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지옥의 수용소였다.
본문
지금 장애우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 새로운 세기인 2천년을 맞았지만 장애우 삶은 과거에 비해 과연 얼마나 나아졌나, 장애우들 처지에 심한 회의를 품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8월 5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빗나간 구원의 목자들’이라는 제목 아래 천안 ‘다니엘의집’ 사건을 내보냈다. 장애우들이 구타와 성폭력에 시달리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확인시켜 충격을 준 이 사건은 그런데 또 다른 의미에서 기자에게 참담함을 느끼게 해준 사건이었다.
기자는 정확하게 10년 전 똑같은 사건을 취재해서 보도한 적이 있다. 시설 이름만 영락교회에서 ‘다니엘의집’으로 바뀌었을 뿐 가해자와 피해자가 똑같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비약해서 말하자면 10년 동안 장애우의 열악한 처지는 전혀 변한 게 없다 이렇게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똑같은 사건이 10년이라는 세월을 묵히고 유령처럼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과연 무엇이 잘못돼서 장애우들은 여전히 시설에 수용돼 인간 이하의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일까, 천안 다니엘의집 사건을 다시 추적한다.
10년 전 사건 똑같이 되풀이돼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뭐라고 해야 할까.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황당하다고 해야 할까, 우연인지 몰라도 시기까지 비슷하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1990년 7월 16일 경찰은 천안에서 미인가 장애우시설 영락교회를 운영하던 김성호(가명, 당시 40세) 목사를 장애우 원생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하고 구타한 혐의로 구속했다.
당시 기자는 이 사건을 ‘장애우 추행, 그리고 도처에 널려 있는 인권유린의 덫’이라는 제목 아래 무려 8페이지에 걸쳐 기사화했다. 그때 기자는 이 사건을 취재 보도하면서 김 목사가 구속됐으니까 자동적으로 모든 상황은 끝난 줄 알았다. 기자가 말하는 상황의 끝은 인권유린이 벌어졌던 시설이 해체되는 걸 의미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시설은 없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장소에 존재했고 가해자인 김 목사도 곧 풀려나와 재기에 성공했음이 이번에 밝혀졌다. 그래서 기자는 사건을 기사화한 후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해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된 점에 대해 심한 자책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러난 장애우의 공적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장애우들을 인권유린의 사각지대에 방치한 장애계의 무기력함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도대체 지난 10년 동안 천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장애를 가졌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시설에 수용됐던 가련한 장애우들에게 어떤 가혹한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단언하지만 이번 사건은 10년 전 사건의 재판(再板)에 다름아니다. 시간을 거꾸로 10년 전으로 되돌려 당시 기사화됐던 기록을 살펴보면 이번 사건과 10년 전 사건과의 유사성에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먼저 10년 전 사건 기록을 들춰보기로 한다.
우선 성폭행 부분, 10년 전 당시 주 피해자는 영락교회에 수용돼 있던 지체장애우 이경희(가명, 당시 21세)씨 였다. 경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가해자인 김 목사는 목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쇼파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강제로 키스하고 ○○를 만져서 애무하고 그녀를 일으켜 세워서 뒤로 밀어 바닥에 눕혀놓고 하의를 벗긴 후 그녀의 몸 위에 올라가 1회 성교하여 간음한 것을 비롯, 같은 해 11월 2일부터 같은 해 4월 까지 매일 밤 11시 경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으로 각 1회씩 그녀를 간음하고……’ 이런 식으로 집중적으로 성폭행했다.
그런데 당시 기자가 만난 경희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 목사에게 당한 장애우는 경희 씨 말고 또 있다. 정신지체장애우인 장모(당시 19세)씨도 김 목사에게 추행을 당해 장 씨가 경희 씨에게 “목사님이 자꾸만 나랑 몸을 섞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다음은 폭행 부분. 당시 기록을 보면 김 목사는 장애우들이 예배를 드리려 하지 않을 경우나 밖에 나가려고 할 때, 그리고 소변을 가리지 못할 경우 각각 죄목을 정해 20여 대씩을 때렸다고 한다. 장애우들을 때릴 때는 얼굴을 때리면 상처가 나 손님들이 방문해 발견하면 골치 아프다며 머리와 발바닥을 주로 구타한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성폭행 피해자인 경희 씨가 집중적인 폭행을 당했다. 당시 경찰 수사기록에는 ‘경희 양이 피의자와의 성관계를 외부에 발설하였다는 이유로 김 목사가 직경 3센치미터 길이 약 50센치 미터의 나무막대와 주먹과 발로 그녀의 얼굴과 어깨와 팔 허벅지 양발바닥 등 전신을 수십 회 구타해서 그로 인하여 경희 양이 전치 약 4주의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당했다’ 라고 적고 있다.
조금 잔인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친김에 경찰 기록에는 없는, 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경희 씨가 김 목사에게 어떻게 폭행을 당했는지 취재해서 쓴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기사를 옮겨보면 이렇다. ‘90년 6월 22일 오전 10시경 부근 동네에서 영락교회를 다니는 이성애 아주머니가 기도를 하려고 영락교회엘 갔다. 그런데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난데없이 고함 소리가 터져나와 이성애 아주머니는 깜짝 놀라야 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그 고함소리는 김 목사가 경희 양을 다그치는 거친 목소리였다. ‘너 이집사에게 뭐라고 그랬어….’ 잠시 후 경희 양의 방에서는 울부짖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이성애 아주머니는 황급히 경희 양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안에서는 김 목사가 마치 미친 사람처럼 경희 양 가슴을 도려내겠다, 팔 다리를 잘라버리겠다는 등의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하며 몽둥이와 주먹과 발로 경희 양의 전신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있었다.
이성애 아주머니는 김 목사에게 이성을 찾으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희 양이 숨이 꺽꺽 넘어가는데도 김 목사는 때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30분은 족히 넘었을 것이었다. 김 목사의 구타는 경희 양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인하여 팬티에 대변을 누는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자 비로소 멈추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폭력이 가능한지 당시 치를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렇게 김 목사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경희 씨를 당시 김 목사는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주장했다. 과대망상증 환자가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자가 직접 경희 씨를 만나 확인한 바에 의하면 경희 씨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여성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고 시를 쓰는 특출한 취미를 가진 장애우이기도 했다. 그 증거로 기자는 당시 기사에 그녀가 90년 2월 18일에 쓴 ‘봄 비’라는 시 한 편을 전재한 적이 있다.
‘어둠이 개이지 않은 / 정적 어린 새벽/ 창호지 문 밖을/ 똑똑 두드리는 빗소리가 / 명랑하게 들린다 / 메마르고 얼어붙은 대지여/ 드높고 청명한 / 3월의 하늘이 되기 전에 / 어서들 오랫동안 동면하는/ 흙 속과 지상의 / 모든 생명에게 / 소생의 봄이 가까이 다가왔다고/알리려무나’ 이런 시였는데, 시에서 나타나듯 맑은 심성을 가진 경희 씨가 있지도 않은 구타와 성폭력 사실을 조작해서 폭로했다는 것은 백 번 양보해도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관인 것은 김 목사는 경희 씨가 구타와 성폭행 과정에서 반항을 하면 자신이 보호자의 입장에서 ‘널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집안이 부유한 정신지체 장애우 지 아무개 씨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회유를 하곤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10년 전 당시 김 목사는 위에서 열거한 구타와 성폭력 혐의가 인정돼 경찰에 의해 구속됐다. 그러면 시설은 당연히 없어져야 했다.
그런데 시설이 없어지지 않고, 포주가 다시 돌아와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애우 7명 구타와 성폭행 당해
지난 7월 25일 천안 경찰서는 지체와 정신지체 장애우 19명이 수용돼 있는, 예전에는 영락교회였던 천안시 성환읍 소재 다니엘의집 목사 김성호(가명, 50세,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지 않았으니까 가명을 써야 한단다. 김성호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본인이 10년 넘게 목사로 행세해 왔으므로 편의상 김 목사라고 부른다.)를 검거해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성폭력범죄의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 장애인복지법위반, 기부금품모집규제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검거 당시 김 목사는 후원금으로 PC를 통해 주식투자에 열중하다가 은팔찌를 찼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뒤인 8월 5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니엘의집 사건을 방영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따르면 이번 사건이 묻히지 않고 드러날 수 있었던 데에는 자원활동자들의 공이 컸다고 했다. 이 점 역시 10년 전과 똑같다. 10년 전인 90년 6월 20일 영락교회를 방문해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갈 채비를 하던 이정란 씨를 경희 양이 자신의 방으로 불러 들였다.
그런 다음 경희 씨는 “아빠에게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요. 아주머니 돈 가진 거 있으면 조금만 주실래요”라고 부탁했다. 이정란 씨는 3천원을 건네주며 “무슨 일 때문에 전화를 하려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경희 씨는 김 목사에게 당했다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이정란 씨가 무슨 말이냐고 재차 물어 보자 경희 양은 그동안 김 목사가 자신을 강간한 사실을 자세히 털어 놓았고, 이게 10년 전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됐었다.
이번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게 된 과정도 비슷하다. 다니엘의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자원활동을 하던 천안의 한 자원활동단체는 6월 중순 수용돼 있던 장애우들로부터 ‘도와달라,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면 모든 것을 밝히겠다’라는 내용이 쓰여진 쪽지를 받았다. 7월 4일 자원활동자들은 몇몇 원생들을 음식을 사준다며 외부로 데리고 나왔고 장애우들의 충격적인 증언을 녹음했다.
“하도 맞아가지고 머리를 못감을 정도예요. 열시부터 세시까지 다섯시간이나 맞았어요. 오라면 안 갈 수 없잖아요. 매 들고 쫓아오는데 어떻게 안 가요. 걱정이 오늘 들어가면 당장 얼마나 맞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김 목사한테 성폭행을 당했어요.”
만약 이런 장애우들의 증언이 신빙성이 없었다면 자원활동자들은 장애우들의 말을 무시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 이번 사건은 묻혀졌을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절절한 장애우들의 증언은 자원활동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장애우들의 성폭력 증언에 충격을 받은 자원활동자들은 천안 여성의전화에 이 사건을 알렸고, 여성의전화는 경찰에 수사를 의뢰해 이번 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됐다.
지금부터 성도착증 환자로 의심되는 한 빗나간 목자에 의해 장애우들이 어떻게 능욕당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덧붙이자면 김 목사의 범죄 사실을 공개할 지의 여부를 놓고 기자가 무척 고심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찰 수사기록은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겨 놓아, 장애우들이 음지에서 어떻게 짓밟혔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아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주요 범죄 사실을 원문 그대로 공개하기로 했다.
다만 부탁할 것은 아래의 장면들은 미성년자는 절대 열독을 사절해 달라는 것이다.
경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 목사에게 폭행 및 성폭행을 당한 장애우는 모두 7명이다.
먼저 1997년 9월 26일 19시경 정신지체 장애우 전미숙(가명)에게,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사랑해, 라고 하면서 껴안았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있는 힘을 다하여 손바닥을 20여 회 폭행. 또 김 목사의 아버지에게 김 목사가 두러 다닌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손바닥을 1백여 회 머리를 10여 회, 때리고 넘어진 피해자의 머리 어깨 등허리 등을 30여 회 때려 폭행.
1997년 10월 1일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여 갑자기 상의 옷을 헤치고 유방을 주무르고 뒤로 눕게 하여 그녀의 하의를 벗기려해 피해자가 반항을 하자, 가만있어야 매를 안 때린다고 하면서 팬티를 강제로 벗기고 그녀를 성폭행.
6일 후인 7일 같은 방법으로 성폭행. 같은 해 12월 중순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그녀의 머리채를 오른손으로 잡아당겨 자신의 성기에 대고 빨라고 하였는데 빨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어깨를 2회 폭행하고 그녀를 성폭행.
1998년 5월 초순 김 목사는 피해자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내가 미국을 가는데 그동안 못보니까 한 번 하자”고 하여 피해자가 싫다고 하면서 나가려고 하자 등뒤에서 잡아 당겨 쇼파에 강제로 눕히고 그녀를 성폭행.
1999년 5월말 정신지체 장애우 장미경(가명)에게,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운동을 하지 않고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손바닥 종아리 엉덩이 등을 3개월간 각 수회 폭행. 1999년 8월 15일 김 목사는 피해자를 강간한 사실을 김 목사의 부인에게 말하지 말라는 이유로 겁을 주기 위해 그녀의 손바닥을 보일러용 고무호수로 15여 회 폭행.
1997년 6월말, 김 목사는 피해자를 서울 가면서 동행하여 여관방을 1개만 잡고 방안에 강제로 눕히고 그녀의 옷을 강제로 모두 벗기고 그녀의 유방과 음부를 손으로 만지며 애무한 다음 성폭행.
1996년 6월말 뇌성마비 장애우 박성희(가명)에게, 김 목사는 피해자가 동료 장애우 장미경이 김 목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음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피의자에게 어떻게 했길래 미경이가 아프다고 하느냐고 따졌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머리 허벅지 등을 10여 회 폭행.
1999년 6월말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원장은 사모가 있는데 왜 우리 여자방에 수시로 들어오느냐고 따지는 것을 사모가 들었다는 이유로 예배당에 여자 원생들만 모아놓고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때리고, 왜 때리냐고 항의하자 “그럼 네가 대신 맞아라” 하면서 손바닥을 10여 회 폭행.
2000년 3월 초순, 김 목사가 여자방에 들어와 잠을 자고 있는 피해자를 깨워 사무실로 오라고 한 뒤 간사에게 외출을 할 때 피의자의 부인을 데려다 놓고 외출을 하라는 말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이마를 1회 발로 걷어차고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온몸을 수회 폭행.
1998년 9월 중순,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동료 장애우 정 아무개를 시켜 업고 사무실에 데려오게 하여 그녀를 껴안으며 “성희씨, 사랑해서 불렀어요” 하면서 자신의 바지 지퍼를 내려 성기를 꺼내고 빨라고 하자 피해자가 고개를 돌리니까 양손으로 피해자의 머리를 잡아 당겨 성기에 대고 약 5분간 성기를 강제로 빨게 하여 추행.
같은 해 9월말 피의자는 피해자에게 시를 읽으라며 쇼파에 앉혀 놓고 “사랑한다 성희씨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녀의 하의 팬티를 강제로 벗기고 성폭행.
1997년 10월 중순 뇌성마비 장애우 김은실에게, 김 목사가 원생들을 성폭행 하는 것을 피해자가 목격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이르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사무실로 불러 앉혀 놓고 대걸레 자루로 등허리 등 수십 회 폭행.
2000년 2월 4일 김 목사는 피해자를 사무실로 불러 쇼파에 앉혀 놓고 “산부인과 선생들은 아기 낳은 물을 받아먹으니 너는 내 물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하며 자신의 하의 자크를 열고 성기를 꺼내어 피해자의 입에 대고 빨라고 하면서 5분간 강제로 빨게 한 후 사정한 정액을 먹게 하여 추행.
같은 해 7월 9일 김 목사는 피해자가 혼자서 방안에 있는데 들어와 그녀의 하의와 팬티를 강제로 벗기고 그녀를 성폭행. 7월 23일 같은 방법으로 또 성폭행.
1999년 8월 중순 정신지체 장애우 이대준(가명)에게, 김 목사는 피해자가 허락을 받지 않고 원내를 몰래 나갔다가 왔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손바닥과 발바닥을 10여 회 폭행.
2000년 7월 초순, 김 목사는 피해자가 밥을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손바닥 20여 회, 오른쪽 팔뚝을 수회 폭행.
1999년 7월 3일 정신지체 장애우 김희숙(가명)에게, 김 목사는 피해자가 집에 가려고 신발을 감추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방으로 들어와 보일러용 고무호스로 “너 집에 가려면 4백대 맞아야 해”라면서 손바닥과 발바닥을 수십 회 폭행.
1994년 6월 9일, 김 목사는 피해자에게 사무실에 오라고 하여 갔는데 갑자기 그녀의 상의를 잡고 벗기려고 하여 그녀가 양팔로 제지하며 반항하자 손치워 ,라고 하면서 양손을 풀어헤치고 상의를 어깨까지 올리고 브래지어를 위로 올린 후 유방을 수회 주무르고 유방에 입을 대고 유방을 빨아 강제 추행.
1999년 8월 10일 김 목사는 원생 9명과 대천해수욕장에 놀러 갔는데 원장이 수영을 가르쳐 준다며 물 속에서 양손으로 피해자의 가슴을 수 회 주무르는 등 강제 추행.
1999 8월 8일 정신지체 장애우 강명자(가명)에게 김 목사는 주일 예배를 마치고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 그녀의 상의를 벗기며 유방을 만지고 하의 바지와 팬티를 강제로 벗기고 그녀를 성폭행.
1998년 5월부터 2000년 7월까지 위와 같은 방법으로 무려 40회에 걸쳐 성폭행.
3년 후원금이 6억8천만원
이상이 경찰이 밝힌 김 목사의 범죄기록이다. 한 마디로 다니엘의집이 지옥의 수용소였다, 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중요한 것은 지옥의 수용소에서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장애우들이라는 점이다. 단지 장애를 가졌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이렇게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 당하고 성적 노리개로 전락해야 한다는 것은 정말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내친 김에 가해자인 김 목사가 어떤 인물인지 더 추적해 보기로 한다. 이번 사건이 드러나면서 그는 가짜 목사임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그는 천안 지역에서 15년 가깝게 버려진 장애우들을 돌보는 선한 목자로 행세해 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역시 의문이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김 목사는 장애우를 팔아 큰 이익을 챙긴 수완좋은 장사꾼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 하나, 10년 전 취재 기사에는 86년 11월 5일 김 목사가 빚 2천5백만 원을 얻어 시작한 영락교회가 3년이 지난 90년 현재 빚을 모두 청산한 것은 물론 드러난 김 목사의 재산만 해도 5백여 평의 밭과 3천5백만 원 상당의 개인 주택이 있을 정도로 그가 장애우 사업에서 수완을 발휘했음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기록에는 친지 소개로 영락교회에 간사로 취직하기 위해 김 목사를 만났던 박아무개양의 증언이 있다.
“김 목사에게 ‘그러면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겠네요’ 라고 묻자 미국에서 천불도 들어오고 만불도 오고 그러는데 천만 원이 들어오면 유 전도사 주머니에 5백만 원이 들어가고, 자기가 나머지 5백만 원을 갖는다고 그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돈이 많이 들어오는데 왜 수세식 화장실 하나 없이 시설이 초라하냐고 따지듯이 얘기했지요. 그랬더니 김 목사가 뭐랬는지 아세요. ‘이렇게 초라하게 하고 살아야 후원금이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집을 새로 지을 돈이 있어도 일부러 집을 안 짓는다’는 거였어요.”
후원금 모금의 귀재 김 목사, 그 후 10년 동안 그는 장애우를 팔아 얼마를 더 치부했을까.
여기 한 목격자의 증언이 있다. “목사가 교회에 간증을 하러 가면 장애우들이 따라가서 시도 낭송하고, 울면서 간증도 하고 그래요. 그러면 사람들이 감동받아 울면서 그 자리에서 호주머니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후원금으로 내는 거죠.”
김 목사의 수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간증을 하러 다니는 방법뿐만 아니라 다니엘의집 홍보 비디오까지 만들어 국내뿐 아니라 외국 한인교회에 배포하는 적극적인 방법으로 후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홍보 비디오 제목이 ‘시련에서 소망으로, 장애를 넘어 희망을 전하는 사람들’이란다. 이러니 교회에서 김 목사에게 후원금을 보내주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경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최근 3년 동안 김목사 계좌로 들어온 후원금만 해도 7억 원(수사기록에는 명성교회 외 7건, 새문안교회 외 22건, 신반포교회 외 47건 등 주로 내로라하는 큰 교회들이 김 목사에게 후원금을 보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정확하게는 6억8천만원이다.
이 금액에는 그가 국내외 교회로 간증을 다니면서 걷은 후원금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간증을 다니며 직접 걷고, 여기에다 다니엘의집을 직접 방문한 후원자들이 현금으로 기부한 후원금까지 합치면 김 목사가 지난 10년 동안 장애우를 팔아 치부한 후원금이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수십억원?)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장애우 수용시설이 벤처기업?
어쨌든 김 목사가 장애우를 팔아 재벌 부럽지 않은 큰 돈을 벌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 위해 기자는 천안경찰서에 가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를 만났다. 다음은 형사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김 목사가 모금한 후원금이 얼마나 되는가?”
“처음에는 성폭행 부분만 수사를 했다. 그런데 뒤져보니, 시설과 기부금 문제 등 문제가 안 되는게 없었다. 김 목사 개인 계좌를 추적했는데 한 달에 약 2천만 원에서 2천5백만 원 정도가 계좌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돈을 다 어디다 썼느냐고 김 목사에게 물어 보니까 자기 월급이 5백만 원이라고 하더라.
그리고 간사 월급이 1백50만 원, 여기에다 자기 차량유지비, 자기 가족들 생활비, 활동비, 이렇게 쓰는 돈이 한 달에 1천2백만 원 정도라고 했다. 그리고 김 목사는 수용된 장애우 1인당 50만원씩 한 달에 9백만 원을 원생 생활비로 쓴다고 했지만 수사를 해보니 그 돈의 반도 생활비로 안 들어가는 것 같았다.”
“김 목사가 후원금으로 증권 투자를 했다고 하는데?”
“김 목사 본인 말로 증권에 투자한 돈이 3억5천만원이라고 했다. 실제로 우리가 압수수색 하러 갔을 때, 김 목사는 PC를 통해 매도 매수 주문을 내느라고 바쁜 상태였다.”
“김 목사는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김 목사 가족들의 반응은 어떤가?”
“김 목사에게 딸이 두 명 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다니는 딸인데, 아버지를 수갑 채우는데도 아이들이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상식적으로는 아버지를 잡아가면 아이들이 놀래야 하는데 아이들이 마치 아버지의 범죄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담담한 표정을 지어서 오히려 우리가 놀랬다.”
성폭행 하지 않고 추행만 했다고 주장
이렇게 명백하게 범죄사실이 밝혀졌는데도 당연한 일이지만 김 목사는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 목사는 폭행 사실에 대해서는 “체벌을 위해서 매를 들었을 뿐이고, 시설을 운영하기 위해서 장애우들을 때리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강변하고 있다.
성폭행 사실에 대해서는 김 목사 왈, “젊은 사람의 유방이 아름다워 옷을 내리고, 유방을 수회 주무르는 등 추행한 부분은 시인하나, 성폭행 하지는 않았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목사는 결론적으로 “이 모든 일들이 돈을 노린 장애우들의 계획적인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는데 이런 김 목사의 말을 믿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더욱 가관인 것은 김 목사가 선임한 변호사 이 아무개 씨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그는 방송에서 “장애우들은 일반적으로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답니다. 누가 이쪽에서 뭐라고 하면 이쪽으로 쏠리고 또 저쪽에서 뭐라고 하면 저쪽으로 쏠리고… 장애우들은 자기 주관과 소신에 입각해서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앞에서 이렇게 하자고 하면 그렇게 따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도 3명의 주동자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결론적으로 3명의 주동자에 의해서 이번 사건이 조작되고 부풀려졌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변호사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전체 장애우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방송에서 마구 해도 괜찮다고 판단한 것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사건이 외부에 알려진 후 다니엘의집에 수용돼 있던 19명의 장애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가족들이 데려가고 나머지 장애우들은 충남지역 장애우 시설 네 곳에 분산 수용되는 것으로 사건은 막을 내렸다. 정리하면 김 목사는 구속돼서 재판을 앞두고 있고, 장애우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면 이제 이번 사건같은 충격적인 장애우 인권유린 사례는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벌써 피해자 중 정신지체 장애우 장미경, 이대준 씨 두 명 가족이 자발적인지 아니면 김 목사 측근의 협박 때문인지 몰라도 김 목사에 대한 고소를 취하한 상태이다. 나머지 장애우들의 고소도 취하시키기 위해 현재 장애우들이 분산 수용된 시설을 알아내려고 김 목사 측근들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전언이다.
하긴 김 목사는 돈이 많으니까 ‘피해자 가족을 돈으로 회유하면 되겠지’, ‘한 1억원씩 준다고 하면 고소를 취하할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서 또 다시 풀려나와 ‘천안에서는 소문나서 안되니까 이번에는 멀리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 다시 수완을 발휘해 볼까’ 김 목사가 이렇게 생각 안 한다고 누가 보증할까.
10년 전 기자는 김 목사의 범죄를 파헤친 기사 말미에 다음과 같이 썼다.
‘후원금을 받아내기 위해 장애우들을 마치 동물원 원숭이처럼 비장애우들에게 구경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교회를 돌며 장애우를 팔아 비장애우들에게 상대적 우월감을 맛보게 해주는 파행적 행태들, 또한 버젓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후원금의 쓰임 내역이 전혀 밝혀지지 않은 채 인권유린의 덫만 도처에 널려 있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들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감히 누가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어서 이런 질문도 던졌다. ‘장애우가 천국행을 보장해주는 면죄부인가? 나아가 돈을 벌게 해주는 기계인가?’ 기자의 치기어린 이런 질문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효하리라고는 당시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세상이다.
“내 몸에 손대는 게 살기 싫을 정도로 싫고 소름끼쳤어요”
김 목사는 김은실 씨를 사무실로 부르거나 시를 읽게 한다는 핑계로 김은실 씨의 방을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지킬 수도 없었고, 그동안 당한 수모를 말할 수도 없었던 김은실 씨는 고달픈 자신의 처지에 대한 설움을 눈물로 쏟아
이번 사건 취재에서 만난 뇌성마비 장애우 김은실(가명) 씨는 기자와는 구면이었다. 10년 전 사건 당시 기자는 영락교회를 찾아가 그녀를 만난 적이 있다. 그 후 그녀가 다른 시설로 옮겨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당시 김 목사를 고소했던 그녀는 이름만 다니엘의집으로 바꾼 시설에 계속 기거하면서 김 목사로부터 집중적인 구타와 성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해답은 김은실 씨가 김 목사가 장사를 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밑천이었기 때문이다. 김 목사는 교회에 간증을 하러 다닐 때 꼭 김은실 씨를 데리고 다녔다. 간증 말미에 김은실 씨가 다음과 같은 시를 낭송하면 교인들은 울면서 너도 나도 후원금을 내놨다는데, 상상해 보라.
뇌성마비 장애우가 더듬거리며 간절한 목소리로 “걷고 싶어요”라고 울부짖는데 후원금을 내지 않을 교인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김 목사는 감옥에서 나오자 다른 시설에 있던 김은실 씨를 협박해서 강제로 데려왔다.
단 한번만이라도 걷고 싶어요 / 사랑스러운 엄마의 손목을 잡고 / 저 아이들처럼 뛰며 걸으며 / 달려보고 싶어요 / 저 푸른 하늘처럼 넓고 / 넓은 하늘만큼 따뜻하고 포근한 / 엄마의 손목을 잡고 걷고 싶어요 /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모든 것이 없어요 / 걷고 싶어요 / 사랑스러운 동생들의 손목을 잡고 / 저 푸른 들판으로 / 단 한번이라도 뛰며 걸으며/ 나가고 싶어요/ 그러나 내게는 이러한 자유가 없네요.
내게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 내게 손이 없어도 눈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 내게 발이 없어도 귀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 내게 건강이 없어도 지혜가 있음을 감사합니다 / 내게 재물은 없어도 믿음과 사랑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 모든 것 없는 내게 영원함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 내게 없는 것은 바라보지 않고 있는 것으로만 /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단 한 번만이라도 걷는 게 소원이라고 울부짖던 그녀, 그런데 지금 그녀는 걷기는 커녕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간암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 생을 살고 있다.
거기에다 그녀는 부모가 그녀의 사망신고를 하는 바람에 호적도 없다. 대한민국 국민도 아닌 것이다. 이런 그녀를 보면서 이 사회가 장애를 가졌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이토록 사람을 비참하게 전락시켜도 되는 것인지, 심한 울분을 감출 수 없었다.
─ 다니엘의 집에서 생활한지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올해로 14년째 입니다.”
─ 이번 사건을 밝히게 된 동기는.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그냥 덮어두고, 나 한 사람 죽지, 라는 생각으로 죽으려고 했었어요. 감기약과 소주를 섞어 마시면 죽는다는 얘기를 듣고 시도하려고도 했고……. 그런데 나만 당한 게 아니라 같이 지내던 동생들이 같이 당했고, 그래서 이 일을 방치해두면 앞으로도 계속 다른 장애우들이 김 목사에게 당할 것 같았어요. 이게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했지요. 그래서 내가 용기를 내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 그 동안 가장 괴로웠던 점은.
“가족에게까지 버림받고, 사회에서도 무시당한다는 생각 때문에 늘 괴로웠어요. 갇혀 사는 것도 답답했지요. 왜 장애우들끼리는 따로 갇혀서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설사 움직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서 살아야 한다 할지라도 우리도 사람이기 때문에 밖에 나가고도 싶고 사람들도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또 목사에게 성폭행을 당해 괴로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하는 말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이번 사건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도 우리가 말을 해도 믿으려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거기다가 왜 장애우들은 사회에서 말 못하게 하고, 멸시를 하는 건지. 모두가 하나 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말로만 외치고 있지 실제로 장애우들이 어떤 수모와 고통과 멸시를 받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또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요. 다니엘의집에서의 생활도 힘들었지만 사회의 외면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어요.”
─ 다니엘의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가족들이 찾아온 적은 있었나요.
“처음 1년간은 여러 번 왔었어요. 그런데 가족들이 올 때마다 김목사가 돈을 요구하면서 자기가 아니면 누가 나를 보호해주냐면서 협박했대요. 그래서 그 이후로 10년 넘게 있는 동안 두 번 정도 가족들 얼굴을 봤어요.”
─ 김 목사가 어떤 식으로 성폭행 했는지 .
“예를 들면 김 목사가 운동시킨다는 핑계로 여자들을 앉혀놓고, 너희들을 사랑해, 너희들도 나 사랑하지? 하면서 뻔한 대답을 유도해요. 우리가 억지로 사랑한다고 대답을 하면 사랑하니까 해야 한다는 식으로 끌고 가서 추행하고 성폭행하고 그랬어요.”
─ 성폭행 당할 때 느낌은 어땠는지.
“김 목사가 내 몸에 손대는 게 살기 싫을 정도로 싫고 소름끼쳤어요.”
─ 새로 옮겨간 시설은 어때요. 거기서는 잘 지내나요.
“시설은 어디나 다 마찬가지예요. 옮겨간 시설은 인가시설이긴 하지만 시설이 매우 열악하고, 또 갇혀 지내는 것은 매한가지죠. 그리고 힘든 점은 우리가 방송에 나간 이후 시설의 다른 장애우와 자원활동자들이 자기들끼리만 수군거리고, 우리를 잘 상대해주려 하지 않아요. 또 아무리 잊고 잘 지내보려고 해도 꿈에서 김목사가 쫓아와 마구 협박하는 꿈을 꿔서 괴로워요.”
“잘해줘도 불만이고, 못해줘도 불만이에요”
가해자도 할 말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언론은 공정하게 양 쪽의 말을 다 들어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김 목사는 구속돼서 인터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대신 다니엘의집을 찾아 이 아무개 간사를 인터뷰했다. 다니엘의집에 근무한 지 올해로 7년째라는 그녀는 적극적으로 다니엘의집 입장을 변호했다.
─ 이번 사건이 왜 발생했다고 보나.
“지능이 정상적인 장애우는 가능하면 돌보지 말라는 말이 있어요. 항상 말썽을 일으키기 때문이죠, 피해의식도 강하고. 저희 공동체에도 4명이 있는데 여자들이 항상 말썽이었어요. 죄의식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참 잘했어요.
자기들이 생각하는 게 어떤 거짓말을 하든, 말썽을 피우든 우리들을 어떻게 할 것이냐, 막말로 감옥에 넣을 것이냐, 이런 태도였죠. 그랬기 때문에 이번 소동을 일으킨 거죠. 은실이라는 아이가 주동잔데, 늘 그래요 걔는…. 정신지체아이들은 좋은 것, 싫은 것도 모르는데, 조금만 지능이 있다 싶으면 잘해줘도 불만이고, 못해줘도 불만이에요. 일종의 피해의식이죠.”
─ 후원금이 3년 동안 7억 원 가까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들어오면 애들은 전혀 안 먹이나요? 우리 식구가 20명인데……. 6억8천이라는 돈이 어떻게 계산된 거냐면 여러 개 통장에다 넣고 뺀 금액을 합친 액수예요. 경찰에서 그 사실을 말했더니 경찰에서는 확인은 해주지 않고 우리가 다 알아서 뽑아왔다, 우리가 바보냐, 아줌마도 같이 해먹었냐, 라고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였어요. 그래서 삿대질하며 싸웠다니까요”.
─ 김 목사가 평소 교회에 간증을 많이 다녔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다니지는 않았어요. 교회에서 간증 나와주세요, 하면 가는 거죠. 은실이라는 애도 어눌하긴 하지만 말도 잘하고 하니까 데리고 갔고, 이렇게 절차를 거쳐서 간증하러 갔는데 방송에서는 아이들에게 앵벌이라도 시킨 것처럼 표현하고…….”
─ 수용된 장애우들 대다수가 가족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가족들은 안 도와주나.
“우리가 19명을 데리고 있는데, 그 중 4명은 적게는 3만 원에서 많으면 5만 원 정도를 가족들이 보내줘요.”
─ 그러면 나머지 장애우들은 가족들이 버렸다는 말인가.
“여기에 갖다 버린거죠. 가족들이 찾아오기는 해도 가족들 형편이 도와줄 형편이 되지 않아요. 법인시설로 들어가려면 기준이 생활보호대상자나 무연고자, 경우에 따라서는 입주비를 얼마씩 내는 조건으로 들어간다고는 하는데, 우리집에 있는 아이들은 아이를 돌보자니 생계에 위협을 받고, 그렇다고 생활보호대상자는 아닌 집 아이들이 주로 들어와 있었죠.”
─ 김 목사가 가짜 목사로 밝혀진 부분에 대해서는.
“방송국에서 왔을 때 밝혀진 것도 없는 상황에서 피디가 “알아 봤는데 목사가 아니라면서요” 이런 식으로 약 올리니까 성격이 급하신 저의 목사님이 “그래 나 목사 아냐” 라고 대답한 것을 방송이 그 장면만을 편집해서 내보낸 거예요.”
─ 후원금으로 주식투자를 한 부분은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 우리나라는 마치 주식투자를 하면 범법자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데, 은행에 돈을 넣으면 합법이고, 주식에 넣으면 불법이라고 그렇게 몰아가고 있잖아요. 우리 목사님이라서가 아니라 저는 주식투자를 하는 것은 범법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우리 시설이 수익을 많이 남기기 위해 은행이자는 싸니까 안정성은 없지만 주식투자를 한 거죠.”
─ 김 목사는 10년 넘게 이곳에 살았으니까 지역사회에 아는 사람들이 많을텐데 뒤를 봐주는 사람들은 없나.
“지금 몇 분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기관이나 그런 곳에 계신 분들하고는 왕래를 거의 하지 않았어요. 얼굴을 익혀두었으면 많은 도움이 되었을텐데. 목사님이 기관 드나들고 기관장 만나는 것을 굉장히 싫어하셨어요.”
─ 김 목사가 구속됐는데 재산 처리는 어떻게 할 예정인가.
“이 땅 이 집 모두 장애우들 데리고 있으면서 목사님이 구입하신 거예요. 모두 목사님 개인재산이죠.”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방송국과 경찰에서는 이번 기회에 미인가시설 다 싹 쓸어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데, 그래서 제가 그랬죠. 우리는 장애우들 모두 데려다 방송국 마당에 풀어놓겠다. 니네들이 알아서 보호해 달라 그랬어요.”
“실컷 두들겨 패놓고 또 그걸 하는 거예요"
다니엘의집에서 김 목사에게 당한 장애우 중 뇌성마비 장애우 박성희(가명) 씨의 생생한 육성을 듣기로 한다. 참고로 이 인터뷰는 천안 여성의전화에서 김 목사 재판 때 증거로 제출하기 위해 직접 박 씨를 만나 녹음한 내용이다.
─ 거기 있은 지 몇 년 정도가 됐죠?
“7년 동안.”
─ 7년 동안 있었어요? 7년 동안 있으면서 목사가 박성희 씨 한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얘기를 좀 해 줄래요?
“엄마가 98년도까지 오다가 98년도 6월에 어느 날 엄마가 아파서 오지를 못하게 됐어요. 그런데 목사가 미국 갔다가 6월에 나왔을 거예요. 어느 날 제가 다니엘의집 바깥에 휠체어 타고 앉아 있었어요. 목사가 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오라고 하는가 갔지요.
마당에서 얘기하다가 나를 바깥에 데리고 나갔어요.(휠체어를 탄 채였으니까) 저는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제가 뭐 힘이 있어요. 안 간다고 반항을 어떻게 해요. 안 그래요? 바깥으로 따라갔어요. 개집 있는 데가 있어요. 그리로 올라갔어요. 올라가서 5시부터 밤 9시까지 나를 달래는 거예요.”
─ 강간했어요?
“아니 달래는 거예요. 나를 살살 달래면서 난 박성희 씨를 사랑한다고 하고, 박성희 씨 밖에 없다고 하고 그러면서 박성희는 할 수 있어, 그러는데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가 몰랐어요.
‘박성희는 할 수 있어, 다 할 수 있어. 박성희, 목사님 소원 들어줄래?’ 그래요. 그래서 제가 무슨 소원을 들어줘요, 그랬어요. 그러면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그랬어요. 그랬는데 진짜 숫처녀를 이렇게 만들은 거예요, 숫처녀를 갖다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 그 날 성폭행을 했어요?
“아니 그 때 약속을 하고 그 해 추석에 점심을 먹고 애들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목사가 와서 나를 불러요. 부르는데 안 갈 수가 있어요?”
─ 그렇죠. 누가 데리고 갔어요?
“정○○ 이가 나를 사무실에 업어다 놓고 나왔어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으니까 목사가 내 뒤로 와 갖고 꼭 껴안는 거야, ‘박성희, 사랑해 사랑해’ 하면서, 사무실에 동그란 의자가 있어요. 자기는 거기 앉아서 자크를 내리는 거예요.”
─ 목사가 자기 바지 자크를 내렸어?
“예 자크를 내려놓고 고추를 내놓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입으로 빨라고… 안 하려고 했는데 자기 걸 갖다 이렇게 여기다 대는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하는 수 없지 어떻게 해요? 내가 못 이기니까 그래 갖고 할 수 없이…”
─ 그런 다음 어떻게 했어요?
“정액을 먹었죠. 먹으래요. 그걸 먹으면 건강하데요. 그거 먹으면 건강하고 뭐 그거 먹으면 약 보다 더 건강하다나 그래서 먹었죠. 또 그때부터 한 2주 있다가 시 읽기를 연습하라고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갔지요. 또 어떻게 안 가요 또 갔지.”
─ 그때도 정○○ 이가 데려다 주고?
“예. 데려다 줘서 갔는데 그 때부터 옷 벗기고 쇼파에다 눕혀 놓고.”
─ 옷을 목사가 다 벗겼어요?
“예.”
─ 그러고서?
“내놓고 아주 했지.”
─ 주로 사무실에서 그런 거예요?
“방에서 하다가 아니면 사무실서 하다가, 우리 방에서도 많이 했어요.”
─ 목사가 주로 밤에 그랬겠네요?
“낮에도 하고 밤에 할 때도 있고, 그리고 실컷 때려놓고 하는 거예요.”
─ 왜 때려요?
“내가 쭉 얘기할게요. 왜 때리냐면 작년 6월달 이에요. 장미경(가명) 이란 애가 있어요. 그 애를 우리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라고.”
─ 목사가?
“사무실 직원이 잠깐 나간 사이에 장미경을 데리고 우리 방으로 몰래 들어가더라고요. 눈치 챘죠. 내가 당했는데 눈치를 안 채요. 눈치 채고 가만히 있었어요. 가만히 있는데 장미경이라는 애가 자꾸 아프다고 하더라구요. 자꾸 아프다고 해서 어디가 아프냐고 물어 보니까 밑에가 아프대요 그러면서 걔가 막 울어요.”
─ 목사가 왔다 간 다음에 울었어요?
“예 막 울어요. 왜 우니 그러니까 밑에가 아프다고. 밑에가 왜 아프니 그러니까 목사 고추가 들어갔다고 나보고 분명히 얘기했어요. 그래서 목사가 우리 방 창문 앞으로 오길래 목사님 미경이가 아프데요. 목사님이 어떻게 했길래 얘가 아프나요, 그랬어요. 그랬더니 목사가 막 몽둥이를 들고 와서 때리더라고 나를 막 때리더라구요. 그런 소리한다고.”
─ 그랬구나.
"때리길래 막 휠체어 타고 도망 나오려고 하는데 막 몽둥이 갖고 때리는 거야. 몽둥이로 때리더니 그 옆에 방으로 막 끌고 들어가. 들어가더니 막 아무 데나 머리를 두드려 패는 거야 니가 무슨 상관인데 왜 니가 그러냐고 막 두들겨 패는 거야. 그때 점심때가 됐어요. 점심 먹고 나오는데 목사가 너 방에 있어, 이러더라구. 너 방에 가서 꼼짝 말고 있으라, 고 그래서 방에 가 있었죠. 방에 가 있었더니 들어와 갖고 꼬치꼬치 그런 소리 왜 했냐고 묻고 그러더니 또 강간을 한 거야, 또 한 거예요. 실컷 두들겨 패놓고 또 한 거야.”
─ 너무 아팠을 것 같애
“실컷 두들겨 맞고 막 울고 앉아 있는데 분해 갖고 울고 앉아 있는데 그걸 하는 거예요.”
─ 진정하고 다른 얘기 물어 볼게요. 목사가 어떤 방법으로 다니엘 식구들을 통해서 돈을 벌었어요?
“매일 매일 신문같이 만들어요. 신문같이 만들어서 그걸 접어가지고 전국적으로 다 부쳐요.”
─ 광고예요?
“후원금을 요구하는 광고물을 부쳐요. 거기다가 영수증 있어요. 그거까지 다 넣어가지고 부쳐요. 그거 부치면 돈이 오는 거야.”
─ 지금 저한데 또 더 얘기할 말은 없어요?
“호스로 때렸어요. 호스 두 개 갖고 때려.”
─ 상처 났을 거 아니예요?
“멍들고, 멍이 다 들고.”
─ 병원 갔어요?
“내가 약 바르죠. 한 번도 안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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