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야학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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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학,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밤. 대학생. 늦깎이 학생들. 아니 혹시 야학이 아직도 있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야학이라는 것이 배움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을 위한 곳인데 살기 좋은 지금 세상에 누구라도 원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그런데 굳이 왜 야학이 필요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2002년 현재 전국에 야학은 160여 개가 있다. 수요가 있기 때문에 공급이 아직 남아 있는 법. 160여 개의 건재한 야학. 이는 아직도 우리사회에 다양한 이유로 배움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아직 사회가 야학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2001년 만들어진 전국야학협의회의 박문수 서울경기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은 후끈한 월드컵 열기 때문인지 초여름 날씨 답지 않게 더웠다. 지하철에는 그 인기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 붉은 색 티셔츠가 군데군데 눈길을 끌고 지난날의 상처 따위야 말끔히 씻었다는 듯, 도시전체가 축제인 서울에서, ‘야학’ 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상처가 있어 우리는 그나마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못 배운 한’의 상처를 치료하던 곳이 야학 아니던가. 이런저런 단상으로 약속장소로 향하는 기자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야학의 역사
전국야학협의회 박문수 서울경기 대표는 야학의 역사가 19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혔다.
“야학이라고 하면 보통 70-80년대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야학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소설 <상록수>를 생각해 보세요. 거기서 채영신이 한글을 가르치는 곳. 그 곳도 야학이죠. 최초의 야학은 1906년 보성야학으로 보는 것에 의견을 같이 하는 편입니다.”
야학은 시대적 역사적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의 민중교육기관으로 자리 매김 해왔다. 1906년을 시작으로 한 야학이 1920, 3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맞서는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왔다면, 1950년 전쟁후 단절되었던 야학이 60년대에는 근대화의 물결속에서 재건 야학의 이름으로 민중들을 깨우치는데에 앞장섰다. 70년대에는 불합리한 자본의 착취구조속에서 억업받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존재하는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노동야학이 태동하게 되고 이를 통해 야학이 사회운동으로서의 인식을 갖추게 된다. 80년대 노동자의 초기 의식화의 공간이 되었던 진보적 노동야학은 87년 전민 항쟁 이후 노동단체로의 통합, 해체의 순서를 밟는다.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야학은 신자유주의의 물결속에서,사회적 위치와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수요자의 요구에 맞는 다양한 교육활동 펴 나갈 터
박문수 대표는 “80년대 야학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눕니다. 검시야학과 생활야학, 노동야학이 그 세 가지이죠. 검시야학이 말 그대로 검정고시 야학이라면, 생활야학은 검정고시 야학이 가지는 전인 교육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생겨난 야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활야학에서는 노래, 풍물, 토론 등 검시와는 조금 다른 교육을 했고요, 마지막으로 노동야학은 진보적 노동운동의 기반으로서의 야학을 의미합니다. 현재는 대부분의 야학이 검시야학체제로 운영되고 있고요, 약간의 생활야학이 남아있지만 노동야학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오늘날에 이러한 구분은 사실은 의미가 없지만요.”라고 밝혔다.
시대에 맞는 다양한 민중교육활동을 펴오던 야학이 왜 검시야학에만 머무르게 되었을까? 검정고시라는 것이 제도적인 교육시스템으로서 편입을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고 했을 때, 사실 검정고시는 보수적인 공교육의 체제를 인정하고, 학력위주의사회를 더욱 조장하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가. 기자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90년대 이후 야학이 급격히 검시야학에 머무르게 된데 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 역시 가장 큰 것은 학생들의 요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검시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흘러갔다고 보면 되는데, 그것을 꼭 학력위주의 사회를 조장한다, 뭐 이렇게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왜냐하면 검시를 준비하는 대부분의 중년 여성들에게 있어서 검시는 뭔가를 해냈다는 자신감을 주는 상징적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죠. 또 검시야학으로 흘러가는 이유는 다양한 평생교육기관의 등장 때문이기도 하구요. 이제는 복지관이라던지 문화센터 같은 교육기관이 속속 등장을 하면서 생활야학이 하던 부분들을 채워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야학의 문제점들을 함께 고민하고 연대를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 전국야학협의회라고 그는 밝혔다. 야학에서 수년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로서 그 또한 전야협의 이러한 모색을 통해 시대의 요구에 알맞게 더욱 발전하는 야학을 기대하고 있었다.
면목지역교육의 터주대감 - 면목야학
면목동에 위치한 면목야학은 새집으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건물 이층에 들어서자 작고 아담한 교무실에 수업을 준비하는 교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규모가 작은 뿐이지 보통의 교무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교시 수업이 시작된 틈을 타 면목야학의 교감선생인 김재선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 면목야학은 언제 생겼나?
“1997년에 생겨서 지금 25,6기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건물로 이사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3월초에 옮겼다. 전에는 지하에 교실이 있었는데, 습기도 많이 차고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서 옮기게 되었다. 그 전에도 이동을 자주 하는 편이었는데, 대부분 보증금이나 임대료 같은 재정문제로 이동을 하는 편이다”
- 현재학생수와 과목은?
“학생 수는 꾸준히 나오시는 분이 중등부 5명, 고등부5명 10분 정도 계신다. 중등부 고등부 각각 1년과정이고 두 반 모두 검시준비반이다.”
- 교사 수는 얼마나 되고 교사 구성을 어떻게되나?
“교사는 총 14명이고 대부분이 대학생으로 이루어져있다. 대학생 아닌 분이 2명 정도이다.
- 현재 운영을 하는데에 어려움이 있다면?
“워낙 야학이라는 곳이 수강료도 받지 않을 뿐더러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강제성이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또 교사들이 1년 단위로 바뀌다보니 교사들간에 연계가 되어야 할 부분에서 그것이 안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의 노하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다. ”
-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왜 야학교사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야학교사를 그만둔 선배들이 이제는 야학이 필요 없지 않느냐, 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너무 속상하다. 야학을 왜 하는지는, 사실 지금, 야학을 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 힘들기 때문에 그만큼의 보람을 얻는다. 야학을 하면서 내가 누군가를 가르쳤다기보다는 배운 것이 더 많은 것 같다.”
이야기를 마칠 즈음, 교실에서는 국어 수업을 하는 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랑카랑 하면서도 힘이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궁금하여 교실 문을 지키던 중,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현재 면목야학에서 고등부 국어교사를 하고있는 그녀는, 인문학부 1학년이라고 했다. 국문학을 전공으로 택할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그러고 싶다고 했다. 기자 또한 국문학을 전공 한지라, 왜 하필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어하는지 궁금했다.
“그것말고는 다른걸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대답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수년 전, 누군가 기자에게 같은 질문을 할 때면, 기자 또한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대답을 했던 기억이 떠오르며, 순식간에 그때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 간 것만 같았다. 아직도 이렇게 소신으로 삶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기자는 얼얼한 마음으로 면목야학의 계단을 빠져나왔다.
교사와 학생이 끊이지 않는 - 파랑새 야학
파랑새 야학은 큰길에서 한참을 걸어 들어간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교사와 학생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이 곳은 취사시설도 갖추고 있다. 살짝 들여다본 교실은 생각보다 큰 편이었다. 파랑새 야학의 대표인 김윤희 교사와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 규모가 어떻게되나?
“학생 분들을 2,30명 정도 꾸준히 오신다. 교사나 학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 야학이 많은데, 우리야학은 사람은 끊이지 않는 편이다”
- 검정고시 야학을 중심으로 하는데서 오는 부작용은 없나?
“검시만을 목적으로 하다보니 검시에만 너무 집중하게 되면서 검시가 아닌 다른 과목들 이를테면 시사시간이나 소풍 같은 것에 관심을 덜 가지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속상하지만 또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융화되는 부분이 생긴다.”
-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열악한 환경이 가장 문제이다. IMF이전에는 8층 건물에 야학이 있었다. 그 건물 주인이 우리가 하는 일을 아시고 세를 받지 않으시고 무료로 자리를 빌려주셨다. IMF이후에 그 건물주인이 부도를 맞으면서 장소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곳은 지하라 공기도 안 좋고, 여러모로 열악하다. 후원도 많이 끊겨서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
- 그러면 재정은 어떻게 충당하나?
“구청에 서식을 작성해 내면 1년에 200만원 정도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최소한 한 달에 50만원의 생활비가 들기 때문에 400만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후원행사를 한다든지 해서 충당하는 편이다”
- 야학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무엇보다도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는 제도교육을 싫어하면서 우리가 교육할 때 학교에서 배우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다가 임기가 끝나면 교사를 퇴임하고, 그런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전문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야학 내부의 일을 하기에도 너무 벅차기 때문에 밖으로 눈을 돌릴 시간이 없고 그러다 보니 연대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부분을 개선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표와의 인터뷰를 마칠 즈음, 교실 문을 열고나온 누군가가 기자의 이름을 불렀다. 5년 만에 만난 기자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렇게 만날 수도 있다니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3년여간 파랑새야학에서 국어교사를 해왔다고 했다. 이제는 교사생활을 접고 간만에 후배교사들의 얼굴을 보러 찾아왔다가 우연히 기자를 만난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 나오면서 기자는 옛친구가 남긴 말 한마디를 계속 곱씹어보았다.
“나는 내가 변화하기 위해 야학을 선택했던 것 같아.”
교사와 학생이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곳. 꺼지지 않는 배움의 등불, 야학과의 만남에 가슴이 뿌듯했다.
글·사진 박채란 객원기자(rhanair@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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