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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중지에 대한 국가의 부당한 질문을 거부하기

인권이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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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태죄 폐지 촉구 '검은시위' (자료제공; 페이스북 페미당당)

장애인은 태어나지 말아야 하는가?

정부는 의료법 시행령에 낙태죄를 포함시켰다. 여성들에게 정말 임신과 출산, 임신중지의 결정권한이 있는가? 국가가 어떤 경우에 애를 낳으라고 강요하고 어떤 사람에게 애를 낳지 마라고 하는지 되짚어보면 답은 나온다.

‘비도덕적 진료 행위’ 항목에 모자보건법 14조 1항을 위반하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포함시켰다. 형법에 이미 ‘낙태죄’가 존재하지만 정부가 의료법으로 임신중절 시술을 한 의사를 처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임에 따라, 임신한 여성들은 다른 결정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게다가 산부인과 의사들도 “개정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입법예고 기간이 끝나는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시술 중단에 나서겠다”고 해, 여성이 불건강한 시술을 받을 위험은 높아지고 있다. 인권교육을 하면서 종종 하는 말이 사회적 소수자란 부당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받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질문을 소수자에게 하거나, 또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있는 질문을 함으로써 해당 집단이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장애인에게 “집에 있지, 힘들게 왜 나왔어?”라든가, 청소년에게 “공부할 시간도 없을 텐데 무엇 하러 이런 걸 배우냐?” 같은 질문이다. 흔하게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일일이 답변하기도 힘들 뿐더러, 왜 이런 질문을 던지냐고 근본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비장애인이나 비청소년에게는 던지지 않았을 질문들이 장애인이나 청소년들의 생활을 어떻게 죄여 오는지 살펴봐야 한다.

정부가 ‘낙태죄’를 강화함에 따라, 여성들에게 쏟아지는 부당한 질문들은 더 거세질 것이다. 사실 낙태라는 말은 ‘애를 떨어뜨려 죽인다’라는 표현으로 이미 부정적 판단이 들어가 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임신중지나 재생산권이라는 표현을 써왔다. 그동안 여성들의 임신중지에 대해 이기적이라거나 손쉽게 결정한다는 부당한 질문들이 난무했다. 그러나 어떤 여성도 마음 편하고 자유롭게 임신중절 시술을 하지 않는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23명의 여성을 인터뷰하고 내린 결론이라며 쓴 글인 <당신이 생각하는 ‘낙태’는 없다>라는 제목에도 잘 드러난다. 임신중절 수술을 한 여성들에게 성적으로 문란해서 임신하고서도 책임을지지 않는다거나 냉혈한이라 생명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임신중절의 경험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기혼여성이었고, 성관계 시 피임 거부(콘돔미착용)는 상대 남성이 하거나 여성들이 성별화된 성문화 규범(콘돔을 신경 쓰는 자장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에 얽매여 적극적으로 남성에게 콘돔 사용을 제안하지 못 하곤 한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수술 이후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거나, 임신중절 수술을 권하는 상대 남성(남편이나 애인)에게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도 언제나 부당한 질문은 여성에게 향해진다.

 

연결된 재생산의 과정을 단면으로 단절시키는 국가

부당한 질문에 맞선 싸움으로 여성인권은 나아졌고(여전히 부족하지만! 상대적으로!) 권리에 대한 명칭도 분명해졌다. 임신, 임신중지와 출산에 대한 권리, 즉 재생산권이라는 명명이 그렇다. 한국도 가입돼 있는 여성차별철폐협약에도 뒤에 여성의 재생산권은 구체화됐다. 1994년 유엔 인구 및 개발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여성이 출산의 자기 결정, 성과 출산에 있어서 양성평등 원리의 중요성, 재생산 건강의 권리 실현 등이 논의됐고, 1995년 여성차별철폐협약 베이징 행동강령에서 재생산권이 명시됐다. 행동강령 전문에서는 여성 건강의 모든 측면, 특히 출산을 조정하는 그들의 권리에 대한 명확한 인식과 재확인은 여성의 힘을 증진하는 데 근본적인 것이라고 밝히며, 여성과 건강 분야에서 여성 자신의 출산력을 조절할 수 있는 재생산 자기결정의 권리 그리고 재생산 건강에 대한 권리는 여성 인권으로 보장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생산건강권이란 재생산의 영역에서 주체적인 의사결정자가 될 것과, 안전하고 효과적인 공공의 재생산 서비스에 접근을 확보하는 것이다.<낙태에 대한 여성의 인식과 태도>- 김도경, 허윤주, 2013.

한 사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삶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의 고리이기에 잘라서 다룰 수 없다.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것도 그렇다. 그런데 여성의 임신중절 수술을 낙태죄로 처벌하는 나라에서는 이를 하나의 연결된 흐름으로서 보지 않는다. 출산에는 관여하되 양육에는 책임지지 않는다! 여성이 임신중지를 할지 출산을 할지 결정할 때 국가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여성이 여러 사회적 개인적 조건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하는 임신 중지에 대해서 국가는 인정하지 않는다. 여성에게 양육을 거의 맡기는 국가임에도 말이다. 임신할 때도 신경 쓰지 않던 나라가, 출산 이후 양육에는 제대로 된 사회적 돌봄시스템도 마련하지 않는 국가는 고무줄 같은 잣대(어떤 시기에는 낳는다고 핀잔을 주다가 어떤 때는 낳지 않으면 처벌한다)를 여성에게 들이댄다. 얼마나 기울어진 제도인가. 여성을 동등하지 않은 인권의 주체로 여기지 않고서는, 그저 출산이 가능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제도다.

 

누구를 살게 할 것인가, 삶을 좌우하는 인구정치

그런데 지금 한국정부는 아직도 여성을 애 낳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것도 국가가 애 낳기를 허용하는 한에서 말이다. 최근 정부는 저출산 대책으로써 출산을 강요하고 있다. 임신도, 임신중지도, 출산도 개인의 삶과 깊게 연결된 흐름이기에 당사자의 결정이 중요하지만, 그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임신을 하면 자동으로 엄마가 되는 것인양 출산을 강요한다.

그런데 국가권력은 여성의 몸에 대한 통제만이 아니라 인구정치를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권력을 행사했다. 모자보건법 14조(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1항은 ‘임신부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로 장애인차별적 조항을 두고 있다. 장애인은 출산을 금기시하도록 종용하고 있다.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 “장애아의 낙태는 불가피하다”고 발언해서 장애계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는 푸코가 말한 생명권력의 작동을 보여준다. 생명권력은 누구를 살게 하고 누구를 죽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일종의 인종주의의 외양을 띈다.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되는 자들의 재생산과정을 통제하거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구증가율은 통제된다. 장애인은 태어나서 안 될 존재로 되거나, 장애인은 임신을 해서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일본식민지시대 때 소록도에 있는 한센인들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애인시설에서 장애인들에게 강제로 불임수술을 한 것도 이에 해당한다.

인구정치는 장애인에 대한 통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주아동에 대한 권리가 매우 제한적인 한국에서, 이주노동자 부부가 아이를 낳는 것은 억제되거나 신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는 이주아동에 대한 출생등록제도가 없어, 이주노동자가 자녀를 낳았어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다. 보편적 출생등록제도가 아니어서, 외국국적의 아동이나 미등록이주노동자의 아동은 존재 자체가 부인된다. 출생 등록이 되지 않으니 교육권도 건강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렇듯 누가 태어날 권리가 있는지, 누가 재생산 과정에서 보호받는지는 인종, 계급, 장애 여부에 따라 국가는 통제한다. 사회가 원하는 종류의 인간이 있고 그에 맞는 경우에는 애를 낳아야 한다.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해

장애여성의 재생산권 확보를 위해서는 좀 더 많은 것들이 이야기돼야 한다.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 장애여성과 상대남성과의 권력관계(그가 비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장애인이라는 위계관계까지), 장애여성이 속한 가족제도, 장애여성의 경제력 확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가치판단 등이 서로 넘나들기도 하고 중첩되면서 재생산권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오래 전 여자선배가 임신중절 수술을 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그 선배의 나이는 좀 많았다. 병원에서 태아의 장애가능성이 높다며 수술을 권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합리적 선택으로 이해했던 거 같다. 왜 장애인을 낳으면 안 되는지, 장애인은 살아가면 안 되는지 등을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한국처럼 장애인의 권리가 제한되고 차별이 횡행한 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도 힘들 것이므로, 아이를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여긴 거 같다. 돌이켜보면 장애인은 아예 사회에 태어나서는 안 될 존재로 확정짓는 게 아닌가. 모자보건법 14조 1항은 ‘장애는 무서운 것, 피해야 하는 것, 나에게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인식을 준다. 장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사회적으로 구성한다.

장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속에서 장애아를 낳은 엄마들이 심한 죄책감을 지니는 것은 수순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 엄마야>(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오월의 봄, 2016)를 쓰면서 만났던 발달장애자녀를 둔 엄마들이 겪었던 죄책감-자책감의 서사는 이렇듯 개인에게 비롯되는 게 아니라 사회가 낳은 것이다. 게다가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유전적 결함이 있다거나 임신 중에서 임산부가 관리를 잘못한 탓이라는 비난 속에서,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죄책감은 더 커졌다.

장애여성의 재생산권은 단지 출산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개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장애여성들이 고민하는 것 중의 하나가 애를 낳을 수 있냐는 것이다. 장애여성에 대한 편견 가득한 “애는 낳겠어?”라는 부당한 질문은 당사자들에게 두 방향의 결과를 강제하곤 한다. 때로는 장애여성의 여성성을 증명하는 무언가로 여겨지게 만들고, 애를 낳아야 한다는 당위로 연결된다. 때로는 애를 낳고 싶은 욕망이 거세된 장애여성이 욕망을 제한하거나 회피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나 파트너와 어떤 관계를 맺을까에 영향을 미친다. 적극적으로 결혼을 고민하기도 하고 꺼려하기도 하며, 섹스를 두려워하기도 한다.

장애여성의 온전한 재생산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많다. 국가가 특정 국민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특정 인간만을 태어나게 하려 하는 현실에서 여성 내 차이를 살피면서 여성의 재생산권을 확보하기 위해 풀어야 할 과제는 많다. 그런데 지금 여성들이 내야 할 목소리는 분명해 보인다. 출산과 양육을 분리한 국가가 여성의 재생산권을 ‘낙태죄’의 강화로 침해하려 하기 때문이다. 함께 소리를 모을 때다. 여성을 ‘낙태죄’로 처벌하는 대신,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조건들을 변화시켜라. 여성의 임신중지를 단서조항 없이 법적으로 보장하라.

 

 

작성자글.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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