부한다. 중국어, 영어, 수학, 음악 따위를 배우는데 모든 운영은 사브리예가 유럽과 미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해나가고 있다.

3월 27일
개강파티가 벌어졌다. 집에 갔던 아이들이 모두 돌아와 벌이는 잔치다. 쨔시와 칠레의 현악기와 하모니카 연주로 막을 열었는데 두 사람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정말 아름답다.
티베트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흥이 많은 민족일까? 아니면 앞을 못 보는 만큼 소리를 민감하게 느끼기 때문일까? 아이나 어른이나 노래 몇 곡조 시원하게 못 뽑는 사람이 없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양껏 노래를 부르고 그 사이, 아이들은 쟁반에 과자를 쌓아 쉴새없이 들고 다니며 더 먹기를 권한다. 아이들 노래하는 제각각 표정이 우습기도, 심각하기도, 익살맞기도 해 도무지 눈과 귀를 뗄 수가 없다.
노래판은 춤판으로 이어졌는데 주로 발재간을 이용한 춤이다. 되지도 않는 춤을 나도 따라 추었다. 보이지 않아도 땅의 울림으로 배웠는지 아이들도 함께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그저 함께 즐기면 됐지 뭐.

3월 28일
오늘은 상급반 거리 실습이 있었다. 흰 지팡이를 짚고서 거리로 나갔다. 약하게 시력이 남아있는 아이들은 안대로 눈을 가렸다. 내게는 10분이면 족할 거리가 아이들에게는 한 시간도 넘게 걸리는 길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자동차가 쌩쌩 다니는 큰길을 건너는 일도, 인도의 높은 턱도, 가로수 아래 흙도,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도, 늘어선 행상들도 다 흰 지팡이로 두드려 알아채야 할 장애물이었다. 보도블럭과 흙길의 느낌, 올라서야 할 때와 내려서야 할 때의 차이, 어느 방향으로 얼만큼 왔는지 가늠하는 일. 두드려 느껴지는 모든 것이 공부였다. 아무래도 어린 아이들이 겁없이 잘 다니고, 큰 아이들일수록 조심스러웠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가슴에 채웠기 때문이리라.
길을 가던 사람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를 만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둘러서서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보이지 않으니 의식할 일도 없다. 눈 있는 나만 쳐다보는 눈들을 의식하고 있었다.
한바탕 거리를 쏘다니고 작은 찻집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실컷 떠들다 돌아왔다. 내 이름이 티벳말로 냄비(하양)와 비슷해 아이들은 내게 "꾜(국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이들이 꾜! 꾜! 거리며 내게 안겨온다.

4월 13일
오늘이 마지막날이다. 티베트에서 만난 한국 친구들을 모두 동원해 아이들 점심으로 잡채덮밥을 만들었다. 아이들 입맛에 맞았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아이들은 "하양, 맛있어요. 맛있어요. 고마워요!"를 외쳐댔다. 내 이름을 오늘은 유독 더 많이 부른다.
중쨔시는 요리할 때는 부엌을 기웃거리더니 막상 식사시간이 되니까 밥도 안 먹고 방에 틀어박혔다. 개구쟁이 녀석들, 오늘은 장난도 안치고 모두 시무룩이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중쨔시 혼자 침대에 앉아있다. 그 아이의 눈동자 없는 흰 눈이 붉게 젖어간다. 괜찮았는데, 정말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 눈에도 주르륵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내일이면 다 잊기 바란다. 그저 왔다가는 사람이니까. 모두들 내겐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이 아이들이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있던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는걸. 그리고 아이들은 자기의 세상을 보여주었는 걸. "내가 너희들 너무 사랑해. 알지?"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말밖에 없었다. 건강하기를, 몸도 마음도…. 우린 꼭 다시 만날 거야. 그렇게 될 거야. 그러니 나는 애꿎은 눈물 흘릴 필요가 없는데….

 

글·사진 이혜영

 

작성자이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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