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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장애우는 나락밭에 제비여!"

국악인 공옥진

본문

 [함께걸음이 만난 사람]

 

 

"장애우는 나락밭에 제비여!"


국악인 공옥진

 


장애우에 대한 애정 가족사에서 비롯

                            

▲국악인 공옥진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장애우가 나락밭에 제비라니, 나락밭은 뭐고, 그 나락밭에 제비는 또 뭔가.
  공옥진 여사는 인터뷰 말미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장애우관을 "나락밭에 제비"라고 한마디로 표현했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장애우를 비하하는 발언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나락밭은 벼가 익은 논을 말한다. 논은 전라도 사투리로 나락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논의 제비는? 여사는 "왜 장애우가 나락밭에 제비냐면, 제비는 나락(벼)을 축을 안내. 먹질 못하지, 참새들이 나락을 다 씹어먹어도 제비는 안 먹어, 이런 하늘같은 신선한 사람들이 장애우인 거야"라고 강조했다.
  여사의 말이 맞건 맞지 않건 장애우를 가리키는 표현 중에 이렇게 생경한 표현을 들어본 적이 없다. 듣기에 따라서는 극도의 존중을 표시하는 말로 들리기도 하는 독창적인 장애우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공옥진 여사인데, 문제는 여사의 이런 장애우관이 한편으로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는 데 있다.
  왜 그럴까? 사실을 얘기하자면 그동안 장애우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는 여사의 이미지는 그렇게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동안 공옥진 여사는 장애우들을 흉내내는, 일명 "병신춤"의 일인자로 언론에 소개되면서, 여사의 공연은 "장애우를 비하하는 공연"이라는 장애우들의 항의를 받기도 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여사는 말과 행동이 각기 다른 사람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애초 공옥진 여사를 만나보기로 마음먹었을 때 초점은 왜 여사는 병신춤이라는 장애우를 흉내내는 춤을 추는가, 그 이유를 알아보려는 데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고 어줍잖지만 여사의 춤이 장애우들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점을 전달하려고도 했다.
  그런데 여사와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엉뚱한 방향을 빠지고 말았다. 춤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공옥진이라는 한 여인의 굴곡 많고 한 많은 인생 이야기가 파란만장하게 펼쳐졌다. 물론 여사에게 있어서 사람과 춤이 다른 것이 아니기에 삶을 회고하는 이야기 속에 자연스럽게 춤 이야기가 들어있고, 춤 이야기 속에 여사가 장애우를 흉내내는 춤을 추게 된 까닭이 녹아 있다.
  각설하고 지금부터 여사의 육성을 들어보기로 한다. 장애우의 입장에서 이 인터뷰가 끝난 후에 여전히 여사에게 불쾌한 감정을 가지든 아니면 여사를 이해하게 되든 그건 읽는 사람의 자유라는 점을 밝혀둔다.
  공옥진 여사가 장애우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인, 여사의 나이 십대 때 한때 길에서 떠돌며 걸인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여사가 걸인 생활을 하게 된 데는 불행한 가족사가 원인이 됐다.
  1933년생인 여사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무용가 최승희에게 돈 1천원에 팔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최승희의 몸종 생활을 하던 여사는 최승희에 의해 다시 일본인에게 팔리는 신세가 됐고, 일본인 가정의 식모로 갖은 고생을 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을 맞아 국내로 돌아온 여사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한때 가족과 헤어져 걸인생활을 했는데 이때 장애우 걸인들을 만나게 됐다. 장애를 가진 걸인들과 같이 어울려 다니면서 여사는 장애우들이 신명나게 춤을 추며 동냥을 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여사는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이 제멋대로 사지를 뒤틀었다가 풀었다가 짓까불면서 춤을 추어 대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여사의 걸인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다시 가족과 상봉한 여사는 조선 창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리수업의 길에 들어섰다. 여사의 나이 스물한 살 때 명창 임방울씨에게서 수학했으며 남도지방의 소리 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 후 국악단에서 창극 주인공으로 활동하던 여사는 어느 날 문득 소리꾼으로서의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전남 영광에 옥진관이라는 이름의 요리집을 차리고 정착했다. 이 요리집 주인으로 있으면서 여사는 본격적으로 장애우들을 접하게 된다.
  그 당시 얘기를 여사의 일대기를 다룬 한 책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옥진은 이 거리 저 거리로 돌아다니면서 빌어먹는 장애우들을 옥진관으로 끌어 들여 밥을 먹여주고 술을 대접했다. 손님들이 욕을 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옥진은 장애우 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다. 그런 다음 옥진은 몸이 불편하다고 신명이 없을 것이여? 배부르면 콧노래가 나오고 취하면 춤이 나오는 것이제라면서 장애우들 앞에서 노래를 하고 비틀비틀 걸쭉걸쭉 춤을 추어 보였다. 그런 옥진의 장단에 맞춰 앉은뱅이들은 발가락 끝으로 장단을 맞추고 곰배팔이도 뒤틀린 팔을 흔들어 댔다."
  "장애우 걸인 청년이 돌아가고 난 뒤에 옥진은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그의 걸음걸이며 표정을 재현해 보았다. 눈물겨운 그의 처지에 자신을 맞춰 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비틀어진 손으로 밥을 먹는 시늉을 하려고 힘을 쓰자 얼굴로 피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잠시만 팔다리를 비틀어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서럽고 기가 막힐꼬, 내가 그런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춤을 춰야 하는데... 옥진은 그런 생각을 하자 자신의 신세가 그들과 다를 바 없이 외롭다는 것이 느껴져서 쿨쩍 쿨쩍 울어 버렸다."
  이러한 장애우에 대한 공옥진 여사의 애정은 근본적으로는 자신의 가족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사는 3녀 1남의 둘째로 세상에 나왔는데 하나 있는 유일한 남동생이 바로 청각장애우였다.
  이름이 삼채였던 남동생을 여사는 무척 아꼈다. 그런데 훗날 여사는 남동생을 잃게 된, 그 한 많은 사연을 여사의 육성을 통해 들어 보자.
  "내가 장애우가족이여. 남동생이 말 못하는 장애우인데 장가 가서 딸을 낳았거든. 그 딸이 또 사고로 안팎 척추장애우가 되어 버렸어. 내가 이렇게 한이 많은 사람이야. 내 동생이 말은 못하고 듣지도 못했지만 육체미로 전남 체전 때 일등을 했어. 공삼채 그러면 전남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구. 그 동생이 광주 무등극장에서 표 받는 일을 했는데, 깡패들 일곱 놈이 "저 벙어리가 우리를 공장에 들여보내 주지 않으니까 한 번 두드려 패보자"고 짰던 모양이야.
  극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삼채를 일곱 놈이 포위를 한 거야. 그래도 내 남동생이 일곱 놈을 당해냈단 말야. 아무리 일곱 명이 덤벼도 안되니까 한 놈이 다가와서 어이 우리 싸우지 말고 악수하자 그러니까 이 순진한 동생이 악수를 하려고 하는 순간 한 깡패놈이 못을 다섯 개나 박은 각목으로 동생 목 뒤를 내리쳤어. 동생의 목에 못 다섯 개가 박혀 버린 거지. 곧바로 병원에 실려갔지만 결국 동생은 파상풍으로 죽어버렸지. 그때 나는 서울 공간사랑 극장서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소식을 들었지만 내려갈려니 차비도 없었고, 밤에 소나기는 억수같이 쏟아지지 여관이라 크게 울 수도 없어서 이불로 내 입을 틀어막고 삼채야, 소리치면서 울 수밖에 없었어. 새벽에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겨우 차를 대절해서 내려갔지. 그랬는데 동생이 죽어가면서도 자기 딸을 가리키면서 병원에 가서 수술시켜 낫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거여.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어. 그렇게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동생을 보냈어."
- 그 후 척추장애우였던 조카딸은 어떻게 됐나요?
  "내 조카딸? 빈말이 아니라 양귀비처럼 예뻤지. 동생 부탁대로 병원에 데려가 수술시켰는데 열 일곱 살 때까지 잘 크더니 결국 제 아빠를 따라 가버렸어."
- 장애우였던 동생과 조카딸 때문에 장애우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되었군요?
  "그렇지. 장애우들 때문에 오늘의 옥진이가 있는 거지. 예전에 불쌍한 우리 장애우들이 거리에서 죽으면 내가 거둬 좋은 자리에 묻어줬어. 그랬더니 영광서 소문이 나기를 장애우가 죽으면 옥진이가 거두더니 어떤 놈 하나가 명당에 들어 갔는 모양이여. 그랬다구. 죽은 장애우가 이 옥진이 뒤를 봐준다는 얘기지. 그런데 제일 곤란한 때가 언제냐면 한 장애우가 앉은뱅인로 살다가 굳은 상태에서 죽었는데 나는 긴 관에도 눕힐 수 있을 줄 알고 긴 관을 사다가 수습하려고 했는데 이건 들어가야지. 그래서 그 관을 물리고 새로 앉은뱅이관을 짜다가 묻은 경우도 있었지."
- 그렇게 장애우에게 애정이 많으신 분이 어떤 이유로 병신춤을 추게 되셨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유를 설명해 주시죠.
  "내가 예술을 그만두고 영광에서 숨어 살았어. 그런데 78년에 당시 국악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던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 그 사람이 나를 서울 공간사랑에서 공연하게 해줬지. 그 공연을 보고 평론가였던 중앙대 정아무개 교수가 내 춤을 병신춤이라고 처음 언론에 소개한 거야. 춤을 평가하려면 예술성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평을 해줘야 하는데 병신춤이라고 한마디로 나를 매도한 거지. 그리고 소설가 문순태가 신동아에 내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제목으로 "병신춤을 춥시다" 그랬어. 나는 병신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거든.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신동아에 쫓아가서 이 책 못 나간다고 막아버렸어. 나는 엄연히 판소리를 하는 국악인인데 내가 왜 병신춤을 춘다고 그러느냐고 항의한 적도 있었지. 명창인 임방울 김연수 박녹균 씨가 내 스승이야. 나는 전통 국악인인데 언론이 잘못 표현해서 나를 난감하게 한 거야. 이젠 다 지나간 일이지만 가슴속에 응어리는 아직도 남아 있어."
- 까닭이야 어찌됐건 여사님의 춤이 유명해지면서 속상해하는 장애우들이 많았던 게 사실인데요. 장애우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다면 들려주시죠.
  "나도 할 말은 있어요.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탤런트들과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장애우들을 비하하는 갖은 흉내를 다 낸단 말야. 어째 그 사람들한텐 말이 없고 애꿎은 나만 뭐라 그러느냔 말야. 막상 털어놓고 얘기하면 내 동생의 한을 춤으로 춘다면 누가 나한테 뭐라 할거여. 성한 놈들한테 맞아 죽어간 동생의 표정을 내가 짓는데 누가 뭐라 할 것이여. 말할 수 없지. 암 말할 수 없고 말고, 척추장애우였던 내 조카딸 춤을 춘다고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 말하자면 이치가 그렇다는 말이여. 내가 한도 많지만 장애우 가족이 아니고는 내 심정을 모를 것이여. 나는 공연하면서 사람들한테 그래요. 장애우들은 나락밭에 제비다. 이렇게 하늘같고 신선같은 장애우들을 어째서 멸시하냐 이거여.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장애우 자식을 낳으면 창피하다고 해서 해도 안비치는 골방에다 가둬놓고 바깥으로 내놓지 않거든.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 말고 진짜 장애우지 몸 불편한 사람들은 장애우라고 생각 안해요. 사실을 말하자면 나도 장애우여. 담석증 때문에 세 번이나 배를 갈랐다구. 이런 내가 장애우를 욕되게 한다면 내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춤으로 표현

  공옥진 여사의 공연을 지켜본 사람이면 알 수 있지만 여사의 공연은 1부에는 창과 무용을 곁들인 창무극이 펼쳐지고, 2부에는 장애우를 흉내내는 춤 또는 동물춤과 재담 순서로 이어진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여사의 공연은 장애우들을 흉내내는 병신춤 대신 동물들을 흉내내는 동물춤이 주로 무대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여사가 장애우들의 항의를 의식해서였기 때문일까.
  여사의 말을 들어보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여사는 장애우들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도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됐다고 강조한다.
  여사는 오래 전에 남도문화제에 참가하면서 동물원에 가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동물원의 철장 앞에서 자유를 뺏긴 채 힘없이 갇혀 있는 곰이나 호랑이 같은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동물춤을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사자나 곰이 철창에 갇혀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서 동물들도 사람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 사람도 살다가 본의 아니게 죄를 짓고 철창 안에 들어가서 답답한 감옥생활을 하는데, 동물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까 죄지은 사람이 철창에서 개과천선을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연상되더라구. 그래서 오냐, 너희들 삶을 내가 춤으로 승화시켜 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혼자 동물춤을 연구했지.
  이렇듯 여사의 춤의 주제는 장애우들을 흉내내는 춤이나, 동물들을 흉내내는 춤이나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한을 부여안고 여사는 무대에 올라 옥양목치마저고리와 쥐부채만 들고서 꼬박 혼자 2시간여를 공연한다. 그런 여사의 공연은 늘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며 열광하게 만든다. 여사의 공연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무엇보다 여사의 공연이 서민적이기 때문이다.
-여사님의 공연을 지켜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는 사람들도 많은데.
  "공연을 하면서 나 자신도 많이 울죠. 내가 한 많은 여자니까, 내가 7살 때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징용노무자로 일본에 끌려갔어. 4남매인 우리를 놔두고 말야, 우리는 다 거지가 됐지. 그때 내가 춤 잘 추는 최승희씨한테 돈 1천원에 일본으로 팔려갔어. 그런데 그 사람도 나를 다른 사람한테 2천원에 팔아먹었어. 차라리 그때 죽어버렸으면 이 한 많은 세상 안살아도 됐을텐데. 사람이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어렸을 때 머릿속에 쇼크받은 슬픔은 절대 못 잊습니다. 내가 열일곱 살에 결혼했는데 내 남편을 둘도 없는 친구한테 뺏기고 그 충격으로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서 중이 됐어요. 3년 7개월 동안 중 생활하다가 아버지한테 끌려 나오고..... 말도 말어. 여자로서 나 같이 한 많은 여자도 드물거야. 내 공연은 내 인생이야. 이 공옥진이가 걸어온 인생이 작품인 거지."
-공연을 하다보면 외로움을 느끼실 때는 없는지요?
  "외롭지. 수많은 관중이 공연 때 환호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나면 나를 좋아했던 그 사람들이 주소도 남기지 않고 다 흩어져 버리거든. 그러면 공옥진 혼자서 쓸쓸하게 화장케이스 하나 들고 여관으로 향하는데 나에게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마음 속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는 또 공연을 하러 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지."
-마지막으로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말씀해 주시죠.
  "내가 요즘은 바닷가에 조개 캐러 다녀요. 바다에 가서 하루종일 조개 캐다가 젓갈도 담그고, 혼자서 바다보고 창 연습도 하고 그러지. 제자들은 주로 저녁에 가르치고, 잘 지내고 있네."


대담,정리/ 이태곤 기자  

사진/ 윤선애 객원기자


  기자가 덧붙인 말  이렇듯 여사의 춤의 주제는 장애우들을 흉내내는 춤이나, 동물들을 흉내내는 춤이나 마찬가지로 한마디로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소외된 사람들의 한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한을 부여안고 여사는 무대에 올라 옥양목 치마저고리와 쥘부채만 들고서 꼬박 혼자 2시간여를 공연한다. 그런 여사의 공연은 늘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며 열광하게 만든다.
  여사의 공연에 사람들이 감동하는 것은 무엇보다 여사의 공연이 서민적이기 때문이다.

 

 

[공옥진약력]

  1933년 전남 승주군 송광면 추동리에서 남도인간문화재 1호로 지정된 판소리 명창 공대일씨의 3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난 공옥진 여사는 1940년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무용가 최승희에게 1천원에 팔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귀국한 여사는 조선창극단에서 활약했으며 1950년 군산, 고창 등지의 명창대회에서 일등을 했다.1957년 명창 임방울씨가 만든 창극단에서의 활약을 거쳐 손수 공옥진 창극단을 만들어 전국 순회공연을 했다. 그 후 1974년 제6회 남도문화제에서 길쌈놀이로 최고상을 받았으며,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공연 전통무용의 밤에서 선보인 독특한 창무극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다음해 홍보가를 발표했으며, 그 후 국내와 해외를 돌며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쳐왔다. 현재 창무극의 일인자로 평가받으며 후진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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