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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화장 전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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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에서는 직장을 구하지 못해 궁여지책으로 배를 타야 했던 한 장애무가 있다. 화장으로 승선했다가 선상폭력을 당한 전길수씨. 그의 서른 여섯 살 삶은 이 땅의 장애무가 처해있는 현실에서 한 치도 빗겨나지 않고 있다.

교통사고를 당해 왼쪽 팔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장애우 전길수씨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먹고살기 위해 할 수 없이 배를 탔다가 어처구니없는 선상폭력을 당하게 됐다"는 그 사연의 전말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삼월 일일 새벽 그는 자신의 셋방이 있는 인천남동구 만수 이동 버스 정류장에서 연안부두로 가는 첫 버스를 탔다고 했다.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인 끝에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목숨을 걸고 배를 타서 돈을 벌어야 되겠다."는 각오를 다진 후라서 그런지 마음은 무척이나 평온했단다.  버스로 한 시간 여를 달려 그는 목적지인 연안부두 해양센타 앞 인력시장에 도착했다.  동이 틀 무렵의 부두는 부산한 움직임들로 아연 활기를 띠고 있었는데 배의 입출 항을 알리는 고동소리가 아침을 깨우고 있었고 하역을 마친 배에서는 삼삼오오 선원들이 모여 앉아 질펀하게 술추렴을 벌이고 있었다. 채 하역을 마치지 못한 배에서는 선원들이 생선궤짝을 어깨에 지고 부지런히 구판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런 부두 정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마침 지척에 서 있는 그가 판단하기에 배를 탈 사람을 구하기 위해 나왔으리라 짐작되는 한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단다.
  "배를 타고 싶은데 화장 자리 있습니까?"
  그가 말한 화장자리란 쉽게 말해 배에서 밥을 하고 선원들 잔심부름을 도맡아하는 조리사를 일컫는 선원들의 은어였다. 그는 불편한 손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엄두도 낼 수 없어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고 밥이나 하면 되는 화장 자리를 구해야 했던 것이다.
  사내가 한참을 그를 빤히 쳐다보았단다. 찬찬히 살펴보던 사내의 눈길이 그의 왼쪽 팔에 머물자 그는 당황해서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내친 김이라 당당하게 사내의 눈길을 받았다.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자리는 있소 만 경험은 있는 거요?"
  "네 있습니다."
  "그럼 좋소. 갑시다."
그래서 그는 사내를 따라나섰다고 했다. 부두를 가로질러 걸어가면서 사내는 자신을 안강망어선 경인 삼백삼호 갑판장이라고 소개한 후 운을 떼었단다.

  "그런데 형씨, 선금은 얼마나 원하슈 ?"
  "백오십 만 주십시오."
  통상 이백 만원을 요구하는 게 관례였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의식해서 낮은 액수를 요구했다. 사내가 그가 요구한 백오십 만원을 건네주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말했다. "급하니까 바로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는 집에 있는 두 아들에게 생활비를 갖다 줘야 했기 때문에 "택시를 타고 금방 집에 다녀오겠다."고 사정했다. 그러나 사내는 냉정하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렇게 돈이 급하면 전화로 집사람을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가 집사람이 없다고 솔직하게 토로하면 사내가 얕잡아 볼 것 같아서 그는 순순히 사내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머지는 갔다 와서 받기로 하고 우선 선금으로 오십만 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예전에 탔던 배에 진 빛 삼십 구만 원을 갚고 주민등록증을 찾아다가 사내에게 맡겼다. 나머지 십일만 원으로 급하게 우비, 작업복, 장화를 구입해 한사리(보름의 기간을 뜻하는 은어)에 삼십 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그 날 오전 열한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가 탄 경인 삼백삼호는 꼬박 이틀을 항해해 삼월삼일 오전 제주도 근해에서 첫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첫날부터 고기가 잘 잡히지 않았다. 선원들은 무료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지만 그는 반대로 첫날부터 뼈 빠지게 일해야 했다.
  화장 일이라는 것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밥을 하고 식사시간에는 내내 선원들 시중을 들고 그러다가 식사가 끝나면 곧바로 설거지를 해야 하는 고단한 일의 연속이었다. 한숨 돌리고 밥 몇 숟갈 뜰라치면 그물 당기는 일을 도와 달라고 갑판에서 호출해서 밥을 먹다 말고 달려나가기 일쑤였다.

  십여 일 밤낮으로 그물을 던졌지 만 계속 허탕을 치자 경비라도 줄이라고 회사 측이 무선으로 통고했고 그래서 그는 동료 선원 네 명과 함께 배를 갈아타고 삼월 십일일 인천으로 돌아왔다.
  그의 승선은 짧은 기간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달리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이틀 후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십사일에 다시 배를 타는 데 갈 거냐 말 거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쓰는 사람이 가자면 가는 거고 말자면 마는 거지 내게 무슨 권리가 있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회사 측에서는 "삼월 십사일 공항으로 나오라"며 우선 생활비로 이십 만원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십사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해 한림 항에서 다시 경인 삼백삼호를 타게 됐다.
  그가 배에 오르자 설혼 한살 먹은 선장 최정구가 대뜸 면박을 줬다. "너 왔으니까 꼼짝 마라"는 것이었다. 그는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 말없이 선실에 들어가 짐을 푼 다음 식당에서 밥을 하려는데 그를 향해 선장이 본격적으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온갖 저질스런 단어가 난무했다.
  이건 밥투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는 그런 선장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최정구 선장에게 선상폭력을 당한 건 배를 탄지 삼일 째 되는 날 십칠일 오후 한시 경이었다. 그는 식당에 쭈그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때 선원 한 명이 들어와 "설거지는 나중에 하고 그물을 당기러 나가자"고 했다. 그는"설거지가 금방 끝나니까 마치고 나가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선장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선장은 "새끼가 말이 많아. 너 누굴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거야. 나오라면 나오는 거지"라며 욕을 했다. 그는"금방 끝나니까 마치고 같이 나가서 일합시다." 라고 사정했다. 그러나 선장은 욕지거리를 그치지 않았다. 듣기 거북해진 그가 한마디했다. "좋은 말로 하지 왜 욕은 합니까." 그러자 선장의 주먹이 날아와 그의 턱을 강타했다. 얼굴이 얼얼해진 그가 비틀거리자 이번에는 선장의 손이 사정없이 그의 뺨에 작열했다. 선장이 씩씩거렸다. "너 오늘 죽고 싶어" 그는 공포에 질려 갑판으로 뛰쳐나가야 했다.
  바람을 둥지고 그물을 당기는 시늉을 했지만 이유 없이 당했다는 생각이 들자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빨까지 몹시 아팠다. 몸이 확 뒤집어지는 것 같은 아득함 때문에 중심을 잡고서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견딜 수 없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선실에 들어가 자리를 깔고 누웠다.
  얼마 안 있어 선장이 선실로 들어섰다. 선장은 역시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 "아프긴 어디가 아프냐."고 고함을 질렀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자 선장이 발로 그의 배를 내질렀다. 그는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선장이 눈에 쌍심지를 키고 그를 노려봤다. "이 새끼가 누굴 죽이려고 이 지랄이야. 밥도 안하고 이러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너 칠십만 원 받았지. 들어가면 그 돈 토해 놔‥‥‥"
  그는 십팔 십구일을 계속 누워 있어 야했다. 충격이 커서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기운을 차려 찬밥을 물에 말아먹기도 했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가 누워 있는 동안에 회사에서 무선 연락이 왔다. "덕적도 근해에 복어가 많이 잡힌다니까 그리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덕적도는 인천 위쪽이었다. 배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데 다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예상외로 복어가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선장이 무선호출기에다 대고 말했다. "화장이 아프다고 누워 있어 밥해 줄 사람도 없고 어차피 경비만 축나니 입항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탄 경인 삼백삼호는 이십일일 새벽 두시 인천항에 들어오게 되었다. 배 가 도착하기 전에 선원들은 탱크에서 생선궤짝을 꺼내 야적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그 작업을 했다. 선장이 "아프다고 빌빌거리던 놈이 멀쩡해져 가지고 일을 한다."고 면박을 줬다. 그는 꾹 참고 일만했다. 선장이 "들어가 서 보자"며 이를 갈았다.

  배가 인천항에 도착하자 그는 생선을 구판장으로 나르는 일을 선원들과 함께 했다. 한참 작업을 하는데 부두에 회사 부장과 서서 얘기를 나누던 선장이 그를 불렀다. 그가 올라가자 느닷없이 선장이 발길질과 주먹질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가 아프다고 그래서 들어 왔는데 멀쩡하게 일하고 있으면 내 꼴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을 맞다가 참을 수 없어 선장에게 말했다. "왜 이러는 거야. 여기가 어딘지 알아. 여기는 육지야 육지, 착각하지 말라고" 그러자 어느새 왔는지 그 옆에 서 있던 선장 친구 박영희가 "말이 많다"고 그를 향해 역시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코피가 쏟아지자 그제서야 매질이 멈췄다.
그는 옆에 서 있던 회사 부장에게 항의했다.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겁니까. 내가 개돼지입니까" 부장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그는 부두 선상 통제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선상폭력을 고발하겠다."고 하자 형사 두 명이 왔다. 그는 진물이나 헐은 손을 들이대며 절규했다. "손등이 까이도록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했는데 왜 사람을 두들겨 팹니까. 한 손 가지고 먹고살 길이 없어 배를 탔는데 그것도 죄입니까. 두 아이가 내 이런 꼴을 보면 뭐라고 하겠어요. 도대체 내가 왜 맞아야하는지 이유나 속 시원히 밝혀 주십시오. "
  그는 형사들과 회사 사무실에 갔다. 부장은 "맞긴 뭘 맞아. 같이 붙들고 실갱이를 하길래 내가 말렸잖아"라고 둘러댔다. 그 말을 받아 형사들도 "치료비나 받고 끝내지"라고 권유했다. 그는 "그렇게 끝날 문제나 아닙니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도 고발하겠습니다."라고 의지를 밝힌 후 사무실을 나왔다.
  셋방에 돌아와서 그는 자리에 누웠다. 진단서를 끊을 돈을 빌리기 위해 여기 저기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단돈 몇 만원을 빌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누워 있다보니 시일만 지나고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용기를 내 이십칠일 친구도움으로 신천연합병원을 찾아가 사정 얘기를 하고 겨우 진단서를 끊었다.
  그는 이날 경인 삼백삼호 선장 최정구씨를 선상폭력으로 해양경찰대에 고발했다.  올해 서른 여섯 살인 전길수씨, 그가 장애우로 두 아들과 함께 핍박한 삶을 살아오면서 육지에서는 받아주는 직장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배를 타야했던, 그 살아온 삶의 내력을 옮겨보면 어쩔 수 없이 어떤 서러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는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한 살에 가정을 꾸렸다. 결혼할 무렵 그의 직업은 주식회사신라교역 냉장부 책임자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다니던 공장이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자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카세트테이프 도매업을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디피점을 찾아다니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였다. 이익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먹고 살 정도는 되었다.

  팔십이 년 가을 어느 날 그는 장애를 입게 된다. 그 날도 그는 원당의 한 디피점에 테이프를 넘겨주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해가져서 어두웠기 때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오토바이를 몰았다. 사고는 원당고개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눈앞에 용달차가 나타나 지그재그 난폭운전을 하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그는 오토바이를 차도 바깥쪽으로 빼고 속력을 늦췄다. 그런데 그 순간 용달차가 중앙선을 넘어 그를 향해 가로질러 왔다. 그는 무의식중에 핸들을 틀었다. 다음순간 오토바이가 가로수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아득하게 그의 뇌리에 박혔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병원에서였다. 이미 그의 왼쪽 팔은 부러진 채 복합골절이 돼 으깨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한동안을 병원 신세를 졌다. 장애를 가지게 됐지만 비관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운명으로 장애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생업에 종사했다. 장애를 개의치 않고 살아가던 그에게 팔십칠 년 초 가혹하게도 불행이 닥쳐왔다. 테이프 도매업자에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평소 거래하던 업자가 테이프를 싸게 넘겨주겠다고 해서 그는 가지고 있던 돈과 주변에서 돈을 긁어모아 업자에게 보냈다. 곧 물건을 보내 주겠다던 업자는 그러나 종무소식이었다. 그가 찾아 나섰을 때는 이미 업자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 날부터 빛 독촉에 시달려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 차압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 일로 충격을 받은 그의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해 사월 이십일 아내마저 가출했다. 아내는 "아이들은 아빠가 잘 돌보는 편이니 믿고 맡기고 며칠 기도원에서 머리를 식히고 오겠다."고 편지를 써놓고 나갔는데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가 안팎으로 곤란한 지경에 처하자 혼자 사는 이모부가 도움의 손길을 뻗쳐왔다. "내가 당분간 아이들을 데리고 있을 테니 돈을 벌어 아이들을 데려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이모부에게 맡기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사판 함바집에 취직해서 밥도 하고 잔심부름도 해주면서 육개월을 보냈다.
  거기서 알게 된 아파트 현장 소장의 배려로 그는 만수동 오단지 아파트 경비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팔십팔 년 삼월 셋방을 얻고 아이들을 데려왔다. 지금 살고 있는 만수 이동 산동네에 있는 보증금 이심만원에 월세 사만 원짜리 셋방이 바로 그때 얻은 방이다.
  그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삼 년여를 근무했다. 그러다가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구십년 십이월 중순 그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뛰어 다녔다. 그러나 한 손을 쓰지 못하는 그를 받아주겠다는 직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정이 이 지경이 되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돈이 없어 중학교 이 학년에 다니는 큰애를 유급 시켜야만 했다.
  다급해진 그는 연안부두를 찾아갔다. 바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다. 부두에서 그가 한 일은 종일을 얼쩡거리다가 운 좋게도 큰배가 들어올 때 줄을 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부르면 작은 배를 타고 나가서 던져주는 밧줄을 갖다가 육지에다 걸어주고 이만 원 정도의 수당을 받는 일 이었다.
  그는 돈이 생기면 집으로 달려가 아이들 먹을거리를 사주고 곧바로 다시 부두에 나가서 대기하는 생활을 최근까지 했다. 하지만 그 일도 일정치가 않고 공칠 때가 훨씬 더 많아서 한 달 평균 삼십 만원을 벌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삼월 일일 목숨을 걸고 배를 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그가 배를 탈수 밖에 없었던 데에는 몇 가지 사연이 더 있다.

  그는 작년 시월 동사무소를 찾아가 생활보호대상자신청을 했었다. 그런데 동회 담당자는 그의 주민등록표에 아내가 올라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잘라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가 동네 사람들의 확인을 받아 가출 확인서를 작성해 갖다 줬지만 규정을 들어 불가하다는 담당자의 통고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란 소박한 기대는 이래서 물거품이 됐다.
  그는 현재 방세와 전기세 기타 공과금을 구개월째 내지 못하고 있다. 집 주인의 독촉도 독촉이지만 아이들의 풀죽은 모습을 대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직장을 구하기 위해 구인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지만 그때마다 "멀쩡한 사람들도 와서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데 장애를 가진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을 합니까."라는 야멸찬 거절의 목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가 말끝에 "사방이 벽"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로"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방문자는 그가 지친 표정으로 진저리를 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어쩌면‥‥‥‥" 무슨 말을 꺼내려다가 말문을 닫았다.
  방문자는 느낌으로 그가 말을 잇지 않았지만 이어질 다음 말을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다시 바다로 나가야될지도 몰라요 기술이 없으니 천상 화장일 밖에 할 수 없겠죠. 어쩌겠습니까. 이것도 내 운명인데 참고 살아야겠지요."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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