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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그래요, 신은 공평합니다"

국제적 명성의 정상급 성악가 최승원씨

본문

  그를 인터뷰하고 찻집을 나서는데 카운터쪽에 있던 직원이 "저 분 성악하시는 분 아니세요?"한다. 그 직원 뿐만 아니라 인터뷰 내내 찻집 안에 있던 손님들의 흘금거림도 예사스럽지 않았다. 외국에서 생활하다가 국내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도 최승원 씨는 그렇게 벌써 유명인사였다. 대중들이 쉽게 클래식 음악인들을 접할 수 있는 "열린음악회" 무대에도 여러 차례 섰으니 그의 "얼굴팔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다.
  그렇지만 그가 무대중앙에  서기 위해 떼어 놓는 몇 발걸음에서도 매우 쉽게 드러나버리는 장애사실이 그의 인상을 더욱 깊게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도드라짐"이  이제까지의 그의 삶을 참으로 고단하게 만들기도 했다. 장애우대통령이라고 일컬어지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 축하공연에서조차 남들과 달리 도드라지게 걷는 최승원이라는 성악가를 무대에 세우는 것은 "그림상" 곤란하지 않느냐는 의견 때문에 출연견이 좌초되기도 했었다니까. 그렇게 그의 도드라짐을 어쨌든 눈에  편치 않은 인상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그는 조금 더 고단해 해야 할 지 모른다.

 

 

"너 성가대 해보지 않을래"

  다행이 이제 사람들에게 그가 지체장애우라는 사실은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정상급 성악가"라는 이력에 가려진 작은 그림자로 다가올 뿐이다.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쿨우승, 프츠스 오페라 콩쿨 입상에 이어 애버리피셔홀, 앨리스 튤리홀 , 카네기홀, 아스펜 응악제, 탱글우드 음악제 연주 등등 그이의 화려한 이력은 끝없이 이어진다. 오월에도 미국 LA, 네덜란드, 캐나다 등 해외 연주일정이 빽빽이 수첩에 적혀 있다.
  오늘날 그가 따내고 있는 그런 성공의 과실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모차르트처럼 다섯 살 때부터는 아니더라도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정성스런 뒷바라지를 받으며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쉽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한 독자들이 있다면 그러나, 한 가지 깜빡한 것이 있다. 그가 지체장애우라는 사실이다. 학장시절 주위 사람들은 그이 노래를 듣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음악의 길을 가도록 권하지는 않았다. 몸이 성한 사람도 성공을 하기 어려운 음악계에서 불편한 몸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더욱 앞날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그의 재능은 오히려 시작(詩作)이나 그림, 붓글씨 쪽에서 더 빛을 발하기도 했다. 한 때 국무총리상도 받기도 한 그의 문학적 재능으로 시인이 되라는,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앉아서 할 수 있으면서도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져야 한다. 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전 그런 얘기를 많이 듣고 자랐어요. 너는 너의 손과 발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서로 사랑하고 안하고는 오히려 그 다음의 문제인 것처럼 말이예요. 그런데 난 그렇게 생각했죠. "그래? 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면 안되는데?" 진로에 있어서도 그냥 계속 앉아서 하는 직업만 찾다보면 평생 장애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버릴 것 같더라구요."
  그렇게 막연한 반발심으로 그는 활동적인 과학기술을 희망했고, 대입 지원서에 공대를 적어넣었다. 그런데 번번히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아도 그의 "장애"가 걸림돌이었다.
  그제서야 운명처럼 음악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미 그이 재능은 주위에 알려진 터였다. 고귀한 빛을 가진 보석은 아무리 다른 돌들속에 감춰 놓으려고 해도 그 존재가치가 곧 드러나는 것처럼.
  그 운명적인 첫 만남은 고등학교 시절 옆집 형을 따라간 집근처 교회의 "문학의 밤"행사에서였다. 우연히 찬송가를 불렀는데 그의 목소리에 반한 성가대 선생님이 높이 칭찬하며 성가대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원래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던지라 음악과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던 교회에 드나드는 일은 그 이후에도 그다지 적극적이지는 못했다. 그러다 공대 입학 신체검사에서 번번히 거부당해 좌절하고 있던 그에게 성가대 선생님은 음대를 권했다. 혹시나해서 부랴부랴 두 번 정도 레슨을 받은 후 시험에 응했고, 무난히 한양대 종교음악과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 후에는 뭐, 저는 미팅 나가면 괜히 분위기만 깨니까 남들처럼 연애고민도 안하고 아침 아홉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그냥 공부랑 연습만 했어요. 그러면서도 사실 가끔씩 암담해지기도 했죠. 과연 남들처럼 나도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아니 졸업 후에 어떤 길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에 말이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은 평소때는 똑같이 연습하고 무대에 서다가 조금 중요하고 특별한 무대에는 합창단 지휘선생님이 그에게 빠지라고 한 일이다. 등장과 퇴장시 도드라지는 그의 걸음걸이를 그 지휘자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해두자. 자신의 항변으로는 역부족인 꽉막힌 지휘 선생님의 편견에 승복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 빠진 무대를 바라보며 분노를 곱씹을면서도 그는 자신이 맞서야할 국내 음악계의 편협한 사고와 좁다란 무대가 갑갑해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현실이 중요한 계기가 되어 그가 대학을 졸업한 해에 그의 가족은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온갖 형태의 예술분야의 진지한 시도와 향연이 가득한 뉴욕에서, 무엇보다 장애우 차별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사회분위기 속에서 최승원 씨는 맨하탄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 원없이 공부했다.

 


"당신의 몸을 보는게 아니라 노래를 들으러 오는 것"

  대학 동기들은 그를 거의 잊어갈 무렵인 구십삼년 사월 어느 날 국내 모든 언론들은 뉴욕 메트리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콩쿨 본선에서 최승원이라는 한국인 성악가가 우승을 했다는 낭보를 전했다. 이만여명의 쟁쟁한 실력을 갖춘 세계 각국의 성악가들 가운데 최고의 목소리로 뽑힌 것이었다.
  그 사건은 종종 명사들이 칼럼에 인용될 정도로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우승자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그는 심사위원들에게 담담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저처럼 다리를 심하게 저는 사람이 오페라 무대에 선 적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본선에서 떨어진다 해도 저는 이런 기회가 주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우승이라뇨? 도대체 왜 저를 뽑았습니까?"
  그 때 심사위원은 이렇게 답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몸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전날 한국식당에서 먹은 설렁탕이 잘못되었는지 콩쿨 당일에 그는 계속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탈진해 기진맥진 한 상태에서, 모처럼 다가온 중요한 기회마저 놓치게 되는 자신의 불운을 탓하면서 조금은 자포자기한 마음이 되어 아무런 기대나 욕심없이 평소에 연습을 하듯이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콩쿨은 한 번도 드러내놓고 무대에 선 아들을 보러 오시지 않았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본선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지리를 지킨 무대였다. 늘 멀리서 아들을 보고 살짝 돌아가시곤 하던 부모님이 보시는 눈앞에서 막상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을 때 기쁨은 무엇보다 컸다. 그러나 그 트로피 보다 심사위원의 말이 던져준 파장은 그 자신이 내심 갖고 있던 막연한 열등감을 속시원히 씼어내준 샘터의 찬물같은 의미였다.
  심사위원이 단순히 격려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곧 경험하게 된다. 아스펜 음악제에서 리고레토의 만토바 공작으로 데뷔 이후 그는 밀려드는 오페라 출연제의를 받기 시작했다. 헨델의 타메를라노에서의 바야제트, 모차르트으 돈죠바니의 돈 오타비오 등 수많은 오페라무대에 서면서 무대를 압도하는 능력과 뛰어난 극적인 해석을 보여준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걸을 때 몸이 적지 않게 흔들리지만 사실 보조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가벼운" 지체장애 수준인 그가 오페라 무대에서는 것은 통념이나 상식을 깨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뭣한 지극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한국 국적 간직하고 있지만 장애우 수첩 발급 못받아

  최승원 씨는 활동무대의 비중을 서서히 국내 쪽으로 돌리고 있다. 교우임용건에 대해 몇몇 대학과 협의도 진행되고 있다. 이민을 떠났지만 아직 국적을 한국으로 남겨놓고 있는 그로서는 국내무대에 서는 것이 개인적으로 영광스럽고도 만감이 교차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전히 유쾌하지 않은 경험을 자주 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몇 해 전 서울에 온 그는 모처럼 지하철을 탔다. 멀리서부터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그를 본 지하철 매표직원은 그가 다가오자마자 장애우수첩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때까지 그런 것이 있는 줄 조차 몰랐던 그는 "그런 것도 있어요?"하고 반문했다. 그건 꼭 갖고 다녀야 하는 거라고 한 마디하며, 그 직원은 무임승차권을 줬다. "이건 왜 주세요?"하고 또 다시 반문하는 그에게 그 직원은 장난치지 말라며 짐짓 화까지 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우리 나라에도 장애우등록제도가 있고 등록을 하면 장애우수첩을 발급받으며, 그 수첩을 제시하면 지하철같은 것은 공짜로 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정보들을 이제 알지만 그는 여전히 장애우수첩도 지하철 무임승차권도 받을 수 없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미국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애우수첩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가 타고 다니는 소나타승용차에는 장애우스티카가 없다. 그래서 그는 눈앞에 장애우주차장을 놓고도 엄밀히 말해 일반 차량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6월1일부터 개정된 편의증 진법 시행규칙이 시행되기 시작했을 때 멋모르고 장애우주차공간에 차를 주차시켰다가는 일반 차량과 똑같은 벌금을 물어야 할지 모른다.
  "아직까지 우리 나라가 관료주이기 때문에 "복지"라는 단어는 사실 잘 안어울려요. 복지라고 하면 무엇을 함에 있어서 그 서비스를 받는 사람의 불편함을 덜어주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오십년대에나 만들었을 법한 규정들을 놓고 그 틀에 맞지 않는다고 이십일세기를 눈앞에 둔 오늘날에도 바꾸려고 하지를 않아요. 저같은 경우 국내 장애등록이 된다는 말도 없고 안된다는 말도 없다는데 선례가 없어서 발급해주기 어렵다는 거예요. 복지부 공무원들도 제 사례를 놓고 어떻게 할 것인가 회의까지 했다고 하는데, 한 공무원도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지만 어쨌든 도울 수가 없다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 나라사람들 하도 "빨리 빨리"를 외치니까 외국에서도 그 말은 안다죠? 그런데 자기 개선은 그렇게 빨리 안되는가 봐요."
  해외 연주여행길에 세계 각국을 방문해 잠시 체류할 때에도 그는 그 나라 다른 국민들과 똑같이 장애우로서의 권리를 자연스럽게 누리곤 했었기에 고국이 한국 정부의 그런 방치에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다. 하물며 루마니아에서는 거리의 여인조차 그에게 몇 가지를 묻다가도 말을 끝낸 후에는 그가 좀 더 편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살짝 몸을 피해주었는데, 우리 나라에서 자신을 밀치듯 몸을 부딪치고 갔던 사람이 박사입네 하고 텔레비전에 나오던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의 박사급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조차 루마니아에서 가장 비천하든 사람 보다 천박한 장애우 인식을 갖고 있는 현실을 발견하곤 할 때마다 그는 너무나 서글프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에게서 노골적인 놀림을 받던 쓰라린 기억도 이제는 이스라하지만 그런 현실을  접할 때마다 아직도 분노가 불쑥불쑥 솟곤 한다.
  "제가 경험한 일이데, 국립극장있죠. 한번은 거기 갈 일이 있어서 장애우주차장이 어디 있는지 아니까 그곳에 세우려고 하는데 주차관리 아저씨가 오히려 저한테 사정사정해요. 높은 부들이 이 근처에 차를 세울테니 그 공간 근처에 절대 차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대요. 만약에 제 차를 들여보내면 자기가 잘리게 생겼다는 겁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그 아저씨가 불쌍해서 한바탕 싸우려다 관뒀어요."
  외국에서 걸림없이 자유롭게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한국에 다시 들어온 한 장애아이가 친구들로부터 계속 갖은 놀림을 받으니까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해 거의 정신분열상태까지 가서 그 부모가 이곳은 내 조국이 아니라고 절규하며 다시 짐을 싸 외국으로 재이민을 나갔다는 이야기 한 토막도 그는 들려준다.
  "전 그런 캠페인을 한 번 했으면 좋겠어요. 별 다섯 개, 무궁화 다섯 개입네 하는 소위 일류 호텔들의 장애우 편의시설을 몰래 카메라로 찍고 만천하에 고발해서 실제적으로 무궁화를 떼는 운동을 벌였으면 하는 거예요. 일류 호텔들도 다 엉망이에요. 암튼 이런 저런 걸 종합해 보면 우리 나라는 뭐 명확히 후진국이에요. 후진국치고는 그런대로 이것 저것 하려고 애쓰고 있고 나름대로 많이 좋아지기도 했죠.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다른 선진국민들의 인식수준으로 올라갈 때까지 당장은 제가 불편하더라도 좀 더 참고 기다려야겠죠."

 


"아, 당신이 장애우였나요?"

  이제 주위에 노래에 소질이 있는 지체장애우가 있다면 주위 사람들은 최승원 씨를 들며 한 번 계속 열심히 노력해보라고 격려를 해줄 지 모른다. 그 자신 너무나도 늦게서야 받았던 주위의 격려와 응원, 자신의 존재가 그렇게 다른 장애우들에게 자그마한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거절하지 않고 응하려고 한다. 물론 실력 그 자체보다 장애라는 외형의 껍데기에 포커스가 맞춰지는 것은 경제를 하지만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장애에 대한 헛된 망령과도 같은 선입견을 하루 빨리 벗기를 바랄 뿐이다.
  "제  노래를 듣고 감동 받았다며 무대 뒤로 와서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여인들도 많았어요. 그들과 데이트를 하면 나름대로 로맨틱한 장소에 가는데 거기 계단이 있잖아요. 그럼 그제서야 당신이 장애우였냐면서 손을 잡아줘요. 제가 세계 각국으로 공연을 다니다보면 레이건 대통령이나 인도네시아 국왕이나 모타코 국왕 같은 사람들하고 파티에서 만나기도 하는데 그 사람들하고 한참 어울리다가 나중에서야 "아, 당신이 장애우였나요?" 합니다. 제 주위 친구들이나 선후배들도 그래요. 저랑 평소때는 편하게 어울리다가 계단이나 걷기 힘든 곳이 있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요. 뭐 그냥 그런 게 그야말로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닌가요?"
  때때로 그를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묻곤 한다. 신이 불편한 몸을 주셨지만 또 대신 아름다운 목소리도 주셨으니 어찌 보면 공평하지 않냐고, 이제 담담히 그도 그 말에 동의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래, 인간은 공평하구나, 하느님은 공평하구나 하고,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는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또 적극적으로 살 수 있도록 한 음악에 대한 사랑,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제 그는 충만하다.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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