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내 아픔이죠, 나를 돌보는 거예요.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내 아픔이죠, 나를 돌보는 거예요.

장애우 목사 이병상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내 아픔이죠, 나를 돌보는 거예요.

 - 장애우 목사 이병상 -

 

▲장애우 목사 이병상씨

그도 다른 근이양증 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장애가 진행돼 이제는 왼손마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 또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장애우들이 불쌍하다고 하지만 제일 불사한 장애우는 제 손으로 신변 처리를 못하는 장애우들입니다. 저도 사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비참한 지경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장애우 목사 이병상 씨의 사는 이야기.

 

 

 교회 이름에 장애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이한 교회가 있다. 서울 진관내동에 있는 "성민장애우교회"가 바로 그 교회이다. 이 교회는 교회 이름에서 보듯 장애우 신도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신도 수를 살펴보면 장애우가 사십여명, 비장애우가 이십여명이다. 장애우 신도 사십여명 중에는 근이양증 장애우가 십오명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장애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뇌리 속에는 성민장애우교회는 장애우들 중에서도 근이양증 장애우들이 모이는 교회로 인식돼 있다. 특히 근이양증 장애우들 모임인 "상록수 독서회"가 이 교회에서 출발했고, 지금도 교회에서 정기 모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민교회 하면 쉽게 근이양증 장애우들을 떠올리는 지도 모른다.
 이 교회를 설립한 이병상 목사는 올해로 십 년째 이 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목회자로서 그는 이 땅의 얼마 안되는 장애우 목사 중에서도 제일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 목사로 꼽힐 만하다. 그는 근육의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서 결국 사망에 이르는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이 장애는 그로 하여금 휠체어에 의지해 목회 활동을 하게 만들고 있다.
 휠체어를 탄 목사는 흔하게 목격할 수 없다.
 그의 신분이 목사인 만큼 그와의 만남은 자연적으로 교회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장애우 교회를 설립하게 된 동기를 "장애우들을 위한 교회가 따로 세워진다는 것은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죠, 그렇지만 현실은 기존 교회들이 장애우들을 거부하고 있어요. 일천명, 이천명 모이는 교회도 장애우가 몇 명이 나오는가, 세어보면 열손가락 미만이거든요. 그런 걸 볼 때에 큰 교회들이 교회 주변에 살고 있는 장애우들을 함께 예배드릴 교회 구성원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대상으로 장애우도 하나님의 백성이다. 함께 예배드리길 원한다는 걸 말하기 위해 우리 교회가 있는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성민장애우교회"가 근이양증 장애우들만을 위한 교회라는 인식에는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우 교회라는 것도 문제인데 장애우 중에서도 근이양증 장애우만을 위한 교회라면 교회 보편성에 어긋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교회외에도 작은 규모의 장애우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소규모 장애우 자립작업장으로 시작된 공동체는 그동안 코일 감기, 비누세트 포장하기 등 여러 가지 하청 일을 하다가 지속적인 일감이 없고, 힘만 들었지 수입이 얼마 안되는 바람에 문을 닫고 지금은 단순 수용시설의 헝태로 운영되고 있다. 공동체에는 지금 다섯 명의 근이양증 장애우들이 있다.
 이제 그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이남삼녀 중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가 자신의 장애를 알게 된 것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한창 공부에 열중하던 때였다. 제대로 걷지를 못하고 자꾸 넘어지면서 그는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았다.
 그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지만 신체의 이상한 징후를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의사인 작은 아버지에게 몸의 이상이 발견되면서 서울에 있는 국립의료원에 입원해 정밀 검사를 받게 됐다. 병원에서는 그의 장애를 근육위축증이라고 진단했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장애명 이었다. 그는 "내 장애가 무엇을 의미하냐?"고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점차 근육이 위축돼서 나중에는 못 걸어 다닌다. 현대의학으로서는 고칠 방법이 없다."라고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줬다.
 의사의 말은 그야말로 그에겐 청천벽력이었다. 특히 멀지 않은 미래에 걸어 다닐 수 없다는 것은 그가 꿈꾸던 인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장차 공대에 진학해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공학도가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당장 못 걸어 다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 입시를 치르고 그는 대학에 진학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응시해 당당히 합격을 했다. 그런데 대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점점 심해져 가는 장애 때문에 절망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붙잡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신앙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주위에서 목회자가 될 것을 권유할 정도로 그의 신앙심은 깊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목회자가 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목회자가 되기보다는 전공을 살려 일을 하면서 장로로 교회에 봉사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쨌든 이 신앙심이 무너져가는 그를 지탱해 왔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무사히 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상하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취직한 곳은 한국 과학기술연구소 전산실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막 우리나라에 도입된 컴퓨터 프로그래머 일을 했다. 이 때가 일천구백칠십일년이었는데, 이때 그의 장애는 계단을 제대로 오르지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 더 이상 신앙심만으로는 버틸 수 없을 상황이 전개되면서 그는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갈등 속에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연구소를 그만두는 길밖에 없었다.
 연구소를 그만둔 그는 목발을 짚고 외출을 할 수 있기까지 상당시간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었는데 이때 설상가상으로 집안에 불행이 찾아 들었다. 작은 사업을 하던 그의 아버지가 사업 실패로 곤경에 처하면서 가세가 기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자 장남인 그로서는 집안의 불행을 모른 체 할 수 없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위해 일을 시작 했다. 그가 한 일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조그만 가게에다 국수공장을 차리고 공장을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동생과 함께 국수를 뽑고, 파는 일에 하루종일 매달렸다. 이때 그의 나이 이십팔세였다. 일년 정도 그 일을 했는데 화가 나서 오기로 살았던 시기라고 그는 이 시기를 회상하고 있다.
 그에겐 힘든 나날들이었지만 운이 좋았는지 국수공장이 잘 돼 그의 집안은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대신 그의 장애는 나날이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그는 이젠 혼자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심한 장애를 가지게 됐다. 한번 주저앉으면 못 일어나게 되자 그는 다시 한번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됐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그 당시 그는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 같은 막막함을 느껴야 했다고 한다.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
 그렇게 돈독한 신앙심도 무의미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어찌 보면 그로서는 당연한 원망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비관 쪽으로 기울면서 그의 하루하루는 고통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절망 가운데서도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님과 담판을 짓고 죽자."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기도원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약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가, 막상 기도원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러다가 기도원에 가서 죽게 되면 어떡하나 라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기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어느 날 그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죽으면 죽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 결심을 하고 난 다음날, 그는 짐을 꾸려 경기도에 있는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그의 회상에 따르면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하던 중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했다고 한다. 그 체험으로 그는 더 이상 장애를 고민하지 않게 되었고, 삶과 죽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새롭게 시작된다.
 기도원에서 내려와서 그가 처음한 일은 과외교사 일이었다. 이일을 하면서 그는 용돈 문제를 해결했다. 그렇지만 확실한 직업이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삶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 일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예전에 그가 다니던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같이 봉사하던 황 아무개 집사가 그를 찾아왔다. 그 황  집사는 하남시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를 찾아온 용건을 "하남시에 장애우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 악세사리 수출업체인 삼영금속이라는 회사가 있어요, 이 집사님 생각이 나서 그 회사에 찾아가서 채용 여부를 얘기해 봤더니 이 집사님 이력서를 가져와 보라고 해서 찾아온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지는 감동을 맛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가겠다."고 대답하고 이력서를 써줬다.
 며칠 후 황 집사가 다시 찾아왔다. "덕풍리 공장에서는 대졸자가 필요하지 않고 하일동 본사에 가면 혹시 채용할지 모르겠다고 회사에서 말하더라."며 "나와 같이 본사에 가보자."고 그를 채근했다. 그는 황 집사와 함께 삼영금속 본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날은 신통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는 총무과장을 만났는데 총무과장은 "금년에는 대졸 사원채용 계획이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력서나 두고 가라."고 말했다. 그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는 "채용이 확정 됐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그는 뛸 듯이 기뻤다. 그래서 전보를 받자마자 회사를 찾아갔다. 그를 면접한 삼영금속 상무는 "당신 혼자서 충분히 살 수 있는 사람이 장애우가 되고나서 다른 장애우를 생각하는 마음에 감동을 받았다."며 "장애우들이 취업하고 있는 덕풍리 공장의 관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삼영금속이라는 회사에 취직했다. 지금은 없어진 회사지만 칠십팔년 당시만 해도 이 회사에는 일백여명의 직원에 장애우가 육십여명이나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공장 기숙사에서 장애우들과 같이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는 장애우의 아픈 삶을 목격한다. 역시 그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는 장애우들이 사회적으로 멸시받았던 때여서 내일에 대한 비전이 없다보니 장애우들이 애써 번 수입으로 술 먹고, 노름하고, 놀러 다니고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싸우곤 했다." 이런 장애우들의 열악한 현실은 그로 하여금 다시 한번 절망하게 만들었다. 그 절망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그가 선택한 자구책은 회사에 신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삼영금속에 "삼덕회"라는 신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신우회를 만드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는 이때 내친 김에 장애우 선교를 위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당시 그의 계획은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목회자가 된 다음 다시 돌아와 삼영금속안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신학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를 결심하자 주위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당신 입장에서 이만한 직장 얻기가 힘드니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만류를 무릅쓰고 신학대학원 진학을 위해 과감하게 사표를 썼다. 그런 다음 훌쩍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이 시기 그는 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기도원에서 지금의 아내 이은경 씨를 만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서른네살이었고, 이은경 씨는 스물여덟살이었다. 유치원교사였던 이은경 씨는 기도원에서 찬양 봉사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귄지 일년 만에 백년가약을 맺게 된다. 물론 이은경 씨 집안의 반대가 있었다. 이은경 씨 부모는 "고르고 고르더니 하필이면 왜 그럼 사람이냐."고 난리를 쳤지만 이은경 씨의 확고한 결심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혼으로 생의 든든한 반려자를 얻게 된 그가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들어간 것이 일천구백사년이다. 막상 바라던 데로 신학대학에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학비 마련 때문에 그는 전전긍긍해야 했다. 가산이 기운 그의 집안은 그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는 교정 일을 해서 겨우 등록금을 마련하고 번역 아르바이트를 해서 필요한 학비를 조달했다.  "그때 내 형편이 어땠냐면 집에서 어렵게 어머니한테 일만원을 타 갖고 나와요, 그 일만원 중에서 왕복 택시비로 칠천원을 쓰고 나면 수중에 삼천원이 남았는데 그 삼천원으로 일주일을 살아야 했어요. 사실 그 돈으로는 식대도 충당할 수 없었죠."
 신학대학에 편의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은 것도 그를 괴롭혔다.
그는 학우들에게 업혀 다니면서 겨우 공부를 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그는 팔십육년 봄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런데 그가 돌아가고자 했던 삼영금속은 이미 부도가 나 없어져 버린지 오래였다.
 그는 다시 한번 막막함을 맛보아야 했다. 장애우인 그를 초빙하겠다고 나서는 교회는 단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그는 손수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 건물을 빌릴 돈이 없었던 그는 아버지 집 방 두 칸을 빌렸다. 그곳에서 근이양증 장애우 대여섯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지난 팔십칠년 사월 십이일, 그로부터 구년이 지난 교회는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성민장애우교회 십 년의 역사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로 그는 팔십팔년 갑자기 땅 주인이 나타나 교회를 이전할 것을 요구해 왔던 시기를 꼽는다. "그 사건으로 근 일년을 법정에 드나들었어요. 결국 우리가 져서 쫓겨나야 했죠. 그 당시 십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릴 땐데 우린 대책이 없었어요. 임대 건물을 얻으려 해도 줄 사람이 없고, 이층, 삼층 건물은 계단이 많아 준다고 해도 얻을 수도 없고. 상황이 그렇게 되다보니 교회 건축 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교회건축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다행스럽게도 여기저기서 건축헌금이 모였다. "이 교회는 전적으로 모금으로 지었어요. 나중에 결산을 해보니 건축하는데 팔천사백만원이 들었는데, 그 돈 중에서 교회 자체에서 나온 헌금은 오백만원 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주위 분들이 도와주신 거예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의 살아온 이야기다. 이제 그와 간단한 인터뷰를 해 본다 먼저 떠오르는 질문이 장애우 교회 하면 단순히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장애우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나 어려움을 해결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그는 "그렇습니다. 심방을 가서 장애우들의 사는 모습들을 보면 정말 가슴 아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당장 살아야 하는데 양식이 없죠. 겨울엔 땔감이 없고 추운 방에서 혼자 지내는 모습을 목격하곤 해요. 이런 생활도 문제지만 너무 외롭게들 사는 모습이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누군가 옆에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럴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고 어떻게 삽니까? 라는 불평 아닌 불평이 나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주는 거죠. 이런 식으로 장애우 목회는 일반 교회의 목회와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제가 장애우 신도 한사람에 대해 쏟는 관심은 일반 교회가 신자들에게 갖는 관심의 열배는 될 거에요. 그렇다면 우리 교회도 사오백명이 모이는 교회라고 볼 수 있죠."라고 말한다.
 내친 김에 그동안 그가 목격한, 그의 눈에 비치 장애우들의 사는 모습을 들어보았다.
 "장애우들도 부모 슬하에 있을 때에는 괜찮은데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거처할 데가 없어요. 하긴 부모 자식이 살아 있어도 마찬가지죠. 우리 공동체에 있는 안병희 집사 같은 경우는 부인도 있고 자식도 있는데 자식은 군대에 가 있고 부인은 일 나가니까 집에서 돌봐줄 사람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귀찮은 존재로 여겨져 우리에게 오게 됐죠. 얼마 가서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건 제가 목회 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인데, 이십대 전후 청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근이양증 장애우들이죠. 장애가 진행돼서 결국은 세상을 떠나는데 그동안 내가 직접 장례를 치른 장애우만도 다섯명이나 됩니다. 그 중 한 청년 장애우는 장애에 적응을 못해 술, 담배에 찌들다가 어느날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그 청년의 빈소에 가서 마음이 아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도 다른 근이양증 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장애가 진행돼 이제는 왼손마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때문에 그 또한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장애우들이 불쌍하다고 하지만 제일 불쌍한 장애우는 제 손으로 신변 처리를 못하는 장애우들 입니다. 저도 사실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비참한 지경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병상 목사는 "훗날  우리 교회도 교회 이름에서 장애우 자를 뺄거에요. 그게 언제냐면 동네에 있는 교회들이 장애우들이 부담없이 출입할 수 있을 때이겠죠."라고 쓸쓸한 표정으로 덧붙인다.
"내 아픔이죠, 나를 돌보는 거예요." 그가 독백을 하듯 가슴 속에 있는 말을 토해냈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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