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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키 작은 사람들의 권리 찾기 이제부터 시작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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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2월 26일 진주에 있는 경상대병원 대회의실, 이 날 이곳에서는 왜소증 장애우와 부모 3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작은 키 한국인 모임-약칭 LPK 발족식이 열렸다. 드물게 회의 장면이 KBS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기도 한 LPK 창립은 그 동안 그늘에 머물러 있던 왜소증 장애우들이 자기 존재를 양지에 드러낸 최초의 모임으로 장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 이 날 작은 키 한국인 모임 창립이 있기까지는 KBS 텔레비전 인생극장에서 1월 중순 5부작으로 방영한 작은 거인 이후의 주인공들인 대구에 사는 왜소증 장애우 4형제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함께걸음은 텔레비전에서 작은 거인으로 묘사된 왜소증 장애우 4형제를 만나 텔레비전에서 미처 하지 못한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LPK 창립에 맞춰 국내 왜소증 장애우들의 실태를 살펴보았다.

 

"난쏘공"은 여전히 현실의 우리 모습


생뚱하지만 이야기를 70년대 노동과 빈민 문제를 정면으로 다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조세희씨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70년대를 대표하는 초상으로 자리잡은 왜소증 장애우 김불이씨, 소설 속에서 신장 백십칠 센티미터, 체중 삼십이킬로그램으로 묘사된 그가 꿈 꾼 세상은 아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고 있다.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사랑에 기대를 걸었었다. 아버지가 꿈 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 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부의 축적을 사랑의 상실로 공인하고 사랑을 갖지 않은 사람네 집에 내리는 햇빛을 가려버리고, 바람도 막아버리고, 전깃줄도 잘라버리고, 수도선도 끊어버린다.-중략 아버지가 꿈꾼 세상에서 강요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일하고 사랑으로 자식을 키운다. 사랑으로 비를 내리게 하고 사랑으로 평형을 이루고, 사랑으로 바람을 불러 작은 미나리아제비꽃줄기에까지 머물게 한다.

▲왜소증장애우모임-LPK

이렇게 사랑으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던 왜소증 장애우 김불이 씨는 결국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의무만 강요하는 시대에 절망한 채" 끝내 경제 사회적 생존권을 찾아 상처를 아물리지 못하고 벽돌 공장 굴뚝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98년 5월호 함께걸음을 보면 조세 씨가 이 소설을 쓰기 전 만난 한 왜소증 장애우가 있다.

 

"그 때 저는 기자촌이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겨울이라 체감 온도가 엄청 추웠습니다. 택시를 타고 동네 입구에서 내렸는데 하나 있는 외등 아래서 어둠에 쌓인 동네를 향해 어느 한 사람이 욕을 퍼부으며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까 그 아저씨가 왜소증 장애우였어요. 그 아저씨는 오징어를 팔고 있었는데 하지만 어디 한밤중에 오징어가 팔리겠습니까?"

 

조세희씨의 "난쏘공"이 발표된 지 어언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지만 "난쏘공"은 여전히 현실의 우리 모습이라는데 비극이 있다. 절대 과거형이 아닌 것이다. 누가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지 않고 의무만 강요하는 시대에 절망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장애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이며 차별 가득한 세상에 울화가 치밀어 불특정 다수를 향해 욕을 퍼붓는 장애우가 없다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대구시 복현동 한 아파트에서 만난 왜소증 장애우 4형제 중 맏이 황회동(40세, 그는 이번에 LPK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씨는 소설은 읽지 않았지만 영화화된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여러 번 보고 또 봤다고 했다. 그리고 묻지도 않았는데 영화에 출연한 왜소증 장애우를 알고 있는데 얼마 전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준다. 왜 영화를 되풀이해 봤냐고 물어보자 그는 "관심이 있으니까. 보고 감동해서, 또 보고 그런 거죠." 라고 대답하며 말끝을 흐린다. 그는 구체적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쓸쓸한 그의 표정에서 그가 한 때 영화 속 장애우와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외모만 보고 거절당하는 게 실정

 

기자 개인적인 감상인지 모르지만 사실 지난 1월 15일부터 19일까지 방송된 인생극장 "작은 거인 이후"는 왜소증 장애우 4형제를 지나치게 밝게 그렸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물론 그 점이 숨어 있던 왜소증 장애우들에게 용기를 줘 LPK 창립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 땅에서 왜소증 장애우로 살아야했던 4형제의 고뇌와 아픔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아 진한 아쉬움을 갖게 했다.

방송은 4형제의 현재만을 담았는데, 그러면 4형제의 과거는 과연 어땠을까, 서두에서 "난쏘공" 얘기도 꺼낸 만큼 방송과 달리 아픔에 초점을 맞춰 왜소증 장애우 4형제의 삶의 궤적을 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황회동(40), 세영(38), 정동(28), 정영(22). 이들 4형제가 텔레비전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4형제 모두 왜소증 장애우라는, 같은 예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중 한 사람만 장애를 가져도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우리 현실에서 4형제 모두 똑같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추측에 맡기고 형제들 말을 들어보자.

 

-고향은?
회동: "경북 청송 시골에서 태어났어요. 저는 중학교 졸업하고 상고나 공고를 가고 싶었는데, 학교에서 장애우들을 배척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진학하지 못했죠. 농고는 아예 가지도 못하고, 인문계 나와서 공무원이라도 되었으면 했는데, 그때는 공무원 꿈도 못 꾸니까 아예 포기해버렸죠. 둘째는 초등학교 나오고, 셋째는 중학교 나왔어요, 막내는 올해 대학에 들어가요."

-언뜻드는생각이 유전이라고 해서 대대로 장애우가 태어나라는 법은 없잖아요.
회동: "그렇죠. 우리도 아버님만 장애우였어요. 아버님 형제도 4형제인데 아버님만 장애를 가지고 있었고, 아버님 형제의 자녀들은 또 다 괜찮은데, 우리 4형제만 장애를 가진 거죠."

-사회생활은 언제부터 시작 하셨어요?
세영: "26살 때 사회에 나왔어요. 그전에는 고향에서 아버지와 농사 짓다가. 농사 짓는 게 희망이 없어 보여서 빠져 나왔죠. 도시에 나와 자개 일을 하다가. 또 금은세공 일도 했는데 그 후 연예계 쪽에 연결이 돼서 쭉 이 일을 하게 되었어요."
회동: "저는 학교를 늦게 다녔어요. 83년에 졸업하고 84년도부터 객지 생활을 했는데. 서울에서 시계 수리공으로 일했어요. 셋째 넷째는 학교 졸업하자마자 둘째하고 같은 일을 했어요."

- 팀 이름이 있나요?
세영: "고슴도치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전국으로 돌아다니죠. 처음 이 일은 양모 밑에서 배웠어요. 양모가 저를 키워준 셈이죠. 처음에는 미미와 고슴도치라고 해서 양모와 둘이 다녔어요. 나중에는 막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학교 다니면서 이 일을 같이 하게 됐어요. 그리고 셋째도 합류하고, 지금은 독립해서 형제가 고슴도치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돌아다니죠."
회동: 저는 안경테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 동생들과 같은 일을 하지 않는데 이유가 있나요.
회동: "저도 한 때는 동생들과 같이 일했어요. 그런데 일이 맞지 않고, 내가 형인데 동생한테 끌려 다녀야 하는 점이 싫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싫어서 그만뒀어요."

- 취업은 생각해 보지 않았나요.
세영: "취업이 안돼요. 문전에서 박대 당하죠. 말 한 마디 못해보고. 기술과 능력과는 상관없이 외모만 보고 취업을 거절당하는 게 우리 현실이죠."

- 살아오시면서 제일 힘들었던 때는 언제였나요.
회동: "많았지만 저는 84년도 시계 수리 학원 마치고 취업을 나갔는데 그때 사람들이 외모만 보고 푸대접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세영: "객지생활 하면서 비장애우들과 지내면서 따돌림도 많이 당했어요. 일 할 때도 힘들었고, 지금은 개인으로 일 하니까 힘든 것을 모르겠는데, 공장에 다닐 때는 아무래도 제가 비장애우들보다 못하니까 차별을 받았어요. 그럴 때 많이 힘들었죠."

 

- 사람들 앞에서 공연하는 게 창피하지는 않습니까.
세영: "처음에는 창피했죠. 그런데 제 성격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은 꿋꿋하게 가는 성격이에요. 남들이 날 이상하게 봐도 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당당한 편이어서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남을 의식했다면 지금 이렇게 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겠죠.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돈 2만 원 가지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남들이 볼 때는 우습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성공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형제 이름 앞으로 각각 집 한 채씩 마련했어요. 여긴 셋째 집이고. 밑에 둘째 집. 그리고 건너에 막내 집이 있어요. 세 형제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큰형만 시골에 집이 있어요."

-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 장터를 돌아다니나요.
세영: "장터는 아닙니다. 우리는 주로 대형 행사에 초대를 받죠. 건강식품을 파는 행사장인데, 우리는 건강식품과는 상관이 없고, 사람들을 모아주는 일을 하죠."

- 앞으로도 계속 그 일을 하실 건가요.
세영: "어렵다고 봐야죠. 경제도 어렵고, 앞으로는 우리가 초대받는 행사도 별로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장사나 할까 생각하고 있는데, 잘 될지 안 될지 고민이라 선뜻 나설 수도 없고, 앞으로 뭘 해야 먹고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 둘째만 결혼 했나요.
회동: "저는 결혼했다가 실패했습니다. 재작년에 아내가 가출했어요. 아이도 하나 있었는데 돌 때 음식 먹고 체해서 병원 가는 도중에 죽었어요. 아내는 가출 신고한지 1년 됐고. 소식 은 모릅니다. 지금 속앓이를 많이 하고 있죠."

- 둘째는 따님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죠. 세영씨의 4살된 딸 가은이도 왜소증 장애를 갖고 있다.
세영: "처음에는 가은이가 장애우인지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산부인과 가니까 아이가 작다고 그러는데 아이 엄마가 실망을 많이 했죠. 제 여동생은 비장애우라 기대를 많이 했는데, 그렇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가은이가 살아갈 세상은 제가 살아온 세상보다는 나아진 세상일 테니까, 교육을 잘 시키면 얼마든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같은 왜소증 장애우가 미국처럼 의사 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앞으로 가은이 교육에 힘쓸 각오입니다."

 

외모 지상주의 사라져야 한다

 

LPK 창립에 때맞춰 나온 "작은 거인 4형제와 LPK 사람들"이라는 책이 있다. 경상대 의대 송해룡 교수와 왜소증 장애들이 저자인 이 책은 국내 최초로 왜소증 장애우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룬 책이다.

그 책을 보면 미국 왜소증 장애우 모임인 LPA 얘기가 구체적으로 나오고 연장선상에서 이번 LPK 창립이 LPA를 모델로 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런데 LPK가 만들어지기까지 장애우 당사자는 아니지만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가 있다. 바로 송해룡 박사다. 소아 정형외과 의사이기도 한 그는 국내에서는 드물게 왜소증 장애우 문제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송해룡 박사는 자신의 왜소증 장애우 문제에 대한 관심을 책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지난 1998년 "수술로 키를 늘일 수 있다구요?" 라는 책을 내면서 미국의 왜소증 장애우 모임 LPA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가 그걸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내 책이 나온 후 언론매체에서는 어떻게 하면 키가 클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경쟁적으로 다루었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키가 작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무관심했다. 언론이나 텔레비전에서는 나에게 키 크기에 대한 정보에 관한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나는 키가 작은 왜소증 장애우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했으나 그러한 주제는 시청률이 떨어진다며 거부했다. 그들은 키 문제의 본질을 보지 않고 호기심 차원에서 키 문제를 보고 있었다."

 

송 박사의 이 말은 우리 사회 왜소증 장애우 문제의 본질을 간파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왜소증 장애우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외면한 채 호기심 차원으로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송해룡 박사는 이어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왜소증 장애우들이 서커스나 술집 앞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기도 일을 하는 줄 알고 있어요. 이런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키 작은 사람들을 보면 저기 난쟁이 가네, 하면서 놀리고, 또 하층계급의 사람들로 보고 있죠."(박스 인터뷰 기사 참조) 라고 왜소증 장애우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질타하고 있다.

실정이 이렇다보니 왜소증 장애우들이 겪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은 놀림으로 표현되는 멸시다. 참고로 책을 보면 올해 고 2인 이지영 양은 장애우들이 멸시로 인해 겪는 아픔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고 있다.

"나는 지금껏 하도 많은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웬만한 놀림에는 눈조차 돌리지 않는데 그런데 최근에 큰 상처를 받았던 적이 있다. 학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깡패 같은 몇 몇 학생들이 뒤에서 나를 지켜보며 얘기하는걸 들은 것이다. "쟤도 인간이냐?" 자기네들끼리 나눈 말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말을 못 들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그 말을 듣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인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내가 짐승인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 그 아이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니네들 눈에는 내가 짐승으로 보이냐? 학교에서 짐승은 뭐라고 배웠고 인간은 뭐라고 배웠니? 그 정도 기초적인 지식도 없니? 내가 연이어 쏘아붙이자 그 애들은 멍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나서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횡단보도를 건너왔는데 마음은 후련했지만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박힌 인식을 어떻게 허물 수 있을까 막막하기만 했다".

 

멸시로 인해 고통받기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현재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을 숨기고 있고, 노출을 꺼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부모들이 위축되어 있어서 왜소증 장애우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 이제 자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LPK 부모들은 어떨까, 4형제 중 둘째인 세영씨는 LPK 창립식 분위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LPK 모임에 참석한 부모들이 175 센티미터 이상 되는 사람들인데, 모임이 방송에 나간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얼굴을 가려 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우리가 아이들의 장애를 감추고 감싸면 안 된다. 부모들이 아이 죽을 때까지 살고 보호해 줄 겁니까? 이렇게 얘기했죠. 어차피 나이 들면 돌아가시고, 아이들은 혼자 남을텐데 활동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사회생활을 하도록 해야죠. 이렇게 말하니까 설득돼서 모임이 끝나고 난 뒤 얼굴 가릴 분 빨리 얘기를 해달라고 했을 때 단 한 사람도 가려달라고 한 부모가 없었습니다."

사견이지만, 이런 변화된 부모들의 태도를 LPK 창립의 가장 큰 소득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왜소증 장애우 당사자와 부모들이 장애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것, 이 지점에서부터 운동은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인 송 박사에 따르면 왜소증 장애우들의 90%는 양쪽부모 모두가 비장애우라고 한다. 그리고 2만명 중에 1명 꼴로 왜소증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한다. 즉 앞으로도 왜소증 장애우 출현은 막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키가 지나치게 큰 사람들은 장애우라고 부르지 않는다. 유독 키 작은 사람만 문제가 되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 사회가 키에 대한 지독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키로 대표되는 외모 지상주의, 내면은 무시된 채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왜소증 장애우들의 고통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왜소증 장애우들은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단지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못 꺼낸다든지 하는 불편만 있을 뿐이죠.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이제 우리 사회도 키 작은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그래서 작은 거인 4형제가 주축이 돼서 만들어진 모임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김경희, 이태곤 기자

 

 

 

| 인·터·뷰 |


<“왜소증 장애우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어요” >


KBS 인생극장 ‘작은 거인 이후’는 4형제 중에서도 막내인 황정영(22세)씨 에게 초점이 맞춰져서 제작이 이루어졌다. 밝은 모습으로 거리낌없이 행동하는 그의 모습이 방송을 탄 후 LPK 홈페이지 게시판은 팬클럽을 연상할 정도로 그에게 보내는 격려 메일이 폭주하고 있다. 형제들도 방송 이후 받은 큰 혜택으로 정영 씨의 휘어진 다리 무료 교정 수술과 대학 입학을 꼽고 있다. 정영씨는 올해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해서 곧 대학생이 된다. 형제들과 떨어져 경상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가 만나 보았다.

― 이제 일은 못하겠네요.

“예 학교 다녀야죠.”

― 공연 일은 언제부터 했나요.

“초등학교 3학년부터 했으니까 9년 되었네요.”

―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떨리지 않았나요.

“아니요. 형들하고 같이 하루에 세 번. 20분씩 공연했지만 창피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적응되니까 괜찮았어요.”

― 본인의 장애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좌절한 적은 없었나요.

“많았죠. 유치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이 놀리고. 그 때는 뭐가 뭔지 모르니까 그냥 넘어갔는데 초등학교와 중학교 들어가서 놀림을 받았을 때 비관 많이 했어요.”

―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극복하지 않았나요

“쳐다봐라 그러죠, 하지만 안될 때가 많아요. 그럴 때는 저 혼자서 욕설도 하죠. 너희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냐 그러면 속이 좀 시원해요.”

― 성인이 되고 난 뒤 변화가 있나요.

“솔직히 저도 남자인데 연예도 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은 것은 당연하잖아요. 여자친구도 만나고 싶고, 그렇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현실은 불가능하죠. 그게 답답해요.”

― 형들에 비해 고생은 덜 한 편이죠.

“아니요. 저도 똑같이 어릴 때부터 농사 짓고 나무하러 다니고, 고생 많이 했어요.”

― 해온 일에 대해서는 만족하나요.

“솔직히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지만 생계가 걸려있고, 우리 같은 왜소증 장애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일 했어요.”

― LPK를 만들었는데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왜소증 장애우들이 외국처럼 잘 살 수 있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우선 우리 나라에 있는 왜소증 장애우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장을 만들려고 해요. 그리고 왜소증 장애우들에게 대한 사회 인식이 개선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활동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어요.”

 

 

<제약없는 삶을 누리는 미국의 왜소증 장애우들 >

 

그동안 다른 장애에 비해 소외되어 왔던 국내 왜소증 장애우들이 최근 뒤늦게나마 한국왜소증협회(KLA)란 모임을 결성하고 권익 옹호를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이미 반세기 전부터 미국왜소증협회(LPA)를 결성해 꾸준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LPA 결성의 선구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한 배우 빌리 바티였다. 지난해 10월 타계한 빌리 바티는 1957년 전국의 대중에게 왜소증 장애우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네바다 주 리노에서 모임을 결성했다. 이 때 바티 외에 20명의 왜소증 장애우들은 1주일 동안 함께 하며 생각을 교환하고 서로 삶의 경험을 나누는 동안 혼자가 아님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왜소증 장애우로서 직면한 문제에 대한 도전을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LPA는 오늘날 전세계 도처에 5천 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큰 왜소증 장애우 단체로 성장했다. LPA가 매년 한 차례 1주일간 개최하는 전국대회는 1천 명 이상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룬다. 이 대회는 위크샵, 부모모임, 독신자 사교회, 10대 이벤트, 아동 활동, 패션쇼와 탤런트 쇼, 체육 이벤트들과 야간 댄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원인에 따라 200여 개의 형태로 분류되는 왜소증은 흔히 부모로부터 유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왜소증 장애우들은 가계에 왜소증 병력을 갖고 있지 않은 평균 신장의 부모로부터 태어나고 있다. 물론 몇 왜소증의 형태는 의학적 질환과 연계되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왜소증 장애우들은 키가 작은 것을 제외하면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없 다.

실제로 미국의 왜소증 장애우들은 직업, 스포츠, 취미생활 등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보편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직업에 있어서 미국의 왜소증 장애우들은 평균적인 신장을 갖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사, 법률가, 성직자, 교사, 용접공, 그리고 예술가를 포함한 동일한 직업선택을 하고 있으며 직업적 성취를 누리고 있다.

스포츠 활동에 있어서도 능력의 범위 내에서 육상(트랙, 필드), 농구, 보치아, 파워 리프팅, 수영, 스키, 탁구, 배구, 배드민턴, 축구, 승마 등 다양한 종목들을 즐기고 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서서 올림픽 대표선수들처럼 국제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기술 연마와 훈련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아마추어 선수들도 적지 않다.

특히 왜소증 장애우들의 체형에 맞춘 의류, 가구, 컴퓨터, 의료용품, 승용차, 잡화용품들이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어 일상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인·터·뷰 |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에 가치를 둘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


― 이번에 LPK모임 만드는데 선생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이런 모임을 조직할 생각을 하셨는지요.

“내 전공이 소아정형외과입니다. 소아정형외과는 주로 뇌성마비를 비롯해 선천적 골격질환으로 인해 팔다리가 짧은 사람들을 치료하게 되는데요, 그러다보니 왜소증 장애우와 접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왜소증장애우 모임이 없고 또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힘을 실을 수 있는 모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 ‘작은 거인 4형제와 LPK사람들’이라는 책에 미국작은키모임(LPA)에 대한 내용이 있던데, 그것은 직접 목격하신 이야기입니까?

“예. 미국에서는 왜소증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죠. 원래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사회적으로 자꾸 키 큰 사람들을 선호해 자꾸 키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작은 사람도 당당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내용을 넣으려고 모델을 찾으니까 우리나라에는 없어요. 그래서 미국의 LPA사람들에 대해 다뤘죠. 그 사람들을 직접 만나면서 많은 것을 느꼈으니까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키 작은 것에 대해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고, 본인 스스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풀어줄 수 있는 방안이 LPK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 단순히 왜소증 장애우뿐만 아니라 키 작은 사람들의 전체적인 모임을 구상하시는 거군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왜소증장애우의 문제가 뭐라고 느끼십니까?

“잘못된 사회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편견 때문에 숨기고 창피하게 생각하고 그러는 거죠. 일단 부모들부터가 다 도망을 가잖아요. 부모가 아이를 숨기고 열등감에 빠지니까 자식들도 닮아 소극적으로 되어 자신을 드러내지 않게 되죠. 그러다보니 인식이 변화되질 않아서 사람들이 키 작은 사람들을 보면 저기 난쟁이 가네, 하면서 놀리고, 또 하층계급의 사람들로 본다는 말이죠. 그래서 왜소증장애우가 직장을 갖게 되더라도 유흥업소같은 곳으로밖에 못 가요. 이런 사회적 인식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것이 내가 LPK를 조직하려는 목적입니다.”

― 이 LPK 모임을 통해서 당장 얻을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우선 같은 왜소증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만나야죠. 그래야 그 사람들이 만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위로도 받고 또 여러 가지 일에 있어 방안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거친 사람의 이야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서 정보를 얻고 배우는 거죠.”

― 우리나라 장애우와 미국의 왜소증장애우와의 차이점은?

“자기를 잘 드러내고 일단 조직이 잘 되어 있죠. 그리고 사회가 우선 잘 받아주고, 다양성을 잘 받아주잖아요. 또 미국사회자체가 외모보다는 능력을 더 알아줍니다. 그러다보니 왜소증장애우이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데 한국은 나이 따지지, 입사연도 따지지, 얼굴 예뻐야지, 키가 커야지. 그런 한계를 주잖아요. 그런데 미국은 그런 제한을 두지를 않죠.”

― 유난히 우리 나라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한 것 같아요.

“매스컴에서 자꾸 만들죠. 저는 우리 사회가 철학적인 사고와 인문학이 발달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문학이 발달하고, 문화적 수준이 높다면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데 가치를 더 많이 두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 키 큰 사람들이 더 인정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문도 공대, 의대 등 뚜렷한 성과가 있는 학문만을 지향하고, 그렇지 않은 학문은 다 죽게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극복시키려는 대안의 하나로 저는 이 LPK모임이 널리 알려졌음 좋겠어요. 왜냐면 120-130센티가 살아가는 것을 보면 150은 행복할 거 아니예요. 상대적으로.”

― 마지막으로 이 모임이 어떤 형태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까.

“키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사회로 진출해야죠.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힘이 실려 사회가 가지고 있는 키에 관한 제한 사항, 편견 등을 없애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나아가서는 정책적으로도 우리가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단체로 자리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성자김경희/ 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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