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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중국에서는 도시민민, 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

서울 가산동 일대에 사는 중국동포들

본문

한국인의 수난사 한가운데에는 우리가 흔히 조선족이라 부르는 중국동포가 있다. 일제의 탄압에 맞서 싸우다가 일제의 수탈에 떠밀려 혹은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고향땅을 떠난 사람들이 바로 중국동포들이다. 현재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 대다수는 일제 시대 일본인들의 강압에 시달리다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들어간 조선인들의 2, 3세대들이다. 중국에서는 도시빈민으로, 한국에서는 불법체류자로 전락해 천대받고 있는 이들의 사는 모습을 가산동위치한 중국동포의 집을 중심으로  만나보았다.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가리봉과 가산동 일대에는 몇 년 전부터 5~6만명의 조선족동포들이 거주하면서 이제는 한국사람들로부터 제법 <조선족타운>이라고 불리운다.

이 근처에는 중국동포교회와 중국동포의 집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현재까지 이곳에 회원에 가입된 사람들이 약 1200백 여명에 달할정도다.

이곳에서는 중국동포들이 한국에서 거주하면서 신분상의 불이익으로 인해 생기는 임금체불, 산업재해, 국제결혼, 국적취득, 의료문제 등의 문제에 대해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질병이나 사고로 다쳤을 때 매우 높은 병원비로 치료를 받거나 충분히 치료될 수 있는 간단한 질병도 병원비 문제로 적절히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사례가 자주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료진료와 함께 의료공제회를 운영하고 있다.

중국동포들에게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달려가는 탓에 이들 사이에서 대부격인중국동포교회 김해성 담임목사는 "90년대 들어와 중국의 개혁개방이 확대되고 한국과 수교가 설립되면서 많은 조선족동포들이 브로커를 통하여 거금을 주고 산업기술연수, 친척방문, 위장결혼, 밀입국 등의 방법으로 한국에 왔다. 이들은 수출산업이 끝나버린 한국경제 흐름에 따라 한국 노동자들이 떠나버린 구로공단이나 안산의 반월공단 같은 지역으로 찾아들기 시작했다. 서울 가운데에서도 가산동과 가리봉동 인근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중국동포들의 일자리가 이 근방인 이유도 있지만 당장 내일이라도 추방당할지 모르는 중국동포들이 보증금없이 월세만 내는 일명 벌집방이라는 부엌도 없는 작은방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동포 교회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60대 이상의 노인들이었는데 이는 젊은 사람들이 나오려면 천만원 이상의 돈을 들여야 하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경우 친척방문으로 나오면 손쉽게 한국으로 올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이나 딸을 대신해서 얼마의 돈이라도 벌어보려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라고 한다.

기자가 찾아간 일요일은 마침 크리스마스 성탄예배가 있었는데 교회에는 약 600여 명의 중국동포들이 찾아와 예배실 통로와 뒷자리에 빼곡히 서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설교를 하러 올라가기 전 김해성 목사가 웃으면서 말한다.

"우리 교회 신도들이 참 많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동포들은 예배를 목적으로 찾아온다기보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상담받기 위해 이곳에 옵니다.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 중70, 80%는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를 당하고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사람들이에요. 불법체류중인 중국동포들은 월급을 달라고 사업주에게 마음대로 요구할 수 없는 처지거든요. 왜냐하면 자신의 권리를 정당히 요구하였을 경우 사업주는 불법체류라는 약점을 이용하여 아무런 보상 없이 강제 출국시키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교회에 주일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밀려드는 건 그만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는 얘기겠죠.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의 뜻 일테니 기쁜 마음으로 이분들을 맞고 있습니다."

1부 예배가 끝나고 점심식사를 마치고 나자 오후에 성탄절맞이 행사가 있는 것과 상관없이 100여명의 사람들이 교회 건너편에 잇는 중국동포의 집으로 달려가 서로 먼저 상담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성탄예배 관계로 오늘 하루는 상담을 하지 않는다고 교회에서 설명을 하고 문을 닫아걸어도 이들은 막무가내로 유리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문이 열리고 교회에서 마련한 성탄행사는 몇몇 사람들만 참석한 가운데 썰렁하게 끝나고야 말았다.

 

중국동포교회 쉼터에서 만난 사람들

중국동포교회 2층과 3층에는 오갈 데 없는 중국동포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해두고 있다. 남자방과 여자방으로 나누어진 15평 남짓한 이곳은 바닥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 냉골에서 한방에 20~30명의 온기로 겨울을 지내고 있다. 방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냉기가 확끼쳐 오면서 그 기운 사이로 희미하게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 누구 들어왔습니까?"
쉼터에서 시각장애우를 만나리라는 생각을 못했던 나로서는 그가 어떤 이유로 시력을 잃게 된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한 30대 중반의 여성은 다소 불안한 눈초리를 보이면서 처음에는 자신은 할말이 없다면서 그냥 돌아가 달라고 했다. 하지만 찬바닥에 30분 이상 앉아서 기다린 나에게 미안했던지 한참만에 "그럼 궁금한 게 뭐냐"고 운을 띄웠다. 심양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지 1년 반 되었다는 그이는 중국에 남편과 열네살된 아이가 있다고 했다. 몇해 전까지만 해도 중학교 교사로 일하는 남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았는데 3년 전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살길이 막막해졌다고 했다. 그런데 마침 같은 동네에 사는 아주머니가 한국에 가서 3년 동안 일하고 돌아와 집 한채를 샀다는 애기를 듣게 되었고 그길로 그녀는 어떻게서든지 한국으로 가서 돈을 벌어와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를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1000만원을 빚을 내서 서류를 꾸며 한국으로 오는 배에 몸을 실었다.

"처음에 와서 한 6개월 동안은 식당에서 일을 했어요. 온종일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고 나면 한밤중에는 발이 퉁퉁 부어올라서 식당에 딸린 방에서 뜨거운 물에 한시간씩 발을 담그고 있다가 가라앉으면 잠들곤 했지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도 주인은 잘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바닥이 더럽다, 테이블이 왜 이렇게 어수선하냐 등등 날마다 트집잡기에 바빴어요. 월세를 방을 구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 돈을 모으면 얼마인데 하는 생각에 계속 식당 쪽방에 살면서 가게 문닫은 후에도 식당 청소며 허드렛일을 군말없이 했어요."

그렇게 일하고 100만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벌면 1년이면 한국에 나오느라 빚진 1000만원을 갚을 수 있고, 그 다음부터 한 3년 동안만 차근차근 모으면 중국으로 돌아가 집한채 마련하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힘이 솟았다. 그런데 6개월째 되던 즈음부터 몸에 열이 나고 목이 타면서 오한이 들면서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고 눈 앞도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식당 근처의 병원에 찾아갔더니 감기 몸살이라며 며칠치 약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한달이 지나도 몸은 나아지기는커녕 온몸에 붉은 반점까지 돋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아주대학병원에 다시 찾아갔더니 루푸스병인데 너무 오랫안 열이 나는 것을 방치해둬서 그 열기가 눈으로 전위되었기 때문에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했다.

"중국에 있을 때는 감기한번 걸린 적이 없이 건강했는데 내가 그런 병에 걸렸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어요. 의사말로는 심한 과로와 스트레스가 원인이라는데 조금 일찍 발견했더라면 눈의 시력을 잃지는 않았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병원에 한달동안 입원해 있었지만 결국 왼쪽 눈은 염증이 생기면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의사 말로는 망막이 떨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퇴원할 수 밖에 없었다.

"아직 한국으로 나올 때 진 빚도 다 못 갚았는데 거기다가 병원비로 1000만원의 빚이 또 생겼으니 앞이 깜깜하데요. 그래도 가족이 잇는 곳에 가서 죽어야지 생각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함께 일하던 중국동포가 서울 가산동에 가면 중국동포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교회가 있다고 가르쳐 줘서 이곳에 오게 됐어요."

중국동포 교회에 온 이후 그녀는 그래도 아직은 시력이 남아있는 오른쪽 눈을 수술받았다.

수술받은지 40일이 된 지금, 이제 겨우 흐릿하게 사물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그녀는 중국에서 남편의 퇴직금으로 근근히 생활하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면 방에 누워있어도 영 마음이 불편하다고 했다.

"하루빨리 제 눈을 고쳐서 돈벌어 중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 가면 저는 치료받을 길도 없고 저희 식구들은 빚더미에 올라앉아서 살지도 못합니다.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온 중국동포들은 그 돈을 핏돈이라고 합니다. 피를 팔아서 번거나 다름없다는 말이죠. 저도 이제서야 그 말을 실감하고 있어요. 중국에 있을 땐 한국이 세계에서 네 번째 부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에서도 동포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정말 너무 합니다. 일본이나 미국에 있는 잘 사는 동포만 동포라고 감싸안더라구요" 한참을 말하고 난 그녀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같은 방 한켠에는 60대 후반의 나이든 아주머니도 누워 있었다. 인천에 살고 있는 고모를 통해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온지 6개월 되었다는 아주머니는 얼마 전까지 여관에서 청소 일을 하면서 지내다가 몸이 안좋아 잠시 쉬려고 이곳에 왔다고 했다. 중국에 있을 때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집사로 일했고 작은 아들도 전도사를 하면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큰아들은 심양에서 농사짓고 있는데 오기 전에 집을 하나 사줬어요. 내가 몇년 벌면 갚아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나왔어요."

이 아주머니는 처음 와서 영등포 근처에 직업소개소를 통해 여관에서 청소일을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아무 것도 할 게 없는데 먹여주고 재워주고 90만원이면 꽤 괜찮다"는 생각에 얼른 일하겠다고 했단다.

그런데 그곳에서 일하면서 겪은 스트레스가 말도 못했다. 아무리 부지런하게 아침 일찍부터 청소를 하고 정리를 해도 젊은 주인은 월급을 올려주기가 싫어서 그랬는지 칭찬 한마디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뭐 한가지라도 실수를 저지르면 난리가 났다. 한번은 몰라서 그랬다고 얘기했다가 "어디서 대꾸질이냐, 주둥이를 밀어버린다"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집 생각이 나서 눈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여관이라는 곳과 한국의 여관은 너무나도 달랐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부부가 아니면 여관에서 함께 묵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은 여관이 지나가는 나그네들이 묵어가는 곳이 아니라 남녀가 하룻밤 사랑을 나누는 곳이더군요. 그곳에서 못볼 것도 너무 많이 봤어요. 중국동포 중에 젊고 예쁜 여자 아이들이 다방에서 일하면서 2차로 내가 일하는 여관에 와서 지내고 가는 것도 봤거든요. 그런 걸 보니까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고 신앙인인데 더는 못하겠더라구요" 라면서 "솔직히 말할까요? 이 땅에서 하루도 살기 싫어요. 돈벌면 빨리 떠나냐죠" 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이국의 설움을 달래주는 중국인 거리가 있어 다행

중국동포교회 주변에는 중국동포들이 꾸리는 식당, 가게, 노래방, 불고기집 등 여러 가지 업소 70여곳이 줄줄이 들어앉아 고객을 부르고 있다.

취재를 마치고 중국인 거리라고 불리우는 가산동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양고기 꼬치집에서 40대 남성의 중국동포를 만났다.

몇 년씩 한국에 체류한 조선족들은 쓸쓸할 때 제일 먹고싶은 것이 바로 양고기꼬치라고 한다. 한국에 온지 5개월 된 정재식 씨는 쉬는 날이면 일하는 곳에서 30분이나 걸리는 가산동으로 일부러 시간을 내서 양고기꼬치를 먹으러 온다. 양고기를 비롯한 모든 재료를 연변에서 운송하는데다가 맛도 연변의 것을 그대로 살렸기 때문이란다.

중국 연변에서 한 때 교사로 일했다는 그는 그래도 자기의 경우는 한국으로 나올 때 많을 빚을 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한국에 나와 마포구 연신내에 있는 갈비집에서 숯불을 피우고 청소를 하면서 차근차근 돈을 벌고 있다고 했다.

"저는 한국에 꼭 돈을 벌러 온 건 아닙니다.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고국에 와서 구경도 하고 사는 방식도 보고 싶었습니다. 돈이야 남한테 안꾸어 쓸 정도면되는 거죠. 아직 한국에 온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일은 어렵고 돈쓸데는 많은 것 같아요. 그리고 있는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와 없는 사람한테 대하는 태도가 너무 달라요. 넥타이 메면 "오셨습니까", 작업복 입고 가면 "오든지 말든지"에요. 그러니까 너나할 것없이 돈버는데 미쳐있는 거죠. 중국동포들 가운데도 그렇게 돈벌어보겠다고 하다가 낭패 본 사람도 많아요.

자신과 함께 나온 중국동포 중에는 다단계판매 회사에 들어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몇 백만원을 낸 후에 물건을 팔다가 결국 절반도 못팔고 그 물건을 떠 앉게돼 빚을 엄청나게 지게 된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어느 날은 저에게 오더니 쉽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서 함께 가지고 하더군요. 같이 가보니 새로운 사람을 회원으로 끌어들일 때마다 수십만원의 할당금을 준다고 얘기하더라구요. 하지만 저희같이 연고가 없는 조선동포가 어디가서 사람을 끌어 모읍니까? 다 꿈같은 얘기죠. 중국에서는 평생 피땀 흘려 일하더라도 도저히 갚을 수 없을 만큼 빚을 지고 있는 동포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나라에서 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나마 재식 씨에게 양고기꼬치와 함께 위안이 되는 건 가리봉동에 있는 "호호"라는 책방이다. 그는 갈비집이 쉬는 날이면 가끔씩 그곳에 가서 중국어로 된 책들이나 잡지들을 사다가 읽곤 한다.

"호호 책방은 고향과 혈육을 멀리 떠난 사람들의 공허함을 달래주주는 휴식처에요. 고된 일을 하는책도 보고 비디오도 보면서 스트레스를 풀면 좋지요."

책방에는 조선글로 된 책, 중국어로 된 무협소설, 만화책, 여러 가지 잡지 5000여권이 있다. 또 편안히 앉아 비디오를 볼수 있는 공간도 있다고 한다. 손님 대부분이 중국동포들인데 하루에 5000원만 내면 하루종일 마음껏 책도 읽고 또 보너스로 1편의 공짜 비디오도 볼 수 있단다. 모처럼만에 책도 사서 읽고 비디오 보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오면 일주일이 거뜬하다는 게 그의 말이다.

 

수십년 대를 이어 내려오며 오매불망 그리던 조상의 땅. 그러나 가산동 일대에서 만난 중국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큰돈을 벌어 돌아가겠다며 목숨걸고 바다를 건너온 그들에게 고국은 이제 더이상 꿈과 희망의 땅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발을 내딛는 순간 불법체류자의 멍에를 쓴 채 한 핏줄이면서도 이민족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국동포들은 작년 11월 30일 헌법재판소가 정부 수립 이전 해외로 거주한 동포와 재미, 재일동포를 차별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해외동포법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것을 지켜보면서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법이 개정되면 불법취업을 합법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동포들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소위 "세계화" 속에는 미국과 유럽이 있고 백인이 있지만 우리가 속한 아시아는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역으로 우리 동포 안에 중국동포들을 그저 "조선족"이라는 이방인으로 방치하고 소외시키고 있지 않은가. 조선동포들이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그들 나름대로의 꿈이 있었을 터다. 그런데 그 꿈들은 불법체류라는 굴레속에서 조금씩 안타깝게 사라지고 있었다.
 

 

 

 

 

글 · 사진/ 이나라 기자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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