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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큰 도시에 나가 살고 싶어요"

뇌성마비 장애우 이재배씨

본문

[사람사는 이야기]

 

"큰 도시에 나가 살고 싶어요"
뇌성마비 장애우 이재배 씨

 

그의 소망은 송희의 치료를 위해 큰 병원이 있는 대처에 나가 사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 키우고 있는 소를 팔아봐야 농협 빚 갚기에도 턱없이 모자라고, 그의 말처럼 도시에 나가 취직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경험상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취직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시름에 겨워한다. 현재로서는 그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즘 이재배 씨는 걱정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장애우로 험한 세상을 살면서 누군들 한두 가지 걱정거리가 없겠냐마는, 이 씨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매우 심각한 실정이다. 마치 둑이 터지듯 한꺼번에 온갖 불행이 그를 덮쳐서 그를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최대 고민은 뭐니뭐니해도 딸 송희에게 일어난 불행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딸 송희가 크게 잘못됐다. 태어난 지 7개월이 된 송희가 정상적인 아이라면 이때쯤이면 옹아리도 하고, 아빠나 할머니를 보고 방긋 웃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면 목이라도 가눠야 하는데, 송희는 전혀 그러지 못하다. 목도 가누지 못하고, 눈 초점도 맞추지 못하는 것은 물론, 머리가 아픈지 하루 종일 울기만 한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아이가 아닌 것이다.
 송희가 이씨 가슴을 무너지게 만드는 것은 이런 송희의 증세가 다른 장애도 아닌 바로 이씨가 가지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의 초기증세라는 것이다. 송희는 병원에서 이미 뇌성마비아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을 받았다. 송희를 진단한 의사는 "송희가 분만 시 뇌를 크게 다쳐 폐혈증, 뇌막염 등의 증세를 보이고 있다. 청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정상"이라며, "걸음마도 못할테니 각오하라."고 겁을 주고 있다.
 아비가 뇌성마비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딸마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다니, 이런 기가 막힌 경우가 어디 있는가. 이씨 입장에서 보면 생각할수록 울화가 치미는 일이 아니 수 없다. 그래서 홧김에 이씨는 송희가 태어난 병원에 몇 번 전화를 걸어 "송희를 정상적으로 만들어놓지 않으면 병원을 폭파시키겠다."고 공갈을 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씨를 더욱 울화통 터지게 만드는 것은 그의 억장이 무너지는 가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 측에서는 자신들의 잘못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송희가 이렇게 된 건 어느모로 보나 병원 측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도 병원에서는 "잘못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며,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있나?"고 한숨을 내쉰다.
 송희는 작년 12월 25일 성탄절 날 . 천안의 이름만 대면 아는 큰 병원에서 태어났다. 이 씨의 주장에 따르면 산모가 골반이 작았기 때문에 당연히 재왕절개 수술을 해서 송희를 꺼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연휴라 산부인과 과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당직 의사가 자연분만을 유도하다가 그게 제대로 안 되자 기계로 아이를 꺼내는 과정에서 뇌를 손상시켜 송희가 장애아가 됐다는 것이다. "요새는 시간이 가는 게 겁이 나요. 송희 장애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어떻게 살아야 할 지 걱정이 태산 같아요." 그는 거듭 한숨을 내쉰다.
 이재배 씨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심각한 고민은 아내의 가출이다. 이렇게 많이 아픈 송희를 돌봐야할 송희 엄마는 집에 없다. 송희 엄마이자 그의 아내 박 아무개 씨는 올해 3월 18일 가출했다. 송희가 장애아가 된 것에 충격을 받은 게 일차적인 가출 이유로 보여진다. 말 그대로 집안이 풍지박산이 난 셈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이씨는 지금 아내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고 있다. 아내가 인천 부평에서 조그만 공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집이 감옥 같다."고 선언하고 떠난 아내이고 보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는 속을 태우고 있다. 그는 이런 자신의 불행이 모두 자신의 장애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장애로 인해 자신의 삶이 어긋났던 것이다. 그 한 많은 사연, 이제부터 그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들어보자. 올해 38살인 그는 경기도 안성군 공도면 마정리 상마정이라는 동네, 말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양성 이씨 집성촌 한 귀퉁이에서 살고 있다. 그의 집 앞마당에는 소가 있다. 소가 있다는 언급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그는 소를 키워 먹고산다. 그가 키우고 있는 모두 합해 7마리인데 , 젖소는 없고 한우만 키운다.
 키우고 있는 소 마리 수만 놓고 보면 축산 농가 치곤 빈약한 두수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를 축산업자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지지만, 그렇지만 그의 장애를 생각하면 적은 마리 수 나마 소를 키우며 사는 그가 대견하다 아니할 수 없다.
 사실 그가 가지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는 취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장애는 적은 월급이나마 받을 수 있는 단순 부품 조립 공장에서도조차 취업을 거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엄혹한 현실 앞에서 그의 선택은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막말로 애를 써도 되지 않는 취업에 매달리느니 속 편하게 자기 사업을 하는 편이 낫다. 더욱이 소를 키우는 일은 두 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도 가능한 일이고 보면 그의 선택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소를 키우는 일에 손을 댄 것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85년이다. 계기는 역시 그의 장애이다. 그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8남매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뇌성마비 장애우로 세상에 나온 그는 장애 때문에 설움도 많이 받았다. 국민하교 다닐 때는 장애우라고 놀림도 받고 매도 많이 맞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형편도 넉넉지 못했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가 품을 팔아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먹고살아야 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올해 73살인 어머니 김순금 씨의 교육열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네가 몸도 이런데 아무것도 모르면 안 된다."며 그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는 겨우겨우 안성고등학교를 나왔다. 그렇지만 도저히 대학에 진학 할 형편은 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게 되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취업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그를 채용하겠다는 회사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세상은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꿈이었던 한 장애우의 바람을 충족시켜 주지 않았다. 충족시켜주기는커녕 그를 자꾸자꾸 매서운 바람 부는 한데로 내몰았다.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유일하게 몸담았던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는 안동재활원이었다. 그는 83년 그 곳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 곳에서 그가 배운 기술은 그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공예 기술이었다.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그가 이 기술을 제대로 습득할 리 만무였다. 그는 시간만 보내다가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가 재활원에 가기 전, 그리고 재활원에 갔다 와서 집에서 한 일은 툭하면 어머니 가슴을 뒤집어 놓는 일이었다. 그 부분을 회상하는 그의 어머니 말을 들어보자
 "왜 나를 이렇게 태어나게 했냐고 원망하면서 맨날 죽는다고 그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어, 너보다 더한 사람도 살려고 몸에 타이어 붙이고 바닥을 기면서 먹고 살려고 돌아다니는데 그런 사람에 비하면 너는 낫다. 왜 죽는다고 그러느냐고 타일렀지만 말을 들어야지. 나는 뜨거운 밭에 나가 일 하느라고 정신없는데 이 자식은 약을 먹고 죽는다고 난리고, 말도 마, 내 속이 시커멓게 다타버렸으니까..."
 그러던 그가 정신을 차렸다고 해야 할까? 그는 "이놈의 세상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라는 오기가 생겼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튼 85년. 그의 나이 27살 때 그는 어머니를 졸라 타낸 돈 100만원으로 송아지 두 마리를 산다. 그런 다음 앞마당에 축사를 짓고, 소 비육업을 시작했다. 비육업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송아지를 사다가 살을 찌워 내다 파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그가 비육업을 시작하자마자 소파동이 일어났다. 그는 앉아서 생돈을 까먹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그렇지만 이왕 시작한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오기로 버텼다. 이 시기 85년부터 87년까지 2년 동안 정말 힘든 시기였다고 그는 회고하고 있다.
 그가 소 비육업으로 돈을 번 것은 89년이 유일하다. 그 해 그는 송아지 한 마리당 60만원을 주고 9마리를 사서 1년을 키운 다음 마리 당 200만원을 받고 팔았다. 사료값을 제외하고 소 한 마리당 100만원을 남긴 셈이다.
그랬는데, 다시 소 파동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는 결국 소를 키우는 일을 작파해야했다. 그는 2년여를 손을 놓고 아무 하는 일없이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94년에 농협에서 500만원의 빚을 얻어 다시 비육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할 수 있는 일이 그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산 암송아지 다섯 마리를 밑천으로 그는 지금 두 마리가 불어난 일곱 마리의 소를 키우고 있다.
 "정부의 축산 정책이 잘못됐어요. 소 수입을 점차적으로 늘려야 하는데 한꺼번에 들여오니까 소 파동이 나잖아요. 작년 연말보다 소 가격이 마리당 100만원이나 떨어졌어요. 축산 농가한텐 엄청난 타격이죠. 지금 소 키워봤자 사료값도 안 나와요. 작년에 송아지 한 마리가 200만원이 넘었는데 지금은 큰 소 팔아야 300만원이예요. 사료값 제하면 인건비는 어디서 건집니까?"
 그는 대안이 없이 소를 키우고는 있지만 정부의 축산 정책이 잘못 돼 여전히 손해를 보고 있다며 혀를 끌끌 찬다.
 이제 그의 아내 박 아무개 씨의 가출 사건을 이야기해 보자. 그가 아내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인 94년 3월이다. 그는 장애우 모임에서 알게 된 형의 소개로 박 아무개 씨를 만나게 됐다. 그가 결혼 문제로 고민하자 "의정부에 아는 아가씨가 한명 있는데 만나보지 않을래?"라고 소개를 해줘 아내를 만나게 됐다. 당시 박 아무개 씨는 일찍 양친을 여의고 언니 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나이 36살, 박 아무개 씨의 나이 30살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박 아무개 씨는 소아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몇 번 만났는데 신체장애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좀 부족한 여자더라구요. 그 사실을 알았지만 내가 이 몸 가지고 어떻게 나보다 나은 사람을 고를 수 있나. 신체적으로 나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됐다 싶어 결혼을 하게 됐죠."
 그의 원래 계획은 일 년 쯤 사귀어 보고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박 아무개 씨 언니가 "데려가서 살아보라."고 권하는 바람에 만난지 4개월 만에 먼저 동거부터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이때 시골 생활을 불안해하는 박 아무개 씨에게 "내 꿈은 여기서 사는 게 아니라 3, 4년 동안 고생한 다음 안성읍이나 평택시내에 나가서 조그만 슈퍼라도 해볼 생각이다."라고 말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순탄했다. 그의 어머니도 여자가 시골에 내려와서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 흡족해 했다고 한다. 그랬는데 결론적으로 그의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증오뿐이다.
 "성격이 안 맞았나봐요. 내가 너무 착하다고 늘 불만이었죠. 친구들한테 이용만 당한다고 그러는데 친구한테 돈 200만원 빌려주고 못 받은 것 밖에 없어요. 그걸 가지고 나보고 바보 멍청이라고 그러고, 남자들은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면 늦게 들어오잖아요. 그것도 꼬투리를 잡고 불만을 토해 내니 어떻게 같이 삽니까? 아내는 집을 나가기 전에 집이 감옥 같다고 그랬어요. 이제 돌아오기는 틀린 것 같아요."
 "그렇지만 그의 결정적인 가출 이유는 송희가 장애아가 될 것이 뻔하니까 집을 나갔다." 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아내는 3월 18일 훌쩍 가출했다. 짐도 가져가지 않고 몸만 나간 아내는 지금 인천에 살고 있다. 그는 수소문해서 아내의 거주지를 알아냈다. 그가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건 집을 나간 아내가 아픈 송희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와 통화를 하다가 내가 그랬죠. 마지막으로 송희 안부라도 물어달라고 했더니 아내가 송희는 자기하고 상관없는 아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 얘기 듣고 정이 다 떨어졌어요."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짓는다. 송희는 지금 아내 대신 73살인 그의 노모가 키우고 있다. 여전히 노모가 품을 팔아 근근히 먹고사는 실정에서 송희 때문에 노모가 일을 못나가게 되면서 집안 형편이 말이 안다. 거기다 송희의 물리치료를 위해 3일에 한번 씩 천안 단대 부속병원에 가야 하는데 오가는데 드는 차비가 만만치 않아 그를 시름에 젓게 하고 있다.
 "친구들 신세지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염치가 없어서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는데 여기서 천안 까지 차비만 25000원 이예요. 오는 거 까지 합하면 5만원이 들죠. 그렇다고 치료를 멈출 수도 없고, 답답할 뿐이예요."
 그가 살고 있는 안성에는 재활의학과가 있는 큰 병원이 없다 그래서 그의 소망은 송희의 치료를 위해 큰 병원이 있는 대처에 나가 사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다. 키우고 있는 소를 팔아봐야 농협 빚 갚기에도 턱없이 모자라고, 그의 말처럼 도시에 나가 취직이라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해보겠는데 경험상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취직한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시름에 겨워한다. 현재로서는 그에게 희망이라는 단어는 없다. 그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글 /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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