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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논단]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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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커다란 망태 하나 메고 동네어귀를 어슬렁 다니던 무시무시한 문둥병자의 병이 낳기 위해선 아이의 간을 빼먹어야 한다고, 그래서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어머니는 말씀 하셨다. 그래도 눈 내리는 연말이면 착한 어린이에겐 가끔 나타나 선물도 주고 간다던 새빨간 거짓말을 당연히 여기던 시기.
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문둥병자들이 모여 산다는 그 윗동네에 함께 가자는 친구의 말에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동행했던 나의 한심한 나환자촌 초행기가 바로 그때였다.
한센병 이라 이름 붙여진 사람들, 손가락 몇 개쯤 떨어져 나가고 검은 썬그라스 뒤에 숨겨진 툭 불거진 눈두덩과 뒤틀린 입술, 왜 그것이 그렇게 무서웠을까.
따지고 보면 담장 밑 수채 구녕을 타고 오르던 나팔꽃이나 길가에 누군가가 심어놓은 봉숭아, ,낯선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컹컹 짖어대는 개의 울음이나 어디에나 지천이던 개망초. 개복숭아, 개살구까지 뭣하나 내가 사는 동네하고 다를 게 없는 그곳이었다. 호랑이 만난 소 새끼처럼 꼬리 감추고 빙빙 겉돌기만 했던 나에게 손가락 없는 손으로 달걀 몇 꾸러미를 안겨주시던 아주머니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듬해 봄쯤 그곳으로 나를 데려갔던 친구가 여전히 그곳으로 설날 세배 다녀온 얘기를 들려주며 떡국이 맛있더라, 약과와 부침개도 직접 하셨더라 등등을 무용담처럼 늘어놓기 전까지 나는 나의 방문 때 받은 달걀을 집으로 가져가지 않은 사실에 대해 후회하지 못했었다, 새해 아침 한센병 환자들과의 식사라! 그때만 해도 여전히 부담스러웠던 그 식탁도 난 이해하지 못했었다

198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을 볼까, 어디 기술 배우러 취직할까를 고민하던 중 막 제대한 형으로부터 대학 공부를 해 보라는 권유를 듣고는 토끼풀 뜯으며 영어단어 외우던 재수생 시기.
무척이나 뜨겁던 그 해 여름, 나는 어느 작은 교회의 청년부 회장을 맡고 있었던 형으로부터 수련회에 같이 가자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겉으로는 공부에 지쳐있는 동생의 휴식을 고려한 처사였겠지만 일 할 사람 부족하니 따라와서 이것저것 거들라는 것을 내 모를까.
단지 거절할만한 -지금도 가장 어려운 일이 거절이다- 특별한 꺼리를 찾지 못한 이유로 따라갔던 수련회는 그 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더 큰 세계를 보여 주었다
삼양동 빨래골. 공초 오상순의 묘라는 푯말을 따라가다 보니 맹학교가 하나 나온다. 장애우라면 으레 연상되었던 음울함과 탄식, 비관과 자기비하라는 나의 선입견이 경쾌하게 깨져버린 유쾌했던 그 수련회 이후, 꽤 오랫동안 나는 변변한 노선버스 하나 없던 그 길을 걸어 교회와 학교에서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니 함께 놀았다.
그전까지 나는 텔레비전나 영화에서만 시각장애우들을 봐 왔다. 눈물 뚝뚝 흘리게 하는 예쁘고 가련한 청맹과니 소녀의 애환, 혹은 스티비 원더나 호세 펠리치아노의 화려한 음악 정도가 내가 간접 경험을 통해 알고 느낀 전부였다. 하지만 맹학교에서의 시간은 내가 장애 가진 사람에 대해 안다는 것이 천박한 선입견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 또한 내가 사는 사회의 한 부분임을 일깨워주었다.
그 아이 성가 소리가 좋았고, 그 아이의 피아노 솜씨가 감탄스러웠으나 그 아이는 중복장애로 허리가 휘는 병을 앓고 있었다. 또 다른 형과 함께 부르는 노래가 즐거웠고 그의 일상에 뱉어지는 유쾌함이 좋았지만 그 형에게는 박스를 주워 생계를 이어가는 노모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가끔씩 외출을 도와주거나 책을 읽어 녹음을 했고 기타를 가르치거나 같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물론 밥도 같이 잘 먹었다. 가끔은 자원봉사 오시는 분들과도 함께 식사를 했는데 그저 숟가락을 들었다 마는 정도로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지’싶은 유치한 마음에 괜히 어깨가 으쓱 하기도 했다.
어릴 적 나환자촌의 부끄러운 기억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라고나 할까.

1989년
제대 후 복학을 하고 일년 내내 꼬깃꼬깃 찌든 때로 물든 군복만 입고 다니며, 세상을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무척 많이 하던 시기.
읽지도 않는 ‘철학의 기초이론’이나 ‘역사란 무엇인가’, ‘해방신학의 이론과 실천’ 등 전공과는 무관한 책을 가방에 넣고만 다니며 그 해 늦가을을 맞았다.
정점에 이르렀던 낙엽의 쓸쓸함 마저 긴소매 끝의 찬바람으로 들어와 뜻 모를 외로움에 빠져들었던 그 가을의 어느 저녁 나는 내가 다니고 있던 학교의 전철역 역사 끝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탁’을 보았다. 이미 지하철 내에서도 마주친 적 있는 맹인 부부가  그 역사의 끝을 찾아와 보따리를 풀고 거기서 도시락을 꺼내 서로의 고단함을 달래주듯 한입 두입 씩 서로에게 먹여주는 모습, 어떨 땐 밥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입가에 묻어도, 반찬이 흘러 바지에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의 손과 얼굴을 더듬으며 확인하고 밝게 웃던 그 아린 사랑의 식탁.
마치 세상이 끝나는 지점을 찾아와 마지막 간절한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 같은 그들만의 성스러운 식탁을 보았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2003
아침에 눈뜨면 뭘 할까 생각하고, 새벽녘 잠들 때면 오늘하루 밥값은 했는지를 염려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기.
「브릿지 콘서트」라는 게 있다. 매달 두 번째 목요일 신촌에서 벌어지는, 세상과 세상,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하는 콘서트. 올 한 해 그 콘서트의 MC와 노래를 하기로 했다. 지난 달에는 서대문장애인복지관과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봉사 점수란 놈을 잡으려고 동원이 된 중딩, 고딩들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고즈넉한 감동을 목표로 했던 나의 계획은 애초에 사라 졌지만 다운증후군 친구들과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출연자들의 사물놀이, 뇌졸중 장애노인들의 콰이어 차임 연주, 그리고 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노래 소리는 세상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는 한 인간의 땀과 눈물로 얼룩진 감동의 무대가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리 하나하나는 내가 지니지 못한 영혼의 부족분을 채우는 소리이고, 그들이 힘겹게 움직이는 입술은 이미 내가 반드시 있어야할 고통의 자리에 대한 예시가 아니던가!
오늘도 나는 밥상 앞에서 하루를 맞을 것이다
사랑의 경건함을 내게 일깨워준 14년 전 그 역사 끝, 맹인부부의 도시락에 감사하며... 노래 한마디 한마디는 가슴을 울리는 최대한의 절규임을 가르쳐준 한달 전 그 무대의 주인공께 감사하며...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식탁을 나의 노래로 만들어가기를 소원하며...
언젠가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자는 뜻으로 만든 노래의 글을 이 글의 마지막에 싣는다

우리 함께 가요

눈물이 없는 곳으로 슬픔이 없는 곳으로 우리 함께 가요, 우리 함께 가요
미움이 없는 곳으로 차별이 없는 곳으로 우리 함께 가요, 손잡고
한 발자국 나서보면 알지요 모든 길은 걷는 사람들의 것
눈물의 고통을 보듬어줄 아름다운 손으로 사람됨의 세상을 만들어가요

생명이 있는 세상을 평등이 있는 세상을 우리 만들어 가요, 우리 만들어가요
사람이 사는 마을은 그리 멀지만은 않아요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의 가치

글/ 이지상

노래패‘조국과 청춘’창단. 대학생시절부터 음악을 통해 문화운동을 실천해 온 그는 작곡, 작사, 노래, 프로듀서 등 모든 분야에 능통한 유능한 노래일꾼. 작게, 낮게, 느리게를 실천하는 나팔꽃 동인이기도 하다. 눈을 감고 가만히 그의 서정적인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아려와 굵은 눈물 한방울 뚝 떨어진다. 아니 그가 그랬다. ^^
http://www.po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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