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뽀] 지금 인사동에 진정한 우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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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동거리 |
"과거와 현재가 혼재하는 곳. 시계 바늘이 얼마간 천천히 돌아간다 해도 밤이 깊어감을 아쉬워하지 않아도 되는 풍경. 말쑥한 정장의 신사부터 남루한 복장까지 나란히 발길을 옮기는 길목. 밤마다 모여드는 고관대작들의 요정부터 서민들의 허름한 포장마차까지, 백 년 전의 주막에 와 앉는 듯한 아득함에서 첨단의 퓨전 레스토랑이 어지럽게 혼재하는 거리……."
몇 해 전 어느 월간지에 인사동 탐방을 적으면서, 위와 같은 표현으로 첫 말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나마 문화적 순수함에 대한 기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전혀 다른 표현을 감히 써야 할 것 같다. "이제 인사동에는 인사동이 없다." 너무 주관적인 단정일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 말은 점점 더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지구로 지정된 바 있는 인사동 거리는 여전히 활력이 넘친다. 평일 저녁은 물론, 차 없는 날인 휴일이 되면 거리 곳곳의 공연과 다양한 볼거리로 생기가 돈다. 수많은 화랑과 전시회, 풍성한 먹을거리의 음식점과 주점, 전통 물건을 판매하는 상점들, 찻집, 유서 깊은 문화재 등은 인사동을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 길을 찾아간 이들은 적잖게 당혹감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양쪽 입구부터 들어선 24시간 편의점과 다국적 패스트푸드점에다가 외국계 커피점의 네온사인 앞에 이르면 당혹감은 더욱 커진다. 그 옆으로 요란한 소음을 내는 게임방과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슈퍼마켓의 간판을 보면, 도대체 인사동을 문화지구로 지정한 이유가 뭔지를 반문하게 만든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너무 많이 바뀐 풍경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인사동을 인사동 답지 않은 거리로 변화시킨 것이다.
"서구화가 너무 급속하게 몰려들어서, 본래의 인사동은 이미 끝났다고 해야 할 거야." 12년째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이름의 민속주점을 운영하는 주인은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아이엠에프 때보다 훨씬, 아니 아주 더 심해졌어. 요즘은 집세마저 못 내서 숨어 다니는 주인들이 꽤 된다고 해. 토요일 저녁인데 이걸 봐. 손님이 없잖아." 실내를 둘러보니 정말 손님이 두 테이블밖에 없었다. 두 명씩 네 명이 전부였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평일 저녁은 한두 테이블만 비어 있을 정도였고, 주말이면 미리 예약을 해야 겨우 약속을 맞출 수 있었던 주점이었다.
"요즘은 동아리 모임 같은 것도 없네요. 간혹 단체 손님이 있어도 맥주는 거의 주문하지 않아요. 소주가 주된 종목이 됐죠." 인근에서 비슷한 주점을 운영하는 주인의 얘기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의 질도 많이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큰 테이블에 둘이 앉아 있을 때 단체 손님이 들어오면 양해를 구하고 작은 자리로 옮길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요즘 젊은 손님들은 손님한테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고 항의를 해요. 인사동 특유의 살갑고 여유로운 문화가 거의 다 사라진 셈이죠." 그 주점도 토요일 저녁 손님은 딱 세 테이블이었다.
"그나마 오래된 단골들이 잊지 않고 찾아 줘서 입에 풀칠이나 하는 거지, 이건 완전히 망한 거나 다름없어. 다른 직업들도 물론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여기 인사동에서 영업하는 사람들은 불황 정도가 아니라 생사의 기로를 느끼는 거라고." 오래되고 지명도 높은 찻집의 주인 또한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 "더 심각한 게 뭔지 알아? 지금은 힘들지만 앞으로는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아니라, 아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거야. 미래에 대한 계획조차 세울 수 없다는 거지."
전통적으로 인사동의 문화를 이끌던 이들은 문인과 화가를 중심으로 한 문화예술인들이었다. 예술인들의 발길이 모이고 모이는 가운데, 인사동 특유의 자유로움과 향기가 흘러넘쳤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문인들이 안 와. 하나 둘씩 안 보이더니, 이젠 내가 알던 얼굴들도 다 잊어버릴 정도야. 분명히 만나기는 할 텐데, 어디에 모여 술자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어. 하긴 이런 세상 꼴에 그 양반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 엄청 힘들게 살 텐데…… 아쉽군. 그냥 놀러 와도 막걸리 한 주전자는 내주고 싶은데 연락도 안 되니, 이런." 자신의 주점 단골이었던 문인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얘기하는 주인의 눈가엔 아주 긴 상념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문인들이 인사동을 떠났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실제로 인사동을 찾는 사람들은 훨씬 더 많아졌어요. 일요일엔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리에는 사람이 가득하죠.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여기에서 무언가를 소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간다는 겁니다. 눈으로 구경만 하고, 안국동이나 종로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모두의 지갑이 그만큼 얇아졌다는 뜻이겠죠." 비교적 젊은 나이인 찻집 주인은 두 달째 집세를 내지 못했다고 했다. "인사동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게 뭔지 아세요? 아르바이트생을 쓰지 않는다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는 매장마다 한두 명의 아르바이트생들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젠 모든 걸 주인이나 가족이 직접 합니다. 밖으로 나가는 그 인건비마저 줄여야 할 절박한 상황이라는 거죠." 그 말을 듣고 보니, 몇 군데 둘러봤던 매장마다 주인이 직접 테이블을 돌고 있었다. 인사동의 현실을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지적한 대목이라 믿어졌다. 그 많던 아르바이트생들이 사라졌다는 것.
물론 끝도 알지 못할 불황에 몸살을 앓는 건 인사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느 업종, 어느 지역에서도 "먹고 살만 하다."는 얘기가 들리지 않는 게 지금의 경제 상황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몸살을 이유로 인사동이 인사동 아닌 모습으로 야금야금 변모된다는 건 생각할수록 아쉬운 일이다. "외국계 식음료 매장이 들어오는 걸 법으로 막을 순 없습니다. 인사동 특구에 대한 건축 제한이 있지만,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허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민속주점이 퓨전 레스토랑으로 바뀌고, 전통찻집이 테이크아웃 커피점으로 바뀐다고 해서 제재할 방법은 없습니다. 건물주의 양식에 기대해야 하는데, 사실 사적인 거래까지 규제할 순 없는 노릇이죠." 마침 가까운 이의 후배가 인사동 지역을 관할하는 해당 부서에 근무한다고 해서 문의했지만, 인사동의 변화를 막을 방법은 사실상 없는 거라 한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사동은 정말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연애도 여기에서 했고, 혼자 길을 걷고 싶을 때도 여기로 왔었죠. 그런데 기억 속의 인사동은 이젠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적당히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본질은 사라졌다고 하는 게 낫겠죠." 경인미술관 안을 둘러보던 사십 대 초반의 남자분 말씀에도 아쉬움이 묻어난다. "차라리 길 건너편인 풍문여고와 백상미술관 사이의 길이 훨씬 좋아요. 예전의 인사동 분위기가 나거든요. 정독도서관으로 향하는 길가의 학교 돌담과 옛날 그대로인 작은 집들, 그림 같은 찻집들과 현대식 건물인 아트선재센터도 아주 멋지고요." 대학 시절부터 인사동을 찾았다는 사십대 중반 여자분은, 특별한 약속이 있을 때는 반드시 정독도서관 가는 길의 찻집으로 향한단다.
"휴일에 한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차 없는 거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일방통행 길로써의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데, 왜 차량 진입을 허용하는지 모르겠네요. 편한 마음으로 다양한 매장을 구경하고 싶은데, 밀려드는 차량을 피하다 보면 별 느낌도 없이 인사동을 벗어나게 되니까요." "인사동 길 자체를 하나의 공원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요? 운치 있는 가로수를 심고 더 많은 벤치를 설치해서, 어린 아이들이 뛰어놀아도 안심할 수 있는 그런 거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물론 차량 진입은 막아야겠죠." "좀더 장기적인 도시 계획을 세워서 인사동을 관리해야 합니다. 탑골공원과 경복궁을 잇는 큰 틀을 생각해야지, 건물이나 매장 하나하나에 매달리면 모두를 잃을 위험도 있어요. 이러다가는 되돌릴 방법조차 없게 국적불명의 거리로 돌변할 겁니다." 다양한 의견 속에는 현재에 대한 우려가 뒤섞여 있다. 그 우려는 연령층이 높아질수록 강도를 더한다는 게 공통점이다.
지금의 인사동도 멋지고 편안한데 왜 공연한 고민거리를 만드는 거냐고 반문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드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지개를 예로 들고 싶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원색으로 이뤄져 있는데, 부분마다 조금씩 검은색이나 회색 또는 흰색이 자리를 잡는다면 어떻게 될까. 다양한 색상의 조화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무지개는 무지개 본래의 일곱 색으로 어울려야 한다. 흰색이 어울리는 자리도 많지만, 분명 무지개 안에는 포함되지 않아야 정상인 것이다. 검은색은 패션계에서도 선호하는 멋진 색상이지만, 도로 신호등 안에는 맞지 않는 색이다. 예쁜 분홍색은 태극기 안에 있으면 안 된다. "인사동은 인사동이어야 한다."는 기본 명제를 새삼 강조하는 까닭이 그것이다. 다양한 문화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지만, 인사동이 인사동이어야 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까닭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첨단의 인터넷 시대에는 전 세계가 동시에 움직인다. 국산과 외제를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국산품 애용이라는 캠페인을 벌일 시대도 지났다. 어느 나라 제품이든 더 나은 게 더 좋은 세상이다. 전국 어느 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다국적 기업의 간판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인지, 이젠 경복궁 안에 패스트푸드점이 들어선다 해도 크게 놀라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이라는 상징으로 대변되던 인사동 거리가 아니었던가. 그 거리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검색한 어느 외국인이 익숙한 영어 간판의 매장을 보게 된다면 뭐라고 말하게 될까. "가장 한국적인 거리"라는 것도 글로벌 시대에는 결국 다국적 논리 앞에 별 수 없는 거라고 치부하지 않을까?
대학로에는 대학로다운, 신촌에는 신촌다운, 명동에는 명동다운 나름대로의 문화가 존재하는 법이다. 또한 존재해야 한다. 조금씩 옛 모습을 잃어가는 인사동을 가지고, 인사동다운 모습을 지키고 간직해 달라고 요구하는 게 혼자만의 고집일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뒤집어 바라본다면, 아주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임을 공감해 주실 거라고 감히 자문자답해 본다. 우리의 혼이라고 자부했던 것들이 점점 더 타인의 몫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글/ 채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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