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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장애우, 여성, 생존권, 그리고… 죽음

최저생계비 현실화 투쟁 벌였던 놔성마비장애인 故최옥란씨의 삶

본문

어느새 추운 겨울이 벌써 성큼 다가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12월 3일부터 명동성당에서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하여 텐트를 치고 농성을 계획하고 있는 최옥란입니다. .........중략....... 저는 청계천 도깨비 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기초법이 시행되면서 정부는 저에게 노점과 수급권 둘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저는 의료비 때문에 수급권을 선택하고 노점을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노점조차도 포기한 저에게 정부는 월 26만원을 지급했습니다. …중략…제가 지불해야 하는 약값만 해도 26만원을 넘는데... 아파트 관리비만도 16만원인데... 도대체 나보고 26만원 가지고 어떻게 살라는 건지? 그러면서도 최저생계를 보장한다는 것인지? 처음에는 실무과정에서 착오가 있으려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중략>… 저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거나 저 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 

- 故 최옥란 씨가 명동성당 농성에

들어가기에 앞서 쓴 결의문 중에서 -

 

▲인권운동가-최옥란씨

 

"후배장애우들만 잘 살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작년 12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며 한겨울의 명동성당에서 텐트 농성을 벌였던 뇌성마비 장애우 최옥란 씨가 지난 3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최옥란 씨는 2월 20일 경 동사무소에서 수급권 재신청을 위해 소득 및 재산신고를 하라는 편지를 받고 과산화수소와 수면제 20알을 삼켜 자살 기도해 장이 녹아 붙고, 식도와 위가 손상되는 등 중태에 빠졌으나 한동안 상태가 호전, 소생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심신이 극히 쇠약한 상태에서의 자살 시도는 그렇지 않아도 떨어진 면역력에 치명타를 가했던 모양이다. 3월 26일 새벽, 갑자기 외부 반응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이를 구하기 위해 의료진이 발벗고 나섰지만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이의 어머니도 눈물을 머금고 산소마스크를 벗겨내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우한성 씨는 입원 당시 아들이 눈에 선해서 미치겠다는 말과 나는 이렇게 되었지만 장애 동료들은 살기 좋게, 편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는 최옥란 씨의 유언을 전했다.

 

최옥란.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해 12월 찬바람이 몰아치는 명동성당 앞에서 한 여성장애우가 최저생계비 보장을 요구하면서 명동성당에서 매일같이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함께걸음에 짧게 등장하고 난 뒤였다. 내가 담당한 기사는 아니었지만 그이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거동을 할 수 있는 1급 장애우, 서른 일곱의 이혼녀, 정부에서 생계비를 수급받는 실업자라는 3중고를 짊어진 우리 사회의 모든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이었기에 당연히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달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최옥란 씨가 자살기도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고, 급기야 3월 26일에는 그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한 줌 뼛가루로 스러져간 최옥란 씨의 절망적인 사연은 서민대중을 위한다는 정부의 복지정책이 장애 당사자의 현실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탁상공론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그이는 아들을 기르고 싶었지만 극빈자이기 때문에 양육이 불가능해지자 노점상을 했다. 그러나 노점상 수입이 조금 생기자 소득이 있으므로 생계비 수급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위협을 받아 노점상도 그만두었다. 하지만 정부는 극빈장애우의 처지를 외면하고 일률적으로만 생계비를 지원했다. 최소한도 60만원이 있어야 장애우가 살 수 있다며, 그는 불합리하게 책정된 생계비에 대해 위헌신청을 내고, 지난 겨울 명동성당에서 일주일동안 홀로 천막농성을 하다가 결국은 희망없는 세상을 등졌다.

 

"아들과 함께 살려면 최저생계비는 포기해야 한다니,

그러면 어떻게 먹고 살란 말입니까."

전동휠체어에 몸을 기댄 채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최옥란 씨. 그러나 그이는 보통 장애우가 아니었다. 길지 못했던 생애동안 그이는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호소하고 저항한 투사였다.

 

그이가 장애우 인권운동에 뛰어든 것은 지난 87년 가을. 평범한 장애우였던 그이는 뇌성마비장애우 모임에 가입하면서 장애우 복지를 위해선 장애우 스스로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고 동료들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 뇌성마비장애우연합인 바롬 설립의 주역이 됐다.

 

그 후 1988년에는 장애문제연구회 울림터의 창립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1989년에는 장애우 고용 촉진법 제정과 장애우 복지법 개정을 위한 공대위 활동 등 장애운동을 하는 현장에서 그이가 빠지는 법은 없었다.

 

특히 2001년 1월에는 장애우 이동권 쟁취를 위한 지하철 선로점검 시위를 이끌었고, 작년 12월에는 그 추운 겨울날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주장하며 명동성당 앞 텐트 안에서 단식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투사와 같은 최씨의 모습 뒤에는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어쩔 수 없는 모성이 있었는가보다.

 

최옥란 씨는 10년 전 동갑내기 장애우 김모 씨와 결혼해 아들을 낳으면서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행복한 삶을 잠시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98년 남편과 이혼 후 아들과 헤어지면서 최씨의 삶도 요동치기 시작했다. 평소 그이는 가족들에게 아이랑 살고 싶다. 혼자 살기는 너무 외롭다며 항상 아이를 그리워했었다고 한다.

 

그이의 전 남편 김씨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어 아들의 양육권을 가지는 데 유리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 남편이 지난해부터 아들과 만나는 일을 가로막아 그이를 힘들게 했다.

 

우선 그녀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서는 부양능력을 입증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청계천 벼룩시장에서 잡화를 파는 노점을 벌이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700만원을 모았다. 그 와중에 조금이나마 생계에 보탬이 되리라는 기대로 국민기초생활보장제 수급 신청을 했고, 이를 통해 영구 임대아파트 관리비 등을 충당했다.

 

그러나 이를 시샘한 주변 사람이 노점상을 하며 경제력이 있는 사람이 왜 영구 임대 아파트에 사냐면서 광명시청에 직접 진정을 해 최씨는 생계비 수급과 노점상 유지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다. 급기야 광명시는 월 소득 33만원이 넘는 사람은 생계비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을 들이밀며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그이는 결국 좌판을 포기하고, 생계비 수급을 선택했지만, 지원금 26만원으로는 치료비 20만원과 영구아파트 임대료 16만원도 충당할 수 없어 매달 30여만원의 빚을 쌓아가며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그이의 여동생 옥희 씨는 죽기 전 언니의 심경이 굉장히 복잡했을 것이다. 아들을 되찾으리라는 희망도, 자기 한 몸 추스를 여유조차 없는 상황에서 언니는 절망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언니가 저 세상으로 가고난 뒤 언니의 일기를 읽으면서 평범하게 자식을 낳아 키우며 살길 원하던 언니의 소망이 이 세상에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뇌성마비 중증장애우의 몸으로 그토록 장애우의 권익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해 왔던 그이였지만, 가난으로 모성마저 포기해야하는 현실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으리라. 결국 그이는 인간답게, 자식과 함께 살고픈 모정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원망속에서 삶을 마감했다.

 

농성에 들어가기까지

최씨는 작년 12월 3일부터 6일간 한겨울의 명동성당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의 개혁을 요구하며 텐트 농성을 벌였다.

 

그이는 격앙된 목소리로 한달 약값도 되지 않는 돈을 주면서 이래저래 생색만 내는 국가에 26만원을 반납하고 말겠다면서 이 나라의 최저생계비 정책을 성토했었다.

 

이후 그녀는 목숨과 같은 돈 26만원을 조롱하듯 바라보는 국가의 면전에 내팽개치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정부청사에 들어가기 위해 경찰과 싸우면서 길위에 드러눕는가 하면 급기야는 보건복지부 장관집에 돈 봉투 26만원을 내던지고 돌아서기도 했다.

 

또 현행 최저생계비에 기초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그리고 최저생계 보장이라는 법 취지에 위배된다며 헌법소원을 제출했었으나 사법부의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생의 희망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도 순탄치는 못했다. 고인의 뜻을 기리는 사회단체들은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3월28일 민중복지장으로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명동성당과 세종문화회관앞을 거쳐 장지인 벽제로 향하려 했다. 그러나 생전에도 그러했듯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도 순탄치는 못했다. 고인을 그렇게 막아서던 경찰은 또다시 운구차의 도심통과는 안된다는 이유로 이미 고인이 된 그녀의 마지막 길을 막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유족과 장례위원회측은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고 벽제 화장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서 장애우이자 여성으로 산다는 것. 그야말로 차별과 차별의 공집합 속에서 차별의 최전방에서 살다가 그 무게를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삶을 내던져 버린 故 최옥란 씨.

 

 우리는 최옥란,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그이의 육체적 사인은 심장마비였을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슬프고, 외롭고, 소외된 생을 살아온 그이의 삶을 이 세상에서 몰아낸 것은 결국힘없는 자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외면이었기 때문이다.


 

 

 

글 이나라 기자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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