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굶어죽기 싫어 지뢰밭 개간한 거요”
본문
한국에서 비무장지대와 인접해 있는 시・군은 모두 10개, 읍・면 모두 43개에 달한다. 그 중 민통선 내에 위치하고 있거나 밖에 있더라도 지뢰지역(미확인지역 포함)에 인접해 있는 마을을 읍・면당 2~3개씩만 쳐도 얼추 1백여 개가 넘어간다.
한국 대인지뢰대책회의(KCBL・이하 대책회의)에서는 그 중 6개 마을의 지뢰 피해자들을 면담한 후 1차 자료집을 제작했다. 피해자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실태조사를 하면서 생생한 증언을 들었던 한상진 씨의 글을 소개한다.
강원도 철원지역에서는 철원읍 대마리와 김화읍 생창리의 두 마을을 망문했었다. 생창리 지역은 인구가 총 5백여명 정도 되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60년대 중후반, 단 한 평의 땅이라도 아쉬웠던 박정희 정부를 비무장지대 인근의 광활한 지뢰밭을 생각해 내고는 지뢰밭을 개간할 민간인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전문가가 아닌 민간인들이 지뢰밭을 개간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익히 알고 있던 정부는 민간인들에게 지뢰사고가 나도 정부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쓰게 하였고, 당시 지독한 가난을 경험했던 주민들은 굶어 죽으나 지뢰밟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그러다가 혹시 살아남으면 내 땅 한평이라도 가질 수 잇다는 기대로 각서를 써주면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뢰사고에 책임묻지 않는다는 각서 요구
그렇게 발생하기 시작한 지뢰 피해자 수가 생창리에만 25명, 마을 주민의 5%에 이르는 숫자이다. 이 마을에서 대책회의 실태조사팀은 지뢰 피해자중 생존자는 한 사람도 만날 수는 없었다. 지뢰로 부상을 입게 되면 가난하던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어렵게 마련한 논밭을 팔아서 치료비를 충당하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어 마을을 떠나버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대전차 지뢰 피해자가 많아서 사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면담한 사망자 가족들의 생활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들에게는 경제적 어려움에 정신적 고통까지 겹쳐서 더욱 힘들게들 살고 있었다. 34살의 젊은 나이에 지뢰사고로 남편이 죽자 얼마간의 정부보상금을 타낼 수 있었던 운 좋은 젊은 미망인은 눈물이 글썽한채 “자식들이 있는데 그래도 살아야죠?” 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또 형이 지뢰사고로 죽자 형수가 재가를 해 버려서 어머님과 함께 쌍둥이 조카를 키웠다는 한 젊은 가장은 형의 산산조각난 주검을 아버지가 한 조각 한 조각 가슴에 품어다 묻고서 이내 앓다가 돌아가셔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에서 아들이 지뢰사고로 11살 때 죽었다는 어느 노부부도 만났다.
특히 기억나는 사례는 11살 나이에 친구와 함께 배고파서 산열매를 따먹으러 산에 올라갔다가 지뢰를 밟아 발목이 절단된 33세 청년이었다. 그는 그 마을이 싫어서 다른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조사나간 우리 대책회의측 사람들을 완강히 거부해 그의 아버지만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들을 만나봐야 도움도 되자 않고 괜히 사진만 찍어가지 자신들한테 돌아오는게 있느냐면서 면담을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후로도 2번이나 더 지뢰를 밟았으나 가벼운 부상만을 당해서 불사신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같이 사고를 당했던 친구는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그 죄책감에 아직도 그 친구의 부모님을 보면 피해버린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지뢰사고가 더 이상 피해자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웃간의 관계마저 단절시키는 마을의 문제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느껴졌다.
생창리에서 우리는 지뢰사고가 같은 장소에서 두 번이나 났었다는 초등학교 옆 공터를 찾아갔었다. 두 번의 지뢰 사고 이후 초등학교는 옮겨가고 대전차 지뢰에 산산조각이 난 트랙터의 잔해가 아직도 나뒹굴고 잇었다.
매년 지뢰피해자 추모식 가지는 대마리 지역
철원군의 또 다른 지뢰사고지역인 철원읍 대마리 지역에서는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을 비교적 많이 만날 수 있었다. 먼저 노인회장을 면담해, 마을의 간단한 역사와 함께 전반적인 마을의 상황을 들었다. 이 마을 역시 입주가 시작된 지는 약 30여 년이 흘렀으며, 현재 마을의 인구는 약 9백여명, 그중 지뢰 피해자는 얼추 사오십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수가 워낙 많고 오래 돼서 정확한 숫자를 기억할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매년 마을 입주 기념식 때 지역구 국회의원까지 참석하는 지뢰 피해자 추모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 피해자의 규모를 짐작할 뿐이었다.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62년 쿠바 인근 해역에서 미국과 소련이 출돌(이 사건은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과 소련의 후르시초프 수상 사이에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했을 때 당시 군 대대장이던 노인회장이 지뢰 2만여 발을 매설했으며, 아직도 지뢰 피해자가 발생하면 자신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진 생존해 있는 몇몇 지뢰 피해자들과의 면담. 지뢰 사고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겪은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가정이 깨지거나 깨질 뻔 한 이야기들, 가슴 아팠던 것 중 하나는 사진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우리의 요청에 며느리가 볼까봐 주방문을 닫고 방문까지 걸어 잠근 다음에야 의족을 떼고 사진 촬영에 응하던 한 피해자의 모습이었다.
또 다른 한 피해자는 다른 친구들과 놀러가면 항상 혼자 소외되 피해자들끼리만 어울리게 된다고 했다. “술 한잔 들어가면 우리가 나이 들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같이 약 먹고 죽기로 약속을 하고 한다. 이런 모습으로 가족들에게 짐이 되면서까지 살 수는 없지 않느냐?”라는 말이 가슴을 쳤다.
우리가 만났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개간 초기에 마을 터를 닦거나 밭을 개간하기 위해 지뢰를 직접 제거하다가 다친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생창리와 마찬가지로 사고가 나도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쓰고 입주했기 때문에 정부에 배상을 청구한다는 건 엄두도 내지도 못하면서,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이들이 갖고 있는 좌절감과 피해의식은 한 피해자의 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만약 우리가 국가 배상을 청구한다면 정부는 ‘정책에 문제가 있었다. 그 정책을 폐지한다. 그러나 지뢰지역의 주민들을 모두 내보내라’고 이야기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된다면 팔다리를 잃어가면서 까지 일구어놨던 땅들을 모두 뺏기고, 부상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마을에서 쫒겨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배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이들은 이렇게 정부에 대한 매우 골깊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도 그럴것이 정부가 개간 후 분양을 철석같이 약속해서 땅 한 평 얻기 위해 목숨걸고 개간했는데, 땅의 원 소유주들이 나타나서 소유권을 주장하고 설상가상으로 사기꾼들까지 나타나 마을 주민들을 유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중재에 나선 정부는 “자본주의국가에서 문서상 소유자가 소유권을 주장하니 다른 방법이 없다. 명을 원 소유주한테 되사든지 아니면 소작을 부쳐라”라는 대답만을 되풀이했던 것이다.
목숨걸고 개간해 최고쌀 짓는다는 자부심
“그 유명한 철원쌀 중에서도 우리 대마리 쌀이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목숨걸고 지뢰밭 일구어 우리는 최고의 쌀을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농사꾼으로서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던 게 필자에게는 그나마 조금의 위안이 되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한 피해자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가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귓전을 맴돈다. “우리 마을에는 두 개의 군 사단이 걸쳐 있다. 하나는 5사단이고 다른 하나는 6사단이다. 5사단 지역에 있는 지뢰는 우리 손으로 모두 제거를 했다. 하지만 6사단 지역에는 아직도 약 2백만평의 지뢰밭이 남아있다. 그 땅을 개간하게 해달라고 국회의원을 통해서 까지 청원을 했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다. 서울가면 높은 사람들한테 힘 좀 써서 그 땅을 개간할 수 있도록 해달라. 우리가 장애를 갖게 된 것도 한스러운데 그 비극을 우리 자손들한테까지 물려줄 수는 없지 않나? 지뢰 제거는 우리가 전문가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이 지뢰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후손들만은 이런 비극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가난도 그 이유 중 하나였지만 단 한 치라도 고향과 가까운 데서 살고 싶어 이주해 들어간 실향민들이 대부분인 그들이기에, 분단의 아픔을 이중으로 겪고 있는 그들을 생각하면 하루 빨리 통일이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
글/ 한상진 (바하이한국공동체 총무)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