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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이웃]끝나지 않는 전쟁, ‘고엽제’와 싸우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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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는 전쟁, ‘고엽제’와 싸우는 사람들
월남전이 끝난지 어느덧 열아홉 해. 이제는 기억 저편으로 묻혀져 버린 월남전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월남의 악몽과 씨름하며 하루하루 말라가는 사람들이 있다. 월남의 산과 들뿐 아니라 사람의 목숨마저 말려버리는 고엽제와 소리없는 정쟁을 치르는 32만 월남참전 ‘용사’들의 내일 없는 삶을 만나본다.
오숙민 (함께걸음 기자)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고아나 장애우, 남편이 죽어 혼자 사는 과부, 병에 걸려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가난한 사람들.
 이렇게 따져 보자면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항의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사연들은 개인적인 것이어서 그 억울함의 호소는 서로 상대적일 뿐, 남을 쉽게 설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억울함의 원인제공이 개인을 넘어선 국가에 있고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억울함이 가라앉기는커녕 더 커지고 있다면 그 한풀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름모를 월남병(?)>
 올해 쉰 넷인 허난열씨는 벽을 짚고 단 5분도 서 있을 수도, 걸어 다닐 수도 없는 침대생활을 하고 있다. 말도 글도 잊어버리고 기억력도 희미한 상태로 그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들으며 보훈병원에서 준 이름모를 약을 먹는 게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몸짓이다.
 1967년 베트남에서 2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이동씨와 결혼한 허난열씨는 결혼초부터 점점 심해지는 두통에 진통제 ‘뇌신’을 하루에도 몇 봉씩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두통과 진통제 중독에 시달리던 허씨는 아들이 태어나자 약은 물론 술, 담배도 끊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한 집안의 가장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바지를 입으면 뒷단이 땅에 끌릴 정도로 점점 하체에 힘이 없어지고 걸음걸이가 불안해지던 허씨의 이름모를 증세는 점점 심해져 마침내 87년 남이 보면 이상하다 싶은 행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눈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병명은 말초신경병변증. ‘고엽제 후유증 1급’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던 다른 전우들보다 증세가 더 심한 상태이다.
 미군이 뿌린 ‘약’으로 베트남의 그 울창하던 밀림이 위에서부터 노랗게 서서히 말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작전지역에서 근무를 하고 그물을 떠서 먹기도 했는데 바로 그 ‘약’이 자신을 이토록 괴롭히는 병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유도 모르는 채 병마에 시달리던 허난열씨는 91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전우를 찾아다니던 또 다른 고엽제 피해자 이재랑씨의 노력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영세민에도 올라 오랜 전·월세 생활을 마감하고 지금의 가양동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다행히 94년 1월부터, 정부가 고엽제 후유증 환자에게 해주는 무료치료와 보상금으로 매달 1백 20만 원씩을 받을 수 있게 된 뒤로 예전과 같은 어려움은 없어졌지만 베트남에서 보낸 2년 이후 그의 삶에 이제 더 이상 미래는 없다. 아내 이이동씨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이제 병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언제 다시 악화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루 하루 침대생활이 연장될 뿐이다.

<미래가 없는 사람들>
 이이동(49)씨는 남편 허난열(54)씨가 온 몸이 마비되고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중환자가 되어 병명도 모르는 채 서울 고려병원에서 원광대 한방병원으로 옮겨 다녔던 시절이 생각나는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깨어나지도 못하고, 사람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마비가 되더라고. 팔다리도 그러고 눈도 홀랑 뒤집어지고, 말도 못하고, 고려병원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죽어도 원이나 없게 광주에 이 양반 형님 조카가 있는 원광대 한방병원에 내려간거지. 침을 맞고 사람이 약간 돌아와서 한 달 좀 더 있다가 서울 갈현동으로 돌아왔지. 퇴원한 지 3일만인데 전화가 따르릉 오는 거야. 집 비워내라고, 내가 사정을 막했지. 몇 개월만 봐주면 갚겠다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되더라고요. 이 양반은 이사한다고 그러니까 자기 내버리고 내가 도망가는 줄 알고 울고 불고, 내가 안보이고 왔다 갔다 하고 다니니까 그렇게 울어 쌌더라고요.”
 남편이 가엾고 불쌍해서 그가 눈물을 흘리자 침대에 앉아 얘기를 듣고 있던 허난열씨도 그때가 생각나는지 흑흑거린다.
 아직 한창 나이인 이씨가 침대에만 누워 있는 허난열씨를 보며 살자니 남편이 밉기도 하련만은 이씨는 행여 환자가 있는 집안 분위기가 어두워질까봐 밝은 표정을 짓고, 말도 기억력도 잃어버린 남편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하루 종일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켜두고 있다고 한다. 누가 들어와도 환자가 있는 집이라는 생각이 안들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을 해 놓았다.
 병원비와 생활비가 없어 친척들과 교회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때도, 남편을 병원에 놔두고 식당일을 하러 나갈 때도, 월세돈이 없어 쫓겨 날판에도 남편을 간호해오던 근 8년 동안 이씨는 여지껏 남편이 밉다던가, 짜증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그저 세상에 태어나서 보람있는 일 못하고 누워만 있는 게 너무 안타까울 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참지 못하고 진작 남편을 떠나는 것이 요즈음의 풍속도이고 보면 이씨의 모습은 고엽제 후유증 문제를 대충대충 처리하려는 정부의 형식적인 태도를 붙잡는 강력한 힘일는지 모른다.
 이렇게 허난열씨처럼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이들은 참전군인 32만명의 7~10%인 약 3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거나 죽은 이들도 91년 이후에만도 80여명 가까이 조사되었다.
 그러나 ‘고엽제 후유증’이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91년 ‘파월유공전우회’ 호주 지부장이었던 최영환씨가 베트남전에 고엽제가 사용되었고 이미 호주, 뉴질랜드가 피해보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본국 전우회에 전해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상한 경로를 통해 들어온 소식만큼이나 ‘고엽제’와 ‘고엽제 후유증’ 진상조사와 보상문제에 대해 가해자인 미국측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의 저자세와 철저한 무관심이었다.

<철저한 무관심에 가려져>
 60년대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32만의 군인을 베트남으로 보낼 때, 박정권은 ‘군인들이 베트남전에 참가함으로써 우리 경제를 발전시키는 일익을 담당하고 베트콩과 월맹이라는 공산세력으로부터 베트남을 지키는 것이 곧 분단된 남한을 지키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1965년 10월 15일, 당시 맹호사단 하사로 베트남 퀴논항에 도착하여 전투하던 중 66년 3월 피를 토하며 쓰러진 뒤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기 위해 보훈병원에 입원해 있는 이재랑(50)씨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얘기한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습니다만 저 같은 경우는 월남에 가기 전에도 보직이 좋았습니다. 제가 병장일 때 지원을 했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막 빼갔어요. 밤에 와가지고 막 불러내서 갔는데, 가기 싫어서 탈영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푸른 제복을 입은 군인이라면 전투를 해야 한다. 녹슬은 철조망 안에서 이렇게 빈둥빈둥 날짜만 때우다 제대하느니 목숨을 걸고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어야 살아 돌아온다면 후손들에게 전투 경험담을 얘기할 수 있다. 이런 마음에서 갔지요. 이유야 어떻든 60년대 콩나물국 하나도 제대로 못 먹는 시절에 저희들이 월남에 가갔고 피를 팔아서 이만큼 이 나라를 발전시킨 장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거기서 헐벗고 굶주려가면서 잠 한숨 못자고 모기떼와 싸우면서 돈벌던 장병은 다 죽어가고, 지금도 굶주리고 있는데 거기서 별이나 붙이고 있던 사람들, 정치나 하는 사람들은 월남전이 어떠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씨는 자신들을 총알받이로 이용한 정치가와 군장성들을 성토하다 그만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그의 병명은 ‘만성 폐쇄성 폐질환’ 정부가 인정하는 10개항의 고엽제 후유증 질병에도, 16개의 고엽제후유의증 질병에도 포함되지 않아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있다.
 66년 3월 전투 중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이씨에게 군병원에서는 ‘결핵’ 판정을 내렸고 이씨도 그동안 그렇게 알아만 왔는데 ‘몇 년 살지 못한다.’는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고 또 가족들에게 전염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병이 ‘고엽제’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29년의 투병생활 동안 몸은 야위어갔고 한쪽 폐는 이미 79년쯤에 녹아 없어졌다. 그동안 가난과 죽음의 유혹을 이기면서 살아야겠다는 의지로 버텨온 그는 아무리 해도 병이 낫지 않자 국방부, 보훈처에 칼을 품고 들어가 참전 당시의 병상일지를 찾기 위해 싸우기도 했고 언론기관과 청와대에 호소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겨우 국가유공자 3급 자격을 받은 93년 이후 이씨는 정부가 제공해주는 무료치료 혜택과 한달 50여만원의 연금으로 29년만에 처음 비닐하우스 실세를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지난해 10월에 소생율 30%라는 ‘혈관접합수술’을 받고 다시 일어날 정도로 의연히 버티고 있는 그는 자신의 병이 고엽제 때문이라는 진실을 밝히고, 고엽제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한 명의 전우라도 돕기 위해 서초지회전우회장을 맡아 고엽제와 싸우고 있다.

<‘에이전트 오렌지’>
 그러면 이처럼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고엽제란 뭔가? 약품을 담은 통에 오렌지색띠를 둘러 ‘에이전트 오렌지’라고 불리기도 하는 고엽제는 말 그대로 식물을 말려 죽이는 약품이지만 종류에 따라서는 수많은 인명을 빼앗는 살상무기가 되기 때문에 전쟁에 쓰이기도 한다.
 당시 베트콩의 활동지역인 산림을 제거하기 위해 쓰인 고엽제의 주요성분인 ‘다이옥신’은 청산가리의 2천배가 넘을 정도로 독성이 강해 이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독극물 중 ‘최후의 독약’으로도 불리며 불과 1그램만으로도 2만명 이상을 살상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투하한 다이옥신은 대략 170 킬로그램 정도로 추산되는데 이정도를 쏟아부었다면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64년부터 73년까지 10여년간 베트남전에 미국이 사용한 고엽제는 수백만을 죽음과 질병으로 내몰았고, 특히 베트남에선 고엽제환자의 2세 수십만명이 같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고엽제로 나무가 말라죽은 황량한 땅에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방치되고 있다.
 여기서 잠간 32만의 파월군인을 낳아야 했던 베트남 전쟁을 살펴보는 것은 그 보상의 성격과 책임을 확실히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1945년, 오랜 프랑스의 지배에서 항불투쟁을 했던 베트남 국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독립을 선포했지만 프랑스는 국제 협정을 어기고 다시 재통치를 개시했다. 하지만 다시 프랑스를 물리친 1945년, 베트남은 불행히도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것처럼 17도선 이북에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이남에는 ‘베트남 공화국’으로 양분되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부패했던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남베트남 공화국 국민들의 저항은 계속됐고 여기에 당시의 냉전 분위기에서 동남아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로 1964년 우리의 6. 25 전쟁과 비슷한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당시 쿠데타로 집권하여 미국 등의 외부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강력한 지원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고 뒤따라 올 경제적 이익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한국군 베트남 파병의 배경이었다.
 지금이야 미국을 단순히 우리의 우방이라고 우기지는 않지만 남북대결로 살얼음판 같았던 당시 분위기에서 참전한 군인들 개개인에게 지금 베트남전의 책임을 돌릴 수는 물론 없는 일이다.
 미국이 강력하게 국제사회에 참전지원을 요구했지만 워낙 명분이 없던 전쟁이고 보니 5개국만이 참전을 했고 개중에 한국군이 미국 다음으로 많았다는 사실은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2세까지 잃고 있어>
 어쨌든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패배로 끝났고 32만 파월 한국군인들은 그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 고통을 받아야 했다.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바뀐 91년 이후에야 고엽제 문제는 뒤늦게 사회문제가 되었고 급기야 92년 9월 26일 파월장병 4백여명이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는 사건이 있자 정부는 93년 5월 11일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진료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 법률은 미국의 관련법을 기준으로 고엽제가 확실시 되는 10개의 질병과 고엽제로 추정되는 16개 질병을 정하고 고엽제후유증환자에게는 가족수당을 포함해서 1급 최고 1백 60만원, 6급 최저 31만 8천원의 월 보상금과 무료 치료,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에게는 무료치료만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91년 이후에 세상에 밝혀질 정도로 입을 막았던 일이고보니 이 법률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 우선은 미국인에게 적용된 26개 질병을 한국인에게 그대로 적용 시킬 수 있냐는 것과 2세에게도 그 질병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보상문제, 후유의증환자에 대한 보상문제가 없다.
 또 93년부터 97년까지로 이 법의 적용을 한정함으로써 많은 수의 고엽제 환자들이 그 보상을 받지 못하고 역사에 묻혀버릴 위험성이 있어 당시 미국의 용병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던 책임을 정부가 회피하고 있다는 모양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그간 고엽제환자의 문제를 정면에 내걸고 전우들의 명예회복과 복지증진을 위해 싸우고 있는 ‘파월유공전우회’에 의하면 92년 1월부터 고엽제후유증환자 접수를 받아 현재 6천여명이 등록했으며 93년 12월 현재 국방부에 정식으로 고엽제 후유증으로 접수한 사람은 4천 6백 13명으로 이중 후유증환자로 판정받은 2백 22명과 후유증일 가능성이 높은 ‘후유의증’으로 판정받은 7백3만명만이 정부의 보상대책에 의해 치료비와 생활비를 받고 있을 뿐 나머지는 아무런 대책이 없는 상태로 이들 중 상당수가 죽어가고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고엽제 후유증 환자 자녀에게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해 경상도 일대에서만 아버지와 똑같이 심한 피부병이나 신경마비로 누워있는 사람이 20여명이나 되는 것으로 밝혀져 고엽제 피해가 이미 대를 이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권영진(50) 조직국장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후유증이라고 의심이 돼서 신고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월남에 참전한 사실만 가지고도 ‘고엽제’ 피해를 인정하고 2세 문제를 포함,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국가유공자 예우, 그리고 후유의증도 심한 경우에 후유증으로 인정해 보상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의 말처럼 국내에서 아직 고엽제 피해상황에 대한 역학 조사도 되어 있지 않고 전문 연구가나 환자를 치료해줄 전문 병원도 없이 전국 5개 보훈병원에서 형식적인 치료만 되고 있는 상태다.
 미국이 정한 고엽제 피해보상 시한은 올해로 끝나버리지만 우리정부는 고엽제는 물론 가능하면 베트남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것인지 아직 국가적인 차원의 배상절차에 대해 거의 손을 놓고 있어 미국에 대한 ‘사대주의’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독재정권 유지와 경제발전의 ‘미끼로 베트남에 기꺼이 몸을 던진 32만명의 젊은이들이 고엽제와 소리없는 전쟁을 치르며 말라버린 지난 20년 세월에 대한 보상은 누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인터뷰>
고엽제 역학조사 필요해 - 고엽제 피해 예비조사팀 김정순 박사 -

- 93년 12월 20일부터 4월 20일까지 정부의 지원을 받고 예비적 역학조사를 했는데 그 목적은.
= 예비적 역학 조사는 실제로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 역학조사가 필요할 것인지 이미 외국에서 했던 역학조사 결과보다 더 낫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 또 시간, 돈, 노력 등 많은 투자를 하고서도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등을 알아보기 위한 예비조사 성격이다.
- 어떤 방법으로 했는지.
= 우선 세계에서 발표된 고엽제에 관한 문헌들을 고찰하고 다음은 보훈병원에 고엽제 피해자라고 찾아온 장병들 1,000여명을 대상으로 면접조사를 했고, 보훈병원에서 검진한 의무기록을 조사했는데 두 가지를 다 받은 640여명을 기초로 했다.
-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
= 제일 어려웠던 점은 실제로 이 환자들이 얼마만큼 고엽제에 노출됐느냐 하는 걸 알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따라서 확대 역학조사를 할 때 각 개인이 어느부대에서 얼마동안 무슨 일을 했느냐 하는 자세한 정보가 없이는 진실을 밝히기가 어려워 육군본부의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우리가 조사한 640여명 중 실제로 판정을 받은 사람은 2백여명 밖에 안되는데 본격조사를 하려면 우리가 원하는 여러 가지 정밀검사를 다시 해야 하리라고 본다.
- 예비조사의 결과는 어떻게 나왔는가.
= 문제는 외국의 기준을 사용하더라도 얼마나 철저히 하고 있느냐, 또 한국사람은 외국사람한테 없는 증상이 있을 수도 있고 미군에 비해 고엽제에 더 많이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어 정확하게 판단하고 사실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역학조사가 꼭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작성자오숙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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