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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에 ‘나중에’가 있나- 표심 핑계로 성소수자 인권을 무시하는 대선후보에게

인권이 던진 질문

본문

여러 종류의 개를 키우는 곳에 가면 흔히 보는 풍경이 있다. 진돗개 같은 큰 개들이 밥을 먼저 먹고, ‘나중에’ 바둑이 같은 작은 개들이 눈치를 보며 밥을 먹는다. 동물의 세계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더한 장면도 나온다. 맹수들이 사냥을 하거나 먹을 게 생기면, 그걸 우두머리가 먼저 먹고, 남은 걸 남아 있는 동물들이 ‘서열대로’ 먹는다.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게 있어도 서열대로 먹는다. 사람 입장에서 보면 치사하게 먹을 걸로 그러냐고 할 수도 있지만 ‘힘의 논리’가 팽배한 동물의 세계다.

사람들은 왜 먹을 거 갖고 그러는 걸 보면 욕을 할까? 먹을 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것이므로 먹을 것에 차이를 두는 것은 사람을 모욕하는 일이라 여겨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가치, 인권은 그/녀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가치가 현대사회의 기본적 합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돌아가는 모양새는 힘의 논리가 우선이다.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인권이 보장되지 않고 힘이 있거나 주류인 사람들의 권리(이익)가 우선된다. 정의와 민주주의가 광장에서 울려 퍼지는 2017년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다. 주류가 아닌 사람들의 인권은 ‘나중’으로 밀려난다. 심지어 ‘나중’이 언제가 될지도 주류가 결정한다. 민주주의가 모든 민중이 정치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이라 할 때 이를 민주주의라 부를 수 있을까.

 

표심과 민주주의가 어긋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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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선 후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이와 다르지 않았다. 대선 유력후보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른바 ‘표심’을 잡기 위해 민주주의에 맞섰다. 작년 말부터 광장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면서 우리가 지향했던 세상이 고작 이런 것인가 싶어 씁쓸하다. 무엇이 정의인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물어야 할 때다. 문재인 전 대표는 2월 13일 한국기독교총 연합회(한기총) 등 보수적인 기독교단체를 방문했다. 종교지도자들의 설교 한마디가 신도들의 표를 모으기도 떨어뜨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수기독교단체들이 문 전 대표에게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해 달라”, “차별금지법에 동성애가 포함돼서는 안 된다”고 하자, 그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성소수자가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현행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배제되거나 차별돼서는 안 되도록 규정돼 있으므로, 추가 입법으로 인한 불필요한 논란을 막아야 된다는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며 차별금지법 제정반대 입장을 분명히 피력했다.

나름대로 비난을 면하기 위한 말솜씨를 발휘한 것이라 여길지 몰라도 이는 명백하게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무시한 언사다. 한 사람의 존재가 지지나 반대의 대상이 될 수 없지 않은가. 어느 누구도 이성애자를 지지하지 않지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거나, 장애인을 지지하지 않지만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은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며, 지지하지 않으니 세상에 있어도 없는 듯이 살라는 경고다.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의 대상에서 제외시켜도 되는 존재로 본다는 뜻이다. 이는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운동을 노골적으로 벌여온 극우기독교의 레토릭과 유사하다. 그들은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너희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2월 16일 성소수자인권활동가들은 문 전 대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한 후 그가 페미니스트 선언을 한 포럼에 참석해 물었다. “왜 성평등 정책 안에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는 것인가”라고. 그러나 문 전 대표는 답하지 않았고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연거푸 물었으나 참가한 사람들은 “나중에, 나중에”를 외쳤다.

그들이 말하는 ‘나중에’는 성소수자들을 존엄성을 가진 동등한 존재,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편에서는 인권을 향유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당분간 인권을 유예당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라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평등이며 특권 없음이며 배제 없음이다. 민주주의는 모두가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주체’로서 사회의 향방을 함께 결정하는 것이다.

문재인 지지자나 더불어민주당은 ‘정권교체’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정치적 선택이라고 변명한다. 성소수자 인권에 반대하는, 성소수자를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의 표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식민지시대 정의와 인권에 반하는 일본정부에 붙어살던 친일 부역자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할 것인가. 친일독재 청산이 화두로 다시 떠오른 민주주의 광장에서 외친 것과 이반(離反)되는 일이 아닌가.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반민주적 반인권적 세력의 표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표를 인권친화적으로 바꿔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 정치다. 이는 친일독재를 청산하자고 하면서도 그들의 과거를 문제 삼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표심과 민주주의가 부딪칠 때, 당신은 아니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묻는 일이자 정치는 어떻게 표심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억압적이고 반인권적인 사회규범이 존재할 때 그것을 정당화할 것인가,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한 법을 만들고 관행을 바꾸는 캠페인과 교육을 할 것인가라고. 권력을 택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택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당사자들은 방향을 제시했다. 2월 18일 광화문 광장 무대에서 공연한 성소수자가 말했다. “한 표라도 더 얻겠다고 신념을 팔고 소수자를 외면하는 지도자는 안 나왔으면 좋겠다”고. 민주주의가 그렇듯 표심은 구성된 것이고 구성하는 것이다.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을 높이는 일을 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사회구성원의 인권의식과 감수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평등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에 대한 구상을 제안하고 그 방향으로 사회구성원을 설득해야 하는 것이 정치다. 그런데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정치인이 ‘인권의식 없는’ 표심에 밀려 정치의 방향을 바꾼다면 이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누군가를 배제해야만 성립되는 정치, 그런 민주주의는 필요 없다. 그런 정치권력을 세우려고 박근혜-최순실의 특권에 맞서 거리로 나온 것이 아니다.

 

인권에 ‘나중에’가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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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역사에서 ‘나중에’와 비슷한 오해가 있었다. 자유권은 즉각적으로 보장해야 하지만 사회권은 해당 나라의 경제적 여건에 따라 ‘유보’될 수 있다는 오해다. 신체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 같은 자유권적 권리는 국가나 기업이 침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 즉각적으로 이행하고 복지나 주거권, 교육권, 노동권 같은 사회권적 권리는 돈이 드니 나라의 경제 사정에 따라 보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유예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신체의 자유나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구금시설을 개선하고 도로를 정비해야 하니 비용이 든다. 노동조합 결성과 단체행동권이라는 노동권 보장은 법을 바꾸고 관행을 바꾸면 되니 국가재정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가와 기업은 사회적 권리인 노동권을 침해한다. 국가는 권리를 ‘유예’시키기 위해 ‘나중에’라는 핑계를 대지만 그 근거인 ‘경제력’조차 이렇게 터무니없다.

특히 장애인의 자유권과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돈이 든다.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에서 장애인도 이동의 자유나 교육의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는 재정을 투여해야 한다. 해마다 장애인예산이 얼마나 확충되느냐에 장애인권운동이 관심을 갖는 이유다. 장애인들이 인권보장을 요구하면 국가는 예산이 많이 든다며 회피한다. 기업의 이윤을 위해 세금을 감세할 수는 있어도 장애인인권보장을 위해 법인세를 늘리지는 않는 정치가 지금의 정치다. 그러는 동안 장애인들은 인권을 박탈당한 채 생활할 수밖에 없다. 유예는 박탈이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 돈이 없는가. 우리나라는 세계경제 규모 10위에 드는 경제대국이다. 문제는 기업의 배를 불리고 그에 붙은 정치인들의 호주머니를 채우는 불평등의 정치다. 이 때문에 1997년 유엔 인권전문가들이 모여 경제・사회・ 문화적 권리에 대한 마스트리히드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국가는 사회권 보장을 위해 존중・ 보호・실현의 세 가지 형태의 이행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권리의 향유를 막는 행위를 하지 않는 존중의 의무, 제3자가 인권침해를 하지 않도록 방지하고 보호할 의무,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 적절한 법률・행정・예산・사법 조치를 취할 실현의 의무다.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야마르티아 센은 기후로 인해 기근이 발생한 나라와 기후로 농사를 망쳤지만 기근이 발생하지 않은 나라를 비교했다. 차이는 민주주의였다.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는 식량을 골고루 배급했기에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나중으로 미루려 할 때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고 장애인의 인권을 유예할 때 ‘예산’을 들먹인다. 그러나 그 근거가 얼마나 허약한지 우리는 봤다. 불평등한 사회는 ‘모두’의 인권보다 ‘특정 세력’의 입장을 우선순위에 둔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려 했을 때 가장 반발이 심한 데가 전경련, 경총 등의 기업과 극우기독세력이었다. 이후 법무부는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에 어긋나는 누더기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다가 국내외 인권단체의 비난을 받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차별금지법을 아예 발의하지 않았다. 보수 정권 시기 야당에서 차별금지법을 발의했지만 극우기독세력의 항의에 의원들이 스스로 발의를 철회하는 황당한 일이 일어났다. 이에 유엔 인권기구는 한국정부에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금지를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지속적으로 권고했다. 2008년 유엔인권이사회 국가별 인권상황 정기검토(UPR) 1차 심의부터 2015년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위원회 심의까지 숱하다. 그때마다 정부는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혐오조장세력들이 성소수자 혐오선동을 하도록 돈을 대줬다.

차별금지법은 성소수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만연한 학력차별을 비롯해 성별, 장애, 나이, 출신 국가, 종교 등을 이유로 사회구성원이 차별당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다. 평등한 사회로 한발 내딛는 디딤돌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사회구성원의 인권에 대한 존중・보호・실현의 국가의무를 다 포괄하고 있다. 국가가 사회적 소수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이 혐오세력으로부터 인권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그들의 인권이 평등하게 실현되도록 관행을 정착시키는 법이다. 차별을 용인하는 민주주의는 없다.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나중’이 아니라 ‘당장’ 보장해야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자라면,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표를 구걸하기 위해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저버리고 민주주의를 배반한 정치인은 필요 없다고 외쳐야 한다.

2월 18일 광화문 박근혜 퇴진 집회 무대에 선 성소수자가 물었다. “저는 차별을 받아도 되는 존재입니까?”라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과 연대로 보여줘야 할 때다.

 

작성자글.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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