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착역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곳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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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지체장애우에게 자립 재활 기회를 보장하고, 생산활동을 통한 자아실현을 통해 당당한 경제인으로서 사회통합을 이루고자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에 문을 연 정신지체장애우 근로시설 "우리마을"이 개원 1년을 맞았다.
2000년 2월 22일에 설립되어 현재 44명의 장애우와 특수교사, 근로기사 외에 유급 봉사자가 함께 생활하는 이곳은 지금까지 장애우시설은 폐쇄적인 수용시설이라는 사회의 편견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정신지체장애우 자활 직업훈련원이란 점 이외에도, 2000평의 대지에 6백10평 규모의 환경 친화적 목조 건물로, 건축구조상으로도 강화도의 새 명물이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근래에는 장애우들을 위한 사업이 보호작업장에서 탈피하여 점차 근로시설로 전환되어지는 추세이다. 근로시설은 보호작업장과는 다르게 많은 자본과 투자가 선행되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 장애우들이 경제적인 자활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바람직한 시설이라고 하겠다. 아직은 장애우 근로시설로서 시작단계에 있는 "우리마을"의 성공여부를 말하기엔 이른 감이 있지만, 우리마을이 성공적인 모델이 되어 더 많은 장애우들에게 경제적 자활의 꿈을 안겨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장애우근로시설 |
삶의 행복이 오로지 육신의 편안함과 근심 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분주함과 긴장의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는 설명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우리마을" 사람들 역시 그런 기준에서라면 행복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봄볕 속에서 다시 땅을 일구기 시작한 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행복해 보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작은 보람들을 찾아가기 때문이다.
"우리마을"은 대한성공회 김성수 주교의 집념과 꿈이 스며있는 곳이다. 95년 대한성공회 관구장에서 은퇴한 김주교가 97년말 시가 20억원 상당의 강화도 고향 선산을 우리 마을 터로 내놓은 뒤 우리 마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3년만인 지난해 2월이다.
공사를 시작하고 보니 땅 속에 바위가 많아 난공사가 우려됐으나, 이 자연석들은 돌담을 쌓는데 유용하게 쓰였고, 강화도에서는 귀한 (배수가 좋은 흙) 마사토도 많이 나와 정원을 꾸미는 데 더할 수 없는 도움이 됐다고 한다. 우리마을은 건축비용만도 국고 10억원과 인천시지원금 10억원이 들었고, 여기에 대지헌납분 20억원과 기부금 및 후원회비 5억원 등 총 45억원이 투입된 큰 공사였는데 김주교는 우리마을 공사기간 내내 "이곳은 하나님이 귀한 데 쓰라고 특별히 축복을 내린 땅"이라며 현장을 꼼꼼히 지휘했다고 한다.
우리마을은 장애우시설이 건립될 때마다 의례적으로 겪는 주민들의 반대가 없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강화군수가 우리마을 설립 당시 기관장들과 면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담으로 이런 시설이 들어온다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겠느냐고 얘기했다가 면박을 당했을 정도라고 하니 김성수 주교가 지역 내에서 받고 있는 신망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만하다.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자활의 꿈 키운다.
김주교가 장애우들이 자립할 수 있는 보금자리를 구상하게 된 것은 초, 중, 고등 과정의 장애우학교인 "성베드로학교" 교장시절, 갈 곳이 없는 졸업생들이 졸업식장에 아예 나타나지 않는 것에 가슴 아파하면서부터다. 장애우들의 평생 취업기회를 보장할 직업학교를 겸한 자활공동체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김주교는 "우리마을"을 그 모델케이스로 첫 삽을 뜨게 되었다. 김주교는 국난을 당하거나 어려운 시절이 닥쳐오면 늘 "우리"가 되어서 이겨내던 조상들의 "우리마을" 공동체를 닮고 싶다는 생각에서 근로시설의 이름을 우리마을이라 칭하고 지금도 그 이름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베드로학교 출신들이 많이 왔지만 현재는 그 학생들에게만 특혜를 준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인천, 강화, 서울등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현재 100여명 정도가 대기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마을 가족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8~25세까지 성인 정신지체인들이다. 정원 44명 중 29명은 기숙사를 이용하고 나머지는 통근차량으로 출퇴근하고 있다.
2천평의 대지에 중앙 빈터에는 잔디가 깔린 도너츠형 숙소 동을 중심으로 근로시설, 식당 겸 강당이 자리하고 있는데 숙소 안은 웬만한 가정집보다 더 아늑하고 예쁘게 꾸며져 있다. 우리마을 숙소에는 교사 1명에 학생 10명이 한가족을 이룬다. 방은 2인 1실로 되어 있고, 방마다 욕실이 따로 있어 개인 생활공간의 영역을 넓혔다. 거실에는 가족들이 함께 모여 TV를 시청하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소파가 있고 거실 중앙에는 간단한 취사를 할 수 있는 부엌시설도 마련되었다.
우리마을은 건축설계에서부터 시설배치까지 모든 것이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입에서 마련되어 있다. 건물은 방마다 커다란 창을 내서 언제든지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마주할 수 있고, 사무실은 유리로 만들어진 벽이어서 누구나 쉽게 원장 신부님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어 마음의 장벽부터 허무는 역할을 하고 있다. 원래 기도실로 만들려던 시설을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음악치료실로 개조하는 등 세심한 배려가 있었다. 건물 밖을 나서면 마주할 수 있는 작은 잔디밭과 흙 마당, 그리고 한가롭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흰둥이를 보면 마치 먼 길을 떠났다가 시골 고향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우리마을의 하루 일과는 오전 6시 30분에 시작된다. 일어나서 각자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기숙사에서 공동취사로 아침식사를 하고, 9시 30분이면 출근개념으로 작업장에 나와서 4시 30분까지 일을 하게 되는데 근로시간에는 수경재배 반과 콩나물재배 반으로 나누어 일을 한다. 4시 30분 이후에는 기숙사로 돌아가서 쉬거나 근로 외에 음악치료사가 운영하는 음악교실, 헬스실, 동물사육반, 텃밭 가꾸기, 성경공부 등의 여가활동도 즐길 수 있다.
우리마을을 대강 둘러보고서 원장인 허용구 신부에게 전국에서 가장 근사한 시설을 갖춘 정신지체인 근로시설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허 신부는 끝까지 경청한 후에 설립자인 김성수 주교님께서 "장애우 시설은 곧 수용시설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획기적으로 지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아이템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라고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그 안에 숨어 있는 본질이 진정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진지한 삶의 태도가 느껴진다. 요컨대 껍데기의 환호를 달가워하지 않는, 센세이셔널을 경계하는 태도다.
그 대신 허용구 신부는 우리마을에서 살고 있는 모든 정신지체장애우들을 친구라고 부르며 누구보다 진정으로 그들의 가까운 벗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온수리 성당에서 이곳 우리마을로 자리를 옮겨오면서 허신부는 사회가 요구하는 현장에서 복음을 전파한다면 어디든 그곳이 교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점심식사 중에도 우리마을 친구들은 허신부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볼을 부비고 한다.
인터뷰 중에도 사무실의 유리로 된 커다란 창밖에서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기도 하고, 수경재배시설을 둘러보기 위해 하우스 근처에 가자 여기 저기서 "신부님, 신부님!" 하고 불러 재끼는데 정신이 없다. 가끔은 알 수 없는 말로 이야기를 걸어도 허신부는 용케도 알아듣고 그들과 대화를 나눈다. 농군이 땅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 귀를 지닌 것처럼 허신부 역시 이제는 우리마을 친구들과 얼굴만 마주해도 그들의 속내를 더듬을 수 있게 된 모양이다.
생산적 복지의 잣대를 가지고 말한다면 장애우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
정신지체장애우들에게 자립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고, 생산활동을 통한 최소한의 소득활동을 지원한다는 취지로 우리마을에서는 수경재배를 통해서 채소류를 재배하고 콩나물을 생산하여 수입을 내고 있다. 수경재배는 우리나라에서는 도입단계에 있으나, 일반 농법과는 다르게 과도한 노동력이 투입되지 않으며, 계획적으로 재배시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마을이 문을 열 당시에는 정신지체장애우들이 재활교육을 이수한 후에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제빵교육과 예술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들에게 도자기교육을 시킬 계획이었다. 제빵의 경우엔 기술자와 인력이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에 취업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고, 도자기교육과 같은 생활교육은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강사를 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판로를 개척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난관에 봉착해 지금은 일보 후퇴하여 다른 방법을 모색 중이다.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것이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이번 3월 중순부터 시작되는 제빵, 수지침 강좌다. 우리마을 원장인 허용구 신부는 우선은 이런 강좌를 통해서 인적자원을 탄탄하게 만들어 놓은 후에 지역주민들이 직접 우리마을 친구들을 가르친다던지 하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애우 재활 중에서도 단연 직업재활을 최고의 가치로 꼽힌다. 장애를 가져도 일을 하고 그 안에서 생산성을 내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가치관에 따른 강박관념 때문일 것이다.
우리마을이 역시 설립된지 1년을 맞으면서 외부에서 성공적인 정신지체인의 근로시설이라는 평가와 함께 앞으로 우리마을의 성공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허용구 신부는 1년 동안 우리마을을 이끌어오면서 근로시설에 대한 경영마인드 부족으로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리마을이 문을 연 이후 수경재배는 12월, 콩나물 재배는 9월부터 시작되었으니 시기상으로도 시작이 너무 늦은데다가 품종선택도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청, 적 상추, 샐러리 채를 했는데 물류부담비가 너무 커서 수익성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강화 안에는 횟집이 많이 적상추 소비율이 많다는 것을 알고 투자를 시작했다.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적상추는 수경재배라서 품질이 좋았고, 가격 경쟁 면에 있어서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에 꾸준히 출하를 늘려갔다.
그런데 이제 겨우 수익을 올리고 있던 차에 지난 겨울 폭설로 비닐하우스가 무너지는 일을 겪은 것이다. 콩나물 재배의 경우는 시설투자비에 비해서 수익률이 너무 박했다. 한 통을 키워야 겨우 900원이 남을 뿐이고 지역경제 기반이 약하다보니 그렇게 많은 물량이 나가지 않기 때문에 사업체와 연결해서 출하를 해보려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1년간 우리마을을 운영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친구들에게 급여를 한번도 주지 못해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허용구 신부는 "우리 친구들이 즐겁게 일하는 걸 보면 수경재배나 콩나물재배가 우리 친구들의 정서에는 잘 맞는 아이템인 것 같습니다. 단지 수입 면에 있어서 경쟁력을 갖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죠. 우선은 이곳이 근로시설이니까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전문적인 아이템을 개발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익모델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고민 중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보호작업장에서 제조작업을 계획하고 있는데 지역경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관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생산해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또 한가지, 우리마을은 우선 인적자원이 탄탄합니다.
따라서 지역사회나 농협의 마케팅능력을 협조 받아 우리마을에서 생산되는 콩나물을 지역특산물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늘려갈 계획도 세우고 있는 중이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마인드는 우리마을은 장애우 친구들이 주인이 되는 시설이라는 점입니다.
무조건 생산적인 복지의 잣대, 지배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대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독립생활을 하는 것만이 재활의 성공이고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사고방식이 참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애우는 소외 계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생산해내는 하나가 비장애우들이 생산해내는 열 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장애우 근로시설의 가치가 인정된다면 이를 사회에서 뒷받침해주는 시스템이 사회적 진정한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의 이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라고 강조했다.
실질적인 삶은 타전이 되는 우리마을을 만들자.
현재 근로시설 기준상에는 기숙사 지원이 없기 때문에 학부모님들이 일부 기숙사생활비를 부담하는데 기숙사생활을 하는 사람은 월 290,000원, 통근을 하는 사람은 월 41,000원을 내고 있다. 우리마을은 앞으로 시설을 대규모화하기보다 소규모 단위의 독립생활공간들을 늘려 가면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우리마을 작업장을 직장의 개념으로 출, 퇴근하는 시스템을 갖출 예정이다. 우리마을이 장기거주 형태의 모습을 띠면 수용시설의 계속적인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종 부모님들 중에는 장애우 시설이 수용시설이라는 편견을 지우지 못해서인지 자녀들이 우리마을에서 장기거주 하기를 원하시는 분들도 많다고 한다. 이때마다 허용구 신부는 부모님들에게 우리마을의 설립 취지를 설명하고 이곳은 학생들의 종착역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허용구 신부는 "우리마을에서는 3년~ 5년 정도 머무르고 그 다음 우리 친구들이 갈 수 있는 종착역을 만들자 생각하고 있어요. 예를 들면 그룹홈 형태의 장기거주동을 만드는 것인데 현재는 세 가지 방법의 아이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마을에서 땅은 제공할 테니 부모님들이 건축목적으로 출자를 해서 만드는 것과 인근지역인 온수리의 연립주택을 구입하는 것, 또 한가지는 전셋집을 구하는 것인데, 내년부터 공사에 들어가고 내 후면부터는 우리 친구들이 그룹홈에서 우리마을 작업장으로 출퇴근을 하는 시스템으로 전환될 예정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마을을 닮은 장애우 근로시설이 전국적으로 들어서도록 하는 것이 저희의 생각입니다. 장애우들이 3년에서 5년 동안 훈련을 받은 뒤 또 다른 우리마을로 옮겨가서 평생 취업을 보장받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5년 동안은 장기거주 할 수 있는 준비기간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라면서 외국의 경우 아파트 바로 밑에 장애우 근로시설을 갖춘 곳이 많은데, 우리도 일반인의 인식만 바뀌면 생활 속에 자활시설이 금새 뿌리내릴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허신부의 말속에는 우리마을의 큰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어디 그늘 밑에서 쉬다온 농부처럼 편안하고 땅에서 배운 겸손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 점잖고 조용조용한 품성에서 어쩌면 그렇게 참신하고 좋은 생각들이 샘솟아 나오는지, 항상 눈앞에 넘쳐나는 일들로 때로는 이 일이 귀찮기도 할텐데 어쩌면 우리마을 일이라면 지치지 않고 덤벼들고, 또 맡은 일에 대해서 그렇게 용의주도하게 준비하고 진행하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1998년 서울 중구 정동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성당 앞마당에서 점심시간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에게 날개돋친 듯 팔려나간 "주교님 커피"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마을에는 복음커피를 산 직장인과 후원회원 등 개미군단의 작은 정성이 흙벽돌 한 장의 버팀목 한 토막이 되어 그 꿈의 한자리로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꿈이 함께 담겨 있는 우리마을. 많은 사람들의 희망과 꿈이 담긴 우리 마을이어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마을의 모습을 돌아보고 오는 차안에서 자기 몸의 70%를 항상 몸 속에 담가두고 있다는 남극의 빙산을 떠올려 봤다. 우리마을은 짧은 시간동안 살펴보고 돌아온 눈에 보이는 몇몇 가지 운영 모습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물밑에 거대하게 숨어있는 빙산처럼 물밑 힘이 더욱 기대되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경쟁력을 갖추어 보다 빠른 발전된 모습으로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 줄지 사뭇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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