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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살지요"

농촌에 사는 안승명 김재심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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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소박한 희망을 가지고 살지요"


농촌에 사는 안승명 김재심 부부


 

▲농촌가구

  아들인 영표 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면 집안 형편도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부부는 가지고 있다. 이기대가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다. 희망치고는 무척 소박한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오늘따라 승명 씨 재심 씨 부부의 투박한 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전남 영암군 미암면 미촌마을, 나주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이 마음에는 마흔 다섯 가구 백 이십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생업이 농업과 축산이고 보면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농촌에서 장애우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올해 쉰 살인 안승명씨와 마흔 네 살인 김재심씨 부부는 이 마을에서 유일한 장애우다. 안승명씨는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고, 김재심씨는 시각장애와 지체장애 두 가지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다.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김재심씨 장애가 안승명씨보다는 덜한 편이다. 안승명씨는 두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어 사물을 전혀 볼 수 없는 반면 김재심씨는 관절염으로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다행히 한쪽 눈의 시력은 상실하지 않아 세상을 볼 수 있다. 농촌에 살면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건 뭘 의미하나, 물어볼 필요 없이 볼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김재심씨는 오랜 세월동안 남편을 대신해 밭일과 소, 돼지를 키우는 일을 하면서 이제는 허리가 휘었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교회 갔다와서 그때부터 일을 시작하죠. 밤 아홉시가 되면 겨우 일이 끝나요." 김재심씨 말이다. 그렇다고 안승명씨가 아내의 고생에 뒷짐만 지고 있었던 건 아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의 일을 덜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지금 이들 부부는 열 두 마리의 소와 세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는데 가축에게 하루 세 번 먹이를 주는 일은 안승명씨 몫이다. 밭일도 아내를 도와 풀도 뽑고 가지를 솎아주는 일쯤은 어려움 없이 해내고 있다.
  이들 부부가 이렇게 서로 도와가며,(김재심씨가 더 많은 고생을 하긴 했지만) 산 지가 올해로 이십 오 년째다. 그동안 부부는 슬하에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 영희 정화와 군대에 가 있는 아들 영표가 부부가 키운 자녀이다. 아이들을 다 키워서 그럴까, 아직 교육비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부부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다.
  그렇다. 부부가 툇마루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살아온 지난 시절 얘기를 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은 어찌됐건 삶에 여유가 있다는 증거다.
  이제 이들 부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자. 누구의 이야기부터 들어야 하나, 그래 안승명씨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승명 씨는 세 살 때 열병을 앓아 장애를 가지게 됐다. 육남매 중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의 장애는 식구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찢어지게 가난했던 집안 형편으로는 비록 그가 장남이긴 했지만 그를 위해 따로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정확하게 일주일동안 목포 맹학교를 다닌 전력이 있다. 하지만 그때 맹학교 형편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맹학교는 전적으로 미군 지원에 기대 운영되고 있었는데 영양식이라고 일주일에 한 번 우유 덩어리를 하나 주고, 밥은 쌀을 찾아볼 수 없는 순꽁보리밥이었다. 마침 아들을 보러온 부모님이 승명 씨가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부모님은 "우리집이 아무리 가난하지만 이렇게 먹이지는 않는다. 집에 가자"며 그를 잡아끌었다.
  승명 씨에게는 그때 부모님 손을 뿌리치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 있다. 왜냐면 그 후로 그는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집안형편에서 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보다는 비장애우인 동생들의 교육이 더 우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점자를 알지 못한다.
  승명 씨는 일주일동안 쐰 바깥바람을 끝으로 스물 일곱 살에 결혼하기까지 스무 해를 혼자서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주로 새끼를 꼬거나, 꼰 새끼로 멍석을 만들면서 지냈는데 이때 그의 유일한 취미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가요를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사랑이 어떻고, 이별이 어떻고를 흥얼거리는 동안 세월이 잘도 흘러갔다.
  그러다가 결혼 적령기가 됐다. 그는 장애와 가난 때문에 결혼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다만 외로워서, 이성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여자친구가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키우고 있었다. 그 바람이 너무 간절해서일까, 승명 씨에게 한 여자를 사귈 기회가 찾아왔다. 승명 씨는 실패로 끝났지만 개인수술을 받기 위해 한 달간 순천의 안과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던 한 여인을 알게 됐다. 그리고 인연인지 그 여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이년여를 사귀었다. 볼 수 없는 그가 어떻게 편지를 주고받았을까, 그에게는 다행히 그 일을 도맡아 해줄 여동생이 있다.
  그런데 그 여인과 결혼 이야기가 나올 무렵 부모님이 반대하고 나섰다. 여자의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그는 여자의 흉터를 이유로 더 이상 그 여인과 사귀지 말라는 부모님의 엄명을 받게 됐고 다시 혼자가 됐다. 이 무렵 한 중년부인이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그렇다고 여러 번 왔다갔다 한 건 아니고 딱 두 번 그를 보고 갔다. 두번째 그 중년부인이 다녀간 날 부모님이 그를 불렀다. "보름 후 네 결혼식을 올릴테니 그리 알고 있거라."
  그는 신부가 어떤 여자인지 몇 살인지,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않았던 결혼을 통보받게 되자 그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보름이라는 기간은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기에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김재심씨, 스물 한 살 때 그녀는 해남에서 살고 있었다. 그녀는 세 살 때 관절염을 앓아 다리를 절게 되었고, 눈은 어렸을 때 눈병을 앓았는데 그만 약을 잘못 써서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말았다.
  집안이 가난해 그녀 역시 학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네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하며 지내던 그녀는 어느 날 어머니로부터 "영암에 사는 좋은 남자한테 시집가게 됐으니 가서 잘 살아라."라는 통보를 받게 됐다. 그녀 역시 결혼하게 될 남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 성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승명 씨와는 달리 볼 수 있었는데 어머니는 남자 얼굴이 찍힌 사진 한 장 보여주지 않았다. 당시 심정을 재심 씨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저는요,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했어요. 어머니가 시집가라니까 온 거죠. 어머니가 일찍 혼자 되셔서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거기다 하나 있는 딸이 장애를 가졌으니까,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 부담감을 덜어주고 싶었고, 오직 어머니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했죠. 나는 그때 어머니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녀는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승명 씨 집에 온 칠십이년 이월 십일일, 그 날 처음으로 신랑 얼굴을 보고, 신랑이 볼 수 없는 시각장애우인 걸 알고 놀랐지만 아무런 이의 제기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맺어준 사람이니까 순종하며 살아야지, 그 생각만을 했다고 한다. 요즘 세상에 이런 신부를 찾아볼 수 있을까.
  한편 승명 씨도 결혼식을 치르고 난 후 비로소 아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지만 승명 씨 입장에서는 실망이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의 심한 장애 때문에 결혼을 못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온 글서는 선뜻 자신한테 시집온 재심 씨가 한없이 고마울 뿐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 결혼식을 치르고, 이어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소도 기르고, 돼지도 기르고, 수박, 마늘 농사도 짓고, 고추도 심어 거두며 살아온 이십 오 년 동안 부부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적어도 아내인 재심 씨가 결혼생활 내내 자신을 승명 씨에게 시집보낸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한 번도 안했다는 걸 보면 부부의 결혼생활이 별다른 갈등 없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결혼생활에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행복만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재심 씨의 고생이 심했다. "결혼하고 나서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옛날에 돼지도 많이 키웠고 소도 키웠는데, 남편이 도와주지 못하니까 소똥 치우는 일을 제가 다 해야 했죠. 그리고 답답할 때도 많았는데, 가축들이 아프면 치료도 해줘야 하는데 남편이 못하니까 내가 못 놓는 주사 놔가며 치료해야 했죠. 그렇게 삼백 육십 오 일 일만 했어요."
  그렇게 고생을 하다보니 재심 씨는 위안처로 신앙을 갖게 됐다. 그녀는 팔십 년에 논에서 일을 하다가 불편한 다리를 또 다치게 되면서 고통에 못이겨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 후 남편까지 인도해 부부는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는 등 신앙생활에 열심이다.
  또 하나 요즘 재심 씨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목포 나들이를 한다. 목포 가톨릭 회관에서 무료로 가르쳐주는 한글을 배우기 위해서다. 재심 씨가 뒤늦게 한글을 배우겠다고 결심한 것 다름 아닌 남편에게 글을 읽어주기 위해서다. 지금 부부의 두 딸은 영암군에 있는 학교 근처에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다. 그래서 집안에는 남편에게 오는 편지나 책을 읽어줄 사람이 없다.
  딸을 대신해 남편에게 글을 읽어줘서 남편의 답답함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재심 씨는 오늘도 열심히 기억 니은 한글 공부를 한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점자를 배우지 못한 승명 씨는 세상사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그런 그가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수단은 라디오를 듣는 것이다. 그는 집안에 있는 날은 하루종일 라디오를 틀어놓고 지낸다. 라디오가 들려주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어느새 하루해가 다 간다. 승명 씨에게는 가끔 시각장애우 단체에서 점자로 된 책을 보내오는데, 그 책을 읽고 싶어도 점자를 모르니 읽을 수 없다. 농협에서 보내오는 공문 내용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승명 씨는 답답하다. 그렇지만 이렇게 글을 읽을 수 없어 느끼는 답답함만 빼놓고는 비교적 그의 삶은 활기찬 편이다. 여기서 하루 일과를 설명하는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 갔다온 후에 소먹이 주고 난 후 허물어진 거나 고장난 물건이 있으면 고치죠. 제 자랑 같지만 손으로 만지는 일은 비장애우 못지 않게 해낼 수 있어요. 농기계나 밥통 같은 전자제품도 고치고 마을 사람 집에 보일러가 고장났다고 하면 남들보다 앞서 달려가서 고쳐드리고, 쇠문 같은 것도 고쳐주죠.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저에 대한 이해를 많이 해주시더라구요. 그렇게 마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헌신적으로 해주려고 하죠." 볼 수 없는 그가 어떻게 전자제품을 고칠까.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반복적으로 고장난 물건을 만지다보니 손에 익어 웬만한 전자제품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고칠 수 있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비단 전자제품만 고치는 게 아니다.
  그는 밭일도 남들 못지 않게 잘 한다. 부부가 같이 밭일을 나가면 재심 씨는 승명 씨에게 어디에 어떤 작물이 있다고 일러준다. 그러면 승명 씨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아내가 시키는 일을 착오없이 해낸다.
  그렇게 밭일을 하면서 승명 씨는 재심 씨에게 방송을 통해 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해준다. 승명 씨 이야기에 재심 씨가 대꾸를 하고,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서산에 해가 진다. 집에 돌아오면서 승명 씨는 재심 씨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힘들지? 미안해. 내가 못나 당신을 고생시켜서, 조금만 참아봐. 좋은 날이 있을거야."
  부부는 이렇게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며 살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부부를 힘들게 하고 있다. 부부가 키우는 소 열두 마리는 지금 사료값도 감당하기 힘든 형편에 놓여 있다. 소값이 폭락하다보니 처분하고 싶어도 살 사람이 없어 처분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값도 작년의 절반으로 떨어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 부부는 어쩔 수 없이 승명 씨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살고 있다.
  사는 형편이 어렵다보니 승명 씨는 정부의 장애우복지정책에 불만이 많다. "도시에 사는 장애우들에게는 지하철이나 항공요금 할인 같은 혜택을 주지만 농촌에 사는 우리 같은 장애우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어요. 그래서 말인데 정부가 장애우들이라고 해서 똑같은 복지혜택을 줄 게 아니라 소득이 있는 장애우와 없는 장애우를 구분해 형편에 맞게 복지정책을 시행했으면 좋겠어요."
  승명 씨 말을 받아 "도시에 나가 살 생각은 안 해봤냐?"고 물어보자 승명 씨는 "시골에 사는 게 문화혜택은 받을 수 없지만 저 같은 경우는 오히려 좋지요. 시골에서는 밭일도 하고 가축도 키우니까 소일거리가 있지만 도시에 나가서는 뭘 할 수 있겠어요?"라고 반문하며 환하게 웃는다. 승명 씨 재심 씨 부부가 요즘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 제목은 "군에 가있는 아들이 나라에 필요한 일꾼이 되게 해달라"는 것이다. 아들인 영표 씨가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하면 집안 형편도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부부는 가지고 있다. 이 기대가 부부의 유일한 희망이다. 희망치고는 무척 소박한 희망이 아닐 수 없다.
  거창한 것이 아닌 작은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오늘따라 승명 씨 재심 씨 부부의 투박한 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글/이태곤 기자

사진/윤선애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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