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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사람들] 일본의 반전평화운동가

‘국가’틀 벗어난 민중들의 연대가 필요합니다.

본문

지난 6월 13일. 서울 시청 앞 광장은 꽃도 피우지 못한 채 미군의 궤도차량에
어이없는 ‘죽임’을 당한 어린 두 소녀의 넋을 기리는 행사가 이어졌다.
그 추모인파 중 한국인과 비슷해 보이지만 낯선 말을 하는 세 사람이 눈길을 끈다.
오키나와에서 온 도미야마 마사히로(남, 49세), 다카하시 토시오(남, 51세), 시마부로 도모꼬.
그들은 한 여성(통역)을 가운데 두고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답하
기 바쁘다.
그들의 요지는 “전 세계 민중들의 연대가 필요하다”였다.

<‘미군기지 철수’라는 공통어>
휠체어를 타는 도미야마씨는 NTT(한국의 KTF라 할 수 있는)에서 근무한다. 최근에 노동
조합 활동을 하다가 자회사로 쫒겨(?)났다. 그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자신을 소개하며 내민
명함을 그대로 옮기면 될 것 같다. △한국-오키나와민중연대 △한평반전지주모임 △아이누
민족과연대하는오키나와모임 △팔레스타인을 연결하는 모임.
그리고 다카하시 토시오씨는 사단법인 「오키나와정신장해자복지연합회」 사무국장이면서
정신지체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빵공장, 가게를 운영하는 사업장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그 역
시 ‘한국-오키나와민중연대’소속 활동가다. 73년도 재일교포 선배 한 사람이 간첩단 사건
으로 구속되면서 그를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온 적이 있으며, 절실한 연대의식을 느낀 것은
광주민주화운동부터였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이라 그들은 6. 13 추모대회 다음 날 아침 일찍 매향리 전만규위원장을
만났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미군기지 반환운동’인데 2000년 5월 매향리 오폭 사건이
후 벌써 4번째 방문이다.
매향리대책위는 주민 300여명 중 270여명의 주민이 원고가 되어 한국정부를 상대로 피해보
상을 요구하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제 항소심까지 각각 1000만원씩의 배상판결을 받아
놓은 상태다. 이제 대법원 판결만 남겨놓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공군은 일주일에 5
일 폭격연습을 하고 있다. 매향리대책위는 승소가 확정되면 배상액을 「평화박물관」건립에
쓸 예정이다. 오키나와에도 오랜 투쟁의 역사적 자료들을 모아 어느 한 개인이 「평화박물
관」을 건립했는데, 그들은 그것 자체가 비폭력 평화운동의 일환이라고 말한다.

<한국-오키나와 민중연대>
이들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아주 오래 전이지만 구체적 실천 연대활동은 「한국-오키
나와 민중연대」을 통해서다.
도미야먀씨는 “97년 오키나와에서 열린 ‘한국의 미군기지’심포지엄에서 한국의 김용한박
사(우리땅미군기지되찾기운동본부, 에바다복지회이사)를 만났는데, 한국과 오키나와에 미군
기지가 주둔하고 있는 현실적 상황이 같아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기 시작했다. 함께
힘을 모아 연대하고 투쟁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게 되어 연대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일본이 아닌 오키나와라는 점을 강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는 1945년 4월 미군이 처음 상륙하여 그해 6월 점령할 때까지 미국과 일본의 전투
가 치열했던 곳이다. 당시 이 지역 건물의 90% 이상이 파괴되고, 12만명의 주민이 사망한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에 편입되고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어도
사실상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국과 일본 양국에 의한 희생자며 독립된 원주민이라는 정체성
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단다. 현재 우리에게 인식되어지고 있는 오키나와도 미군기지가 주둔
하고 있고 미군범죄가 끊임없이 발생되는 불평등한 군사지역일 뿐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비폭력 투쟁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군기지를 인간 띠로 에워싸고 평화적
으로 집회를 연다. 그럼에도 상대방들은 활동가들을 테러리스트라며 폭력으로 진압하고 있
단다. 도미야마씨는 “9·11테러 당시 비행기를 몰았던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테러범
이라는 사람 말이죠. 아무 것도 모른 채 탑승한 사람도 불쌍하지만 그렇게 각오를 한 사람
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누가 테러범이고, 누가 폭력을 일으키는 사람일까.
그 후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계속 전쟁 위협을 가하자, 그는 지난 3월 이라크 상황과 지
원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직접 이라크를 방문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불편한 몸이지만 평화와 반(反)차별을 위한 세계 민중들의 연대에 그의 ‘장애’는 전
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조금 불편하지만 ‘도미야마’그냥 그다.

<국가는 나를 관리하지 마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뜬금 없이 장애등록은 했느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의
외였다. “한 30여년 전 장애등록을 해야 한다고 해서 병원에 가 진단을 받으려고 했지요.
근데 의사가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앉았다 일어나라, 자기 맘대로 취급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빠지더라구요. 인권침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가지고 있던 서류를 모두 집어던지
고 그냥 나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국가 공식 인증(?) 장애우가 아니라고 한다.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약
간 후회되기도 한다며 웃음을 보이지만, 곧이어 그는 국가의 관리나 힘에 개인은 자신의 선
택에 따라 거부,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존재를 현실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개인이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옆에서 통역하고 있던 이윤숙씨가 더 앞서 나간다. “아, 비폭력 직접행동(일상에서 스스로
의 선택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힘으로 얻는 것)을 실천한 거군요. 당신,
아나키스트죠?” 그러자 도미야먀씨,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웃는다. 그
는 “저는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지도 표현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아나키스트와
비슷할 뿐이죠.”

<‘장애’또한 나의 화두>
매향리까지 오는 내내 울퉁불퉁한 보도, 휠체어 장애우가 탑승하기 어려운 일반버스, 그리고
큰 짐 보따리에 비는 오고 우산은 받쳐들고...괜스레 그러한 상황이 미안해져, “이동이 너무
불편하지 않은가?”라고 묻자, 한국 장애우들의 이동권 투쟁을 잘 알고 있고, 7,80년대 오키
나와에서도 이동권 투쟁이 있었다고 답한다. 그는 “10년전까지만 해도 <장애해방>이라는
구호아래 활동했어요. 78-79년 ‘특수학교 의무화 저지’전국 투쟁에 결합하기도 했지요.
‘전국장해인해방운동연락회의’소속으로 그후 장애우와 함께사는 마을만들기 운동을 거쳐
현재도 장애우 운동단체와 교류나 연대를 하고 있습니다.”

<반차별 운동은 모든 운동의 근간>
이들이 바쁜 일정속에서 휴가를 내면서까지 먼 한국 땅을 밟은 이유는 결국 하나로 연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 환경, 평화, 반전, 미군기지반환, 소수자 등의 문제는 반(反)차
별로부터 기인한 것이고, 그래서 반(反)차별운동은 모든 것의 근간이 된다.
미국이 혹은 국가가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오키나와에서 온 멋진 두 남성들은‘전 세계 민중들이 연대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글·사진 여준민기자 / 통역 이윤숙

 

작성자여준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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