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자기자식은 끝 까정 부모가 키워야죠" > 함께 사는 세상


[사람사는 이야기] "자기자식은 끝 까정 부모가 키워야죠"

자폐아 정화양의 부모 정신지체인 김형동 하덕수 씨 부부

본문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임대아파트, 똑같은  모양을 한문들 안의 공간을 숫자로 구분해 놓은 그 한 공간에 김형동 하덕수 씨 부부가 산다. 그리고 이들 부부사이에는 올해 열다섯 살인 큰딸 정화, 그리고 세 살 터울의 작은 딸 현진이가 있다. 동사무소 사회담당 공무원이라면 이들을 소개할 때 생활보호대상 가정이며, 이들 부부가 모두 삼급 판정을 받은 정신지체인이고, 정화는 자폐아라는 설명을 한 가지 덧붙일 지도 모르겠다. 예전 어렸을 때는 "엄마", "까까"와 같은 간단한 단어들을 내뱉곤 했지만 이제 완전한 침묵 속에 자아를 닫고 살아가는 자폐아 장화는 그렇다치지만 이들 부부는 이웃에서도 장애사실을 잘 모를 정도로 그저 평범할 뿐이다.
  서른 살, 스물 아홉 늦은 나이에 이웃들의 중매로 결혼했던 이들 부부는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사만 알고 다른 가족들과 함께 농사지으며 살다가 홀연 서울행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렇게 서울 강남의 한 곳에 보금자리를 틀게 됐다.
  이 가족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을까. 김형동 하덕수 씨 부부의 육성으로 살짝 들여다보자.
  "애 아빠는 지금 용산 한강성당에서 경비 보는 일해요. 그래서 오전 아홉시쯤에 들어와서 밥 먹고 한숨 자다가 오후 네시쯤에 일하러 나가요. 정화는 복지관이랑 조기교실에 한 사 년 다니고 구의동에 있는 특수학교엘 삼학년까지 다녔는데 내가 몸이 아파서 못 데리고 댕기니까 학교를 못 다니고 있어요. 한 몇 년 집에 그냥 데리고 있었는데 예전에 조기교실에서 정화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여기 방배동(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부설 장애아동가족지원센터)으로 옮겨오면서 애를 맡아준다고 해서 맨 날 맨 날 거기 댕겨요. 현진이는 여그 근처 초등학교 다니고."
  "경비 선다고 해도 잠깐 한 숨 붙일 짬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결혼은 팔십년에 하고 서울에는 팔십이년에 왔네요. 지가 서른 살 먹도록 서울구경을 못해봤댔어요. 그 때까지 큰 형님집서 일만 하고 그랬에요. 지가 칠십팔년도 부텀 성당을 다녔는디 팔십이년도인가에 조선교구 이백주년 행사를 여의도서 한다고 지방마다 버스 대절해 갖고 사람들 겁나게 많이 모였어요. 그 때 처음으로 서울을 와 봤는디 동작대굔지 뭔지 노량진이랑 여의도광장에 빌딩이랑 많고 귀경하니까 좋더라고요."
  "그 때 서울 사는 형부가 서울구경 한 번 시켜준다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줬나봐. 서울 보고 좋았는지 몸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은 서울가야 산다고 그러더라구요. 집에 와서 첨에 형님한테랑 식들한테 서울 가겠다고 그러니까 큰어머니랑 다 이사가는데 내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반대했어요.
  그래도 싸우고 그냥 왔지. 처음에는 서울길이랑 아무 것도 모르니까 애 아빠는 내 동생하고 한 일년간 같이 다녔어요. 친동생들이 타일 기술자였는데 애 아빠는 기술이 없으니까 데모도(조수)하면서 따라 다녔어요."
  "도시 올라와서는 하루 바삐 일을 해야 하대요. 방세도 줘야하고 시골서는 안 벌어도 뭐 당장 나가는 건 없으니께 살만한디. 서울 올라와서 내 집, 내 가정이 있응께 아무 거라도 닥치는 대로다 하게 됐쥬. 사실 지는 결혼할라고 생각도 안 하고 수도원으로 갈라고 그랬어요. 결혼하믄 식구들 벌어 먹여야 되지, 골머리 아프잖아요, 그냥 독신수도 하믄서 밥 먹고 일하고 기도하고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그러면 "만고땡"이니께 근데 큰집이랑 온 가족 친척들이 니가 거기가서 뭐 하느냐고 막 반대를 해서 그렇게는 못했네요. 사실 우리집에 시집오면 여자들만 고생이쥬. 글도 못배웠는디 돈이 있어야 편히 먹여 살리지유."
  "사실 결혼한 담부터 이제까지 편한 세상 한 번 못 살아봤어요, 현진이 낳고 집에는 왔는데 양식이 하나도 없고 우유값도 없어서 사흘을 굶은 적도 있어요. 예 산후조리도 못하고요 또 서울 와서 연탄가스에 수천 번 적셨어요. 죽었다 깼다 죽었다 깼다 했는데 아무리 하소연해도 주인은 안 고쳐줘요."
  "그런데 또 애들이 하나같이 모유는 안 먹고 분유만 먹을라고 그래요 그것만 멕이게 되면 한 달이 십만원도 모자라고 황소 한 마리 값이 들어가요. 제 월급으로는 안되겠어서 쌀을 볶아서 가루를 내서 분유랑 짬뽕 시켜갖고 먹였네요. 처음엔 애들이 분유보다 까끌까끌 하니까 안먹을라고 해서 한 이틀을 그냥 굶겨버렸어요. 인자 자기들도 배고픈께 그 담부터는 쭉쭉 잘 먹드만요. 근디 그래도 우유를 좀 먹어서 그런가 야들이 황소처럼 성나믄 머리로 이렇게 떠받칠라고 해요.(웃음)
  인자는 서울에 대해서 박사예요. 그 때 당시에는 여기 서울 와서 생고생만 되게 했네요, 그 때 고생한 것 책으로 기록하면 다 하지도 못해요. 뭔 일이 되들 안해요. 코 빨 간 건 술 땜에가 아니라 그때 노가다(막일) 할 때 하도 찬바람을 쐬싸서 그려요. 그래도 인자 살 운이 돌아왔능가 이렇게 집도 자연히 생기고 해서 더 바라는 것도 없어요, 그냥 주님한티 감사 감사해요."
  "용산쪽에 몇 번씩 이사하고 돌아다니면서 살 때는 이 방 보다 작은 방 한에 농 하나 놓고 베개놓고 발을 쭉 뻗고 누우면 아주 딱 들어맞았어요. 정화까지 세 사람이 누우면 더 누울 자리도 없어서 나는 현진이 없고 많이 날 샜죠. 거기에 비하면 여긴 호텔방이죠,. 여그 아파트는 생각도 안했는데 하루는(동사무소)사회담당이 우리가 철거민이어서 서민아파트 십오평짜리 들어갈 수 있는데 강남쪽에도 임대아파트 자리가 났다고 둘 중에 선택을 하래요. 근데 애 아빠는 반가워하지를 않어요. 죽어도 한강다리 안 건넌다고."
  "성당가서 상의를 하니까 다들 그 임대아파트 안돼서 웬수라고 한다고 그러면서 걱정 멀고 빨리 계약하라고 그래요. 그래서 얼른 했쥬."
  "구십사년 팔월 십일일에 처음으로 이사했는데 아이 때문에 다행이 일층이라. 정화도 주택가서 옹기종기 살다가 여그 아파트는 마당도 넓고 집도 넓어서 좋응가 첨에 이사와서 큰방 갔다 작은방 갔다 하믄서 좋아서 깍깍 거리고 그러더라구.
  예전에 용산서 단칸방에 살 때는 좁은 디 이러고 고생하느니 넓은 곳에 있으면 낫겠다 싶어서 정화가 여섯, 일곱 살엔가 이리 무슨 보육원에 한 삼년 갖다 맡겼었어요. 한참 더울 때 데려다 주러 갔는데 처음에는 다른 애들이랑 물장난하고 그러느라고 엄마 가는 것도 못보고 신나게 물에 들어가서 놀더라구요. 그런데 가끔씩 만나러 가서 보면 선생님이 그래요. 여그 애들이 부모들이 한 번 왔다 가면 한 닷새고 열흘이고 뚤레뚤레 보면서 운다고, 엄마 아빠랑 있을 때는 엄마 아빠가 때리고 그래도 금방 헤헤거리고 그러는데 거기서는 다 낯선 사람이니까.(정화 보내놓고) 계속 마음에 걸려서 삼년째인 해에 작정하고 데리러 갔었어요.
  그랬더니 선생님이 우유랑 음료수 주면서 들어가라고 해도 뒷걸음치면서 날 보고 얼마나 좋아하든지 팔짝팔짝 뛰어요."
  "그때 시설에 있을 때 가끔 정화 보러 가면 모기에 뜯겼다는데 피부가 성한 디가 없어요. 맨 모기 자국이고 피부병도 걸려 갖고... 아유, 낳은 죄로 내가 키워야지."
  "지금도 멀리서 수녀같이 너울 쓴 사람만 보면 애가 새파랗게 질려 갖고 막 숨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랑 어디 안 갈라고 그래요. 시설 가는 줄 알고, 어쩌다 집에 낯선 사람이 찾아오면 시설 데리고 가는 줄 알고 겁내면서 반항하고 고집부리고 그래요. 한 번은 가위로 전화선도 다 끊어놨었에요.
  신림동 살 때는 이웃 사람 중에 아들만 셋이고 딸은 손이 귀한 집이 있었는데, 그 때가 정화 세 살 땐데 정화가 통통하니 귀여우니까 이뻐라 했어요. 그 아저씨가 말은 못해도 저런 애 하나 데려다 키웠으면 좋겠다고 나한테 그러기에 애아빠한테 그냥 그 말을 전했는데 정화가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저 어디다 보내는 지 알고 앙앙앙 울어요. 말은 못해도 다 알아 듣는다니까요. 정화는 여기와서 많이 사람 됐어요. 거기 시설서는 다이어튼가 뭔가 시킨다고 밥을 쪼금씩 주니까 빼작 말라갖고 꼭 환자같이 눈이 쑥 들어가고, 거기 시설에서는 애를 안에다 두고 밖에서 문을 잠궈 버려요. 그래서 맨날 방안에만 있응께 애가 뼈에 힘이 없어서 몇 발자국 가다가 픽 쓰러지고 가다가 픽 쓰러지고, 그래서 애아빠가 더 큰일 나겄다고, 다리까지 못 쓰게 되겄다고 해서 기냥 서둘러 가서 데리고 와버렸어요."
  "자기 자식은 자기가 키워야쥬. 정화같은 장애아들이 음식까탈 많이 부립니다. 그냥 터퍽터퍽 먹어야 하는데 정화는 파랑 콩이랑 다 가려내지, 김치도 물에 담궈 먹고. 그런데 시설서는 에미애비처럼 그렇게 못 봐주잖아요. 시설서 있으믄 바보 천치 밖에 안돼요.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에미애비가 길러야쥬."
  "시설에서 데려와서는 보라매공원에 있는 복지관에 구십일년도에 가입해서 현진이까지 업고 계절학교에 한 삼 년 데리고 다녔어요. 그런데 거기 선생님이 자폐있는 애도 조기교육 싸게 받아주는 데가 있다고 해서 충무로에 있는 조기교실(장애아동가족지원시스템)을 알려 주더라구요. 거기서 정화가 한 일년 교육 받았는데 거기 있는 서선생님이랑 지선생님이 구의동에 있는 다니엘학교에 입학할 때도 가고 서류 뭐 할 때도 가고 그래줬어요. 삼학년 때까지는 계속 학교 그렇게 데리고 다녔는데 갈수록 내가 몸이 아파서 다리가 띵띵 붓고 무릎이 빠질라 그래요. 그러다 정신 잃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애 아빠가 정신 잃고 쓰러지고 그러다 애 손 놓으면 애 잃어버린다고 그만 두라고 그랬어요.
  센타 다니기 전에는 집에 그냥 마냥 있었죠. 그런데 선생님들끼리 상의를 했나봐. 그냥 집에 있으면 더 안 좋다고, 큰 애는 큰 애끼리 작은 애는 작은 애끼리 프로그램이 따로 있으니까 나오라고 하드라구요. 그래도 지금 센타는 정화가 가기 좋아라 해요. 새벽 네다섯 시부터 일어나서 밥 먹고 옷 입고 선생님이 차로 데리러 올 때까지 일찌감치 문 앞에 앉아 있어요. 아무리 들어오라고 불러도 꼼짝도 안해. 어쩌다 선생님이 오는 시간에 안 오면 맥이 탁 풀려 갖고 하루 종일 그러고 있고."
  “우리 말은 한 쪽 귀로 듣고 한 쪽 귀로 흘려버리는데 선생님들 말은 잘 들어요. 꼭 주체사상마냥 철썩같이 들어요. 지금 지 선생님이랑 서 선생님이랑 또 전 선생님이랑 내가 만약 세상을 떠나드라도 그 선생님들 은혜는 못다 갚고 가게 생겼어요. 떡이랑 황소 한 마리 놓고 고사를 지내도 그 은혜를 다 못 갚고 가게 생겼어요.”
  "야는 그래도 시술 갈치면 잘 할 거여요. 지금도 양파 사 놓으면 다 까서 냉장고에 넣고 파도 다 까서 냉장고에 넣고 그래요. 엄마가 쌀통에서 쌀 꺼내면 얼른 물 틀어주고, 엄마 뭐 하면 얼른 양념통이랑 칼 찾아주고, 빨래도 어른들이 하는 것만치 잘개고 걸레 갖다 훔치고 닦고 싹싹 잘 치워요. 인자는 다 커서 또 내 옷이랑 같이 입어요. 엄마 이쁜옷 입는 꼴을 못 보고 다 입을라고 그러고, 근데 다른 사람들 말이 말을 할라믄 머릿속에 이만한 방울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야 한다고 머리수술을 해주래요. 한 천만원 넘게 가지면 수술할 수 있다는데..."
  "에유. 우리 성당서도 교통사고로 다친 사람들 많은데 다른건 몰라도 머리만큼은 손대지 말아야 겄어요."
  "남들이 그냥 그러더라구요. 머리에 이상있응께 머리를 고쳐야 된다고... 야 현진이가 하루는 세수하고 와서 농 옆에 쪼그리고 않아서 아빠는 흰머리나고 아프고, 엄마도 아프고 언니는 말못하고 그러니까 난 불쌍한 사람이래.(웃음) 왜 언니는 말을 못하냐고, 나는 하는데, 이상하대. 둘이 좋아라 장난칠 때는 잘 모르다가도 언니랑 말이 안통하니까. 그러면서 앞으로 자기가 수화공부 열심히 해서 언니 수화 공부 시킨다고, 가르쳐주겠다고 언니도 불쌍하고 그러니까 지가 잘 돌본다고.
  내가 아파서 못하믄 지네 둘이 목욕탕 가서 언니 머리감기고 목욕시키고 다 해요.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지가 얼른 약국에 가서 약 사오고 방 청소도 하고 지 언니 머리 빗기고 이빨 닦게 하고 그렇게 잘 해요. 내가 몸이 아플 때 정화 하나만 있었으면 더 괴로웠을텐데 현진이라고 옆에 있어서 심부름하고 그러니까 좋더라고요.
  그런데 현진이 들어섰을 때 친척들이 애 또 그런 애 낳으면 어떻게 하냐고 떼라고 난리였어요. 나보고 말 되게 안 듣는다고 그러고, 그런데 지금도 친척 중에 한 사람은 좁은 집에서 정화를 현진이랑 같이 있게 하믄 똑같이 바보 된다고 현진이 위해서 정화를 그냥 시설에 넣으라고 성화에요.
  어떻게 조카도 자기 자식인데 그렇게 말하는지 몰라. 친척들이 하도 정화 말 못한다고 뭐라고 그래서 인자는 친척집에 가기도 싫어." "성당서는 생목숨 죽이믄 안된다고 하잖아요. 낙태는 철통같이 반대쥬. 하나의 생명체로 세상빛을 볼려고 나왔는데, 말 못하는 애기지만 컴퓨터에서 보면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그러잖아요. 우리 신부님 한티 가끔 그런 말씀 들어요. 생명을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고 신부님이 강력하게 미사시간에 말씀하세요.
  그래도 우리는 지금 못 먹고 못 입더라도 정화가 커서도 먹고 살만치는 다 해놨네요. 천만원 모이면 또 깨갖고 적금 붓고 그래가지고 한 이천만원 모아놨어요. 현진이는 서방 잘 만나서 시집 잘 갈랑가 못 갈랑가 모르겄지만 암튼 야가 지 언니 좀 봐주고 그럴라 그래도 (현진이) 신랑이 또 맘을 틀어서 시설에 갖다 넣어버리면 안되니까 아예 정화 몫으로 해놔야겠어요. 정화 몫으로 식모를 한 사람 두든지 종교집단에서 짓는 아파트 같은데 가서 살게 하든지. 말 들어보면 여러 가지대요. 형제간한테 인계하고 가면 그 돈 있을 때는 꼴 봐주다가 그 돈 다 먹으면 시설이나 양로원에 갖다 넣는대요. 돈은 친척들한테 맡기지 말고 차라리 넘한티 주는 게 낫다고 그래요. 복지관의 선생님. 복지사들, 신부님한티 차라리 돈을 주고 좋은 자리에 써 주라고, 그 돈으로 멕여살리고 그래달라고."
  "예전에는 관리비 내라고 모자라는데도 돈 십만원만 갖다주고, 좀 지나서 삼십만원, 많아야 사십만원 가져오는데 남은 돈 십만원, 이십만원은 꼭 예금 들어서 모았어요. 나는 돈 십 원도 못 벌어요. 정화땜에 애들땜에. (동사무소) 사회담당이 취로 나오라고도 허는디 그거 할라믄 아침 일곱시 여덟시에 나가야 하는데 애들 학교 가는 것도 보아야 하고그래서 못 다녀요. 애아빠가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하고."
  "여자들 직장 다니면 사람 다 버려요. 짜증나면 집에서 욕이나 하고, 그냥 고생하지 말고 집에서 애들이나 잘 키워야지." 정화 아버지 김형동 씨는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는 조금 피곤한 기색으로 이제 좀 자러 가야겠다고 일어섰다.
  집을 임대해준 것처럼 정부가 더 해줬으면 하는 것이 없냐고 마지막으로 묻자 그는 "인자 없어요. 우면동에 이사와서 살다보니 공기도 좋고 얼마나 좋은지 모르겄어요. 주님한테 감사감사하네요"라고 말한다.
  "나는 소원이 이거예요. 생전에라도 내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것하고, 돈 좀 실컷 써봤으면 좋겄고, 우리 정화 말이 언제라도 터졌으면 좋겄어요." 정화 어머니의 바람은 조금 더 현실적이다.

 

글/ 한혜영ㆍ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함께걸음 인스타그램 바로가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5364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치훈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