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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이야기]천상병 시인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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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천상병 선생님 댁을 방문한 것은 91년 11월 초쯤이었다. 살갗에 스며드는 바람이 꽤 매섭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 날의 일은 나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추억이었기에 몇 자 적으려 한다. 일행은 한국 시단의 거목 중의 한 분이신 랑승만 시인과 현대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는 젊은 시인 허남식씨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두 분은 거동이 불편한 분이었다. 랑 선생님은 중풍의 후유증이 다리에 남아있었고, 남식형은 근육병 장애를 갖고 있었다. 세 사람의 만남은 전혀 예정된 바 없는 기묘한 만남이었다. 전부터 친분이 있어 우연히 남식이 형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랑 선생님께서 기자를 대동하고 남식 형을 취재 차 방문했다 간단히 취재를 마치고 술을 좋아하는 두 분은 막걸리를 한 잔 걸쳤다.
 남식이 형이 전혀 엉뚱한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천상병 선생님 댁에 갑시다. 마침 여기서 가까운 의정부이고 또 선생님과는 막역지우니까요."
 그 말을 들으신 랑 선생님께서 "야! 임마 너 미쳤냐. 이 몸을 하고 어딜 가냐. 나 걔 본지 2년도 넘었고 집이 어딘지도 몰라" 하시며 반대하셨다. 그러나 남식 형의 거듭되는 권유에 랑 선생님은 마지못해 하락하셨다.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만 달랑 알아내 무작정 길을 나섰다.
 도봉역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수락산 쪽으로 향했다. 이미 주위가 온통 새까맣게 변한 지 오래여서 앞을 분간키 힘들었다. 어느 정도 왔다 싶어 나는 차에서 내려 전화를 했다. 천 선생님께서 손수 전화를 받으셨다. 그러나 오랜 병마에 시달리신 까닭인지 거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승만이냐, 승만이냐, 빨리 와라"라는 몇 마디뿐이었다. 그러나 선생님 말만 듣고는 도저히 찾아가기가 어려웠다. 할 수 없이 물어물어 찾아가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날은 더 추워졌다. 워낙 인가가 드문 곳이라 사람 만나기도 힘들었고, 문을 두드리고 물어 보아도 천상병이라는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3∼4㎞나 되는 길을 여러 차례 왔다갔다한 탓에 남식 형은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길을 걸을 수 없었고 랑 선생님의 오른쪽 발은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집을 찾기는 고사하고 생사람 잡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1㎞를 나는 남식이 형을 들쳐업고, 랑 선생님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정신 없이 걸었다. 구멍가게에 물어보니 다행히도 집을 알고 있었다. 남식 형을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랑 선생님이 홀로 지팡이를 내딛으면서 걸어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찾았냐. 야! 이건 시베리아 벌판에서 네흐류도프가 카츄사 찾아가는 것 같다." 랑 선생님은 그 와중에서도 농담을 하셨다.
 논 쪽을 10분쯤 걸어가니 논 한가운데에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바로 천상병 시인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었다. 말문이 막혔다 대한민국 최고 서정시인이 사는 집이 그렇게 초라하다니…
 천 선생님의 장모님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급하게 문이 열리면서 "승만이냐! 승만이냐! 잘 왔다. 잘 왔다" 하시며 마냥 즐거워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이 계신 골방은 천정이 있는지 없는지 지붕 서까래가 훤히 보였고, 많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사모님은 "귀천"(천상병 시인의 아내가 운영하는 카페)에 나가셨는지 안 보였다. 여 조카 모습은 옷차림과 분위기가 5·60년대 여성을 연상시켰다. 그리고 방에 놓여진 물건과 분위기가 현대 문병의 이기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벽에 걸려 있는 선생님의 장인어른인 듯한 오래되고 낡은 사진이 그런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었다.
 
오랫동안 못 만난 회포를 푸시는지 두 분 선생님은 서로 부둥켜안고 우셨다. 이미 두 분은 늙으셨지만 옛날 명동시대를 풍미하던 두 문인의 젊은 모습이 상상되었다. 천 선생님은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한 품성을 갖고 계셨다. 비록 몸은 말이 아니었지만 어투와 행동은 때묻지 않은 모습 그 자체였다. 명동시대의 신사 김관식 선생님의 얘기, 명동의 명물인 돌체, 르네상스 다방에서 브라암스와 슈베르트의 음악에 심취했던 얘기 등 나에게는 전혀 감이 안 가는 이야기였지만 두 분의 대화에서 암울했으나 멋을 알았던 우리 문인들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부족치 않았다 갑자기 남식 형이 한숨을 쉬며 한마디 내뱉었다.
 "선생님! 서울상대까지 나오셔서 이게 뭡니까. 차라리 사업을 하셨으면 이렇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시면서 그저 허허 웃으실 뿐이었다. 술로 유명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술 얘기가 안 나올 수 없었다. 그러나 80이 넘은 장모님은 말리셨다. "안돼, 하루에 맥주 2병 이상 주면 안돼. 이번에 진짜 그러면 죽어." 87년에 급성간 경화증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어 매우 조심하시는 모습이었다. 한때 막걸리를 세 사발로 하루 세 끼를 대신했던 술에 대한 일화가 숱하게 많은 분이었지만 아주 먼 옛날의 일화로만 남아 있었다. 특히 맥주 2병만 허락하셨다. 나는 선생님이 손수 따라주시는 술을 받았다. 이런 분한테 술잔을 받을 수 있다니 영광이었다. 넉넉하지도 못한 집에 오래 있기 죄송해서 일찍 나오려 했지만 선생님과 장모님께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붙잡아 저녁 대접을 받고 직접 서명해 주신 시집도 받았다. 아쉽지만 다음에 한번 더 방문할 것을 기약하면서 집을 나왔다.
 그로부터 며칠 후, "부부만세"라는 텔레비전 프로에 두 내외분이 나온 모습을 보았다. 말쑥하게 양복을 입고 나오신 천상병 선생님, 그리고 목순일 여사, 너무 다정하신 모습이었다.
 
"내 오직 소원은 우리 마누라와 함께 저 세상으로 가는 거야."라는 말씀이 잊혀지지 않았는데 얼마 전 선생님의 유고 소식을 접했다. 아쉬웠다. 또 뵐 수 있을까 했는데… 돌아가실 때의 모습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했다 한다.
 천상병 시인은 그저 아는 사람만 만나면 백원만 백원만 해서 "백원만"이라는 아호 아닌 아호로 불리 우기도 했다. 60년대 "동백림 사건"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한 지식인이 폐인이 되어 간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몇 사람이나 될까. "소릉조" 라는 시를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아버지 어머니는/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가지 못한다/저승 가는데도/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가지 못하나/생각느니 아/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지난 5월 28일 아침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천상병 시인은 1930년 일본에서 태어났으며 1949년 시 "강물"로 문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다. 서울상대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시인의 길"을 택한 그는 하루 두 되 막걸리로 끼니를 대신하며 취생몽사로 "시작"에만 몰두했다. 1967년 동백림사건 때 받은 고문으로 극도로 황폐해진 천상병은 1971년 시립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이때 주위 사람들에게 죽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유고시집 <새>를 내는 일화를 낳기도 했다. 천상병 시인을 추모하며 91년도에 천시인을 만났던 기억을 되살려 이현제씨가 글을 보내왔다. 이현제(23)씨는 현재 신구전문대학 1학년에 다니고 있다.
 
글/이현제


 

작성자이현제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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