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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옳은 것인가

정신지체장애 뒤집어 보기 (1)

본문

<정신지체>
1급 - 지능지수 34 이하인 사람으로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의 적응이 현저하게 곤란하여 일생동안 타인의 보호가 필요한 사람
2급 - 지능지수 35 이상 49 이하인 사람으로 일상생활의 단순한 행동을 훈련시킬 수 있고, 어느 정도의 감독과 도움을 받으면 복잡하지 아니하고 특수기술을 요하지 아니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사람
3급 - 지능지수 50 이상 70 이하인 사람으로 교육을 통한 사회적·직업적 재활이 가능한 사람

〈내가 왜 정신지체장애우인가!〉
제가 아는 미국의 한 장애지원센터의 벽면에는 사탕을 담은 몇 개의 병 사진과 함께 이런 표어가 써있습니다. "라벨이 필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다."  또 이런 표어도 기억나는군요. "말을 못한다고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도 정신지체라는 공식라벨이 있습니다. 그것도 1급, 2급, 3급이 있죠. 그러나 바보, 천치에서 정신박약을 거쳐 정신지체라는 보다 "과학적인" 용어로 "발전"해오기까지 우리는 이러한 라벨들이 그 지칭대상들의 세계를 가장 객관적으로 드러낸다는 믿음에 과연 얼마큼 의문을 던져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0여년 전쯤 제이슨 킹슬리와 미첼 레빗츠라는 두 미국 청년은 다운증후군과 함께 살아온 자신들의 삶에 대한 대화형식의 책 Count Us In을 발표했는데 그 책 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제이슨: 내가 태어났을 때 산부인과 의사는 내가 배울 수 없고, 엄마, 아빠도 절대 볼 수 없으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고, 나를 시설로 보내야한다고 얘기했어요. (만일 내가 그 의사를 다시 보게된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거예요. 나는 바이올린을 켜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리고,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하고, 운동경기와 연극반에서 남과 경쟁을 하고, 많은 친구가 있고, 그리고 나는 충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장애를 가진 아기에게 충만한 삶을 키워낼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반잔의 빈 컵 대신에 반잔의 채워진 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그리고 장애(disability)가 아니라 능력(ability)을 생각해주세요.

이 책에서 제이슨은 정신지체에 대한 산부인과 의사의 판단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의사의 판단과 장애인 당사자의 판단이 충돌을 일으키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이슨처럼 소위 정신지체라고 부르는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만일 자신의 장애에 대한 "전문가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진단을 거부하고 그것을 오히려 장애에 대한 차별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혹은, 지능검사 결과 IQ가 40, 50 혹은 60이라고 "결정난" 사람들에게 과연 전문가들은 제이슨이 말하는 충만한 삶에 대해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또 우리 나라의 장애판정 기준을 따른다면 IQ 48인 2급 정신지체 장애인과 IQ 51인 3급 정신지체 장애인 사이의 IQ 3점의 차이는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걸까?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하다보면 다음과 같은 보다 근원적인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도대체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점수화해서 서열을 매길 수 있고 그 서열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된다는 생각은 누가 어떻게 시작한 거야?"

〈지능과 차별〉
이 연재물은 바로 인간의 지적 능력의 서열화가 어떤 의도로 시작되고 진행되었으며 또 정신지체를 규정하는 IQ라는 개념이 어떤 역사적, 정치적 맥락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가볍게(?) 요약하여 살펴보려는 목적으로 쓰여집니다. 이야기의 기본줄기가 정신지체라는 화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겠지만 지능을 매개로 한 인간차별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이 많이 견지될 것입니다.

주 텍스트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진화생물학자인 스테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의 저서 "잘못 측정된 인간" (The Mismeasure of Man)이고 여기에 제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적당히 융합할 예정입니다. 굴드는 이 책으로 전미 서적 비평가 상을 받았습니다.

굴드는 먼저 태생에 따른 인간 서열화의 기원을 플라톤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타고난 기질에 따라 통치계급, 방위계급, 그리고 생산계급으로 분리되어 교육받아야 하고 또 그런 자신의 지위를 받아들여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된다는 것이 플라톤이 생각해낸 국가관인데, 이런 플라톤의 "신화"는 이제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과학의 옷을 입고 근, 현대에 이르러 새롭게 정당화되고 유지되었다는 것입니다. 생물학적 결정론은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공유하는 행동규범이나 장애와 인종, 성 등으로 구분되는 인간 그룹들 간의 사회적, 경제적 차이가 태어날 때 결정되는 것이며, 사회는 이런 인간의 생물학적인 차이를 정확하게 반영한다고 보는 시각입니다.   

〈뒤틀린 생물학적 결정론〉
생물학적 결정론이 이데올로기화되고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되어 인간사회를 광기로 몰아간 가장 끔찍한 사건이 바로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입니다. 몇 년 전의 영화 "홀로코스트"와 "쉰들러의 리스트" 그리고 최근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우리는 그런 광기의 현장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치가 대학살을 벌인 대상이 유태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정화한다는 이름 하에 십여만명의 장애우들도 역시 가스실로 보내졌습니다. 주로 정신지체 장애우들과 정신장애우들이었죠.

뒤틀린 생물학적 결정론으로부터 우리 사회가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 나라도 이제는 "빨갱이의 자식"이 영부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좌제에 묶여 고통받았던 수많은 국민들이 있었습니다. 혼혈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정신지체 장애우의 경우 여전히 집안 혈통의 수치로 여기고 이들을 숨기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특히 아직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부각되고 있지는 않지만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 광범위하게 시술되고 있는 강제불임수술의 저변에는 예외없이 이 같은 시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굴드는 이 생물학적 결정론에 두 가지의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는 구체화 오류라는 것인데 이는 어떤 추상적인 개념을 실재하는 실체로 전환시키려는 경향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지능이라는 개념이 그렇습니다. 너무나도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의 능력이 지능이라는 단일 개념으로 치환되면서, 이 지능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이제 실체가 있는 어떤 것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실체의 위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기본 물질을 찾기 시작합니다. 지능이 위치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생각한 곳이 어디였겠습니까? 바로 인간의 뇌입니다.

굴드가 지적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두 번째 오류는 서열화입니다. 서열화는 복잡한 변화를 단계적인 등급으로 배열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서열화에는 개개인을 단일차원에서 각 위치에 할당할 수 있는 척도가 필요합니다.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는? 바로 숫자가 아니겠습니까?

지능이 뇌에 위치하는 인간능력의 단일 실체로 구체화되고, 인간 개개인에게 있어 하나의 숫자로 그 지능의 양이 표시되며, 이 숫자를 가지고 인간의 가치라는 단일차원에서 인간들에 대한 서열을 매겼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바로 인종과 계급, 성, 그리고 장애를 가진, 달리 말한다면 사회로부터 억압을 받는 집단의 태생적인 열등성의 발견이었습니다.

그러나 서열화에 대한 생물학적 결정론의 과학적 접근방법은 19세기와 20세기에 다르게 나타납니다. 19세기가 두개측정법(뇌의 크기를 재는 방법)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지능검사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 호에서는 두개측정법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또 이를 통해 당시의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싶어했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작성자김치훈 (03어린이집 특수교사)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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