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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조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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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이야기]

 

조 월 자

 

막내 정학이는 요즘 들어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걷다가 넘어지기 일쑤이다. 저러다 결국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자신처럼 앉아서 남은 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앉아서 생을 보내기에는 정학이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정학이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다. 열한 살 아이가 주저앉는다면 그녀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한 가정에 네 명의 장애우가 있다. 그리고 집안을 합쳐서는 여덟 명의 장애우가 있다. 한 집안에 한 명의 장애우만 있어도 뒷바라지에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우리네 현실에서 네 명의 장애우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고, 한 집안에 여덟 명의 장애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무척이나 당황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이건 도대체 무언가? 라는 질문을 저절로 하게 만든다. 천형인가, 아니면 조물주의 실수인가, 왜 이런 가혹한 일이 일어났는지 누가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올해 서른일곱 살인 조월자 씨, 그녀는 근이양증 장애를 가지고 있다. 몸에서 점차 근육이 빠져나가 결국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장애, 이 장애를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자녀도 같이 가지고 있다.
 그뿐 아니다. 그녀의 두 오빠도 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녀의 사촌 오빠, 언니도 이 장애를 가지고 살고 있다. 정리하면 그녀 집안과 작은집 집안 합쳐 모두 여덟 명의 근이양증 장애우가 있는 셈이다. 그래도 그들은 삶을 산다. 삶이 그네들을 속였지만 그네들은 억척스럽게 산다.
 그 버거운 삶의 한가운데에 있는 조월자 씨를 만나보자. 조월자 씨는 가정주부이다. 그녀가 사는 곳은 전북고창군 상금리 중금부락이다. 이곳에서 올해 쉰 살인 남편과 열일곱 살, 열네 살, 열두 살, 먹은 세 자녀, 합쳐 다섯 식구가 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잠시 설명을 덧붙이자면 그녀가 살고 있는 중금부락은 원래 그녀의 친정이 있는 곳이다. 실제로 지금도 그녀의 집 바로 앞에 노모와 큰오빠가 사는 집이 있다.
 그녀의 시집 식구들이 살고 있는 곳은 전남 영광군이다. 남편이 장남이고 보면 그녀가 시집을 떠나 친정에서 사는 것이 언뜻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녀가 왜 시집을 떠나 친정에서 살까?
 조월자 씨의 처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가 지금의 남편 한석길 씨를 만난 것은 18년 전인 1979년이다. 그녀는 중매로 남편을 만났는데 만나자 마자 결혼했다. 물론 그때도 그녀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걷는 게 불편해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장애우임을 알 수 있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장애우가 그것도 여성이 장애를 가지고 있다면 결혼에 어려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결혼에 장애가 걸림돌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양쪽 집안이 모두 절박한 사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한석길 씨의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다. 노총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구남매 중의 장남이라는 게 부담이 됐다. 말하자면 동생들 때문에 빨리 결혼을 서둘러야 할 입장이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소작농으로서 경우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조월자 씨는 어땠는가, 그녀 집도 가진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나이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그녀보다 열세 살 이나 많은 남자와 만나 결혼할 수박에 없었던 것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다. "장애가 더 심해지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성황에 떠밀려 그녀는 결혼했다. 결혼을 하기 전 그녀는 "나는 밥도 못 하고 상도 못 든다. 그래도 결혼 할 거냐?"라고 한석길 씨에게 물어보았다. 지금 남편이 된 사람은 "내가 다 죽게 생겼더라도 일단 결혼하겠다."고 대답했다. 본인의사가 이렇게 확고한 만큼 나머지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시댁에서는 "저 좋다는데 어떻게 말리냐."며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했다.
 79년 3월에 결혼한 그녀는 80년 2월에 첫 애를 세상에 내보냈다. 살림이 쪼들리는 것만 빼놓고는 조월자 씨의 결혼 생활은 우리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밥은 시어머니가 했고 빨래는 시누이들이 도와줬다. 그녀는 남편 뒷바라지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을 조르기 시작했다. 분가를 하고 싶어서였다. 아무리 시댁 식구들이 도와준다지만 정상적인 맏며느리 역할을 못해냈던 그녀로서는 불편하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따로 나가 살자."고 남편을 졸랐다. 분가 이야기가 나오자 시어머니는 "한 동네에서 산다면 절대 분가를 못 시켜준다. 대신 친정에 가서 산다면 분가를 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이런 시어머니의 방침은 내심 그녀가 바라던 바였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가를 서둘렀고 얼마인가 남편과 첫 아이를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결혼해서 떠난 지 2년여 만에 다시 돌아온 친정집, 그렇지만 친정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친정집도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런 형편에서는 친정도 그녀를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친정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친정집 대신 친정집 바로 뒤에 있는 조그만 흙담집에 살림을 풀어놨다. 그런 다음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정이 있는 마을의 고향에서의 고된 삶을 시작했다.
 그녀는 장애 때문에 밖에 나가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적으로 남편의 수입에 기대 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전형적인 시골마을에서 일을 해서 고정수입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땅 한마지기 없는 그녀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품을 파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마저 일정치 않아 일 나가는 날 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이런 실정에서 연년생으로 두 아이가 더 태어났다. 당장 먹을 게 없어 배를 곯아야 했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으로 점철된 날들, 그날들에 그녀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제 그녀의 장애 이야기를 해보자.
 그녀가 자신의 장애를 느낀 것은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닐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손을 올리는 게 부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그녀는 자신의 장애가 왜 시작됐는지 몰랐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그녀 어머니도 딸의 장애를 알지 못했다. 어머니가 낳은 네 남매 중 둘째만 멀쩡하고 세 남매가 모두 똑같은 증세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어머니는 아이들이 왜 그런 증세를 보이는지 알지 못했다. 막연히 세상을 떠난 아이들 아버지가 똑같은 증세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도 아프구나 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하긴 아이들의 장애명을 알았다고 해도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이들의 장애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아이들을 굶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한세월을 살기에도 벅찼다. 어머니가 자식들의 장애, 그리고 조월자 씨의 자식들의 장애명을 안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89년이었다. 그때쯤 조월자 씨의 가정은 엉망진창이 됐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하기로 하고, 그녀가 자신의 장애명을 알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 때 조월자 씨 가정은 더 이상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하려고 장애 진단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원광대 부속병원엘 갔는데 그 병원에서 근이양증 장애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됐다. "고칠 수 있나요?" 조월자 씨가 장애명을 알게 되면서 보인 첫 반응이었다. 의사는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의사 선생님이 고칠 수 없다면 그렇게 알아야지요." 그녀는 쉽게 체념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그녀 가슴 속의 통곡을 의사는 들었을까? 이런 과정을 거쳐서 어머니와 조월자 씨는 자식들의 장애명을 알게 됐다. 모녀는 진작 아버지의 장애명을 알았다면, 그 장애가 유전으로 대물림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만 들었어도 아이들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텐데 라고 때늦은 후회를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뻔히 보이는 아이들의 장래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특히 조월자 씨는 가슴을 쳐야 했다. 여기서 가혹하지만 조월자 씨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의 장애가 아버지의 장애에서 비롯된 유전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녀 또한 자식들에게 장애가 대물림 될 것을 염려해 아이를 낳지 말아야 했을 것이 아닌가, 그 질문을 던지자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하도 없이 살다보니 정말 몰랐어요. 그냥 아버지가 물려준 병이라고만 알고 있었죠. 아버지가 그랬으니까 우리도 그렇다. 그렇게만 생각하며 살았어요. 물론 아이들에게 장애가 나타날 걸 알았다면 아이들을 낳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 사촌 작은 오빠와 언니가 있어요. 그 작은오빠와 언니도 똑같은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둘 다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은 모두 괜찮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들은 건강하겠다고 생각한 거죠"
 "우리 아이들도 막 낳아서는 건강했어요.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었죠, 그랬는데 세 살 정도 되니까 큰 애가 자다가 깜짝 놀라 울더라고요. 그런 증세가 서너 차례 나타났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아이 셋을 다 낳고 큰 애가 일곱 살이 됐을 때 아이에게 처음 증세가 나타났어요. 아이의 한쪽 어깨가 처지고 안면근육 마비가 시작되면서 입술이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있으니까 직감으로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았죠. 그때부터 나를 대신해 우리 어머니가 아이를 들쳐 업고 매일 침을 맞으러 다녔어요. 낫는다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진행이 안 될까. 그 생각 하나로 용하다는 한의원은 다 찾아 다녔어요. 한의사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고 그랬지만 그래도 매달리고 싶었지요."
 그녀의 회한에 찬 회상은 계속 이어진다. "돌이켜보면 살아오면서 큰 애가 낳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말 그대로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았어요. 매일 끼니를 굶어가면서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죠. 실제로 죽어버릴려고도 했어요. 그렇지만 자살을 실행하려고 하면 뇌리에 우리 아이들이 잠깐씩 스쳐가는 거예요. 아 내가 죽으면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나 누가 돌봐주지. 그렇지 않아도 몸이 부실한데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면 어쩌나. 이런 생각 때문에 차마 죽을 수 없었어요."
 남편은 어땠을까. 그녀 못지 않게 절망에 빠졌을 텐데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을까? "남편은 나한테 그래도 죽지 말고 살라고 그랬어요. 만약 옆에서 남편이 자식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낯으로 사냐고 한 마디만 했어도 나는 약을 먹고 죽었을 거예요. 남편은 전혀 그런 말 안 했어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고 있죠." 이야기가 남편에게 이르자 비로소 그녀 얼굴이 펴진다. 그녀 말마따나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착하기만 한 남편 그 남편이 자상함에  더해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세상일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가 보다. 그녀 남편 또한 질병을 가지고 있다. 천식을 앓고 있어 호흡곤란 때문에 힘든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의 논일 해주고 추수 때 조금씩 나눠 먹는 게 수입의 전부였어요. 그렇게 십이 년을 살았어요." 그녀의 회고이다.
 친정집이 바로 앞에 있었지만 친정에서도 그녀를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올해 칠십 칠세 된 어머니와 큰오빠가 살고 있는 친정집도 큰오빠의 장애 때문에 먹고사는데 곤란을 겪기도 매한가지였다.
 이런 실정에서 그녀 삶에 약간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은 5년 전 정부로부터 생활보호대상자 일종인 거택보호자로 지정 받게 되면서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녀 집은 전적으로 생보자에게 지급되는 생활보조금에 기대 살고 있다. 정부로부터 지급되는 돈은 96년을 기준으로 한 달 평균 40만원을 넘지 못한다. 그 돈으로 다섯 식구가 산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이다. 그러다 보니 곤궁한 살림 때문에 그녀는 가슴 아파 할 경우가 많다.
 "우리 아이들에게 매일 김치만 먹이니까 아이들이 엄마는 우리한테 살찌라고 그러지 말래요. 야채만  먹이면서 무슨 살이 찌겠느냐고 푸념하는 거죠. 우리 아이들은 고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고 자랐어요. 그 정도로 못 먹이다 보니 아이들 건강이 더 나빠진 것 같아요." 말끝에 그녀는 "요즘 막내아들 정학이 때문에 잠 못 이룬다."고 덧붙였다. 막내의 장애가 무척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학이는 요즘 들어 혼자 힘으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걷다가 넘어지기 일쑤이다. 저러다 결국 걷지 못하고 주저앉아 자신처럼 앉아서 남은 생을 보낼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앉아서 생을 보내기에는 정학이 나이가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정학이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이다. 열한 살 아이가 주저앉는다면 그녀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다 가난이 원수예요. 그렇게 하면 조금이나 나아질까. 위안이나 받고 싶어 아이에게 침이나 약을 먹이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그녀는 채 말을 잊지 못한다. 정녕 그녀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이제 마지막으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희망 한조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녀는 "그래도 삶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고 말한다. 그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기약은 없지만 긍정적인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은 서울 모 병원서 지금 근이양증 장애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데 십년 내에 치료약을 개발할 수 있을 것 같다. 라는 소식이다. 이 소식이 현재로서는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다. 빨리 연구가 진행돼서 아이들의 장애만이라도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그녀는 하루 하루를 산다.
 "좋은 일은 없어요. 그저 그러나 하고 사는 거죠.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절대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얘기해요. 세상은 좋아지게 돼 있으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사는데 까지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자고 강조하죠." 그녀가 희망을 강조하면서 말을 맺었다
 그런데 그녀의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의 큰오빠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조병준씨, 그는 조월자 씨 집과 이웃한 오두막집에서 노모와 단 둘이 산다. 조병준 씨도 조월자 씨와 마찬가지로 생활보호대상자다. 그가 조월자 씨 보다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조얼자씨는 아무런 재산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그는 물려받은 논 다섯마지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 논을 남한테 맡겨 일 년 농사를 지어 추수 때 쌀 다섯가마니를 받는다. 돈으로는 50만원 정도다. 그것뿐, 그는 조월자 씨와 마찬가지로 암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동생 보다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우선 그는 장애 때문에 장가를 못 들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그의 옆에 있는 건 늙으신 노모뿐이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게 더 치명적이 괴로움이다. 그는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장 노모가 세상을 떠나면 어디에 몸을 의탁할지 부터가 걱정인데 그는 전혀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시설에 들어가 살아야죠. 그 방법밖에 없잖아요." 그는 씁쓰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옆에서 조월자 씨가 "그때에는 기자님이 도와주셔야 해요."라고 거든다. 세상에 수용시설에 들어가는 게 유일한 대책이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갈 곳도 없고 해서 하는 일없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해요. 주변에 복지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배만 안 곯으면 사는 거죠." 말끝에 조병준 씨는 "말할 수 없이 답답하죠. 누가 내 심정을 알겠어요."라고 한숨을 내쉰다. 이웃에 사는 남매, 그리고 세 명의 아이들, 이들의 삶의 무지개는 언제나 뜰 것인가. 그녀 집 밖으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글 /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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