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와 친근한 벗으로 우리 앞에 선 연기자 문성근 > 세상, 한 걸음


이제는 돌아와 친근한 벗으로 우리 앞에 선 연기자 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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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첫날 개봉한 영화 "죽이는 이야기"가 화제다. 우리 나라에서는 흔치 않게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내용으로 한 영화"라는 이야기구조에서 자기들 멋대로인 배우들에 치이고 제작자의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고심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문성근 씨가 눈에 띈다.
  지난해 4년여만에 "그것이 알고싶다"의 진행자로 돌아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그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올해부터 시작하는 "장애인과 친구들"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최근 밝혀 그의 행보를 지켜보는 일에 더욱 관심이 모아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를 만나 IMF시대 영화인으로서 갖는 고민을 들어보고 장애우에게 열어놓은 그의 마음 한 쪽을 확인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지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살았었다는 뜻밖의 고백

  그는 늘 지적 콤플렉스에 시달리면 살았다고 한다. 갤서 멍청히 있으면 시간을 죽이는 것 같아 손에서 항상 책을 떼지 말아야지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부친인 고 문익환 목사를 비롯, 고모, 작은 아버지 등 집안에 학자들이 많았는데 그런 가족들 사이에서 지적으로 뒤쳐지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그렇게 된 것 같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연기인" 문성근의 대표적인 "지식인" 이미지는 그렇게 외모에서만 느껴지는 감(感)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도 된다.
  그러나 "세상밖으로"나 "꽃잎"같은 영화에서 어느날 갑자기 막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탈옥수나 막노동꾼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을 때는 영락없이 일자무식의 시정잡배 같기도 하다.
  저 사람한테 원래 그런 본성이 숨어있었나 싶던 놀라움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있을 무렵 4년여만에 그는 다시 예의 또박또박한 말투로 단호하게 사회 구석구석의 문제를 지적하는 시사고발프로그램 진행자로 돌아왔다.
  그 첫 방송으로 유부도라는 한 섬에 세워진 정신요양원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인권유린상이 다뤄졌다. 흥분과 분노를 절제하는 듯한 명료한 말투로 이러한 사회비리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다짐하는가 하면 또 지뢰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자신의 고등학교 동기가 바로 그 지뢰의 피해자임을 밝히는 그를 우리는 보았다. 그런 그는 저만치 멀리 그리고 높이 놓여 있는 무대 저편의 사람이 아니라 술잔을 나누며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됐냐는 한탄을 나누고픈 객석이편의 이웃으로 성큼 다가온 듯 하다.
  더욱이 얼마 전 그는 장애우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지난해 12월 창립 10주년 기념식을 기해 98년부터 새롭게 추진해나가겠다고 천명한 "장애인과 친구들" 운동에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제까지 그가 장애우와 삶의 한 순간을 같이 했던 기억은 어떠했을까. 그를 만나러 가면서 내내 "그것이 알고 싶었다."
  "뭐니뭐니 해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성재 이사장님과의 인연이 가장 오래됐죠. 제가 중학교 때부터 김 목사님을 보고 자랐으니까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문동환 목사님이 모두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 교수셨고, 그래서 저는 교수사택에 살았는데 당시 김 목사님은 학생이셨어요. 물론 김 목사님한테 장애우라고 하는 특별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항상 밝은 성격이셨고, 저한테 늘 공부 좀 하지 그러니, 대학은 가지 그러니 하고 따뜻한 충고를 해주시던 분으로만 기억합니다. 그러고 그때 한국신학대학의 다른 교수 사모님이 그러니까 어릴 때 사고로 척추장애우가 되신 분이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다일 때인데, 한 번은 전체 학생과 교수가 북한산으로 등산을 갔었습니다. 정상에 올라 쉬면서 즉석 장기자랑무대가 펼쳐졌는데 한 학생이 말하자면 그 사모님의 장애를 흉내낸 듯한 춤을 췄어요. 아버지가 그걸 보시고 "장애를 너무 희화화하는 것 아니냐"며 언짢아 하셨던 게 계속 기억에 남아요."
  얼마전 한 방송에서 그와 형 아우하며 지내는 여균동 감독이나 최근 영화작업을 함께 한 배우 황신혜 씨는 그를 두고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데 특히 이 부분을 이야기할 때 예전 기억을 더듬는지 말은 점차 느려지고 눈빛은 허공을 계속 헛돌았다. "또 초등학교 5학년때 단짝 친구가 소아마비장애우였는데, 제가 어떤 면에서 다른 친구들의 놀림으로부터 그 친구들을 보호해준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당시 반아이들도 절대 놀리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지금은 그 친구와 연락이 안됩니다만."
  곧이어 그는 이런 얘기를 덧붙였다. "당시 한국신학대학은 교수 사택이나 학생들 기숙사가 모두 개인단독주택으로 돼 있어 묘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었어요. 학생과 교수 숫자가 많지 않기도 했지만 그 모두가 종교적인 일체감에서 뿐만 아니라 학문과 생활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남녀간 성역할이나 장애우에 대한 인식등에 있어서도 한 발 앞서 나가 있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을 한 것이 그후 제 자신의 삶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새삼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가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한 평생을 헌신한 고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 부부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문성근이라는 사람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이 사회에 대해, 다른 배우들과는 다른 명확한 가치인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점은 그가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로 우리 앞에 처음 나타났을 때 단지 그 음성이나 외모에서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전체가 딱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사회문제 끝까지 추적하겠다"로 멘트 고쳐

  1년 9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면서 그와 프로그램 모두 명성을 쌓아나가던 93년 말, 홀연 그는 방송진행을 그만 두겠다고 선언했다. 제작진을 비롯해서 그때 그의 결정을 말린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중이던 한 여성분은 한국에 잠시 다니러 온 김에 방송국 연락처를 어렵게 알아내서 "영화 한편 보다 "그것..." 한 편이 사회적으로 훨씬 더 중요하지 않는가"라는 간곡한 만류의 말을 그에게 전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그에겐 연기자로서 "좋은 영화 한편, 그 속의 괜찮은 연기 한 번"에 계속 도전하고 싶은 욕망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게 인간인 것 같아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이 아니라 다른 길이 더 너에게 맞고 편하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그 방면에 재주가 없고 해도 안되는 일일지라도 그 자신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이죠. 끝이 뾰족한 산에 바위를 굴려 올리는 신화속의 시찌푸스처럼 말이죠."
  "그것이 알고 싶다"의 전체적인 제작흐름에 진행을 맡고 있는 자신의 가치관이나 윤리적인 판단도 개입돼서 한회 한회 거듭할수록 보람은 있었다. 그러나 "연기자"로서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진행자라고 하는 하나의 캐릭터를 수백 번 되풀이하다 보니 연기의 측면에서는 더 도전할 부분이 없는 것도 같아 중단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느님이 개개인에서 주는 달란트라는 게 몇몇 특별한 사람을 빼고는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거든요. "그것..." 진행이 저한테도 맞고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이라면 그 일을 우선 하고 그 다음에 다른 영역에 대한 도전을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4년여 만에 다시 진행을 맡게 됐죠."
  -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방송에 복귀하시면서 첫 회에 다루었던 것이 정신장애요양시설인 유부도의 장항 수심원의 인권탄압문제였는데요. 90년도에 이미 바로 그 방송에서 다뤘던 사건이기도 했고, 지난해 첫 방송이 나간 후 몇 주 후에 또 다시 다루지 않았습니까. 이번 수심원관련 방송과정에서 제작팀과 함께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으셨나요.
  "수심원문제를 다룬 첫 번째 방송에서 작가가 "아무리 지적해도 바뀌지 않는 사회 현실 때문에 참으로 난감하다"라는 식으로 마지막 멘트를 써놨더군요. 그게 사실 방송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많은 현장 조사를 거쳐 정말 개선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 방송을 내보내지만 결국 안변하거든요, 그대로죠. 변하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좋아지겠어요.
  더군다나 현실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움추려 들게도 되는데, 우리마저 지치면 이 프로그램을 하는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얘기해서 결국 "이러한 문제점을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팀은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멘트를 고쳤죠. 이 프로그램 진행을 다시 맡으면서 제작진과 조그만 변화가 있어도 계속 추적 보도해 나가자, 이런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부도문제도 또 다시 다룰 가능성이 있죠."
  - 영화도 그렇지만 방송도 점점 시청률 확보를 위한 재미와 오락성이 지상과제가 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만, "그것..."과 같은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일요일밤 7시에 편성한 것은 어떻게 보면 모험이라고도 보여집니다.
  "모험이고, 방송사에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시도예요. 방송이 전체적으로 오락성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는 상황에서 방송사에서 왜 그런 편성을 했는지 잘 알고 있고 그 뜻이 고맙기도 해서 한 번 해보자고 그랬죠."
  심야시간대에 머물러 있던 프로그램을 문성근 씨를 재기용함과 동시에 황금시간대인 일요일 밤 7시로 옮긴 것을 보면 방송사측이 그에게 갖는 신뢰가 어지간히 높은 듯 하다. 그런데 시청률로 프로그램 성과를 판가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를 비롯한 방송국 제작팀이 시청자들로부터 맛본 것은 결국 배반의 쓴맛만은 아니었을까. 다행히 현재까지는 괜찮다고 했다.

 

독립운동 하듯이 영화를 계속하는 심정

  올해 1월 1일 개봉한 영화 "죽이는 이야기"가 과연 많은 관객들을 죽여줄 것인지, 아니면 영화 혼자만 덜렁 죽을 것인가에 영화계 전체적으로 뜨거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현 시대를 그야말로 "도탄"에 빠뜨린 채 한국사회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는 IMF 망령은 영화계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꿈을 낳는 산업이라고 하는 장미빛 환상만을 안고 영화계에 뛰어들었던 대기업 자본들도 전체적인 재정위축을 이유로 한두 군데만 남고 다들 썰물처럼 빠져 나가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영화는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사업이라는 사실을 영화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에게나 자본을 댈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환기시켜야 한다는 부담이 그를 비롯한 영화제작팀에게 졸지에 떠안겨지게 된 것이다. 한 방송국에서 대선이 끝난 후 마련한 한 쇼프로그램에서의 짤막한 인터뷰에서조차 "한국 영화를 보면 한 푼도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고 외치듯 말하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절박함 때문이다.
  그가 이제까지 출연했던 15편의 영화 가운데 언론이나 영화평론가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찬사를 받았으나 결국 5억원이라는 씁쓸한 적자 기록과 함께 그에게 적지 않은 상흔을 남겼던 "초록물고기"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그래서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과연 우리 사회에서 예술영화가 가능한가"라는 고민을 하면 산다고 했다.
  "절대 관객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죠. 영화제작에 관련된 사람들이 물고기이고 관객은 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을 해보자 하는 영화에는 보러 오는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인 거죠.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우리의 척박한 문화풍토의 현주소이기도 하니까요."
  이미 그는 여러 차례 아프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대에 연극영화과를 만들자 등등의 의견을 주위 사람들에게 꾸준히 제안하고 영화산업의 전반적인 문제점능 다뤄 보자며 방송콘티까지 완벽하게 짜서 가져가 보았댔자 할 일 많다는 세상에서 사실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의 주류가 될 수 없는 그냥 "영화"이야기였던 것이다.
  "영화를 그냥 단순한 오락거리로 볼 수도 있지만 요즘같이 전세계가 동일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으로 살려면 나름의 문화가 있어야 하고 문화를 선전하는데 있어 가장 영향력이 있는 영화를 살리고 지원해야 한다."는 점을 문화정책입안자들이 외면하는 현실이 그는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 한 편으로 벌어들인 돈 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을 무슨 구호처럼 되뇌며 들어왔다가 계산기를 두드리고는 금방 손 털고 돌아서 버리는 대기업 자본에도 그는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미국이나 홍콩의 영화산업이 가지고 있는 시장의 기본 배경은 보지 않고 한국의 상황을 그들과 단순 비교만 하다가 이내 포기해버린 그들의 근시안은 그를 답답하게 한다. 그래서 결국 그가 바라는 시대가 되기까지는 "독립운동을 하듯이" 그렇게 영화를 찍어가야 할 것 같다고 한다.

 

"나이가 들었나봐요"

  그는 올해로 마흔 여섯이 됐다. 가까이에서 본 그의 머리에는 하나둘씩 흰머리카락이 섞여 있었고 멜로영화를 찍기에는 이제 그의 이마도 너무 넓은 듯(?) 했다.
  - 재야쪽의 문화공연 출연요청도 많이 받으셨을 줄 압니다만 평소 하고싶은 일과 해야하는 일에 대한 고민을 어떻게 조절해 오셨나요.
  "나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 더 많이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더군요. 사실 몇 년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에 참여했지만 다른 분들이 저를 보면 응당 와야할 사람이 왔나보다 하세요. 그런데 지난해 하루 감옥체험때 권해효 씨가 참여해서 관심을 모았잖아요. 저 보다는 이제 그런 분들이 자꾸자꾸 무대를 채우는게 더 효과적일 것 같아요."
  - 뻔한 질문 같지만 장애우역할의 연기를 해볼 의향은 없으십니까. 영화 "포레스트 검프"나 "나의 왼발" 같은 경우 잘만 하면 그야말로 연기력이 더욱 두드려져서 연기상도 쉽게 받지 않습니까.
  "실은 저도 한 텔레비전 단막극에서 나환자의 미감아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역할을 예전에 맡았었는데 그 교사가 한 쪽 다리가 절단된 지체장애우였어요. 극중에서 의족을 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다리에 붕대와 석고를 바르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처럼 해서 연기를 했었죠. 전체적인 내용은 결론적으로 나환자나 미감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마을 사람들과의 갈등을 그린 것이었는데, 나환자연합회분들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다루어지는 것 자체를 극렬하게 반대해서 결국 방영되지는 못했습니다만."
  - 미국의 "포레스트 검프"나 "7월4일생" 같은 영화를 보면 컴퓨터 그래픽으로 감쪽같이 절단장애우를 만들어서 어떻게 보면 더 흔하게 장애우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기도 한데요.
  "그게 돈이나 기술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 작업이예요. 일기예보 하듯이 특수한 파란색 천으로 그 부위를 감아서 일일이 그 장면을 다시 촬영해야 하죠. 아직 한국영화에서는 경제적인 여건상 활발하게 그 기법을 사용하지는 못하니까 직접 장애우가 연기하면 돼죠.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찾아오셨어요. 지체장애가 심한 분이셨는데 장애우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달라고 하시더군요."
  - 장애우의 친구가 된다고 하면 어떤 마음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으세요.
  "글쎄요. 사실 아직 명확하게 상은 잡을 수 없지만 장애우라고 해서 일반 비장애우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물론 정신지체장애우문제를 어떻게 사회적으로 풀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남을 것 같습니다."
  무역학과를 나와 건설회사에도 다니던 그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은 이것이 아니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냥 눌러둘 수만은 없었다. 휑하니 열려 있는 무대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며 자신의 다른 일면을 그 스스로 들여다보고 또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연기라는 일을 본업으로 갖게 된 것이 서른 넷의 나이.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자신의 길을 찾은 듯했다. 다행히 "한씨연대기"나 "철수와 만수"와 같이 초창기에 그가 출연한 연극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나름대로 연극계에서 성공작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학구적인 주위 가족과 친척에 비교하면서 가졌던 자신의 지적 콤플렉스는 연기자가 된 다음에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고 했다. "사람마다 쓰임새가 따로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연극에 이어 텔레비전 드라마, 그리고 방송진행, 영화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폭을 넓혀온 그였지만 요즈음은 또 한 차례의 모색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요사이 충무로 영화판에서는 이미 완성된 시나리오들도 돈이 적게 드는 쪽으로 다시 다 뜯어 고쳐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대학로 소극장들에서 연극공연을 하는 사이사이 프로젝트로 영화를 쏘는 게릴라식 방법을 시도해보자는 시작했다. 그것이 최소한 한국영화를 죽이지는 않을 현실적인 구제책이기 때문에.
  "당분간 영화출연은 힘들 것 같고요. 취재를 직접 다니거나 하면서 방송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있습니다. 여균동 감독은 영화에 관련된 글이나 시나리오를 써 보라고 하는데 아직은 주제넘은 짓 같아서 못할 것 같고요."
그는 이미 우리의 친구가 되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에게 "여러분"이라는 노래가사처럼 내가 내가 우리가 화답하기 위해 영화관에 가서 그를 보자.

대담 및 정리 한혜영 기자
사진 이정률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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