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로운 세기,새로운 여성
본문
여성 지위의 향상을 논의하기 위해 동아시아 8개국 비정부기구 (NGO) 여성단체들이 대만의 타이페이에서 ‘새로운 세기, 새로운 여성’ 이라는 주제로 ‘4차 동아시아 여성포럼’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나는 주제는 커녕 우리 나라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여성인권이 어느 위치에 있고 또한 동아시아 국가 중 어떤 나라들이 참여하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사전정보에 희박했다. 게다가 나는 중증청각장애우라서 참가여부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작년의 한·일 장애우교류대회에서의 좋은 경험이 어디를 가나 내 이웃이고 고향일거라고 생각하는 열린 의식을 가지게 했고, 또한 지역에서의 활동도 정책에서부터 심도 있고 효율적으로 계획할 수 있기 위해서는 넓은 세상을 접하고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과감히 참가 신청을 했다. 함께 동반한 수화통역사 겸 홍보부장이 처음 외국에 간다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덩달아 소풍가는 느낌이 들었다.
본부의 배려로 포럼 시작 사흘 전에 대만에 도착하여 호텔에 큰 짐을 맡기고 가벼운 배낭차림으로 기차여행을 떠났다. 차보다 많은 일상용 오토바이가 자동차 앞줄에서 나란히 신호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을 하며, 서울과 부산, 청주, 천안 등지에서 함께 모인 여덟 명의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식구들은 양쪽 목발을 짚고 높은 이층버스를 오르내리다 넘어지면서도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두 영어를 쓰는 탓에 수화통역도 무의미해져 애써 무언가를 들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차창을 통해 보이는 광활한 바다와 파란 하늘이 보통때보다 훨씬 더 가슴 설레게 했다. 피곤함에 졸리려 하다가도 환한 자연의 경치가 자연스럽게 졸린 눈을 뜨게 했다.
기차여행을 마치고 이번엔 경비행기를 타고 자연을 감상했다. 많은 사람이 험난한 산을 닦아 길 만든다고 깔려 태노각 협곡과 대리석 계곡을 지나갔을 때는 나는 숨을 내쉬는 날숨에 주력하고 들숨은 자제했다. 왜냐면 석회질 투성이의 산이라 산소가 희박하여 폐에 해로운 기운이 가득하고, 흐르는 물조차 내리는 비에 의해 석회질이 벗겨져 진한 회색빛깔이기에 별로 쳐다보고 싶지 않은 암울한 기를 주었기 때문이다.
높고 깊은 산이라 할지언정 맑은 산소와 천년을 가는 나무가 없는 계곡이어서 별로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작은 동산이라 할 지언정 맑은 공기와 향긋한 들풀이 있는 곳이면 머물고 싶듯이 인간도 높은 학식과 부와 권위가 있다한들 그 심성안에 맑고 늘 푸른 자연같이 꾸미지 않는 겸손한 마음이 깃들지 않는다면 이 산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
관광프로그램의 하나로 어린 청소년들이 경쾌하고 일정하며 안정된 리듬으로 춤을 추고, 결혼의식과 제사의 모습을 표현한 아미족민족쇼도 관객들 모두가 하나가 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 꽤 매력있었다.
드디어 제4차 동아시아 여성포럼의 개막식이 열렸다. 개막식에서는 오리엔테이션을 비롯, 기조강연, 국가·지역별 발표 등 전체적인 동아시아 여성포럼의 내용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두 번째 날에는 여성과 개발, 인권, 정치 참여, 교육, 건강, 문화, 환경, 청년 포럼등 8개의 이슈를 다루는 워크숍이 열렸고 각 회원국들의 불평등 상황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8개의 워크숍 중 나는 인권과 교육의 관련된 내용에 관심을 두고 참여했고, 내 수화통역사의 관심사는 환경이라 환경 워크숍에 참여하는 바람에 약간 불편함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유익한 시간이었다.
전체회의장에서는 주로 인터넷을 활용한 정보통신을 통한 여성지위향상에 대한 내용으로 토론을 했고, 처음 참가한 티벳은 미국, 중국, 인도 등 강대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심각한 여성인권 유린상황을 고발해 동아시아여성포럼에 참가한 사람들을 일깨웠다. 아마도 티벳의 힘없는 비영리여성단체와 소외여성국가의 현실, 그리고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현 실정과 너무나도 흡사해서였는지 모른다.
한국은 주최측인 대만에 이어서 했는데, 한지현 원불교여성회장을 대표로 해서 육십명에 가까운 전국의 여성단체임원들이 참가했고, 한국여성장애인연합의 우리들은 본회의 이예자회장님과 사무국장의 정보입수와 적극적인 활동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성장애우들은 장애우 이전에 여성이고, 여성으로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여성 이전에 장애우라는 먼저 생각이 들 만큼 식사, 교통, 숙박 등의 문제에서 전혀 배려가 없었다. 특히 가정폭력-이건 심각한 인권유린이다-에 의한 장애발생 빈도도 높아짐에 따라 여성과 장애, 장애와 인권, 여성과 인권은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주최측에서는 준비위원회부터 여성장애우를 참여시켜 식사와 교통 그리고 숙박에 이르기까지 편의시설을 배려해 준비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아시아회원국들의 인권의 불평등을 논하는 국제포럼답게 여성장애우에 대한 참여기회와 행동반경의 평등부터 실천해야 한다고 본다.
포럼이 끝나고 그곳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야시장을 돌면서 늘씬한 미녀가 큰 뱀을 목에 감고 생사탕이 좋다고 외치는 가운데 번들번들거리는 느끼한 표정들과 비위에 탁한 냄새와 포르노기구를 공개적으로 파는 상가는 살아가는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였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면들을 서로 인정하면서 시장에 버젓이 내놓고 살테면 사고 말테면 말라, 는 식은 좋게 보면 대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복과 오덕을 내리는 배불뚝 미륵조사와 주위를 온통 향내음으로 진동하게 하는 용산사에서의 육진오온의 무상한 삶의 길에 대자대비로 중생을 모든 고난에서 구하는 관세음보살의 원조를 만나고서는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원만히 조화시켜 나가는 이 민족의 느긋한 원천이 어디서 나오는지 조금 느껴졌다.
차창을 내다보는 것은 참 즐거웠다. 왜냐면 서예가인 나로서는 모든 간판이며 벽에 쓰인 글씨가 종횡으로 참으로 자유롭고 파격적이게 재미있기도 하면서도 기품이 있는 것도 있고 호방한 것도 있고 글씨체도 다양했기 때문이다.
서예가 고급문화로 편중되어 있고 종으로만 쓰는 것을 아직 고집하고 있는 우리실정에서 나는 서예의 서민화 대중성을 지향하고 어떤 구도이든 간에 마음에 평안히 닿는 것을 좋아하기에 실용적인 붓글씨들이 참 반가웠던 것이다. 더구나 국립고궁박물원에서의 문화감각을 키워주는 관람은 유익했지만 역사속에 사라진 인물인 왕희지나 저수량의 글씨를 공부한 입장에서 그 인물들인 사용한 흔적이 뚜렷한 벼루를 접한 것은 문화란 정말 시공을 초월한 것이란데 더욱 확신을 가지고 행복하였다.
다음 포럼개최지는 삼년 후에 홍콩으로 정해졌고, 우리 여성장애우들은 좀 더 영어실력을 키울 것과 여성현안문제에 심도 있게 공부할 것을 다짐했다. 폐막식 날에는 총통부인의 치사와 기자회견이 있었는데 부인이 휠체어여성장애우라 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또 활동하는 마음을 장애라는 이유로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 기품있는 모습의 부인이 고맙다고 느꼈으나, 부인이 퇴장하자마자 우르르 따라 퇴장한 언론들의 모습에 한국이나, 대만이나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짧지만 여러모로 나에게 유익했던 동아시아여성포럼을 마치고 충북으로 돌아온 나는 우리 단체의 임원들에게 삼년 만기의 적금을 들자고 제의했다. 가급적이면 각국여성운동의 현장과 방법들을 한 눈에 살펴볼 기회가 되는 홍콩에서의 포럼을 위해서 말이다.
우리 땅에 돌아오니 넓고 깨끗해 보이고 공기가 쾌적하고 내리는 빗줄기조차 시원하였다. 청주로 돌아온 밤 열두시가 넘는 시간에 나는 된장찌개를 끓여 열무김치와 밥을 퍼 먹었다.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나서 숨쉬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단잠에 떨어졌다. 배불뚝이 미륵조사의 합죽웃음을 입가에 물고서…….
글/ 이영미 (충북여성장애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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