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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성민이 엄마 모순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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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애씨에 대해 얘기하려면 무엇보다 그녀의 결혼에 얽힌 비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장애판에서 화제가 됐던 이유도 실상은 그녀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비장애우와 결혼을 하고 뒤이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출산을 했으며, 가정주부로서 아이 양육과 남편 내조를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러준 대로 대림동 어느 낮선 슈퍼마켓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는데 좀체 응답이 없었다.
 어느새 창밖 거리는 어둠의 세계로 변해가고 있었다. 입을 앙 다물며 이럴 때 으레 맞보게 되는 낭패감이 제발 기우이길 바라며 재차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래도 응답이 없었다.
 신경이 곤두서기 시작했다. 몇차례 더 마치 속사포를 쏘듯 빠르게 숫자판을 요격했다. 야속하게도 모순애씨는 끝내 나와 주지 않았다.
 공중전화 부스를 포기하고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섰다. 모순애씨가 만나주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의문이 잠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은 결코 원하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취재를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책임은 모순애씨에게 있다. 애써 자위하며 돈을 세느라 정신이 없는 카운터 여자를 붙들고 늘어졌다.
 "저기 이 동네에 장애를 가진 체격이 자그마한, 가정주부가 사는 집이 어딘지 혹시 모르십니까?"
 "모르겠는데요."
 "이 부근에 산다고 했어요. 모순애씨라고, 그래요 인형같이 작은 여자인데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며 산다는데……"
 "인형이 애를 낳았다구요?"
 "그게 아니고 장애를 가졌는데……내참"
 더 이상 물어보아야 신통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따가운 시선을 뒤통수에 느끼며 슈퍼마켓을 빠져나왔다. 다시 전화통을 붙들고 늘어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잠시 거리에 섰다. 스산한 겨울 바람이 불어왔다. 허황한 심정을 곱씹으며 옷깃을 여몄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한 아이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우리 엄마 찾아왔죠."
 "네 엄마가 모순애씨니?"
 "맞아요."
 정말 반가웠다. 그러면 그렇지 약속이 어긋날 리가 없는데,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따라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알고 보니 모순애씨 집은 슈퍼마켓에서 채 십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삼층건물의 지층에 모순애씨 집이 있었는데 그 지층에는 모순애씨 집 외에도 여러 가구가 세든 듯 길게 이어진 방들에서 왁자지껄 사람사는 소리가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를 따라 낮은 계단을 내려가 그중 한 방으로 들어섰다. 우선 앉은키보다 훨씬 낮게 자리잡고 있는 부엌 살림이 눈에 들어왔다. 가스렌지도 찬장도 싱크대도, 그리고 하물며 수도까지도 바닥에 널려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 부엌 옆으로 방이 있었다. 방으로 통하는 문턱 자체가 없는 것도 또한 특색이었다.
 방문을 밀었다. 거기 모순애씨가 있었다. 눈이 몹시 나쁜 듯 렌즈가 두꺼운 안경을 끼고 정물처럼 가만히 앉아서 그녀는 방문객을 맞았다. 들은바 그대로 그녀는 아주 작은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인은 누구인가?
 모순애씨에 대해 얘기하려면 무엇보다 그녀의 결혼에 얽힌 비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장애판에서 화제가 됐던 이유도 실상은 그녀가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어 비장애우와 결혼을 하고 뒤이어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출산을 했으며, 가정주부로서 아이 양육과 남편 내조를 충실히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애판에서는 드물지 않은 비장애우와의 결혼과 출산의 예들에서 유독 모순애씨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그녀의 심한 장애이다.
 그녀는 두 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며 한쪽 손도 팔꿈치 윗 부분을 사용하지 못하는 중증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 설상가상으로 체격도 작아서 그녀의 몸무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이십 킬로그램을 넘은 적이 없다.
 서너살 먹은 아이의 몸무게가 이 정도인 걸 감안하면 특히 나 그녀의 출산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에겐 대단히 미안한 얘기지만 그녀를 지칭할 때 "아이가 애기를 낳았다"는 표현이 설득력 있게 유포됐던 것이다.
 그녀와 마주 앉았다. 상투적인 질문을 먼저 던졌다. 그녀의 신상 명세서를 알고 싶다고 했다. 모순애씨는 수줍은 듯 웃었다. 으레 그러려니 짐작했는지 그녀의 얘기는 막힘이 없었다.
 그녀는 올해 설흔일곱살이다. 고향은 전북 순창군 동대면이고 소규모로 농사를 짓던 모규채(57세)씨와 어머니 김차남(57세)씨 사이에서 육남매 중 큰딸로 태어났다.
 세상에 나올 때는 장애가 없었는데 돌을 지나기 전 열병을 앓아 지금처럼 심한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살던 곳이 아주 산골이었고 집이 가난해서 병원에도 가보지 못했다. 특별한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했고 나중에야 자신의 장애가 일종의 소아마비라는 것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집안에 방치된 채 아무 하는 일 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야 했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됐지만 학교는 가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 많이 마음 아파했다. 그러나 그것도 반복이 되자 체념이 됐다. 그러면서 자신의 장애를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게 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애써 명랑하게 지냈다.
 자신의 장애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우울해 지는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녀는 열 살 때 동생들 어깨 너머로 한글을 깨우쳤다. 그리고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사람을 사귀는 그녀의 천부적인 사교성은 이때부터 싹텄다.
 그녀가 열 두 살 되던해 그녀의 아버지 모규채씨는 농사를 작파하고 경기도 동두천으로 상경했다. 셋방을 얻어 서울로 노동일을 나가 하루 벌어먹고 사는 곤궁한 생활이 이어졌다. 이때도 그녀는 아무 하는 일 없이 집 안에서만 지냈다.
 동두천에서 삼 년을 산 후 그녀의 가족은 마침내 서울로 입성했다. 면목사동 중곡초등학교 근처에 역시 셋방을 얻고 그녀의 아버지는 야채 행상을 시작했다. 살림은 변함없이 쪼들렸다. 방 한 칸에 여덟 식구가 기거하면서 부대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생활이었다. 면목동에서 십 수년을 살다 다시 방배동으로 이사했다. 이번에는 살림이 좀 피어 시장에 야채가게를 세낼 수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나면 뜨개질을 하고 여력이 닿는 데로 집안 일을 도우며 가게에 딸린 방에서 생활했다.
 이 무렵부터 그녀는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라디오를 듣고 알게된 장애우 모임에도 나갔다. 바깥 외출을 하면서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을 만나게 되자 그녀의 일상은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몇 군데 재활원도 찾아갔다. 비록 나이제한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그녀의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했다.

 그녀의 의욕은 이런 식으로 높아만 갔다. 그렇게 해서 설흔 두 살이 된 팔십 육년, 그녀는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결혼을 하겠다고 나서게 된 배경에 대해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지금 그런 결심을 하라면 용기가 안 생겨 못할 거예요. 왜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집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게 됐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자괴잠이 들더군요. 발전이 없는 삶은 무의미 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전에 딱히 자극을 받은 건 아니지만 동생들이 자라는 걸 보며 동생들이 결혼하기 전에 자립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건 사실 이예요. 그래서 아주 우연히 어느 날 남자 친구를 사귀어보고 결혼 할 수 있으면 해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그때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을 때라 믿음 안에서 결혼하면 생활을 해나갈 수 있겠다 생각했죠."
 그녀가 이런 결심을 한참하고 있을 때 안양에 사는 한 노총각 역시 결혼문제 때문은 아니지만 신상과 관련된 고민을 거듭하며 번민에 빠진 삶을 살고 있었다.
 박종이씨, 당시 설흔 다섯 살의 일용건축노동자였던 그는 모순애씨를 만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때는 명학동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일월이었죠. 겨울철이라 일이 없이 집에서 취고 있었어요. 당시는 정치적 상황이 굉장히 암울했고, 개인적으로도 일이 잘 안 풀려 매사가 어둡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그전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었지만 신앙과 사회가 안 맞는 것 같아 교회도 나가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방송을 듣게 된 거예요. 신앙을 가지 사람으로 배우자를 찾는다는 그 방송을 듣는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깨달음이 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방송이 장애인프로라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죠. 방송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교만한 생각인지 몰라도 십자가를 짊어지는 방법 중에는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내리고 집사람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모순애씨와 박종이씨를 연결시켜 준 건 케이비에스 제일 라디오 내일은 푸른하늘 방송이었다. 당시 이 프로를 즐겨듣던 모순애씨는 직접 진행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결심을 얘기  했고 사연이 전파를 타자 박씨가 응답을 한 것이다. 박씨는 자신의 신상과 심정을 만리장성으로 써 부쳤고 편지를 보낸 지 정확하게 보름만에 그녀에게서 답장을 받는다.

 답장을 받자 다시 편지를 써 보내고 하면서 세 차례를 걸쳐 편지를 교환한 후 두 사람은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그날은 팔십 육년 이월 하순 어느 날 이었다. 방배동 가야병원 근처 어느 다방에서 마침내 두 사람은 조우한다.
 모순애씨는 외사촌 동생과 동행이었고, 박종이씨는 혼자였다. 박씨는 모순애씨를 처음 보는 순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장애우를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그는 막연히 알고 있던 장애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너무나 다른 게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가 알고 있던 장애우는 다리를 약간 저는 고향친구 정도였다.
 그런데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얼굴이 화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숨을 데가 있다면 숨고싶을 정도였다. 내가 편지를 보낸 사람이 아니라고 얼버무리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양심 때문에 차마 그렇지는 못했다.
 당황하기는 모순애씨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만나도 고개를 못들 텐데 박씨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니까 더 고통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대화가 이뤄질리 만무였다. 박씨가 먼저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차가운 겨울 거리로 나섰다. 근처의 인적이 드문 효령대군 묘역으로 가 박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진정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같이 기도하자고 했다. 모순애씨는 비록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헤어져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모순애씨는 괜히 만났다고 만남 자체를 후회했다. 그리고 결혼은 글렀다고 낙담했다.
 그런데 한달 후 박씨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 편지는 가는 길이 어렵겠지만 결혼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박씨의 제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했다. 그렇지만 기쁜 건 사실이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눴다. 이번에는 두 사람 모두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박씨가 진실되게 자기 심정을 털어놓는걸 보고 좋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박씨가 처음 만남을 가진 후 곧바로 반월에 있는 기도원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얘기했다. 피할 수 없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그녀 때문에 잃었던 믿음을 되찾게 돼 고맙다고 덧붙였다. 남들이 우리 가장을 볼 때 혹 조롱하지는 않을까 두렵기는 하지만 같이 극복해 나가자고 박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결혼 준비를 서둘렀다. 칠남매 중 셋째였던 박씨는 집안의 반대를 예상해 그녀와의 결혼을 비밀에 붙였다. 차후를 생각해 바로 위의 형님에게 신부가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열심히 살겠다고 통보했을 뿐이었다.
 오래 끌면 일이 안될 것 같아 두 사람은 그해 오월 삼십일일 모순애씨가 다니고 있던 방배동 새빛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식장에와 그제서야 신부를 본 박씨 형제들은 무척이나 가슴아파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무사히 결혼식을 치른 다음 신림 삼동에 오백만원짜리 전세방을 얻어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하기 전에는 모순애씨가 살림을 전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밥도 짓고 반찬도 만들며 비록 세탁기에 많이 의지했지만 빨래까지 직접 해 박씨를 기쁘게 했다. 박씨는 반찬거리만 사다 날라주면 되었다.
 일반 신혼부부처럼 깨가 쏟아지는 신혼 생활이 한동안 이어졌다. 예상과는 달리 부부생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에게 갑자기 어려움이 닥쳐왔다. 모순애씨가 덜컥 임신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녀도 설마 자신이 임신을 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몸이 이상해서 찾아간 동네산부인과 의사도 상상임신이라고 진단을 내려 그녀는 안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몸은 자꾸만 무거워져만 갔다. 음식이 비위가 상해 구토를 하는 일도 잦아졌다. 다시 병원을 찾아갔다. 이번에는 의사가 임신 삼 개월 째라고 일러주었다. 못 믿어 다른 병원을 찾아갔지만 틀림없는 임신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의사들은 한결같이 모순애씨가 일반인들과는 신체구조가 달라 일반 병원에서는 손을 못 대니 서울대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서울대 병원에서 그녀는 일주일 동안 조직검사를 받았다.
 검사를 한 의사의 소견은 지금 애를 떼는 수술을 해도 위협하기는 마찬가지니 버틸데까지 버티다가 애를 낳는 쪽이 낫겠다는 것이었다.
 별 수 없이 그녀는 꼬박 팔개월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심폐기능이 약해, 더욱이 폐가 꼬여 있는 상태였던 그녀로서는 호흡곤란 때문에 하루 하루가 지독한 고통의 나날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팔개월을 보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녀는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이십 킬로그램이나 나갈까 말까한 체중이 무려 칠 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아기를 뱃속에 가지고 있자니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한지 보름만에 재왕절개 수술을 해서 아들 성민이를 낳았다. 그것도 난산이라 마취상태에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의사의 예상을 뒤엎고 수술 후 두 시간만에 깨어나 의사들을 놀라게 하고서였다.
 수술한지 사흘만에 신생아 실에서 처음 핏덩이를 보던 날 부부는 감격해서 울 수밖에 없었다. 뭔가 이루었다는 성취감이 부부의 가슴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낳고 난 후에도 그녀는 몇 차례 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지금이야 별일 아닌 듯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다고 그녀는 회상한다.
 "성민이를 낳은 후 애 아빠가 뭔가 해보겠다고 나서다가 일을 그르쳐 그나마 있던 방 한칸도 날려버린 적이 있었어요. 애 아빠가 청계산 산 속에 들어가 북해산 토끼 양토 사업을 했는데 경험이 없이 시작한 일이라 토끼가 늘어나니까 감당을 못하더군요. 사료값을 마련하기 위해 애 아빠가 무진 고생을 했어요. 밖에서는 혼자 발버둥을 치는데 나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고 비닐 하우스 안에서 있자니 정말 안타까웠어요. 살아오면서 그때만큼 서로가 마음 고통을 심하게 앓았던 적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부부는 정확하게 양토사업을 시작한지 일년만에 전세금을 모두 날리고 거기에다 빚까지 이 백만원을 지고서 산을 내려온다. 절망감이 이들을 휘청거리게 했지만 성민이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부부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포일리 허름한 연립 지하실에 보증금 일 백만원으로 사글세방을 얻고 아이 아빠는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건축일을 나갔다. 이때가 팔십 팔년 이었다. 때마침 건축경기가 활성화도어 몇 년간 묶여 있던 임금이 오르면서 미장 기술자였던 아이 아버지는 적지 않은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 수입을 쓰지 않고 저축해 지금 살고 있는 보증금 일 천만원에 월세 사 만원짜리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성민이 아버지는 요즘 수입이 많은 달은 일백 삼십만원, 적은 달은 칠 십만원 가량을 번다. 겨울에는 일을 안나가지만 그래도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다.
 이들 부부에게 남은 소망이 있다면 빠른 시일 내에 작지만 따뜻한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특히 몸이 많이 불편한 모순애씨는 이사 다니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성민이가 별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주는 것도 이들 부부에게는 큰 보람이다. 간혹 엄마가 자기보다 힘을 못쓴다는 것을 알고 대들기도 해 속을 썩이지만 그래도 대견스럽다. 여섯 살이 된 성민이는 벌써 집안의 잔심부름을 도맡아 해 모순애씨는 흐뭇하다.
 그렇다고 걱정거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주변에서 모순애씨 가정을 바라보는 눈이 평범하지 않아 자라나는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 할 수밖에 없다.
 장애우 가정으로서 어둡게 살지 말고 빛 되게 살자고 다짐하며 살지만 이 생각만 하면 어쩔 수 없이 소외감을 느낀다.

 한편 이들 부부는 최근 체력훈련에 열심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휠체어를 타고 전국일주를 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했다.
 모순애씨는 남편이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추켜세운다. 성민이 아버지는 모순애씨가 음식 솜씨가 수준 급인 일등 마누라라고 자랑한다.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 부부는 말 그래도 보통 부부이지요."
 모순애씨가 힘주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였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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