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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데, 없어요” 점자형 선거공보, 시각장애인 유권자의 권리는?

지금 우리 제도는 - ②

본문

 
 
 
대한민국은 장애인이 살아가기에 얼마나 좋은 나라인가? 장애인에 대한 복지서비스가 정말 잘 되고 있는가? 장애인을 위한 제도도 분명히 존재하고 계속 나아지고 있다지만, 선뜻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거의 없을지도 모르는 이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함께걸음>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를 시작한다. <지금, 우리 제도는>이라는 연재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분명히 제도는 존재하지만 정작 장애인이 가진 장애에 맞춰진 제도가 아닌, 제도에 장애인이 맞춰져야 하는 현실을 하나씩 파헤쳐 나간다.
 
 
 
점자형 선거공보 = 무용지물(無用之物): 존재만 할 뿐 결국 쓸모없는 물건
박OO(25)씨의 할아버지 A(83) 씨는 5년 전 건강검진을 받고 시각장애 1급을 판정받았다. 젊은 시절 시력 때문에 훈련소 생활만 마치고 군 면제 판정을 받았을 정도로 시력이 나빴다. 평소 안경을 착용해오다 최근 노안으로 인해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고 장애 판정까지 받았다. 신체 노화로 인해 서서히 찾아온 장애이기에 A 씨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A 씨는 시각장애 판정을 받은 후 치러진 몇 차례 선거를 겪으면서 불편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박OO “지금은 물건을 지정된 자리에 두지 않으면 못 찾을 정도로 시력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항상 가는 길, 하는 것 외에 생활반경도 좁아졌고요.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시니까 그런 제약에 대해서 조금 답답하고 불편한 것은 있지만 큰 피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으시거든요. 선거는 거의 4~5년에 한 번씩 찾아오니까 장애 판정을 받고 나서 처음 있었던 선거에서 잘 안 보이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크게 느끼신 거예요.”
 
박 씨는 2018년 6월 13일 치러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평소와는 다른 선거 공보를 받았다. 길이 27cm에 너비 19cm, 무게 약 1kg에 두께 7cm의 두꺼운 종이 뭉치. 바로 ‘점자형 선거공보’이다. 난생처음 보는 두꺼운 선거공보에 할아버지의 시각장애 판정이 현실로 다가왔고 이내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었다고 한다.
 
박OO “이게 뭔가 싶었죠. 저희 할아버지는 점자를 전혀 모르시거든요. 당연히 인제와서 점자를 배워야겠다는 생각도 없으시고요. 사용법도 모르는 점자형 선거 공보가 시스템상으로 ‘시각장애인’이라고 등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냥 온 건데, 따지고 보면 저희한텐 그냥 쓰레기에요. 아무래도 자원 낭비가 가장 신경 쓰이죠. 분리 배출해서 버리기도 번거롭고요. 후보마다 한글파일, 영상파일이 담긴 USB도 동봉되어 왔는데, 저희 할아버지는 USB 사용법 역시 전혀 모르시거든요. 사용도 못 하는데 ‘이걸 왜 보내는 거지?’ 싶었어요. 그렇다고 이걸 전화해서 일일이 보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좀 애매해요. 일괄적으로 행정처리 해서 보내는 걸 텐데 그쪽에서도 일이 더 늘 것 같고···.”
 
여기에는 두 가지 편견이 내포되어 있다. 첫 번째는 모든 시각장애인 유권자가 점자를 읽을 수 있다는 편견이다. 서울시가 제작·배포한 영상('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 8가지 장애유형별 교육.홍보 영상)에 따르면 실제로 시각장애인 중 점자 해독이 가능한 비율은 5.2%에 불과하다. 두 번째는 모든 시각장애인 유권자가 USB와 같은 이동식 저장매체 사용에 익숙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다.
 
그저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점자로 된 선거 공보를 일괄적으로 발송하는 것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다. 점자형 선거 공보와 USB 제공만으로는 시각장애를 가진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충분히 충족시키지 못하며, 자원은 자원대로 낭비된다. 쓸모없는 선거 공보에 대한 처리도 장애인 유권자의 몫이 된다.
 
녹색연합의 보도자료(2022.02.13.)에 따르면, 약 2주간 선거 홍보를 위해 발생되는 CO2의 양은 총 28,084톤으로 이는 일회용 컵 약 5억 4천만 개를 사용한 것과 같다. 20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7,312톤의 CO2가 쓰였으며, 제 7회 지방선거 홍보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20,772톤으로 30년 된 소나무 2,282,637그루가 1년 동안 흡수해야 하는 양과 동일하다. 우편발송 요금만 191억 원 이상에 달한다.
 
 
누군가는 점자형 선거 공보를 사용하니 괜찮다?
물론 점자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상황이 다른 것도 아니다. 점자 해독이 가능한 전맹 시각장애인 이OO(25)씨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이OO “점자형 홍보물이 제대로 제작되면 괜찮은데 부분 부분으로 제작되거나 내용이 누락되거나 등등의 사유로 부정확한 공보물인 경우가 많아요. 앞부분만 부각하고 후면은 생략한다던지 일부 내용만 발췌해서 제공했죠. 그래서 차라리 USB 홍보물이 접근하기 더 편한 것 같아요. 점자 홍보물은 다 보고 버려야 하는 환경오염 문제도 있고요. USB로 데이지(DAISY) 형태 또는 점자파일, 텍스트파일 이런 식으로 제공해주면 점자 가독이 가능한 시각장애인이든 가독이 불가한 시각장애인이든 관계없이 활용도 되고 USB도 후에는 포맷해서 다른 용도로도 활용할 수 있으니까 더 좋지 않을까요.”
 
현행 공직선거법이 개정되기 전 점자형 선거공보는 책자형 선거공보와 동일한 작성 면수를 지정하고 있었다. 대통령 선거는 16면, 국회의원 및 지방자치단체 선거는 12면, 지방의회선거는 8면이 그 예이다. 점자로 표기될 경우 일반 텍스트에 비해 같은 지면에 담을 수 있는 내용이 더 적다 보니 점자형 책자 제작과정에서 제작자의 판단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공략을 누락시키는 등 동일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게도 동일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의 취지에 따라 한 차례 개정이 추진되어 책자형 선거공보 면수의 2배 이내인 최대 32면(대통령 선거 공보)까지 늘릴 수 있도록 개편되었다.
 
여전히 최대 면수가 2배 이내로 제한된 배경에는 과도한 선거 비용을 방지하고 인쇄업자들이 최대 수익을 내기 위해 책자형 선거공보에는 없는 내용을 기재하거나 임의로 문단을 나누는 등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시각장애인협회 2022년 언론보도 자료에 따르면, 여전히 점자형 선거공보의 내용을 축소하거나 일부 인쇄업자들이 32면을 다 채우기 위해 책자형에는 없는 내용을 기재하는 등의 문제가 모니터링 결과 파악됐다. 오타 및 점자 규정에 맞지 않는 내용도 다수 발견됐다.
▲ 한국시각장애인협협회에서 제공한 모니터링 자료.  
 
 
 
 
대표적인 예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점자형 공보 검수 결과 4페이지에서는 '내일을 바꿀 대통령 윤석열은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7페이지 '두 가지는 지키고 싶습니다' 14~15페이지 '윤석열이 내일을 바꾸는 10대 약속' 역시 통으로 생략되어 있다.
 
 
문제는 점자형 선거 공보뿐만이 아니다
USB 형태로 선거 공보를 제공한 경우에도 정작 USB 표면에 점자표기를 누락하여 컴퓨터 연결 후 파일을 일일이 열어봐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시각장애인 유권자에겐 어느 후보의 저장매체인지 알 수 없는 랜덤박스인 셈이다.
 
점자나 USB 형태의 자료를 아예 제공하지 않는 후보들도 있다. 현행법상 장애인 유권자에게 정당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후보자 편의에 따라 선거공보 매체를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행 공직선거법 제65조 제4항에서는 대통령, 지역구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후보자가 시각장애인을 위해 점자형 공보물을 작성, 제출하거나 그 내용을 음성, 점자로 확인할 수 있는 QR 코드 등을 책자에 표시하도록 의무화한다. 점자나 USB 형태의 공보물이 아니더라도 책자형 공보물에 QR 코드를 표기하여 대체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책자 내 QR 코드 위치를 점자로 표기하지 않아 시각장애인 유권자가 대체 QR 코드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문제가 제기된 바 있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이 시각장애인 선거 공보물 제출 현황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선거공보를 제대로 제출한 후보는 14명 중 단 3명에 불과하다.
 
 
모든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아는 것도 음성파일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노화로 인해 시각장애를 얻은 유권자가 아니어도 문제는 존재한다. 유년 시절 시각장애가 생긴 최OO(36)씨 역시 점자 해독을 못 한다. 저시력에 청각장애까지 있는 그는 점자나 음성변환 파일보다는 텍스트 형식으로 제공되는 파일이 가장 이용하기 편하다. 문제는 책자형 선거공보도 후보마다 기호와 공약 내용이 적힌 책자의 레이아웃, 서체 크기와 종류, 색깔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인 정보라고 할 수 있는 후보자의 이름과 기호 표시도 후보마다 위치와 내용이 제각각이다.
 
최OO “저처럼 저시력 시각장애인의 경우 종이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후보마다 기호와 이름의 위치, 글씨체가 다 다른 점이 불편해요. 위치 배치가 다 다르기 때문에 공약을 먼저 읽은 다음 어느 후보의 공약인지 알게 된 경우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전 후보자의 공약과 혼동되기도 하고요. 투표하려면 그 후보가 ‘기호 몇 번’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숫자가 어디에 있는지 못 찾아서 좀 헤매야 했어요. 저시력 시각장애인이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후보마다 기호, 이름 위치 등 어느 정도 공통된 규격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 제도상으로는 그저 시각장애인이면 점자로 된 것과 변환 파일을 우편으로 보내주면서 다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비치니까 시각장애인이 선거 후보들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공직선거법 제6조 1항에서는 유권자의 선거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선거권자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점자형 선거공보가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거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정보 전달과 유권자 편의에 맞춰 활용될 수 있는 형태로 제공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제도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각장애인 유권자의 권리 행사에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개선이 필요하다.
 
 
 
작성자이은지 기자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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