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일 장애우 연대 마침내 시작됐다. > 기획 연재


기획 연재

[특집] 한일 장애우 연대 마침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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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일 장애우 교류대회
                 한·일 장애우 연대 마침내 시작 됐다

  한국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일본의 장애우 차별과 싸우는 전국공동연합이 해방 50주년을 맞아 민간 차원의 장애우 교류를 확대하고 양국 장애우 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공동 주관한 제1회 한 일 장애인 교류대회가 지난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3박 4일 동안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는 무엇보다 정부 설립 후 처음 있은 대규모 일본 장애우 들의 방한으로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치러진 이번 대회의 이모저모를 취재했다.

  지난 8월 28일 오후 일본측 장애우와 자원활동자들이 김포공항을 통해 속속 입국하면서 이번 대회는 막이 올랐다. 일본측 참가자는 무려 2백 30여명에 이르렀으며 그것도 일본열도 전국에서 고루 참가해 이번 대회는 거는 일본장애우들의 지대한 관심을 보여 주었다. 특히 일본측 참가자들은 정신지체 장애우와 뇌성마비 장애우 등 중증장애우들이 주류를 이뤄 풀뿌리 장애우 교류를 실감나게 했다.

 

  먼저 도착한 일본측 일행은 경복궁 등 시내관광을 마친 다음 대회장인 양재동 서울교육문화회관으로 향했으며, 서울교육문화회관에는 미리 도착한 한국측 장애우 참가자 1백여 명이 이들을 따뜻하게 맞았다.
  이 날 오후 6시 30분 교육문화회관에서 이번 대회의 개획식이 열렸다. 개회식에는 한국측에서 이해찬 서울시 부시장과 국회의원 정대철, 이우정 씨등 정계 인사와 조일묵 장애인재활협회 회장 등 장애계 인사, 그리고 김성수 전 대한성공회관구장 등 지도급 인사들이 다수 참여해 대회를 빛내 주었으며, 일본측에서는 야마모토 다카시 중의원과 호리 전 참의원등 정계인사와 특별히 오사카 주지사와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격인 일본 후생성 장관이 메시지를 보내와 대회를 축하했다.
  개회식 인사마라에서 한국 대표 김성재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번 대회는 한일  간에 처음 있는 장애우들의 대규모 교류라는 점에서 큰 역사적 의의가 있다"며 "이번 대회를 계기로 한 일 장애우들이 가까운 친구가 될 뿐 아니라, 양 국 정부가 의무를 가지고 장애우문제를 해결할 것을 촉구하고, 장애우 자신이 인간답게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노력하며, 진정한 화해를 바탕으로 21세기의 동반자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어 인사말을 한 일 본 대표 이노우에 게이찌 공동련 대표는 "일본 각지에서 2백명 이상의 장애우가 이동한다고 하는 것은 일본의 장애우 운동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전제하고 "장애정도의 차이와 국가 사정이 다르지만 이번 대회가 양국의 장애우 운동에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개회식을 마친 참석자들은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만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공동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양국의 장애우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며 동료로서의 우의를 표시하는 모습이 만찬장 이곳 저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튿날인 29일 오전 대회 참석자들은 양국의 장애우 실태와 복지에 관한 기조 강연을 들으며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 한국측 기조 발제자로 나선 이철용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이사는 "한국의 장애우는 아직까지 비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전제하고 구체적으로 "재활치료를 받을 기회가 거의 없고, 교육의 혜택에서 제외돼 있으며, 직업을 가질수 있는 기회가 제한돼 있고, 경제적 자립과 소득보장 수준이 대단히 낮은 상황에서 편의시설도 마련돼 있지 않아 고통을 겪고 있다"며 그러나 "한국의 장애우들은 장애우문제를 인권적 차원으로 접근해서 해결해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장애관련 양법안 제정 등 그 동안 몇몇 성과도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철용 이사의 기조 강연이 끝나자 일본측 참석자들은 이철용 이사가 13대 국회의원 재임시 장애우 복지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실을 알고 질문을 던지는 등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이어 일본측 기조발제자로 나선 이노우에 게이찌 공동련 대표는 "일본 장애우의 실상과 앞으로의 과제"라는 발제에서 "일본은 1970년까지는 장애우에 대한 복지정책이 전혀 고려되지 않아 장애우들이 방치된 상태였다"며 "그러나 70년대부터 장애우 한사람 한사람이 자각하여 전국 각지에서 장애우 운동을 시작하면서 편의시설 마련과 장애연금과 소득을 확보하는 복지정책을 권리로서 정부에 요구해 성과를 얻어냈으며 80년대부터는 장애우 스스로가 거주지에서 자립하려는 운동이 시작돼 장애우들이 수용시설로부터 나오고 있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라고 일본 장애우 운동의 과정을 설명했다.
  양국의 장애우 실상과 복지에 대해 기조강연을 들은 대회 참석자들은 이 날 오후 좀더 구체적으로 양국 장애우가 처해 있는 실태를 알기 위해 장애우 운동, 교육, 사회환경, 고용 등 4개로 분과로 나뉘어 각각 분과별 주제발표와 토론을 가졌다. 이 날 분과토론은 세 시간이 넘게 이어졌는데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과 발언으로 서로가 궁금한 것을 묻고 대답하며 양국 장애우 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한편 참석자들이 분과토론을 하는 동안 이번 대회에 동행한 양국의 정신지체 장애우 부모 20여 명은 따로 별도 모임을 갖고, 장애우 부모로서의 경험과 역할에 관한 간담회를 가지는 시간을 마련해 이채를 띠기도 했다.
  분과토론을 마치고 난 이 날 저녁에는 친선의 밤이 열렸다. 양국 장애우들은 선물 교환과 장기자랑, 그리고 레크레이션등 흥겨운 시간을 보내며 이번 대회를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대회 삼일째, 아침식사를 마친 양국의 장애우들은 서로 어울려 통일전망대 등 역사 유적지와 롯데월드를 비롯한 시내관광에 나섰다. 통일전망대를 방문한 일본측 참석자들은 한국의 분단현실에 가슴아파하며, 휴전선 북쪽에서 오랫동안 눈길을 떼지 못했으며, 시내관광에 나선 장애우들은 편의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장애우들에게 친절한 한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관광을 마친 참석자들은 대회장으로 돌아와 마지막 행사인 문화의 밤 시간을 가졌다. 문화의 밤에는 한국측에서 장애우 가수 김연택씨와 시각장애우들로 구성된 다스름의 사물놀이 공연이 이어졌는데 특히 일본측 참가자들은 사물놀이 공연이 시작되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춤을 추며 호응하는 등 열띤 반응을 보였다. 문화의 밤의 하이라이트는 양국 대표단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무대에 선 양국 대표단은 대회 성공의 공을 서로에게 돌리며 지속적인 교류를 가질 것을 다짐했고, 참석자들은 환호로 대표단을 격려했다.
  시간이 흘러 문화의 밤도 막을 내리고,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참석자들은 못내 아쉬운 듯 자리를 쉽게 뜨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서로의 주소를 교환하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듯 잡은 손을 놓지 않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였다.
  9월 1일 오전, 일정 때문에 일본측 장애우들은 먼저 돌아가고 양국 대표들만이 참가한 가운데 대회를 결산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에서는 공동선언문이 발표됐으며, 기자회견 서두에 한국대표 김성재 이사장은 "일본측 장애우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에 비해 우리측 장애우들의 위축된 모습에서 분노와 아픔을 느꼈다."며 "소득보장과 인권을 보장해 우리나라 장애우도 활기찬 모습으로 살수 있도록 정부가 조속히 복지정책을 시행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대회 성과로 한국측 대표 김성재 이사장은 "대회를 통해 양국 장애우 교류가 실질적으로 시작됐고, 사회통합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정신지체 장애우들의 통합 가능성이 이버 대회를 통해 확인됐으며, 이번 대회를 계기로 일본 뿐 아니라 세계장애우들의 연대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점을 꼽았다. 한편 일본측 대표 이노우에 게이찌는 "이번 대회를 통해 일본장애우 운동의 돌파구를 찾았다"며 "한국장애우 운동을 참고해서 일본 장애우 운동을 벌여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이 기자회견을 끝으로 이번 제1회한일 장애우 교류대회는 막을 내렸다.

 

 

[부모모임]
양국 부모 지속적인 교류 약속

  이번 교류대회 둘째날 진행됐던 공식적인 분과토론 모임 외에 토론의 필요성 때문에 개별적으로 진행된 또 다른 모임이 있었다. 한국과 일본의 정신지체 장애아 부모 11명이 모여 장애아를 둔 부모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서로의 아픔을 보듬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양국의 부모들은 장애우복지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있어 의사소통에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장애아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로써 서로 이해하는 마음이 있어 성황리에 모임이 진행됐다.
  양국의 부모들은 먼저 부모들의 자기소개를 통한 한국과 일본의 장애아동이 처한 현실을 얘기했고 이후 한국의 부모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장애아의 장래 문제에 관한 많은 얘기가 오갔다.
  한국측 부모들은 "현재 우리나라 복지정책이 중증장애우를 도외시하고 경증장애우 위주로 정책이 입안된다"며 어려움을 털어놨고, 또한 "부모들이 살아있는 동안 가족의 보호아래 장애아가 생활할 수 있지만 사후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한탄했다. 이에 대해 일본측 부모들은 일본도 10년 전에는 신체장애우 중심의 정책을 펼쳤었는데 "장애우 자신들이 스스로 나서 많은 정책을 변화시켰다"고 얘기했다. 또한 일본측 부모들은 한국의 부모들이 사후 장애를 가진 아동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을 의아해 하며 "아무리 중증장애우라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것이 부모의 임무"라고 얘기했다. 일본의 부모들은 "사람이 사는 사회는 서로 공존해야 한다"며 장애아가 충분히 친구를 사귀면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국측 부모들이 또한 관심을 보였던 대상은 "공동작업소"라는 일본의 소규모 작업소였는데 일본측 부모들에 따르면 "공동작업소는 비장애우와 함께 공동생활을 하며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두고 있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공동작업소는 6-7명의 인원으로 중증장애우가 중심이 돼 비장애우와 함께 빵·과자·재활용품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 모임은 이후 서로 양국을 방문해 실제 정신지체 장애우들이 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시간상 문제로 토론 도중 간담회가 마무리 됐지만 이후 저녁 시간에 다시 모여 토론을 갖는등 부모모임에 대한 양국 부모들의 관심은 각별했다.

 

 

[참가자 인터뷰]


"장애우도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 수 있도록 정부나 사회가 장애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회의원격인 일본 중의원 야마모토 다카시(46세) 씨는 장애우 복지에 있어서 정부나 사회의 책임을 강조하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일본 신진당 소속으로 2년전 중의원에 당선돼 현재 일본국회 후생성(보건복지부)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공동련 의장인 이노우에씨의 권유로 이번 대회에 참여하게 됐다는 그는 "그동안 고아나 장애인 등 사회적인 약자와 어떻게 같이 살까를 고민해 왔다"며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의 장애우 복지 실정을 알기 위해 이번 대회에 참여하게 됐다"고 참여 동기를 밝혔다.
  일본에서의 활동사항을 묻자 그는 "2년전 일본 장애우를 위한 기본법 제정에 참여했고, 지금은 각 지역별로 구체적인 장애우 욕구조사를 실시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욕구조사가 끝나면 장애우들이 시설에 수용되지 않고 혼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 개선 등을 추진할 계획이다"라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본이 경제는 일류일지 몰라도 사회복지나 정치는 아직까지 멀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그는 "일본 역시 장애우들의 욕구에 비해 예산이 한정돼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내친김에 일본 정부에 장애우 정책이 격리를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가? 라고 묻자
  "정신환자 장애우는 집안에만 있고 외출을 꺼리니까 어쩔 수 없이 시설에 수용하지만 그건 일부이다. 내가 보기에 격리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일본의 장애우 시설이 자리잡고 있는 장소가 도심이 아니라 외딴데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나 라고 생각되는데 일본 장애우들도 이제 시내에서 살려고 하고 있고, 후생성 정책도 그렇게 되도록 추진하는 단계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현재 일본에서 시행되고 있는 장애우복지 정책 중 우리나라가 받아들였으면 하는 정책으로 "장애우 실업 보험 제도"를 꼽은 그는 반대로 "장애우 교육에 있어서의 분리 교육 제도는 절대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한 자립생활 센터(복지관)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노구찌 씨는 이번에 전국공동연합의 부대표 중 한사람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그가 일하고 있는 자립생활 센터는 5년전 개관한 곳으로 장애우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생활에서 부딪치는 문제들, 가령 주택구입 등의 사안에 대해 상담하고 조언해 주는 일을 하는 곳이다. 노구찌 씨는 그 외에도 장애우들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는 일도 하고 있다.
"지체 부자유자들이 외출할 때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버스나 차량을 제공할 사람들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합니다. 무료이용은 아니고 거리와 시간에 맞추어서 약간의 돈을 받고 있습니디."
  노구찌 씨는 아직 세계적으로 그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은 근육디스트로피 장애우이다.
일본에서도 근육디스트로피는 난치병으로 분류된다.
  장애라기다는 치료가 어려운 병을 몇 가지 난치병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의료비에 대한 무료혜택이 주어진다. 또한 근육디스트로피에 대한 수당을 받게 되고 치료가 길어지면 그 이후에는 장애우로 인정되어 장애우 수당과 그 밖의 혜택들을 받게 된다고 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근육디스트로피 협회가 있고 주로 어린이 환우들에 대한 조기치료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전문 연구병원이 몇 군데 있어서 연구가 계속 진행중이고 아직은 유전자 문제일 것이라는 가정만 할 뿐 치료방법의 발견은 미비한 상태입니다.
  현재는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라며 노구찌 씨는 이번 행사에서 몇 명의 근육디스트로피 한국 장애우를 만나 한국과 일본의 연구상황과 여러 가지 생활상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고 말한다.


  이번 교류대회에서 가장 나이 어린 참석자로 꼽히는 모모꼬 양은 가마따 씨의 외동딸이다. 도저히 아이 엄마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가마따 씨는 공동련에서 10년 넘게 일하고 있는 자원활동자다. 공동련 내에서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이번 대회를 준비한 실무자 중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가마따 씨는 한국사람들이 말하는 자원활동과 일본에서의 장애우 단체를 돕는다는 것은 그 의미가 좀 다르다고 한다. "일정한 시간제 급료를 받고 일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아르바이트와 성격이 비슷하죠. 이 곳 외에도 장애우 단체 두 군데의 일을 돕고 있습니다."
가마따 씨가 장애우와의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본인이나 가족중에 장애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12년전쯤에 이사를 했는데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장애우를 중심으로 하는 자립작업장이 있었고 그 곳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마따 씨는 이번 방문이 있기 전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가지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국 장애우들이 많이 환영해 주었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일본과 한국의 장애우문제에 대한 양상이 비슷하기 때문에 매우 가까운 느낌을 많이 받았다.
  가마따 씨는 앞으로도 계속 공동련에서 활동할 계획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똑같이 대우받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그런 평등한 회사를 설립하고 싶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중증정신지체우 딸이 있는 가기구보 미에 씨는 가족과 함께 한일장애우교류협회에 참여했다. 인터뷰 도중 미에 씨는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정신지체우 딸 유키의 얘기를 하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현재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특수학교처럼 양호학교라는 곳이 있어 장애우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의무화해 좋았다 한다. 일본도 처음에는 장애별로 학교가 있었지만 요즘은 융합을 하고 있는 시가라 장애우라면 누구든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유키는 그냥 보통학교에 보냈어요. 양호학교에 가봤자 유키의 상태로는 발전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일반학교에서 비장애우와 어울리면서 서로를 알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장애우를 차별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보통학교에 입학시켰을 때 유키의 담임 선생님이 "이곳은 교육을 시키는 장소지 훈련을 시키는 곳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한편으로는 속상했지만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따졌어요.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냐"고 말입니다."
  17살의 유키는 밥 먹는 것, 옷 입는 것, 대·소변도 혼자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만큼 장애가 심했다. 그런 아이를 어떻게 보통학교에 진학시킬 수 있는가 라는 의구심은 당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에 씨의 대답은 간단하다.
  "입학시키고 나서 당연히 불안하죠. 자기 의사표현이 전혀 되질 않으니까요. 그러나 유키를 학교에 데려다 준 다음에는 그냥 집으로 돌아왔죠. 처음에는 혼자 지내던 유키에게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가 생기더군요. 만약 내가 유키 옆에 계속 붙어 있었다면 친구는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유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유키를 도와줄 수 있는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찾아주는 것이라 생각해요."
  일본에서도 부모들의 모임이 있다고 한다. 부모모임은 대부분 신체장애우협회나 지적장애우협회에서 주관하고 있는데 부모가 참석하면 그 부모에게 협회측에서 요구를 많이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간바레(노력해라)"라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은 많지 않다고 한다. 미에 씨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라면 내가 왜 가만히 있겠어요. 어떻게든 고쳐보겠죠. 이제는 노력해라 라는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려요"
  유키 때문에 속상한 날도 많지만 웃을 수 있는 날도 적지 않다. 유키가 비록 동물적인 본능이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잘해줄 것만 같은 사람을 알아보기도 한다고 한다.
"  거짓말도, 나쁜 말도 못하는 아이지만 감정이 상하면 화를 내고, 기분이 좋으면 웃는 그렇게 자기 감정에 순응한다는 것은 그만큼 순수한 것 아니겠어요? 순수하게 사는 우리 유키한테 친구처럼 잘대해 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유키가 살아가는 힘이 되리라 생각해요"
  미에 씨는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세상이기 때문에 특별히 유키의 미래에 대한 계획이나 고민을 하지 않는다. 유키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굳게 믿을 뿐이다.

  이와끼리 유사부로 씨의 모습은 공항에 도착함과 동시에 한국측 대회참석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코걸이에, 귀걸이를 4개나 하고 있었고, 더 눈길을 끌게 한 것은 그의 머리였다. 주변머리는 모두 깎아버렸고 정수리부터 기른 말총머리는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장애우와 같이 공동작업소에서 과자를 만들고 있는 유사부로 씨는 자원활동 외에도 남다른 사연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 후배 중에 장애우가 있었어요. 그 후배랑 참 친했죠. 나는 고등학교를 쉽게 진학할 수 있었지만 그 후배는 결국 고등학교에 입학을 못하더군요.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그 후배 부모가 다른 몇 명의 부모와 함께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작업소를 만들었어요. 트라이앵글이라는 그 작업소에서 가끔씩 일을 도와주다가 구성원이 됐죠"
  공동작업소인 "트라이앵글"은 처음에는 일정한 업무가 없었고 하청을 맡아 했었다 한다. 그러나 일정한 업무가 없는 것은 임금도 불규칙하고 힘이 들어 현재의 과자공장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트라이앵글은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취미도 살릴 수 있는 곳이라고 유사부로 시는 얘기한다. 트라이앵글 사업소를 유사부로 씨는 "린"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장애우 4명, 비장애우 2명으로 총 6명이 그 구성원이다. 그들은 과자를 직접 만들어 팔 뿐 아니라 자연비누, 무공해 식품 등을 함께 구입해서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유사부로 씨는 자원활동 하는 이유에 대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 이라고 간단히 대답하며 자원활동을 해야할 정신지체장애우에게 바쁘게 달려갔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서 한국까지 왔다는 마쯔바 세쯔꼬 씨는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현재 NHK오사카 방송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세쯔꼬 씨는 방송국에서 기획총무실 경리를 담당하고 있다. 900여명 규모의 큰 사업체에 장애우는 세쯔꼬 씨 혼자뿐이다. 직장 내에서 10년이 넘게 일했건만 아직까지 장애우를 한번도 보지 못했다는 세쯔꼬  씨는 그녀가 취직된 경위의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1981년에 국제장애우의 해였잖아요. 그때 일본에서 시민단체들과 장애우들이 연합운동을 벌였어요. 연합운동이 계기가 돼 국가에서 특체로 장애우를 고용시켰어요. 극히 소수의 장애우가 고용이 됐는데 나는 운이 좋았어요" 그리고 장애우가 직장을 구할 때는 직업안내소를 찾지만 고용되는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성장애우는 집에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지내거나 쇼핑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일본도 여성장애우가 생활하기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시외주택에 살고 있는 장애우는 불편한 점이 많아요. 목욕탕 시설이 없는 곳이 꽤 많아요. 그리고 집을 구할 때도 장애우 혼자서 입주하려하면 집주인이 거부해요. 단 한사람만이라도 비장애우가 꼭 있어야만 돼요" 다행히 그녀는 결혼을 해 입주 할 때 큰 어려움은 없었다.
  능력에 따른 혜택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쯔꼬 씨는 "일본 정부는 여성장애우 문제를 방치하지만 말고, 여성장애우가 스스로 사회진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얘기하며 여성장애우가 사회진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야 여성장애우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측에서 본 "한·일 장애우 교류대회"의 의미는?
  일본에 장애우운동이 시작되고 공동련이 활동을 시작한 지도 20년 되었다. 시작 당시부터 수시로 발생하는 문제들을 그냥 부딪히는 대로 해결해왔는데 하지만 지금도 뒤돌아서 생각을 해보니 과연 잘해온 것인지 여러 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래서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외국 장애우 운동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싶었는데, 서구세계의 잘 된 시설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보다는 비슷한 문제들을 갖고 있는 곳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행사는 공동련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어서 의의가 크다. 그리고 2백명이 넘는 장애우가 함께 여행하는 일도 처음이지만 그 일들을 장애우 스스로 기획하고 시도했다는 것도 이번 행사가 갖는 의의 중에 하나다.

 

2백명이 넘는 장애우들이 함께 여행했다는 것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에서는 장애우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 나름대로는 이 새로운 시도 자체에도 많은 의미를 두었었다.

 

이번 행사의 전체적인 프로그램 내용과 운영에 대한 평가를 한다면?
만약 점수를 매긴다면 90점 이상이다. 나머지 10점은 행사 후에 이루어지는 작업들과 행사의 의의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나 하는 것 등 행사이후의 작업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3박4일간의 행사 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프로그램은?
둘째는 있었던 분과모임이 가장 좋았다. 그렇게 활발하게 의견이 교류될 줄은 예상 못했다. 일본에서는 처음에 토론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이라 예상하고 이 프로그램을 반해 했었다 .그리고 결정된 후에는 토론이 이루어지기 힘들 것 같아 미리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끌어갈 사람을 준비했는데, 결과적으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토론의 내용을 들으면서 한국과 일본이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도 서로의 상황을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시도로 이번 행사에 의의를 두었는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가?
행사이후의 정리와 평가가 이루어져야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있겠지만, 간접적으로는 개개인이 이번 행사 참여를 통해 느낀 것들이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임들이 각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모임들의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공동성명서에 보면 한국에서 사회시민 운동과의 연대 및 정치의식화에 대해 배우고 싶다고 되어있는데, 많이 도움이 되었는가?
앞으로는 시민들에 대한 홍보를 활발히 하고 정부와의 직접 교섭에도 힘쓸 생각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에서처럼 직접적으로 정부와 타협하고 제안하고 하는 점들이 매우 약했다.
이번 행사에 또한 중위원이 참석했기 때문에 정부와의 새로운 통로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전국공동연합에서 갖고 있는 활동계획은?
후반기에는 별다른 사업계획이 없다. 이번 행사에 대한 평가와 지속적으로 의의를 갖고 활동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가야 할 것이다. 그 외에는 현재 지역별로 운영하고 있는 작업소와 회사들이 계속 운영될 것이고 이런 식의 행사는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는 조직에서 준비하는 행사에 참가할 계획이다.

 


[분과토론 주제발표요약]

한국측

  한국의 장애우 고용은 일반 기업체 의무고용에 따라 경쟁 고용을 하는 "할당고용 형태"와 일상적인 조건에서 일하기 힘든 중증장애우를 위하여 보호적 조건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보호작업장"의 두 가지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장애우의 일반고용정책은 1990년에 "장애인고용촉진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노동부 내에 장애우 고용과가 91년에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1994년 1월을 기준으로 장애우 고용율은 0.44%에 불과한 실정이다. 또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장은 소속 공무원 정원의 100/2 이상을 장애우로 고용해야 함에도 전체 고용되어야 할 장애우 5천5백80명중에 2천1백81명만이 고용되어 있어서 장애우 고용에 대하여 모범을 보여야 할 정부가 오히려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보호고용제도는 1986년에 장애우 복지시설내의 자립작업장 설치 계획에 의하여 22개의 보호작업장이 설치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보호작업장은 1백21개소로 보호작업장 대부분이 장애우 수용시설 및 요양시설에 부설되어 있으며 사회복지법인이 주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이들 작업장은 주로 하청인을 하고 있는데 임금은 고작 10만~20만원으로 생활하기에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장애우 고용 과제는 중증장애우의 노동권 확보와 장애우 개개인이 나름대로의 능력을 발휘하여 사회의 주제로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측

  일본에는 대기업의 장애우 의무고용제와 공동작업소(자립작업장) 등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어 종별로 봤을 때는 한국상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한국상황과 많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특히 일본은 정신 질환자가 장애우이다. 따라서 일본의 장애우 고용 현안은 정신지체인과 정신질환 장애우의 고용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일본의 의무고용률은 1.67%에 해당되며 일본의 부담금 수준은 5만엔(한화 약 40만원).
  그러나 한국의 자립작업장과 비슷한 일본의 공동작업소내의 고용형태는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공동작업소가 대규모이거나 혹은 "아주" 열악한 상황이 아니다.
  대부분 10여명 안팎의 작은 규모인데 다가 주로 일반인과 정신지체인 혹은 정신질환자 등 중증장애우가 각기 50%씩 고용되어 있고, 제빵 혹은 우유팩 재생, 청소 등의 일을 주로 하며 판로도 확보되어 있다. 대부분 공공기관의 주문을 받고 가정에서의 주문도 받는다. 각 개인의 수입은 일본인 대졸초임수준이고 거기에 장애수당(매당 6-8만엔, 한화 약 60만원)이 지급된다. 또한 중도장애우의 직장적응, 시설 설치, 작업설비 갱신, 특별고용 관리를 위한 일정의 조성금이 장애우를 고용한 기업에 지급되고 있다. 제도 혹은 고용에서 제외된 장애우는 수산시설, 공동작업소에(임금은 수천엔에서 수만엔 정도의 수준)고용되어 있다. 여성장애우에 관한 차별은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으나 현재 컴퓨터나 전화교환원을 하는 여성장애우가 많은 수를 차지한다.

 

 

교육

한국측
  한국 에서 현재 취학연령에 있는 전체 장애우의 추정치 30만명 가운데 교육을 받는 장애아동은 20% 수준으로 의무교육인 초·중등 과정의 장애아동 국민학교 취학률이 19.7%, 중학교 11.97%이다.
  장애아동들의 취학률은 법제도에 의해 장애아동이 의무교육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의 부족, 예산부족 등으로 인해 저조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장애우 교육의 문제점 가운데 지적해야 할 것은 조기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재가 장애우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의 전무와 직업재활교육의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 94년은 장애우의 교육에 있어서 기억될만한 해이다. 왜냐하면, 장애아동 역시 의무교육의 대상에 포함시킨 특수교육진흥법이 개정되었고 적절한 후속 조치들이 계속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를 통한 장애아동 교육의 발전을 기대해볼 수 있다. 그러나 중증 장애우의 대학 특례 입학은 아직도 논란이 있는 제도이다.
  사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장애아동의 조기교육이 제대로 실시되지 않고 대부분의 재가  장애우가 의무교육조차 받고 있지 않은 한국의 장애우 교육에 있어서 대학에 먼저 장애우를 위한 특례입학을 실시한다는 것은 우선 앞뒤가 맞지 않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증 장애우의 경우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환영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측


  일본의「장애아동」교육은 1979년에 문교부에 의해 양호(養護) 학교 의무제도가 마련되면서 시작됐다. 이 제도는 정신지체인과 지체장애우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국민학교 입학시 (4월)그 전해의 11월중에 취학시의 건강진단을 실시해 장애의 정도와 종류에 따라 교육위원회에서 기관이 취학을 선별·지도하는 명분으로 강제성을 띤 제도이다. 따라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교육받지 못하는 경우가 지금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그 때문에 1995년2월, 문부성에서도 지금가지의 강행하던 방법을 약간 바꿔 취학지도의 안내로서〔교육상담〕의 충실을 앞으로 내세우며, 장애의 판단과 입학선에 대해서는 부모와 본인의 의견을 들은 뒤에 정하기로 했으나 취학 시에 건강진단의 제도 자체에는 결코 바뀌어진 것이 없다.
  일본에서도 분리교육이 제도화된 것은 아닌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학교에서 아동을 특수학교에 다니도록 부모를 설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일본도 일반학교에 장애아동이 다니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 장애아동과 그 부모들은 장애아동이 일반학교에서 수학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장애 정도가 심한 아동일수록 인적, 물적 비용을 이유로 보육원과 유치원에서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장애우와 일반아동과의 서로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 일본에서는 일반아동과 장애아동의 조기 통합교육이 가장 큰 과제이다.
  일본은 학력사회이기 때문에 고교 졸업 이후 대학 수험과 연결되어 있어 많은 장애우가 초·중등의 의무교육을 받은 이후에는 고교입시에 도전을 하지 못해 교육의 끝이 되고 있다. 결국 의무교육 속에서 장애우의 교육은 선별되어 격리되는 숨겨진 정책이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장애아동 개인과 부모에게 그 책임을 돌려 버리는 것이다.

 


장애우 운동

한국측

  한국의 장애우운동은 그 역사가 짧고 장애우 문제를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역량이 아직 부족한 형편이다. 하지만 80년 대 중반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장애우 운동도 예전보다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장애우라는 이유만으로 대입을 거절당한 사람, 법관임용 탈락사건 등과 같은 사안으로 정부에 청원이나 구제를 요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87년 대통령 선거와 88년 장애우올림픽을 맞아 젊은층을 중심으로 명동에서 대규모 가두시위를 벌이면서 최초의 조직적인 장애우운동을 시작했다.
  장애우들의 주체적이고 조직적인 움직임이 관건이라는 인식하에 89년에는 전국 200여개 단체가 하나가 된 "장애우복지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여 "장애우복지법" 개정과 "고용촉진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90년에는 주민 반대로 건립이 중단된 천안 "인애학교" 사태에 대해 장애우계는 다시 한 목소리를 내어 해결하였다. 이어서 공대위는 장애웅복지관련 기관과 학교들의 건립위기에 대처한 활동을 벌여나갔으며 92년대선 때 장애우복지정책안을 만들어 공약사업을 하며 장애우 운동의 중심에 우뚝 섰다. 93년에는 "장애우 교육권 확보를 위한 사업"에 전념하며 사회단체와의 연대 등 각종 활동을 펼쳐나갔다.
  한국에서 장애우운동이 안고 있는 향후과제는 기본권 확보와 중앙집중의 운동에서 지역중심으로, 인식전환, 지방자치 시대에 맞는 장애우 권리확보를 계속하며 사회운동단체와의 연대를 통하여 통합사회를 향한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일본측


  일본에서는 장애우가 산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다. 일본의 장애운동의 시점은 1971년으로 <천민·비인(非人)등>의 명칭을 폐기하고 장애우를 일반에 편입하면서 장애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1957년 푸른잔디회(뇌성마비 장애우조직)가 결성되면서 사회를 향한 목소리가 커졌다. 1970년에는 휠체어 전국집회가 개최되면서 공동작업장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장애 종류별로 장애운동이 많이 일어났다.
  현재 일본의 장애운동의 과제는 장애우 종류를 뛰어 넘는 통일된 운동이며 자립운동이다. 특히 중증장애우의 자립생활 운동이 관건이며 각기 다른 장애종류의 단체가 장애에 맞는 자립의 수단으로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신질환 장애우와 정신지체장애우의 단체활동은 지금부터라고 본다. 실제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장애우단체들이 모두 지원하고자 하나, 단체간의 이해 관계 때문에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장애수당, 연금 등 일본의 사회보장정책은 잘되어 있으나 장애우에 대한 편견문제는 한국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일본의 장애우운동의 핵심은 인식개선과 제도개선이라는 두 가지 축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역사회에서 장애우의 완전한 참여와 평등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사회환경
향후 과제는 장애우 편의시설과 관련 통일된 법안을 마련한다거나 관련 법안들을 개정하는 것이다.

한국측
  한국은, 장애우의 사회환경을 주거공간, 교통환경, 도시공간, 정보 및 통신(문화, 예술, 종교, 그리고 통신), 그리고 복지서비스 등 함께 사는 모든 삶의 공간에 대해 장애우가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찾는 것으로 광의적으로 정의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장애우가 접근할 수 없는 "제한구역"과도 같다. 따라서 장애우는 제한구역 안에서 교육, 고용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과 소외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다.
  접근에 관한 다른 사항은 차치하고라도 장애우의 이동과 관련된 제도적 장치가 건축법, 도로교통법, 주차장법과 장애우 복지법 등에 겨우 분산 배치되어 있는 데다 임의규정이고 국가적인 조정이 없어 실효성이 미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강제규정으로 나름대로 실효성이 있는 조항이 있는 법안은 장애우복지법이다. 장애우복지법이 지난 89년에 개정된 이래 무려 5년이 지난 지금에야 간신히(?) "장애우 편의시설 설비 및 설치규칙"이 제정되었다.
  이 규칙은 공동주택 등의 장애우 편의 시설의 적용기준과 설치계획, 시정절차 시행일자 등을 명시하여 장애우 접근권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자리 매김 될 것으로 보이나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50만원의 벌금을 내게 되어 있는데, 너무 작아서 영향력이 거의 없다. 그나마 이 법안에 있는 시행절차라는 조항을 이용하여 일정정도의 성과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 향후 과제는 장애우 편의시설과 관련 통일된 법안을 마련한다거나 관련 법안들을 개정하는 것이다.

 

일본측
  일본의 장애우 사회환경은 자립생활을 어떻게 영위할 것인가에 크게 맞추어져 있다. 장애우의 자립생활은 "자기선택과 자기책임에 의한 생활" "가족과 시설의 보호가 아닌 생활"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생활로서 정의되며 이를 위해서는 소득보장, 개호보장, 주택/그룹홈과 공동주택, 교통문제·마을 환경만들기, 취업과 일, 자립생활운동과 고용·취로, 자립생활운동을 유지하는 CIL(자립생활센터) 등이 주로 진행되고 있다.
  자립생활의 기초가 되는 85년 연금 개정시에 장애기초연금제도의 도입이 모색되었으나, 혼자서 생계를 꾸리기 위한 소득으로는 아직도 불충분한 상황이다. 일본은 70년에 홈-헬퍼(가정봉사원)파견제도가 만들어지고 90년부터 시작된 골든 플랜(헬퍼 10만인 체제의 10년 계획)에 의해 공급이 다양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원활동자 활동비는 정부지원과 지방자치단체 혹은 개인이 부담하고 있다. 그룹홈은 78년에 도오쿄(東京)에서 제도화되어 89년에는 후생성의 시책으로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고 94년부터 철도에 장애우편의시설 설치가 제도화됐으며 노선버스는 일부 자치제에서 휠체어 대용 리프트설치버스의 시험적인 도입이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운행은 앞으로 장애우운동의 확산에 달려있다.
  자립활동운동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시설과 가족의 보호아래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중증장애우 자립생활을 도모하기 위해 일어났으며 각지에 자립생활센터가 설립되었다. 자립생환센터는 ①운영위원회의 절반이상은 장애우 ②대표·사무국장은 장애우 ③복수의 서비스를 복수의 장애종류를 가진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④권리옹호활동을 하고 있다.
 

 


  일본 전국 각지에는 사회로부터 배제 당하여 왔던 장애우를 중심으로, 장애우-일반인이 함께 어울려 일하거나 생활하는 장소가 자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애우가 훈련을 받던 곳이거나 직원들이 지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장애우도 비장애우도 같은 동료로서 함께 생활하는 터전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장소가 서로 연결되어서 각각이 작은 규모로 임시 변통하던 것이 고작이던 상태를 벗어나 서로가 발전을 이룩하고자 1984년 10월에 결성한 것이 장애우 차별과 싸우는 공동체 전국연합이다.
  장애우 차별과 싸우는 전국공동연합은 현재 각지에서 장애우들이 활기차게 생활하고 일하는 자립 작업장을 계속 만들고 있으며, 그 곳을 진정으로 장애우가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해방적인 거점으로 하여 장애우의 자립을 목표로 활동해 나가고 있다.

주요활동  공동련의 주요활동

  공동련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많은 활동을 해왔다. 1984년 10월 공동련이 결성된 이후 노동부, 후생부, 건설부에 대해 장애우가 지역에서 생활하기 위한 지원을 요구했고, 특히 노동부에 대해서는 ‘함께 일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납부금 조성을 요구했다. 1985년 5월에는 전국적으로 ‘함께 생활하며 일하는 장소’를 확대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장애우 자립 노동 협회 설립을 구상했다. 1988년 1월 각지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하는 장소’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그 의의와 과제를 제시해 교류를 이룩하고자 마라톤 토크를 시작했으며, 1984년 공동련의 결성대회를 오오사카에서 개최한 이후 도쿄, 구마모또, 훗카이도, 효고, 아이찌, 시즈오카, 오키나와와 함께 매년 장애우의 자립과 발전을 위해 자립운동의 학습/ 경험의 보고 등을 전국대회를 통해 교류하고 있다.

 

 


[공동선언문]

  하나, 한․일 양국 장애우는 자국의 장애우 문제를 알리고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서로 논의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지구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에 노력한다.
  하나, 장애우의 생존과 평등한 보장을 위해 우리들은 장애우 문제를 인권문제로서 인식하고 공동의 문제를 풀어간다.
  하나, 일반인과의 분리에 기초를 둔 장애우 정책을 절대 반대하고, 양국정부 및 의회에 통합정책 실현을 요구한다.
  하나, 해방과 분단 50년을 맞이하여 재차 군국주의 부활을 막고, 군사비를 삭감하여 평화와 복지증진을 위해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
  하나, 아시아․태평양 장애우 10년중 3년째를 맞이하여 우리들은 장애우 운동의 동지로서 풀뿌리 교류를 확대하여 간다.

 1995년 8월31일
제1화 한․일 장애우국제교류회 참가자 일동

 

 

 

작성자함께걸음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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