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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나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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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상위에 램프가 하나 놓여있다. 겉모습은 단순하다. 도자기 사발을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인데 한 가운데 메추리 알만한 전구가 꽂혀 있다. 받침대에는 빙 돌아가며 네모 무늬가 그려져 있고 색동으로 칠해져 있다. 밤에 잠들기 전에 코드를 벽에 꽂으면 전구에 불이 들어온다. 흐미한, 그 옛날 호롱불 같은 그 불은 너무 어두워서 등불이 정말 거기 있는지 얼른 알아차릴 수 없다. 그러나 그 흐미한 불은 거기 검은 방안에 분명하게 있다.

지난 늦가을 음산한 어느 오후 학교 사무실로 전화가 왔다. 전선으로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
그러나 들으면서 어느덧 내 얼굴은 저절로 찡그려진다.
내용인즉. OO 천사원이다, 몸이 불편하거나 정신지체를 가진 아이들이 월드컵무늬를 그려 넣은 책상등을 만들었다, 한 상자에 두 개 넣어서 6만원이다, 착한 아이들을 위해......
수화기는 귀에서 점점 멀어지고 얼굴은 점점 못마땅해지면서도 입에서는 네, 그러지요, 대답이 나온다. 
수화기를 놓고 보니 그 옆에 비슷한 용건의 지로용지들이 이미 몇 개 있다. 안되겠다 싶었다. 나는 얼른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렸다. 저, 두 개는 좀 그렇고 한 개만 보내주세요... 며칠 뒤에 배달된 상자에는 작은 램프 두 개가 들어있다. 그것을 만든 아이들의 웃는 얼굴 사진이 박힌 안내서도 있다. 그 아이들의, 소위 정신지체나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의 미소는 너무 말갛게 보여서 창백하게 빈혈기가 느껴진다.
나는 상자를 덮고 한쪽 옆으로 치웠다.
며칠 뒤 다시 상냥한 목소리가 택배는 잘 배달되었는지 확인하였고 나는 6만원을 송금한다.
겨울 방학을 한 뒤 그 상자를 집에 가지고 온다. 방안에 있는 낮은 책상 한쪽에 램프를 꽃은 뒤 그걸 만든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저 경련 하는 손으로, 저 말간 눈으로 네모 무늬에 색동을 칠한거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잠 잘 준비를 하고 자리에 눕는다. 긴가 민가 하는 마음으로 램프를 꽂는다. 가물거리는 창백한 불이 작은 전구에 들어온다. 나는 한숨을 쉬고 눈을 감는다.

나의 밤은 이제 그 희미한 등이 밝히고 있다.
몹시 피곤하거나 마음이 안 좋을 때는 안내책자에 실렸던 말간 웃는 얼굴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러면서 "불편한" 그들이 "성하다고 하는" 나를 밝혀주는 등불이 되는, 이 알 수 없는 섭리 또는 이치에 그저 침묵하게 된다.   

 

글/ 서숙


 

작성자서숙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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