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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가장 낮은 자세로 남을 섬기면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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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낮은 자세로 남을 섬기면서” 
                       - 종암동의 ‘늘푸른 공동체’ 사람들 -
전과와 장애라는 이중의 시련을 딛고 늘 푸른 삶을 꿈꾸는 장애우들이 있다. 서울 종암동 지하 셋방에서 늘푸른선교회를 운영하며 공동체 생활을 하는 다섯 명의 장애우들, 이중 공동체를 만든 최길오씨는 거의 삼십 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어둠의 자식이었다. 이제 새 삶을 소망하며 남은 생을 소외된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늘푸른 사람들 네 명의 사연을 들어본다.
이태곤 (함께걸음 기자)

<1 이야기 하나, 최길오>
 마흔여섯 살이라는 나이 흔히 이야기하듯이 불혹의 나이이다. 불혹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따르면 부질없이 망설이거나 무엇에 마음이 홀리지 아니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남들은 어느정도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여유있는 삶을 설계할 그 나이에 지난 삶을 지우고 다시 삶을 시작해야만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는 한 장애우가 있다. 소아마비 장애우 최길오씨, 그는 믿기지 않겠지만 별(전과)이 스물일곱 개이고 무려 이십팔 년을 교도소에 갇혀 지내야 했던 먹빛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최길오는 이렇게 참회한다. “나는 인간 쓰레기였으며, 있어서는 안될 존재였다.”고, 이제는 돌아온 탕자처럼 그 방황의 날들에 진저리치며 늘푸른 언덕에 정착한 최길오. 그의 어두운 삶은 전북 고창에서 시작된다.
 최길오는 두 살 때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친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의붓아버지 밑에서 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최길오는 의붓아버지의 학대에 못 이겨 열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가출을 결심한다. 최길오가 전주 역전 노상에서 배를 곯으며 노숙을 시작한 것은 최길오 나이 열두 살 때였는데 최길오는 곧 “나를 따라오면 먹여주고 재워주겠다.”는 어느 청년을 따라나섰고 청년이 최길오를 데려간 곳은 철둑 너머 노송동 허름한 무허가 하숙집이었다.
 그곳에 붙잡혀 최길오는 껌팔이를 해야 했다. 돈을 벌어오면 대빵(우두머리)에게 다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거의 매일 두들겨 맞고, 그 고생담은 우리가 이런 류의 수기를 접하게 되면 묘사돼 나오는 장면 그대로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최길오는 구타를 당하게 되자 체념하지 않고 앙갚음을 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최길오는 얼마 안되는 돈을 삥쳐(상납하지 않고 몰래 감춰) 대빵 몰래 전주 체육관에 등록하고 밤 시간을 틈타 레슬링을 배웠다.
 마침 발육기에 접어든 최길오의 신체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르게 근육이 발달되어 갔는데,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불편한 다리가 거의 정상에 가깝게 나을 만큼 효과는 눈에 띄게 드러났다. 최길오는 그 재미에 삼년을 체육관에 다녔다. 그러다가 나이 열여섯 살 때 최길오는 전주 신성 카바레에서 기도보조로 일을 하게 됐다. 껌팔이보다는 훨씬 나은 직업이었지만 그러나 춤바람 난 어느 여자를 연탄장사가 바로 최길오 눈앞에서 살해하는 등 험악한 광경을 자주 목격하게 되자 최길오는 미련없이 그 일을 그만뒀다. 그런 다음 의붓아버지가 있는 고향으로 갔다.
 고향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최길오는 한동안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구박이 여전히 그치지 않고 이어지자 다시 집을 나왔다. 정처없이 떠돌며 광주로 가서, 역전에서 얼쩡거리면 잡혀서 다시 껌팔이를 하게될까봐 월산동 쓰레기 하치장을 찾아가 쓰레기더미에서 잠을 자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 고통을 겪으면서 최길오는 전주에 있는 외갓집을 생각해 냈다. 거기가면 뭔가 사는 수가 있겠지. 그래서 최길오는 열차를 쌔벼(무임승차)타고 전주로 갔다.
 물어물어 외갓집을 찾아간 최길오는 외사촌형의 소개로, 외사촌형이 다니고 있던 호남전공사라는 전기공사를 전문으로 하는 조그만 회사에 취직했다. 최길오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비로소 직장 같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자 최길오는 신이 나 부지런히 전기공사 현장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됐을 때 최길오는 서울로 올라왔다. 최길오가 서울로 상경하게 된 것은 외사촌형이 서울에 먼저 취직이 돼서 최길오를 불러 올렸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최길오는 외사촌형 밑에서 계속 전기공 생활을 했다. 낯선 서울 생활이 그렇게 점차 안정이 되면서 최길오에게는 뜻하지 않던 여러 가지 변화가 생겼다. 그중 제일 중요한 변화는 뭐니 뭐니해도 결혼이었다.
 최길오 나이 스물한 살 때 최길오는 먼 친척 조카가 세 들어 사는 연신내 셋방에 놀러갔다가 그 집 주인딸이었던 아내를 만났다. 숫기가 있었던 최길오는 만난 바로 그 날 데이트 신청을 했고 그 데이트 신청을 아내가 될 여자가 받아들여 그 후 두 사람은 영화를 같이 보러 다니고, 서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장래를 약속하게 됐다. 최길오가 결혼에 적극성을 띤 것은 무엇보다 아내 될 여자 집이 재산이 있어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가난한데 저 집은 그래도 집이라도 한 칸 있으니 결혼하면 최소한 굶지는 않겠구나. 그래서 최길오는 자신의 직업을 한국전력공사 직원이라고 속이고 결혼을 서둘렀다.
 수중에 땡전 한 푼 없었던 최길오는 어머니가 논을 팔아 당시 돈 삼만원을 마련해 줘 겨우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올렸지만 문제는 방을 얻을 돈이 없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 결혼 초기부터 처갓집에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고민하고 있는데 아내가 어머니가 가방에 넣어줬다며 육천원을 내놓았다. 최길오는 그 돈으로 현저동 산꼭대기에 허름한 방을 얻고 신혼살림을 들여놓았다.
 최길오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고생의 연속이었다. 직업을 속인 게 탄로나 처갓집에 찾아갈 처지가 못 되었기에 처갓집의 도움은 전혀 받을 수 없었다. 때마침 전기공사일도 비수기라 일을 나가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았다. 수중에 돈은 없는데 먹고 살아야는 하겠고 할 수없이 아내가 파출부로 나섰다. 이런 가난은 최길오로 하여금 세상을 비관하게 한탕주의에 젖어들게 했다.
 최길오가 처음 교도소에 들어간 것은 전주에 있을 때 알게 된 친구의 소개로 정읍 내장산에 있는 한 절의 분규에 가담하면서였다. 당시 최길오는 비구니쪽 동원 폭력배가 되어 대처승을 쫓아내기 위해 싸웠다. 결국 치열한 싸움 끝에 대처승들을 절에서 쫓아내긴 했지만 패싸움 과정에서 사람이 죽기도 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면서 경찰에서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지목해 덜컥 구속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이 일로 최길오는 폭력 전화를 달고 일년 육개월을 교도소에서 살아야 했다.
 꼬박 형기를 채우고 교도소에서 나온 최길오는 수소문해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는 청계천가 조그만 식당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었다. 최길오 말을 빌자면 이런 비참한 아내 모습을 접하게 되자 일이 손에 안잡혔다. 그래서 최길오는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대신 동대문에 있는 무허가 합숙소에서 조바일을 시작했다. 거기서 신문팔이와 구두닦이 등 밑바닥 생활을 하는 소년들의 하루 숙식비로 오원을 받으면서 소년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잔인하게 구타하는, 소위 막걸리 깡패로 한동안을 지냈다.
 그 중간 중간 돈이 떨어지면 최길오는 서대문 적십자혈액원에 가서 매혈을 하기도 했는데 한 번 피를 빼면 그때 돈 일천 삼백 원과 크림빵 하나를 줘서 최길오는 당장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열두 번이나 피를 팔았다. 그래도 또 돈이 떨어지면 최길오는 이번에는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아내를 찾아가서 아내가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번 돈을 빼앗았다. 그 돈으로 술을 먹고 최길오는 애꿎은 세상에다대고 욕을 퍼부었다.
 최길오가 그렇게 밑바닥 생활을 하면서 겪어낸 당시 편력기는 이렇다. 가리봉 오거리 다리밑에 천막을 쳐놓고 공장 다니는 노동자들을 등쳐먹고, 자리를 옮겨 영등포 사창가와 용산역앞 사창가에 진출해서 기둥서방과 인신매매를 일삼으며 지내다 가, 맞고 난 후 들어가기도 하고 때리고 나서 들어가기도 하는 등 수시로 교도소를 들락날락거렸는데 그래도 그 엄혹한 세월을 겪으면서 도둑질만은 하지 않았다는데 최길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하도 많은 징역살이를 하다보니 최길오는 몸이 쇠약해져 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팔십 육년에 결핵 때문에 결핵 병동이 있는 마산교도소로 이감됐는데 거기서 최길오는 세상을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다.
 “허무했어요. 딴 사람은 면회 오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면회 오는 사람이 없잖아요. 부모도 나를 버렸지, 처자식도 나를 버려 버렸지, 찾아오는 사람들은 교인들밖에 없더라고요.”
 그러나 그런 생각도 교도소에 있을 때뿐이었다. 교도소를 나오면 참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최길오의 방탕한 생활은 다시 이어진다. 꼬박 일년 육개월을 살고 마산교도소를 나온 최길오는 다시 아내를 찾아갔다. 아내는 제기동에 있는 피혁공장에 밥해주는 아주머니로 취직해 있었다. 이번에 최길오는 그 모습을 보고 비관하는 대신 아내를 봐서라도 열심히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피혁공장 수위로 취직했다. 그런데 아내가 사촌언니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자 울화통이 치밀어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피혁공장마저 망해 당장 길거리에 나않게 된 상황이 벌어지자 최길오의 절망은 깊어만 갔다.
 최길오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갈 결심을 굳혔다. 당시 정부에서 영세민 지방 이주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이주비로 일백이십만 원을 준다고 해 최길오는 그 돈을 받아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야겠다, 이놈의 서울 징그럽다, 진저리치며 고향으로 내려갈 채비를 했다. 그런데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 되다 보니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최길오의 낙향을 결사반대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결국 이사 가기 이틀 전 아내는 아무런 말도 없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최길오는 속이 상해 가지고 있던 돈으로 술을 다 퍼마셨다. 세간도 팽겨치고 그 날로 종암동 뚝방으로 나와 버렸다.
 뚝에서 난장깐다는 말이 있다. 하늘을 이불삼아 아무데서나 자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비하하는 말로 주로 걸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말하자면 최길오는 본격적으로 걸인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종암동 뚝방에 모인 걸인들은 고물을 주워서 팔아온다든가, 꼬지(동냥)를 한다든가, 껌을 판다든가 해서 돈 몇 푼 벌어오면 막걸리나 소주를 사먹으며 술에 취해 살았다. 미래는 없었고 현재 취하는 것만이 유일한 삶이었기에 역설적이게도 술값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거기서 최길오는 난중 까는 걸인들이 으레 택하는 코스를 거치며 점점 알콜중독자가 되어갔다.
 서울의 경우 걸인들이 옮겨가는 코스는 이렇다. 종암동 뚝방에서 시작하면 보문동 다리밑을 거쳐 용산역과 영등포역 근처에 있는 무허가 하숙집에서 기거하다가 공단오거리까지 진출하며 거기서 다시 서울대 밑 관악산으로 해서 출발지 종암동으로 돌아오면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툭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욕을 하고, 그러다가 시비가 붙어 또 교도소 가고, 이게 최길오의 삶이었다.
 최길오는 육 년여 걸인생활을 했다. 최길오가 최종적으로 교도소에 간 것은 종암동으로 돌아와서 취로사업으로 하천에 쓰레기를 버리지 못하게 하는 일을 맡게 되면서였는데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과 시비가 붙어 폭력으로 이년 사개월 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갔다. 스물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교도소행이었다.
 최길오는 예전과 달리 이번 교도소행에서는 장애우라고 청주 교도소 장애우 감방에 수감됐다. 거기에는 장애우가 오십여 명 가량이 수감돼 있었는데 유독 장기형을 선고받은 장애우들이 많았다. 놀리거나 살고 있던 여자가 도망가면 욱하는 성미에 살인을 해서 들어온 장애우가 많았다. 그곳에서 최길오는 검정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한편 신학공부도 병행했다. 성경을 보면 눈물이 났고 하나님을 믿어야 산다는 생각을 하게 됐단다. 노력한 보람이 있었는지 최길오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 검정고시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신학공부는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했다. 목사들이 찾아와도 최길오는 교도소 내 교회에 나가지 않았는데 왜냐면 목사들의 행태가 말 뿐이지 실천적으로 돌봐주는 목사는 없어 냉랭한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루는 서울 잠원동 늘푸른교회 목사가 찾아와 이야기 끝에 교도소를 나오면 꼭 찾아오라고 연락처를 가르쳐주었다. 최길오는 그 목사에게 호감을 느꼈고 교도소를 나오게 되자 잠원동으로 그 목사를 찾아갔다. 이즈음 최길오는 어머니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았던 터라 남은 생을 노인과 장애우 선교에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던 터였다.
 교회를 찾아간 최길오는 목사에게 교회 청소라도 할 테니까 여기 있으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하지만 교회에는 기거할 거처가 없었다. 갈 곳이 막막해진 최길오는 어느날 종암동 동사무소 사회담당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회담당은 요즘 어디서 자냐고 물어왔다. 최길오는 잘 곳이 만만치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회담당은 방을 얻어 줄테니 이곳으로 오라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래서 최길오는 다시 종암동으로 오게 됐다. 최길오는 동사무소 직원이 얻어준 보증금 일백만원 월세 십삼만 원짜리 셋방에 살면서 역시 동사무소의 배려로 일당 일만 이천 원을 받는 취로사업엘 나갔다.
 그러면서 최길오는 생각하고 있던 봉사활동을 시작하는데 갈 곳이 없어 뚝방에 나와 있는 동네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청주교도소 장애우 감방에서 알게 된 오갈 곳 없는 장애우들의 거처를 마련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모두는 최근에 시작한 일이다. 최길오는 지금 신학대에 입학했고 장애우 네 명과 열네 평 지하 셋방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새 삶을 살고 있다. 가장 낮은 자세로 남을 섬기면서 살겠다는 각오 하나로 최길오는 오늘도 바삐 움직이고 있다.

<2 이야기 둘, 김을동>
 김을동 목사는 지금 육십 이세다. 김을동 목사는 십삼 년 전 당뇨병 합병증을 앓아 장애를 가지게 됐는데 처음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그일 년 후에 두 눈을 실명했다. 그런 다음 다시 사 년 후에 나머지 오른쪽 다리마저 절단해야 했다. 그래서 김을동 목사는 현재 두 다리가 없고 두 눈마저 실명한 매우 심한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다.
 장애를 가지기 전 김을동 목사는 장래가 촉망되는 목회자였는데 부인도 이화여대를 나와 미국유학을 한 재원이었고 자신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지방에서 목회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등 남부럽지 않는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그런데 장애를 가지게 되자 이 모든 것이 뒤틀렸다. 김을동 목사는 부인과 이혼을 하야 했고 아들 하나 있는 것도 남으로 여겨야 했다. 그런 다음 최근까지 광주에 숨어 살다가 우연히 라디오 방송을 듣고 늘푸른 공동체를 알게 돼 서울로 올라와 늘푸른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로 새 삶을 살고 있다.

<3 이야기 셋, 최형배>
 올해 서른한 살인 최형배는 청주 장애우 감방에서 최길오를 알게 돼 늘푸른 공동체에 오게 됐다. 최형배 가족은 지금 모두 다 미국에 이민가 있고 국내에는 없어 최형배는 전과가 말소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최형배는 방위 근무 중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장애우가 됐다. 몸이 수시로 떨려 오는 장애를 가지게 된 최형배는 구십 일년 술을 먹고 충동적으로 강간 사건을 저질러 이년 육개월 형을 선고 받고 최근까지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4 이야기 넷, 채억만>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채억만이 최근까지 생활한 곳은 청송보호감호소이다. 청송에 가기전 채억만은 아는 형이 차린 운명철학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사고를 쳤다. 동생뻘 되는 후배 둘을 데리고 금은방을 턴 것이다. 채억만은 이미동일전과가 네 개 있었다. 그래서 중한 전과가 상습적이면 들어가는 청송감호소에 수감돼 꼬박 십 년을 살아야 했다.
 채억만에게는 가족이 없다. 올해 마흔여섯인 채억만은 서울에서 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거의 대부분의 삶을 거리에서 보내야 했다. 채억만은 자라면서 장애 때문에 설움도 많이 겪어야 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취업이 안돼 구두닦이로 전락한 것이 채억만의 삶을 뒤틀리게 한 원인이었다.
 그래도 채억만은 서울 보광동 버스종점에서 구두를 닦을 때 중매결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여자는 집을 나갔고 절망에 빠진 채억만은 칠십 구년에 한강 철교에 올라가 집 나간 아내를 찾아 달라며 울부짖어야 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지상에 ‘전과자가 도망간 아내 찾아 달라며 한강 철교 올라가’라는 제목으로 기사화 되기도 했다.
 채억만은 청송감호소에서 생활할 때 지원해서 고령자 감방에 들어가 봉사활동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런 참회의 봉사활동은 감호소에서 나와서도 이어져 정처없이 떠돌다가 잠시 정착한 전주에서 한 장애우 시설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채억만은 천성이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성격이라 전주를 떠나 전국을 떠돌아다녔는데 세상이 싫고 육지가 싫어서 목포 우의도에 가서 한동안 새우잡이 배를 탔기도 했다. 속칭 멍텅구리배에서 임금은커녕 목숨이라도 살아나온 게 다행일 정도로 고생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곳이 상일동 상일사우나라는 목욕탕에서 구도를 닦는 일이었다.
 그 일은 수입은 좋았지만 혼자이다 보니 얼마 안가 또다시 싫증이 나 채억만은 그곳을 나와 이번에는 공장을 전전했다. 그러면서 몸이 피곤할 때 생각을 하곤 했다는데 인생에 한번 태어나서 살다가 죽으면 그만인데 내가 이렇게 살 게 아니라 뭔가 좋은 일을 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 끝에 우연히 늘푸른 공동체를 알게 돼 지금 공동체에서 세끼 식사를 짓는 등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장애와 나이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해서 그렇지 사는데 자신은 있다는 것이 채억만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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