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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신기료쟁이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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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호텔과 백화점이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고 지하철 잠실역이 있으며 성남시와 강남, 그리고 시내 방면으로 갈라지는 교통 요충지인 서울 잠실 사거리는 예외 없이 많은 차량들과 그에 걸맞는 인파들로 시끌벅적거리며 붐비고 있었다.
 무심히 길을 가던 한 노인이 있어 문득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둘러보며 자신이 젊었을 때의 잠실벌을 기억해 낸다면 틀림없이 그 놀라운 변화의 양상에 격세지감을 느끼고 혀를 내두를 것이 뻔한 잠실 사거리에서 "신기료쟁이"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유년시절, 설레임과 흥분 속에 어른들을 따라나섰던 장터 말미에서 목격하곤 했던 신기료 아저씨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부지런히 고무신과 운동화 짝을 만지며 한편으로는 무궁무진한 옛날 이야기로 턱을 괴고 쭈그리고 둘러앉아 있던 아이들을 감동시키던 모습으로 각인되어져 있다. 마치 신발을 고치는 일 보다는 이야기의 샘을 길어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주된 일이었던 듯 신기료 아저씨는 아이들에게 그리움을 나눠주는 꿈의 마술사 그 자체였었다.
 그런 신기료 아저씨를 지금 찾을 수 있을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개발붐이 밀어닥치기 전 잠실벌은 호수가 있는, 말 그대로 한적한 시골에 지나지 앉았다. 시골이라면 틀림없이 장이 섰을 것이고 신기료 아저씨 또한 장의 한 구성원으로 호기심 많은 아이들 틈에 둘러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의 억지가 따르지만 옛 장터가 열렸던 자리를 찾아보는 것도 어떤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늦은 여름날 오후 잠실 사거리를 헤매었다. 번잡도를 보아 옛 장이 열렸던 터가 지금의 잠실 사거리 어디쯤이라고 미루어 짐작하며, 알 수 없는 가벼운 흥분감 마저 느끼며, 부지런히 인파를 헤쳐나갔다.

 신기료 아저씨는 있었다. 주공아파트를 끼고 도는 담벼락에 붙어 서 있는 몇 개의 노점들 사이에 신발관리점이라는 번듯한 간판을 달고, 그리고 신기료 아저씨는 뜻밖에도 장애우였다.
 역시나 그 옛날 신기료 아저씨는 사라져버린 듯 했다. 현대의 신기료 아저씨는 고무신 대신 구두를 고치며 장애우로서 버거운 삶을 이겨나가며 직업으로 신기료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신기료쟁이 배규호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옛날이야기가 아닌 우여곡절이 많았던 자신의 삶의 여정기였다.
 올해 서른 다섯 살인 배규호씨는 전남 영광군 영광읍 무령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 부친은 영광읍에서 법성을 오가는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수였다. 먹고사는데는 별문제가 없었던 집안에서 그는 종손으로 태어났다. 위로형이 한 명 있었지만 그 형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병을 앓다가 죽었다고 했다.
 세 살 때까지 별 탈 없이 자라던 그는 세 돌 잔치를 막 치르고 난 어느 날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뚜렷한 병명도 없이, 일어서려 하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넘어지고 온 몸에 열이 나는 이상한 병이었다. 훨씬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회지 의사는 그의 병명을 소아마비성 비타민 결핍증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앓아 눕자 그의 집에서는 그의 병을 고치기 위해 논 한마지기를 팔았다. 가축도 팔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해 어머니 이효순씨가 그들 들쳐업고 전국의 여러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 다녔지만 그의 병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집안 가계가 급격하게 기울어 가는 가운데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되던 해 여동생을 낳았다.
 그 즈음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도 여순반란때 빨치산에게 난사 당한 다리의 통증이 심해져 거동을 날이 더 많았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가출을 했다. 아버지 대신에 돈을 벌어 오겠다고 어머니는 광주시내 큰 식당에 취직을 해 집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할머니의 간호를 받으며 꼬박 삼년을 더 누워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그는 기적적으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온전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그는 영광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생계는 어머니가 조금씩 부쳐주는 돈과 동사무소에서 영세민 배급으로 나오는 한 달 밀가루 한 포와 이천원 가량의 돈으로 근근히 이어나갔다.

 공부를 잘해 반에서 십등안에 꼭 들던 그는 삼학년에 올라갈 무렵 갑자기 목이 굳어버리기 시작해 더 이상 자라지를 못하고 현재의 장애상태를 가지게 되면서 아이들한테 심한 놀림을 받았다.
 그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집안 살림을 맡고 있던 할머니가 그가 사학년에 올라가던 해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어 드러누우시고 말았다. 밑의 여동생은 어머니가 데려가 별문제가 없었지만 의욕상실에 걸린 아버지와 할머니 간호는 그의 몫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는 집안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밥을 하고 수발을 들고 학교를 가야 하는 고단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그런 가운데서 어렵게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가정 형편상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꿀 수 없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있어 아버지가 화병과 우울증을 앓다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나온 결론은 할머니는 작은아버지가 모셔가고 집과 논을 팔아 그와 여동생은 어머니가 있는 대처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 즈음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던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어머니의 사촌오빠 집인 응암동 산꼭대기 무허가 판자 집 방 한 칸을 빌어 여동생과 같이 자취를 하게 됐다. 식당 일을 하던 어머니가 전적으로 생활비를 대줘 굶지는 않았다. 놀면서 심심하면 시내를 쏘다니며 하드도 팔면서 삼년 가량을 지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서울 변두리에 있는 한 재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쯤 그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재활원에 들어가자마자 원장님한테 학교에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원장님은 공부보다는 보석가공 기술을 배우면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할 수 있다며 그의 부탁을 거절했다. 
 별 수 없이 그는 눈물을 머금고 재활원에서 소개해준 금호동에 있는 한 보석가공 공장에 취직했다. 공장에서 숙식을 제공받으며 그는 보석에 광을 내는 일을 했다. 그가 처음 받은 월급은 삼천원 이었다. 거기서 일년육개월 가량을 일을 하다가 공장이 망하게 되어 그는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상도동에 있는 동업종의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이때 이왕 이렇게 풀린거 돈이나 벌자는 생각을 그는 했다. 옮기면서 월급이 일만오천원으로 뛰었다. 그는 어느새 재단-컷트-광으로 이어지는 보석가공 공정에서 각광을 세우는 최고의 기술자로 인정을 받고 있었다. 브라질 바이어가 방문해서 그의 솜씨를 보고 브라질로 이민을 가자고 총돌질할 정도였다.

 상도동 공장에서 그는 꼬박 삼년오개월을 일했다. 그 기간 중에는 두 번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들어가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기능은 월등한데 월급은 비장애우에 비교해 형편없이 낮게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공장 주인은 노골적으로 너는 장애우니까 작은 월급도 감지덕지하라며 그의 기를 죽였다. 그는 당시 칠만원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도 사만여원의 월급밖에 받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분노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몇 차례에 걸쳐 주인에게 항의를 했다. 그러나 주인은 간단하게 그의 욕구를 묵살했다. 결국 그는 아무 미련 없이 그 공장을 떠났다.
 상도동 공장을 나온 그는 삼육재활원에 들어가 한동안 시계수리 기술을 배웠다 워낙 손재주가 있어 삼개월여만에 기술을 다 배우고 북가좌동에 있는 어느 시계점에 취직을 했다. 시계점에 수리기 사로 들어가면서 그는 주인에게 처음에는 밥만 먹여 달라고 했다. 그 대신 일을 잘하면 월급을 주는데 이왕 줄바에는 비장애우와 똑같이 달라는 단서를 붙였다. 그 덕분인지 두 달만에 그는 월급으로 팔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시계점에서 이년 가량을 있으면서 그는 손님들을 상대하며 시계를 고치는 일을 했다.

 그 후 그는 우연히 시계를 고치러 들른 한 손님을 알게돼 잠실 삼전동에 있는 신문가판관리소로 자리를 옮겼다. 시계수리 기술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직후였다. 기판관리소에서 그는 주로 돈을 관리하며 지냈다. 월급은 얼마 안됐지만 생에 처음 행복감을 맛보았다. 주위사람들이 그를 인격체로서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그는 구두닦이, 신문팔이 넝마주이 청소년들의 모임인 개미회를 알게 되어 가입했다. 개미회는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조금씩 돈을 각출해 불우청소년을 돕는 모임이었다. 그도 월급을 떼어 돈이 없어서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을 도왔다.
 거기서 일년을 지낸 후 그는 어느 날 엉뚱하게도 종로 낙원상가에 있는 드럼을 파는 한 악기점엘 들어갔다. 뭔가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보석도 안되고 시계수리도 안되니 이젠 잘난 놈들이 하는 음악이나 해보자는 자괴감과 맞물려 그를 충동질했다.

 그는 허드렛일과 고작 삼만원에 불과한 월급만이 보장된 악기점에서 낮에는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드럼 치는 연습에 매달렸다. 그 보람이 있었던지 연습을 시작한지 오개월이 지났을 즈음 그는 밤업소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하루 출연료로 일만오천원에서 이만원을 받으며 그는 봉천동, 신원동 등 서울 변두리 고고장을 전전했다. 한창때는 워커힐 나이트클럽에 출연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다섯 명이 팀을 이뤄 유명한 해수욕장을 섭립하며 돈을 긁어모으기도 했다.
 낙원상가 영광악기점 배꼽 추라면 악사들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의 전성기는 꽤 긴 시일동안 이어졌다. 그가 이렇듯 잘 팔릴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이 팽팽하고 조그맣고 귀엽고 장애를 가진 그가 비장애우도 치기 힘든 드럼을 쳤기 때문에 그는 상품가치가 있었다. 그는 이런 사실이 수치스러웠지만 분노했기 때문에 더 열심히 연습을 하고 드럼을 쳤다.

 그러나 이런 남다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생활은 결국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어 그가 가지고 있던 상품가치들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는 어느새 이십대 후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밤업소에서 그를 외면하자 방랑벽이 도진 그는 삼육원에 있을 때 알게된 인천에 살고 있던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는 여인숙에 기거하며 주안 역 앞 사거리 한 모퉁이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그는 거기서 일년여를 있으면서 기술도 없으면서 서툰 솜씨로 구두를 고치다가 손님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면서 신기료 기술을 배웠다 다방을 돌며 구두를 걷어오는 찍새 일도 그의 몫이었다. 열심히 했지만 벌이는 생각만큼 시원치 않았다. 근근히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는 암담함을 느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예전에 몸담았던 삼전동 신문판매소를 찾아간 그는 구두 닦을 자리를 한군데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송파사거리 황제예식장 앞에 자리를 잡고 신기료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센터를 못 짓게 해 길바닥에서 하다보니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하루 일만원 가량이 초기의 그의 수입이었다. 그는 얼마 안 되는 수입을 꼬박꼬박 저축했다. 구청에서 단속을 나오면 치우고 단속반이 지나가면 다시 벌려놓고 일을 하는 숨가쁜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이년여가 지나자 그는 하루 수입으로 이만원에서 삼만원 사이를 벌 수 있었다. 장사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힐 무렵 그는 자리를 팔았다. 관행은 권리금으로 백일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백만원을 받아야 했지만 사러온 사람의 사정이 하도 딱해 결국 칠십만원만 받고 자리를 넘겨주었다. 그는 그 돈에다 개미회에서 빌린 돈을 얹어 부근의 진주아파트 앞자리를 오백만원을 주고 샀다. 거기서 삼개월 정도 장사한 뒤 다시 육백만원을 받고 자리를 넘긴 후 빚을 갚고 난 차액 백만원으로 지금 자리를 사서 옮겨왔다.

 그가 정착한 현재의 자리는 먼저 하던 사람이 구청의 단속에 쫓겨 거진 포기하다시피 한 자리로 그 자신도 정착하기까지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수시로 들이닥치는 구청의 단속반 때문에 애써 마련한 센터 박스가 실려 가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지금 지어 논 박스는 그가 세 번째 마련한 박스이다.
 그는 몇 번에 걸쳐 구청에 찾아가 철거에 항의를 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인간답게 살려는데 왜 장사를 못하게 하느냐,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지는 말아라… 그 덕분인지 이제 강제철거는 없어진 상태이다.
 그는 현재 자리에서 초기에는 하루 수입으로 고작 칠천원에서 팔천원 사이를 벌었다. 그때는 물론 단골도 없었다. 웬만큼 장사가 되기 시작한 건 팔팔년 이후부터이다. 그 해 이후 그의 한달 평균 수입은 대략 칠십만원을 웃돌고 있다. 장사가 되자 주변에서 방해도 많았다. 특히 불량배들은 원정까지 와서 해 떨어지면 경찰이 없다는 식으로 협박을 일삼으며 자리를 거저 삼키려고 했다. 그는 싸움도 불사하며 불량배들과 맞섰다. 그는 천성적으로 누구든지 와서 자존심을 건드리면 못참는 성격이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지금 그는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인정해주는 신기료쟁이가 된 것이다.
 그는 무슨 일을 해도 최고가 되자는 목표를 삶의 지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절대 창피하지 않은 기능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멍청히 앉아 있는 것을 싫어하는 그는 손님이 없을 때는 연구에 몰두하기도 해 구두수평기를 고안해내 손님들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장애를 인정한다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말한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며 절대 허왕된 꿈을 꾸지 않는 그가 그래도 남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년후면 환갑을 맞으시는 어머니 이효순씨를 안심시켜 드릴 배필을 찾는 것이다.

 그의 두평 남짓한 삶의 터전으로 손님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는 일일이 인사를 챙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웃음을 잃지 않으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끊임없이 손님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모습이 옆에서 지켜보기에 무척 좋아 보였다.
 그의 말대로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무슨 일을 하건 자신이 만족하고 있다면 그 삶은 이미 성공한 삶이 아닐까. 어줍잖게 개똥 철학을 옲으며 그와 작별했다. 어느새 잠실 사거리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글/이태곤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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