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마음속에만 있는 걸 어떻게 이해해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마음속에만 있는 걸 어떻게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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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분을 뵈러 길을 나섰던 날은 겨울의 한복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는 일월 중순의 어느 날 이었다. 그래서인지 외투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 사이로 길가에 군데군데 쌓인 눈덩이들이 꽁꽁 움추러 들어 뭉쳐져 있는 모습이 버스 차창 너머로 간단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두 분에 관한 사전 지식은 두 분이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분 중 한 분은 굉장히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장애를 이기고 슬하의 자녀 세 명을 남부럽지 않게 훌륭하게 키웠다는 피상적인 차원에 그치는 사실뿐이었다. 때문에 장애 판에서는 드문 자녀양육에 관한 이야기가 이번 취재의 주제라면 주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솔직히 말해서 두 분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취재기자의 관심은 자녀 양육에 관한 스토리보다는 두 분이 장애우 노인이라는 사실에 더 쏠려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무슨 엉뚱한 발상이냐고 핀잔을 준다면 그에 대한 기자의 변명은 이렇다. 즉, 언제부터인지 확실히 기억 할 수는 없으나 기자는 장애우들의 수명에 대하여 악의에 찬(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편견이 암암리에 비장애우들 뇌리에 자리잡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재활의학과 의사까지 공기인 방송에 나와 수 차례에 걸쳐 무슨무슨 근거를 대며 이 부분에 관해 집중적으로 거론함으로써 결정적으로 한몫 거든 이 편견의 내막은 기억에 의지하자면 장애우들의 신체구조상 장애 입은 부분의 손상으로 인하여 오래 살 수 없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기 때문에 이 편견설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이유야 어찌됐든 이장수 불가론이 장애우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 틀림없다는 전제 하에 당시기자 또한 같은 장애우의 한 사람으로서 심각하게 전전긍긍해야 했었던 기억이 새롭다. 지나친 상상력이 발동해서인지는 모르나 장애우와 비장애우와의 결혼에 이 편견이 난관으로 작용하지는 않을까에까지 생각이 미쳐 고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 때문에 기자는 그동안 명확한 이론적 근거를 들어 이 편견을 조목조목 반박하기보다는 일거에 이 어처구니없는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증거를 찾아 취재했으면 하는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두 분이 예순을 훨씬 넘게 사신 장애우 노인들이라는데 일시적이나마 기자의 관심이 더 쏠렸던 데에는 이 같은 배경이 깔려 있다.

 변명의 말미에 노파심 때문에 하나의 사실을 더 덧붙이자면 이번 취재를 기화로 여러 경로를 통해 수소문해 본 결과 우리 주위에는 장수를 누리는 장애우 노인들이 여럿 살고 계시다는 것이다. 장애우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분들 또한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장애우 노인들은 고단한 삶의 역정을 해쳐 나와 하나같이 부끄럽지 않은 말년을 향유하고 계셨다.
 그래서 기자는 장애우가 장수를 누릴 수 없다는 편견은 터무니없는 낭설임을 확인하고 두 분을 뵙게 되어 몹시 기뻤다. 두 분이 살고 계시는 문정동 장애우 아파트 팔동 일천이백오호에 들어섰다. 예상덕 할아버지는 유난히 등받이가 높은 휠체어에 파묻히듯 온 몸을 기대어 교육방송 임직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회화를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기자가 도착했음에도 볼륨을 낮추지 않는 것으로 보아 예상덕 할아버지는 매일 같은 시간대의 방송을 놓치지 않고 경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자를 맞은 건 이순영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거실 겸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는지 황급히 손에 묻은 물기를 수건으로 닦으며 기자를 탁상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꺼낸 처음 화제는 할아버지의 향학열에 관한 것이었다.
 볼륨을 조금 줄여달라고 부탁을 했다가 잠시후면 방송이 끝날 것이라는 대답과 함께 듣게된 예상덕 할아버지의 향학열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영어, 일어, 불어 거기다 중국어까지 오로지 방송을 듣고 외우는 식으로 공부를 해 웬만한 전공대학생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이순영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할아버지를 쳐다보자 할아버지는 대답대신 씩 웃는다. 집안에만 있다보니 방송청취가 유일한 낙이라고 옆에서 할머니가 덧붙인다. 예상덕 할아버지는 말하는 것과 움직이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중증의 뇌성마비 장애우로서 올해 예순 네 살이시다. 어려서 장애를 고치려고 여러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다가 상태가 더욱 나빠져 척추에서 물을 빼게 된 후로는 그나마 성한 허리까지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순영 할머니는 충남 예산이 고향이다. 올해 예순 여섯 살이신 할머니는 어려서 집에 있을 때 종기가 난 다리에 침을 맞다가 침이 신경을 건드려 왼쪽다리를 절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팔십년도에 교통사고를 당해 저는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아주 못쓰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두 분이 결혼하기 전 각자 살아온 삶을 간략하게 언급해 보자. 예상덕 할아버지는 서울이 고향이다. 다동에서 태어날 당시 집안 형편은 비교적 유복한 편에 속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순종 임금 때 승지 벼슬을 지냈고 비록 돌 지나고 얼마 안 있어 돌아가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당시 남대문 시장에 있는 중앙물산의 중역을 역임했다. 두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체부동으로 이사해서 오래 살았는데 장애 때문에 학교는 다닐 수 없었지만 가정교사를 채용해서 영어, 일어 등 학교 교과 과목을 집에서 배울 수 있었다. 육이오 동란 중에는 집안식구들이 모두 피난을 떠난 텅 빈집을 혼자 남아 지켰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할아버지 어머니는 피난 가서 만난 어느 국회의원 할아버지와 재혼했다. 어머니를 따라 신당동으로 이사해 살면서 할아버지는 뚜렷이 하는 일 없이 월급을 주고 채용한 간병인의 수발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이순영 할머니는 예산군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광신면 노절리에서 농사짓는 집안 일을 도우며 살았다.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다. 주로 일군들 밥을 해주면서 지내다가 스물 다섯 살에 친척이 서울에 많이 살아 친척집을 다니러 왔다가 아주 서울에 눌러 앉게 되었다.

 할머니가 예상덕 할아버지를 만난 것은 할아버지가 스물 여덟 살이 되던 해, 할아버지가 신당동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나이 서른 살이었던 할머니는 친구가 할아버지 수발을 드는 간병인으로 있어 놀러 갔다가 그 후 자주 할아버지의 신당동 집을 들락날락 거리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다녀올 데가 있다며 며칠 간만 할아버지를 돌봐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마침 따로 하는 일이 없었던 할머니는 선뜻 그러마 라고 대답을 했고, 그 날부터 밥도 먹여주고 담배 심부름도 해주며 할아버지 수발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돌봐주자 먼저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청혼을 해왔다.
 할머니를 처음 보는 순간 어떻게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할아버지의 청혼은 꽤나 적극적이었고 돌봐주다 보면 좋은 날이 있겠지 라고 생각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두 분은 얼마 안 있어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곧 콘 딸 원희를 낳았다.(현재 서른 네 살) 원희가 돌이 지날 무렵 시어머니와 같이 살던 국회의원 할아버지가 정릉 쪽이 공기가 맑고 새집을 많이 지으니 이사를 가자고 했다. 그래서 현재도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정릉 개천가 우체국 앞에 집을 사 이사를 갔다. 이사를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국회의원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돌아가셨다.

 그 후로 꼬박 이십오년을 한곳에서만 살아 두분 삶의 대부분의 내력이 담겨있는 정릉 집에서의 생활은 시작부터 어려웠다.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방 다섯 개 중 세 개를 세를 줘 거기에서 나오는 방세로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안방은 시어머니가 기거하고, 두 분은 좁은 뒷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지내야 했다. 방이 얼마나 좁은지 네 명이 누우면 칼잠을 자야 할 지경이었다. 큰딸이 네 살이 되던 해 작은 딸 은희가 태어났다.(현재 서른 살)그리고 삼 년 후 막내아들 홍진(현재 스물 일곱)이도 연달아 세상에 나왔다.
 슬하에 자녀 세 명을 두게 되자 이순영 할머니의 삶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녀양육이 그녀의 생활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눈물겹도록 힘들었던 한 시절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서 자녀들을 키울 수 있었는지 이순영 할머니는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꿈만 같다고 말한다.
 정릉 집에서의 생활은 언급했듯이 방세 외에는 따로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매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방세마저 시어머니가 직접 받아 쓰셔서 며느리는 집안경제에 관한 한 속수무책이었다.
 한동안을 두 분은 용돈도 없이 끼니를 잇는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이순영 어머니는 더 이상 밥만 먹고는 지낼 수 없었다. 당장 아이들 학비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다.

 그래서 처음 시작한 일이 한번을 만들어주든 품삯을 받는 일이었다. 다행히 예전에 어깨너머로 배운 기술이 있어서 어머니는 부지런히 주변 가정집이나 시장을 찾아다니며 일감 주문을 받아 열심히 품삯 바느질을 했다. 그때 돈으로 치마 저고리 한 벌 바느질을 해주는데에 사천원을 받았는데 이 돈으로 우선 아이들을 아버지 담배 값을 대고 나머지는 아이들 학용품 값을 충당하는데 썼다.
 수입이 만만치 않아서 삯바느질을 계속하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눈이 침침해와 더 이상 바느질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어머니는 바느질일을 그만두고 남의 집 환자를 돌보아 주는 간병인으로 나섰다. 마침 뇌졸중을 앓아 누워 있는 동네 노인을 알게 되어 하루걸러 그 집에 가 노인을 돌봐주고 오천원의 월급을 받았다. 아침 열시에 집을 나서 저녁 열시나 돼야 돌아오는 고단한 일이었다. 이 일을 꼬박 오년간 했다. 육년째 접어들어서야 어머니는 삼만원의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은 늘 훈훈했다. 무엇보다 자녀들이 제 앞가림을 스스로 하며 속을 썩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공부도 잘했다. 막내아들은 다섯 살에 한글을 다 깨우칠 정도로 총명했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처럼 밖에서 놀지 않고 집안에서만 노는 자제력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어머니는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하러 야단치지 않아도 되었다. 어머니 스스로 마음이 아파서 그렇지 아이들은 부모의 장애에 대해 티끌만치도 원망하거나 부끄럽게 생각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극진한 효심을 보였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홍진이가 네 살 때인 어느 날 사십원을 과자를 사먹으라며 홍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돈을 받아 나간 홍진이는 잠시 후 뜻밖에도 담배 한 갑과 두부 한 모를 사와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담배는 아버지에게 주고, 두부는 반찬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 날 어머니는 너무도 기가 막혀서 많이 울었다. 홍진이는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자신이 차를 사서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꿈도 꾸지 마라고 핀잔을 줘도 막무가내였다. 꼭 할거라고 고집을 부리던 홍진이는 프랑스에 유학을 가기 전 차를 사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을 세 번 다녀오고 경주를 두 번 다녀와 자신이 한 약속을 지켰다.
 아이들 교육을 시키면서 어머니는 책상 하나 제대로 못 사주고 라면 한번 제대로 끓여 주지 못했다. 용돈도 줄 수 없었다. 집안 사정을 아이들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용돈을 달라는 말을 입밖에도 내지 않았다. 대신 스스로 알아서 용돈을 벌어 썼다. 노트를 복사해서 팔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을 가리키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어머니의 짐을 덜어 주었다. 더욱이 홍진이는 중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학자금 걱정까지 덜 수 있었다.
 이렇듯 비좁은 방에서 책상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무난히 해 어머니를 기쁘게 했다.

 큰딸 원희는 성실여대 재학 시 장학금을 타면서 다녔고, 홍진이는 서라벌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수학교육과에 합격, 대학교를 마친 후 아주대 전산학과 대학원을 거쳐 프랑스에 유학을 하고 있는 현재까지 오히려 학교에서 돈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있다.
 유일하게 작은 딸 은희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은희가 성심여대부고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장기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은희는 엄마가 쓰러졌는데 어떻게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겠느냐며 진학을 포기한 채 그 해부터 직장생활을 했다.

 팔십년 팔월 십육일, 간병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 집 앞 건널목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한쪽 다리를 아주 못쓰게 된 것은 물론 그 후 꼬박 삼년여를 병상생활을 해야 했던 그 시기는 어머니에겐 악몽 같은 날들의 연속으로 기억되어지고 있다. 그 때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은희를 대학에 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회한이 지금도 어머니 가슴에 남아있었다. 홍진이가 대학교에 입학하는 경사조차 지켜보지 못한 채 어머니는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다.
 병상생활을 하면서 어머니가 더욱 가슴아파야 했던 것은 집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작은 딸 은희가 아버지 수발을 들었는데 직장이 멀어 출근하면 저녁 늦게나 들어오기 일쑤여서 무엇보다 아버지 끼니를 제대로 챙겨줄 수가 없었다. 아침에는 세수시켜 드리고, 대변을 받아내고, 옷을 입혀 드리면 밥을 먹여드릴 짬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는 아들 수발을 기피했다. 은희가 출근하고 나면 빵과 우유를 사서 아들에게 먹으라고 주었을 뿐이다.
 빵과 우유를 하도 많이 먹어 아버지는 지금도 빵과 우유를 보면 진저리를 친다. 제대로 된 끼니는 은희가 퇴근해서 먹여드리는 저녁식사 한끼가 고작이었다. 어머니가 병상생활 일년만에 외출을 나와보니 아버지 모습이 말이 아니었다. 하얗게 늙어서 영양실조로 왼손이 마비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 날 어머니는 아이들 아버지를 부여잡고 많이 울어야 했다.

 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이순영 할머니는 큰 딸 원희씨의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희씨는 연애 결혼을 했는데 부모의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당당하게 아버지보고 장가오느냐 나보고 오는 거지라며 연애를 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희씨는 현재 슬하에 남매를 두고 무역협회에 근무하는 남편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다. 작은 딸 은희씨는 평범한 회사원 사위와 결혼해 금호동에서 역시 행복한 삶을 꾸리고 있다. 아들 홍진씨는 팔구년 올해 사월 달에 들어갈 며느리와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다. 수년 내 박사 학위를 따면 귀국해서 교단에 설 포부를 가지고 있다.
 예상덕 할아버지와 이순영 할머니는 아들 홍진씨가 귀국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아들이 돌아오면 그동안 할아버지가 구술을 해서 틈틈이 써놓은 시를 모아 시집을 낼 생각이다. 그뿐 아니라 현재 융자를 끼고 있어 빠듯한 아파트 생활도 조금은 펴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아들이 나올 때까지만 참으면 고생도 끝나리라는 생각을 하며 요즘 할머니는 아파트 내에 있는 노인정에 나가 보안경 상자를 접는 부업을 하며 소일을 하고 있다. 하루 삼백 개를 접으면 삼천원을 받는데 더도 덜도 없이 꼭 그 정도의 일을 한다.

 같이 살고 있는 시어머니는 지금도 엄하다고 한다. 올해 여든 네 살인 시어머니는 혼자 몸이시면서도 안방을 차지한 채 속으로는 고마워 하시는지 몰라도 밖으로 전혀 내색을 안 해 이순영 할머니는 몹시 서운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할아버지 또한 자존심이 강해서 고맙다는 말을 좀체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할머니는 지난 삶이 억울할 때도 많다.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씻은 듯이 억울한 감정이 사라진다. 혹 어쩌다 아이들 생각만으로 억울한 감정이 풀리지 않으면 주로 아침에 할아버지를 붙잡고 탄식을 한다. 참고 들어주소 부탁을 하며 왜 이렇게 생겨 가지고 나를 힘들게 하느냐며 나이에 걸맞지 않는 투정을 부린다.
 예상덕 할아버지는 공부가 제일하고 싶단다. 끝까지 공부를 했으면 박사학위는 문제없이 딸 수 있었다는 것이 할아버지의 진한 아쉬움이다.
 마지막으로 기자는 예상덕 할아버지에게 할머니와 사는 동안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어보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내 마음을 이해 못해주는 것이 섭섭했지" 그러자 이순영 할머니가 얼른 반박했다. "아니 마음 속에만 있는 걸 어떻게 이해해" 두 분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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