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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시민입니까?

공원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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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7017조감도 (사진제공. 서울로7017 페이스북)

몇 년 전 한동안 아침마다 공원에 나간 적이 있다. 산책로 벤치에 앉아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고 오곤 했다. 라섹 수술을 했는데 시력이 잘 안 나와 걱정 끝에 자연의 기운을 빌려보기로 마음먹고 실행한 ‘건강비책’이었다. 정말 눈이 좋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음만은 느긋하고 평안해졌다. 안산공원은 작은 산이지만 교통약자 편의시설이 잘 돼 있어 휠체어나 유모차가 다닐 수 있다. 누구나 나무들의 냄새와 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게, 그 동네 주민으로서 은근 자부심이었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를 짓느라 동네마다 공원을 만들 자리가 마땅치 않거나, 있더라도 장애인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 부지기수 아닌가.

 

공원에 들어갈 수 있는 자

생각해보면 ‘누구나’라는 말이 얼마나 희소성이 많은 단어인가 싶다. 누구나 자연을 즐길 수 있는 공원,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은 현실에서 ‘일부’다. 인권운동이 줄기차게 주장한 인권의 보편적 실현은 집 근처의 공원처럼 현실에서 드문 일이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지’ 보장해야 한다는 인권의 보편성은 주체를 제한하거나 특정 시공간에서만 인권을 누리도록 돼 있다. 누구나 인권의 ‘주체’로 들어갈 수 있는 공원이 인권이 보장된 사회일 게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권이라는 말이 등장한 때부터 현재까지 국가는 ‘인권’이 있는 자들과 ‘시민’으로서의 권리가 있는 자들을 구분했다. 인권과 시민으로서의 권리(시민권)를 구분할 때 인권은 ‘실효성이 없는’ 존중, ‘말뿐인’ 존엄에 머문다. 대표적 근대인권선언인 프랑스대혁명 당시의 선언 명칭에도 이는 드러난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속칭 프랑스 인권선언은 인간의 권리와 시민의 권리를 구분했고 시민에 속하지 않은 인간의 존재를 분명히 했다. 자연상태에서 주체(자연권적)인 ‘사람’의 권리와 그 권리를 사회상태에서 행사하는 ‘시민’의 권리를 구분한 것이다.

선언문에는 인권과 시민권을 분명한 문구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언 채택 직후부터 3조에 있는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라 주권을 행사할 구성원을 한정했다. ‘능동시민’(일정한 조세요건을 충족시키는 성인 남자만을 의미)과 ‘수동시민’(여성, 어린이, 외국인 등 ‘공적 시설의 유지에 하등 공헌할 수 없는 자’)으로 나누고 능동시민에게만 참정권을 부여했다. 시민이 될 수 있는 자는 일정한 재산이 있는 백인 남성, 그러니까 능력과 재산이 있는 제3신분인 부르주아들이었다. 결국 모든 인간에게 시민권이 있지 않았다.

 

금지 표시는 없으나 들어갈 수 없는 공원

돈을 내지 않아도, 특정한 자격(나이, 성별 등)을 요구하지 않아도 공원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법률적 자격이 주어졌다고 시민권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의 예처럼 장애인편의시설이 돼 있어 휠체어를 타고도 걸을 수 있는 보행로를 만들지 않았다면 장애인은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 들어갈 수는 없게 된다. 명시적 금지는 아니지만 현실적 금지다.

시민권의 대표적인 권리는 참정권이다. 지난 5월 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전직 대통령이 파면되고 치러진 선거라,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자신의 투표권 행사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새로운 대통령을 직접 뽑아 다른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그런데 장애인들은 기대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처음으로 투표할 수 있던 때는 서른이 넘어서였어요. 엄마의 등에 업혀서 투표장에 갔어요.”

장애인여성활동가의 증언이다. 만 19세면 법적으로 투표권이 있지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녀가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청소년이나 이주민처럼 법적 자격을 주지 않아서가 아니다. 국가가 투표권 행사를 위한 물리적 접근성을 마련하지 않아서 실질적 자격이 박탈된 것이다. 공직선거법에서는 선거인의 투표참여를 촉진하기 위해 장애인과 노약자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지만 장애인이나 노인들은 투표소까지 오기도 어렵고, 투표소 건물에 도착해도 투표할 수 있는 기표소 접근이 쉽지 않다. 투표소를 계단 있는 건물에 둬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들이나 노약자들은 이용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참정권 행사를 할 수 있도록 물리적 접근성이 있는 곳에 투표소를 설치했다면 이러한 권리 제한(박탈)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지인은 투표소에 있는 계단을 보고 황당하고 막막해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본 공무원들이 계단을 통과할 수 있도록 투표소까지 그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마치 친절을 베풀 듯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친절이 불쾌했던 지인은 집으로 돌아왔다. 비장애인처럼 장애인도 도움 없이 투표할 수 있는 곳에 기표소가 설치됐다면 씁쓸하게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친절이 권리보장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

“후보들이 어떤 공약을 냈는지 알 수 없어요.”

정보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아 참정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던 사람들도 있었다. 시각장애인들은 점자로 쓰인 후보들의 공약집이 없어 공약을 비교해볼 수가 없었고, 발달장애인들은 복잡한 내용과 한자식 표현이 많아 누구를 뽑아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공직선거법 65조에는 시각장애인 선거공고문 발행 규정이 있다. 하지만 의무가 아니므로 후보들은 시각장애인 선거공고문을 내지 않아도 된다. 또한 발달장애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제작한 공보물은 거의 없다. 다행히 올해는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선거 공약집이 만들어졌다. 비영리 민간단체인 ‘피치마켓’이 발달장애인의 정보접근성을 높이는 공약집을 출판했다. 큰 글씨체와 간단한 단어, 그리고 한눈에 알아보기 쉬운 그림으로 이뤄진 무료전자책이다. 중앙선관위가 한 것은 선거방법을 쉽게 알려준 동영상 제작이 전부다. 선거용지도 후보 이름 옆에 사진이나 정당마크 등을 넣어 식별하기 쉽게 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인이나 발달장애인은 그저 점치듯이 아무나 찍거나 가까운 사람의 권유대로 투표를 결정해야 하는가.

 

우리는 시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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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참정권이 아니어도 일상적으로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고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장애인은 더 그렇다. 얼마 전 개장한 “서울로7017공원”은 서울시의 자랑이지만 정작 장애인들은 이용하기 어렵다. 화단을 곳곳에 복잡하게 설치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은 통행이 불편하다.

장애인들만이 아니다. ‘서울로7017 이용관리 조례’에 따르면, ‘눕는 행위’나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를 할 경우 경범죄처벌법에 따라 처벌하도록 규정했다. 공원은 공공의 장소다. ‘공공장소’이므로 특정인만 이용할 수 있지 않다. 공공장소인 만큼 누군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고 그곳을 이용하는 누군가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이용했다고 처벌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조례는 악취가 난다거나 눕는다고 경범죄로 처벌하도록 돼 있다. 도대체 악취를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 전날 목욕을 안 한 사람은 아닐 게다. 결국 자의적으로 행색을 보고 지저분해 보이는 사람을 통제할 것이다. 만약 이 조항이 서울역에 많이 생활하고 있는 노숙인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면 더 문제다. 노숙인은 이용할 수 없는 공원으로 만들려는 것일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자꾸 정부에 묻게 된다. 노숙인들은 시민인가 아닌가. 장애인들은 시민인가 아닌가.

“우리는 시민입니까?” 사회적 소수자들이 차별이나 인권침해를 당할 때마다 매번 국가에 묻는 말이다. 누구든지 인권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는 법적 제도적 물리적 장치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형식적인 기회 평등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을, 과정의 평등을 충족할 때 인권은 인권일 수 있다.

한 사회에서 인권보장은 어떠해야 하는지 설명할 때 비유하는 우화가 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다. 여우의 집에 초대된 두루미는 여우가 준 스프를 먹을 수 없다. 스프를 호리병이 아니라 접시에 주었기 때문이다. 두루미의 부리로는 접시의 스프를 먹기 어렵다. 여우가 두루미에게 스프를 먹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주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두고 식사를 대접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여우의 무지든 실수든 결국 두루미는 스프를 먹지 못하니까. 인권도 그렇다. 당사자의 특성에 맞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장된 권리가 아니라면 ‘이름뿐인’ 인권, ‘허울 좋은’ 시민권이 될 수밖에 없다. 동성혼도 그렇다. 우리나라 민법은 동성혼금지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시민권의 하나인 가족구성권이 동성애자에게 보장돼 있다고 말할 수 없다. 2013년 9월 결혼한 김조광수-김승환 게이부부는 서울 서대문구청에 혼인신고를 했지만 구청은 이를 수리하지 않았다. 결국 2014년부터 소송에 들어갔는데 1심 재판부는 구청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남편과 아내, 부모처럼 성을 구별하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혼인은 ‘남녀 간의 결합’을 전제로 한다”고 해석했다. 행정기관인 구청이 거부하고 사법기관인 법원이 그들의 결혼을 부정했다. 동성애자는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도 시민이니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라. 우리도 시민이니 ‘동성결혼’을 보장하라…. 이름 붙이기! 사회적 소수자가 시민권을 보장받기 위한 싸움에서 시작은 박탈된 권리를 구체적으로 명명하는 일이다. 장애인들이 편하게 이동할 수 없기에 ‘장애인 이동권’이라 명명한 것처럼, 동성애자들이 결혼을 통한 가족구성권을 뺏겼기에 ‘동성혼’을 보장하라고 외친다. 권리를 빼앗긴 자는 무엇을 빼앗겼는지, 무엇을 되찾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기에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지금은 공원에서 사라진 권리에 이름을 붙여야 하는 때다. 그래야 정권교체가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지는 작은 다리라도 될 수 있다. 이동의 권리가 없는 공원, 결혼의 권리가 없는 공원보다 모든 사람의 권리가 보장된 공원이 아름답지 않은가. 공원에 여러 크고 작은 나무가 어울려 자라듯이 말이다.

작성자글. 명숙/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cowalk100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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