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정희수 시인 1주기 추모 특집 시
본문
<한계령>
저녁 노을 사위어 오르면
첩첩산중은 무서운 아버지 같았고
가엾은 어머니 같았다.
허기진 웃음 머금은 별 하나
맺힌 가슴 그러쥔 채 사라지면,
물색 차디찬 숲 사이로
열나흘 달 그림자
속쓰림처럼 일어나는 그리움 붙안고
초췌하게 피어 올랐다.
풀잎들 두런거리는 소리
억지웃음이라도 지어 봐
몸고생 마음이 이기면 고생이 아니잖아?
불어오는 바람에 눈시울이 매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부르지 마라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나는
하늘에 있고 싶지도 않으며 결코
너희들 곁을 떠날 자격이 없다.
나는 보았다
골방에 갇혀 세월을 갉아먹는
영혼을 보았으며
잠 자는 머리맡에 바짝 다가앉아
머리칼을 뽑아 들고
사방에 내던지며 키워 가는 증오심도
보았다.
너희가 그 무슨 개꿈이라도
기억으로 남겨 주고 싶겠느냐 모두
내 잘못이다.
내가 너희를 축복하지 못하는 세월을 두고
어찌 너희에게 무릎 꿇으라 할 수
있겠느냐 안타까워라
이제 내 거룩함을
너희가 가질 시간이다 나는
소멸시효를 잘못 계산했다.
<영등포 戀歌 1>
낡은 녹음기 털털거리는
앉은뱅이 손수레
그 손수레에 매달려
시장바닥을 기고 있는
그대 목숨값은
얼마인가요?
<영등포 戀歌 2>
상갓집 강아지 발길질해 쫒아내고는
아주까릿대에 매달린 개똥참외
몰래 따먹으려는 듯
시가 어떻고 작품이 어떻다는
향그로운 그대 입에서
영등포 니나노집?
아니올시다.
어질병이 지랄병 된다면 모를까
날마다 야윈 얼굴로 만나 보는
그대 누이
증오와 그리움 넘나드는
붉고 파란 형광등 빛깔 아래
속살 드러내고 고즈너기 누워 있는데
그대는 논다니 너름새 자랑하듯
미쓰 리, 미쓰 킴, 미쓰 오를 들먹이지만
그것이 허허 참이 아니듯
어항에 금붕어 노니는 단꿈만은
아닐 것이니
그니 목숨값 대신
퍼런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노라고
누구를 어떻게 어쨌노라고
술 기운 빌어 무용담처럼 늘어놓지만
글쎄올시다. 다음날 아침이면?
얽거든 검지나 말지
<영등포 연가 3 - 겨울>
밤마다 가래톳 서는 다리로
가탈 많은 영등포 네거리 들어서면
언제나 그 청년은 숯등걸 가슴으로 앉은 채
거친 바람과 싸우고 있었다.
그 앞에는 겨우내
백 원짜리 수세미와 좀약을 담은
함지박만한 좌판이 구성없이
고즈너기 놓여 있었다.
<영등포 연가 4 -밤이 오고>
밤이 오고
술집 네온사인이 곤두박질 치는 사이로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매김 하는 시각
돈통에는 기미 가득한 동전 서너 개가
불빛을 받으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영등포 연가 5 - 어디로 갔을까?>
술에 쩔어 너름새 없이 쏘다닌,
기억마저도 가물거리는 나날들
그날이었던가
청년이 그여 보이지 않았다.
<영등포 연가 6 - 다시 그 자리에서>
청년이 사라지고 없는
휑뎅그렁한 자리
뒤집힌 채 말아 죽어버린
풀방구리 껍질 같은
까맣고 넙적한 고무판이
고집스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술꾼들 토악질 덩어리를 안은 채
따스한 봄볕 받으며
<영등포 연가 7 - 새마을, 좌판, 그리고…>
사람들이 말했다.
새마을 깃발을 펄럭이며 단속반이 나왔더라고,
춘계 새마을 가로정비 기간이라데,
퍼뜩 치우라꼬 윽박지르더란께네,
청년이 말이시 애원허는 눈빛으로 앉은채 조그맣게 웃어불더라고,
단속반이 고마 그를 나꿔채삐데,
고꾸라진 청년을 질질 꿋고 가더랑께,
수세미하고 좀약이 땅바닥에 뒹군계네 도살장에 끌리 가는 소맨크로 눈이 젖어가꼬 끔벅끔벅 바라보데,
그 자리엔 거적데기 겉은 고무판만 달라 남아분 거여,
사람들은 몸져 누운 듯한 고무판을 그제사
처음 보았노라고 말했다.
영등포 연가 8 - 다시 겨울이 오면>
오지개 아파오는 꿈을 꾸었어.
꿈에서 깨려고 울면서 발버둥쳤지
내 몸엔
피멍과 매 자욱이 얼룩져 있었어.
따뜻하게 토닥이는 손길, 잠에서 깨어났지
청년이 환한 얼굴로 웃고 있었어.
그는 내 몸을 적시고 있던
식은땀을 닦아주었던 거야
청년이 나하고 약속했어.
다시 겨울이 오면
그 자리에서
수세미와 좀약을 팔 거라고 그랬어.
<겨울바다>
사라진다는 말을 가슴에 옹이 박으며
이 한 목숨 툭 던지기로 했더랬지
살아 있음이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한 뒤부터
죽어 바다에 떠다닐, 예수의 나이와 같은
내 보잘것 없는 몸뚱아리를 생각해 보았어
겨울바다 어디쯤에든 따뜻한 물길 한 자락
붙잡을 수 있으리라
속마음 깊은 은혜 원했더랬지
그러나 짝사랑같은 환상이었고 오만이었어
소나기 쏟아져 내리는 겨울바다는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는 내게 말했어
해골에 창호지를 발라 놓은 듯한
내 동무야
이 가슴에 네 몸 내던진대도
세상이 변하기는커녕 아무도 설워하지 않아
어서 가 어서 돌아가서
네 가녀리고 빙충맞은 서른세 살 나이가
앉은 자리를 찾아 봐
이 가슴에 쏟아지는 소나기가 아무리 많아도
결코 넘치게 할 수 없으며
네 몸 후줄근히 적시고 있는 이 빗줄기가
언제나 그렇게 추위를 타게 하지는 않아
겨울바다는 나를 토닥여 주었어
햇빛이 따사로운 날 다시 찾아오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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