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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노인, 장애우, 고아 함께 살아가는 무의탁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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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명의 대식구가 함께 생활해 가는 곳

  수도권 전철 부평역에서 내려 32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박촌에서 하차, 군부대쪽으로 약20분쯤 걸어 올라가다 보면 2동의 건물이 길게이어져 있는 단층 조립식 건물이 보인다.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는지 마당 한쪽에 모랫더미와 벽돌 등이 쌓여 있어 겉보기에는 작업장 같은 인상도 주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내 집에 온 것 같이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방이 15개나 되는 큰 집이다.

  현재 인천시 북구 동양동에 위치한 이 "즐거운 집"은 무의탁노인 23명, 장애우15명, 고아 26명과 원장 부부 권태일(41)씨와 홍현송(36)씨를 비롯한 봉사자들을 포함해 70여명의 대식구가 한솥밥을 먹으며 함께 생활해 가는 무의탁 공동체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9년 전 권태일 씨는 당시 고향인 경북상주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전기 안마기, 건강식품등의 외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권태일 씨는 충무로 어느 육교위에서 얼굴이 심한 화상과 한 쪽 눈을 읽은 40세 가량의 한 여인이 두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대하면 비웃음과 조롱을 퍼부어 주고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느껴졌었는데 그 아주머니의 처참한 모습을 본 순간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때 그 아주머니의 애절한 사연을 들으며 전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 생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그 후로 권태일 씨는 외판원 일을 하면서 틈틈이 정부나 복지기관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몇 개월 동안은 자신의 저축해 왔던 돈을 털어 생활비를 도와주었으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너무 미약해서 곧 한계에 부딪쳤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한 끝에 권씨는 87년 3월부터 "사랑밭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본격적인 구제선교 활동에 나선다.

  "진실한 마음을 밭과 같은 것으로 여겨 사랑으로 마음의 밭을 일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뜻에서 이름지었다는 이 사랑밭회는 "한 사람이 천원씩만 내면 많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라는 문구로 처음에는 부친과 인천지역을 대상으로 회원을 모집해 나갔다.

  그 후 2년여가 지나면서 사랑밭회는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9백여명 회원이 모집되어 그들이 내는 후원금으로 매달 30가정에 3만원에서 5만원  정도의 생활보조비를 지급하는 등 여러 가지 자원봉사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던 차에 권태일 씨는 양아들의 횡포를 피해 도망다니는 이선볻 할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이북에서 태어나 전쟁통에 가족을 잃어 갈 곳도 없는 이 할아버지의 딱한 사정에 사랑밭회에서는 인천시 일신동에 조그만 비닐 하우스방을 마련해 주었다. 

움막생활 6년 끝에 신축된 즐거운 집의 새 보금자리

  이 일을 계기로 89년 4월 일신동에 "즐거운 집"이 처음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남들이 쓰다 버린 가구나 합판 등을 주어다가 지붕과 문짝을 달아 판자집을 꾸몄다. 이 때 신문배달을 하며 공장창고에서 살던 할아버지와 직장암에 걸렸지만 치료도 받지 못하고 있던 또 다른 노인, 고아 소년과 고아원에서 쫓겨난 정신지체아 이렇게 4명이 즐거운 집의 첫 식구가 되었다.

  그 이후 즐거운 집을 찾는 소외된 사람들은 점점 들어나 인근에 계속 판잣집을 지어 방을 늘려 갔지만 얼마안가 더 이상 방을 늘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주택공사와 구청으로부터 철거독촉장과 계고장이 계속 날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즐거운 집이 있는 일신동 일대는 이미 택지지구로 지정되어 있었던 곳이었다. 그래서 철거가 불가피하게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보기에는 더럽고 누추한 움막 같은 곳일지라도 즐거운집 식구들에게는 그나마 이 곳이 마음 편히 누워 잠들 수 있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는데 하루아침에 다시 거리로 쫓겨난다는 것은 식구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절망이었다.

  이에 사랑밭회는 전국 각 사회단체 및 후원자를 찾아 도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거리에서 "사랑의 저금통"을 나누어 주며 식구들의 급박한 상황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92년 9월 동양동에 건립대지 346평을 마련해 즐거운 집 신축공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

  부근 2년에 걸쳐 공사를 했습니다. 중도에 건축자금도 부족하고 주민들의 반대도 심해 몇 번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끝냈습니다.

  무료로 건축설계를 맡아 해 주신 분, 건축자재를  기증해주신 분, 2만명 이상의 사랑밭회 회원들, 공사를 도와준 인근 부대 군인들,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계시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제일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사랑밭회와 즐거운 집 식구들이 천일기도를 드렸다고 이야기하며 권태일 씨는 고개를 숙인다.

  마침내 즐거운 집은 95년 2월 28일 지난 6년 동안의 움막생활을 청산하고 동양동 신축된 집으로 이주했다.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으로 삶에 지친 사람들

  지금 즐거운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5살 막내둥이 철호에서부터 최고령인 90세 김유덕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으로 삶에 지칠대로 지친 사람들이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버림받고 상처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중풍에 걸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자 남편과 자식으로부터 쫓겨난 사람, 아이를 못낳아 쫓겨난 사람,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구타에 못이겨 집을 나온 아이, 친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정신지체아, 사생아...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아픔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더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다.

  식구들 중 한 명인, 백마명 중 한 명 꼴로 걸린다는 근이양증으로 벌써 육년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임청규(54세)씨, 임씨는 포항에서 선원생활을 하다 부인과 이혼한 후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게 되어 지금은 거의 말을 못할 정도로 심한 언어장애까지 가지게 되었다. 92년부터 즐거운 집에 기거하기 시작한 임씨의 증세는 계속 악화되고만 있다고 한다.

  민원식(50세)씨는 고통사고로 양쪽 다리가 절단되었는데 첫 번째 수술이 잘못되어 4번이나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손가락이 썩어가고 있고 당뇨기까지 있지만 수술도 받지 못하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지난 2월 "홀어머니가 계시는데 교통사고로 반신불수가가 되어 대소변을 다 받아내야 하는데 두 딸은 형편이 어려워 모실 수가 없으니 와서 데려가 달라"는 배다른 자식으로부터의 전화를 받고 홍천에서 데려온 윤보순 할머니(70)도 있다.

  심희숙 씨는 61년생인데 벌써 치아가 거의 다 빠지고 없다. 태아 상태에 있을 때 산모의 약물복용으로 인해 선천적인 기형으로 태어나 정신장애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또 마흔 살의 정신지체장애우 정승호 씨를 떼놓고 갈 수 없어 아예 딸네집에서 나와 즐거운 집에서 아들과 함께 기거하는 늙은 어머니.

  여기에다 불륜의 아내를 살해한 친아버지로부터 2층 창문에서 던져져 뇌손상과 전신마비 장애를 가지게 되고, 2년간의 투병 끝에 겨우 한 쪽 다리 마비가 풀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15살 소녀와 중풍으로 쓰러진 뒤 5년 동안 머리는 물론 손톱, 발톱, 수염 등을 한번도 깎지 못한 채 지하실 연탄광에서 살아왔던 송영신 할아버지(65세)도 있다. 서로 피 한방울 살 한 점 섞이지 않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손과 발이 되어주며 살아간다.

  한편 식구들은 애써 바깥세계와 담을 쌓으며 살고 있다. 어쩌다가 한 두 명의 방문자가 차자 올 때도 있으나 굳이 입을 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식구들의 마음속엔 세상의 대한, 자신을 버린 가족에 대한 원망과 질타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이 그들의 짐이 되지 않을까하는 자괴감이 더 강하게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즐거운 집의 생활은 우리들의 손으로

  이곳 동양동으로 이주해 온 후로는 권태일 씨의 부인 홍현송 씨가 "즐거운 집"을 도맡아 꾸려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홍현송 씨는 집 정리를 하느라 식구들중에서 제일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어쩌다 즐거운 집을 맡게 되었는데 벌써부터 걱정이에요. 일신동에 있었을 때보다 해야 할 일이 두 배로 늘은 것 같아요.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정신적인 어려움이 더 큰 것 같아요. 하지만 처음에는 엄두가 안났지만 지금은 이 일이 내생활이고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식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그래요."

  그리고 덧붙여 홍현송 씨는 "지금 즐거운 집에서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이들이 자립 할 수 있는 일거리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 이주해 온 후로 사랑밭회와 여타 후원자들의 후원금만으로는 도저히 운영해 나갈 수 없고, 쌀, 양말 등 생필품마저 부족한 형편이라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나사, 볼트를 조립하는 부업을 시작했어요. 거동이 불편한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일할 수 있는 식구들 만이라도 일을 해 즐거운 집의 생활을 우리 손으로 꾸려보자는 마음으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다른 부업으로 가축을 기를 계획도 가지고 있어요. 뒷산에 염소나 닭 같은 것을 기르면 생활도 보탬도 되고 심심찮은 소일거리로 적당할 것 같아요. 무엇보다 식구들이 좋아할 것 같아요."

  즐거운 집을 운영하는 틈틈이 설립자 권태일 씨는 신학을 공부해 지금은 즐거운 집 내에 교회를 세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즐거운 집의 일과는 새벽 기도회로 시작하여 저녁취침예배로 끝난다. 권태일 씨에 따르면 신앙만이 식구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한다.

  4월5일에는 즐거운 교회에서 두 쌍의 합동 결혼식에 있을 예정이다. 한쪽 다리가 없는 김명란(52)씨와 선천적 장애로 한쪽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고혜경(40)씨, 그리고 둘 다 고아로 자란 김성민(25)군과 박은아(25)양 이렇게 두 쌍이 부부로 신혼방을 꾸민다.

  즐거운 집이라는 커다란 둥지안에 작은 새끼 둥지를 트는 일이라 모든 이들의 부러움과 축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아무리 벗기고 후벼파내도 다 드러낼 수 없는 살 속 흰 상처로 어쩌면 오늘보다 내일 더 아프게 걸어가야 할 지도 모를 이들의 첫 발걸음에 진달래꽃이라도 놓여있기를.......

작성자전경애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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