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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동생들이 저처럼 되는게 꿈이래요"

정신지체인 최초로 장애극복상 수상한 서성철씨

본문

  서성철(33). 이 사람은 월 수입은 몇 년 저부터 일백오십만원에서 일백십만원대를 오르내리며 그 밑으로 떨어져본 적이 없다.
  그런 그를 보고 "아마 국내에서 가장 높은 월수입을 올리는 사람일 것"이라고 어떤 이가 살짝 귀띔한다. 그 정도 가지고 뭐가 그렇다는 말인지, 잘 이해된지 않는다는 사람에게 서성철 씨가 정신지체 삼급의 장애우이고, 정신지체인 가운데 그렇다는 말이 덧붙인다면 그제서야 "아, 난 또. 어쩐지 이상하다 그랬지"하며 고개가 끄덕여질까?
  정신지체인 대다수가 일자리를 얻기 힘든데다 그것도 대부분 보호작업장같은 곳이고, 거기서 받는 월급이래야 교통비에도 모자라는 오만원 이하가 태반이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성철 씨가 받는 보수의 무게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기자는 함께 걸음 독자 가운데 "여기 더 높은 월수입을 올리는 정신지체인 있소"하고 누군가 나서주기를, 그래서 그 기록이 거듭 거듭 깨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감히 깨뜨릴 수 없는 기록을 이제 서성철 씨가 갖게 됐다. 정신지체인 최초의 장애극복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다. 지나 구십칠년 이래로 장애우의 날 기념식에서 시상식을 진행하고 있는 장애극복상은 매년 열 명의 수상자를 선정하는데 올해 처음으로 정신지체인 수상자가 나온 것이다.
  흔히 말하는 "장애극복"의 기본은 성인 장애우에게 있어 "자립"일 것이다. 그리고 자립의 기본은 자신의 일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하며, 그 대가로 납득할만한 보수를 받아 주위의 직접적인 도움을 받지 않고도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주요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장애우도 일자리를 갖기 어렵지만 그 중에서 특히 정신지체인의 경우 취업이나 그 밖의 생활에서의 자립이 더욱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현재의 우리 나라 사회 환경 속에서라면 말이다.
  그런 속에서 서성철 씨가 장애극복상을 수상할 만한 빛나는 가치를 가진 것은 그가 경력 십년의 제과 제빵 전문가라는 사실이다. 장애우기능경기대회에 아직 정신지체인 부문이 없어서 그렇지 만약 정신지체 제과제빵 부문이 있다면 그는 맡아놓은 금메달감이란다. 겨우 한글을 깨친 정도여서 자격증 취득시도는 아직 역부족이지만 기능대회에 정신지체인 부문이 있고 그것이 참작이 되어 필기시험이라도 면제되어 자격증을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딸 수 있다면 월 보수도 더 많이 뛸 텐데, 하는 것이 재활원 선생님의 아쉬움이다.


 

빵이 바꾸어놓은 이 사람의 삶의 모습

  그가 일하고 있는 충북 청주 봉명동 대로에 위치한 봉명제과를 찾았을 때 듬직한 체구의 성철 씨는 분주히 시간에 맞춰 이 오븐에서 저 오븐으로 빵들을 옮기고 온도를 조절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날이 바로 장애우의 날 전날이었는데, 다음날 장애극복상을 받으러 서울로 올라가야 하니까 다음날치까지 빵을 만들어 놓느라고 그 날은 더욱 분주했다.
그를 기다리며 제과점 여기 저기를 둘러보다 노릇노릇 말랑말랑 적당히 부풀어오른 꽤나 맛있어 보이는 빵들을 눈에 담았다. 그것들은 그저 그냥 빵일 뿐이었지만 고, 빵이라는 것이 바꾸어 놓은 한 사람의 삶의 모습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지금에야 서울만 해도 서울 복지관이나 남부복지관 같은 장애우 종합복지관에서 정신지체장애우들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고 있지만 성철 씨가 처음 제과제빵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십년 전만 해도 그것은 아주 낯선 기술이었다.
  그 때 성철 씨는 충북재활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 전에는 충남 보령의 ㅈ시설에 있었고 그곳에 옮겨가던 열두살 무렵까지는 한 일반 보육원에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모른다.
  "일반 가정의 아이들처럼 어머니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면 평범하게 정상적으로 자랐을텐데." 성철 씨는 오랜 동안 지켜본 충북재활원 김봉권 총무는 지나가는 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의 지능은 장애판정의 경계선급인 아이큐 칠십 정도 된다고 하는데 과연 부모님의 세심한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지능형성기나 성장기를 보냈다면 그의 삶은 많이 달랐을까.
  어쨌든 일반 초등학교에서는 학습진도를 잘 따라가지 못한 듯 그는 열두살의 나이에 장애우시설인 보령의 한 시설로 오게 됐다. 안타깝게도 일반 초등학교 오학년까지 다닌 것이 학교와의 마지막 인연이 됐다. 어린 나이에 그래도 같은 또래의 보육원 아이들만 보다가 무척이나 낯설게 보이는 다른 중증 정신지체장애우들과 함께 생활하게 됐을 때의 느낌은 어땠을까.
  "그냥 다른 생각은 없구요, 지금도 그 사람들이나 나나 똑같은 사람이라고 봐고. 손가락 하나라도 없으면 장애우라고 하지만 신체는 아무 이상 없잖아요. 그 시설에서 장애우들을 처음 봤지만 그 사람들도 저랑 같은 장애우 아녜요. 저한테 인간대우 해주고 금방 친구되고 하니까 그냥 그 사람들 두손 되주고 싶고 그랬어요."
  그곳에서 토끼랑 닭 모이주고, 공작새도 키우며 지내던 열여섯살 무렵 충북재활원에 있었다는 한 장애우가 보령으로 넘어와 그 시설에 잠시 함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있었던 시설이 더 좋다면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해서 그도 솔깃했다.
  그렇게 서너명의 친구들과 함께 충북재활원으로 옮겨오면서 그는 내심 "그곳에 가면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충북 청주에는 정신지체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없었다. 원하던 대로 학교에 갈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그는 운동에 재미를 붙였다.
  멀리뛰기와 높이뛰기는 인근에 소문날 정도로 단연 실력과 소질을 나타냈다. 그래서 지역 체육대회에 매년 나가서 금메달을 따로 있다. 정신지체인만 출전자격을 갖는 특수올림픽 육상종목에 출전하기도 했다. 원래 그 올림픽은 순위나 메달을 놓고 경쟁하는 성격이 아니어서 선수들도 그냥 매번 돌아가면서 참가하는데 그는 매우 드물게 두 번이나 참가해 비행기타고 미국과 스페인 같은 외국 구경도 했다.

 

 

"못한다고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그러나 운동을 직업으로 갖기에는 더구나 정신지체인이 그러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어서 돌아오면 다시 평범한 시설 장애우였다. 시설에서 이런 저런 기술을 배우며 동생뻘의 아이들을 돌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스물살을 맞고 그리고 또 몇 살을 먹은 그를 가끔씩 충북재활원에 와서 자원활동을 하던 한 제과점 사장이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에 와서 구체적으로 들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태극당의 이병수 사장이 성철 씨를 비롯한 몇몇 정신지체 장애우들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본 것은 분명하다. 장애는 가벼워 보이지만 어쩌면 평생을 그곳에서 살다가 생을 마칠 수도 있는 그들을 잘만 가르치면 제법 자기 돈벌이도 하는 실력을 갖출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을까.
  그는 성철씨를 비롯한 장애우 몇 명을 데리고 가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재활원에서 출퇴근하며 배우기 시작한 빵 만드는 기술은 재미도 있었다. 그냥 밀가루일 때는 볼품없던 것이 오븐에 한동안 들어갔다 나오면 멋지게 부풀어오른 맛있는 빵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손이, 자기 자신이 마술사가 된 듯 신기하기만 했다.
  "근데 사실 태극당 그 (사장)형한테 야단도 많이 맞았어요. 나름대로 한다고 했는데 맨날 못한다고 야단 맞으니까 한 번은 도망가고 싶은 생가도 들었어요."
도망가고 싶은 마음 한편으로 그는 내가 더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하려고 했다고 의젓하게 말한다. 다른 친구들이 배운 기술 한 가지에만 매달릴 때 그는 나름대로 새로운 메뉴에 대해서 머리속으로 연구도 했다. 더디지만 서서히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고, 사장형한테 칭찬도 받기 시작했다.
  육년여 정도 그 태극당에서 일하다 현재의 봉명제과에 오기전에는 호텔 제과제빵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거기가 보수도 많고 안정되기는 하지만 월급을 제때 주지 않고 밀려서 줘 불만을 갖다가 봉명제과 남상호 사장을 소개받고 그와 일하고 있다.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남상호 씨는 연배가 그보다 아래이고 학원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해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일하고 있다.
  이미 그는 구십오년도에 시설에서 퇴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철 씨 뿐만 아니라인근 정식품이라는 회상에 취업해 나가있는 두 명을 비롯해 다른 다섯명의 친구들은 각자 월급을 모아 함께 살고 있다. 시설 선생님은 아주 가끔씩만 방문하는 정도니 그룹홈도 아니다.
  예전에 성철 씨도 다른 장애우들과 생활지도교와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그런데 제과계통의 형들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술을 마시는 일이 잦았고, 술먹고 늦게 들어갈 때마다 일찍 들어와 있는 친구들이나 선생님 보기 민망했다. 그러나 재활원 원장님 같은 분도 충분히 너는 자립할 수 있겠다 해서 몇 년 전부터 혼자 따로 나와 살고 있다. 임대아파트 분양을 기다리던 중 부도가 나는 바람에 원장님한테 꿨다가 대출받고 다시 갚고 하느라고 좀 복잡했지만 그이 명의로 된 아파트도 한 채 있다.
  "요라랑 어떻게 해먹냐고요? 그냥 빵을 만들 때처럼 이것 저것 새로운 재료를 넣어가며 하나씩 시도해보는 게 재밌어요. 저는 라면도 그냥 안먹고 꼭 콩나물 같은걸 데쳐서 같이 끓여 먹거든요. 김치찌개 이런 것도 뭐 일도 아니죠."
  아침에 신선한 빵을 손님들에게 내놓기 위해서는 아침 여섯시부터 일찌감치 서둘러 빵을 만들어야 하지만 대신 오후 두세시 경이면 일이 끝난다. 걸어서 십분 거리인 재활원에 가끔 가서 동생들에게 맛있는 도너츠같은 간식거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중요한 보람이긴 하지만 같은 제과계통의 형들을 만나 어떤 제과점에 자리가 났다고 하는 정보에서부터 새로운 빵 메뉴에 대한 이런 저런 도움말을 얻는 것도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다른 제과점에  가서 호박이나 바나나를 재료로 사용한 새로운 메뉴를 본 날은 그이 질문이 유난히 길게 이어지는 날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의 아이디어가 덧붙여진 또 다른 빵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일하고 있는 봉명제과도 그 형들 소개로 오게 됐다고 한다. 그렇게 같이 어울리면서도 한 푼도 돈을 허 투로 쓰지 않고 한 달에 육십에서 구십만원에 이르는 돈을 꼬박 꼬박 저축하는 그는 제과점 형들한테 때때로 구두쇠라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처음엔 그도 돈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 지 몰랐지만 재활원 원장님같은 분들이 부금을 얼마나 넣어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셔서 이제 돈 관리도 그가 직접 다 한다.
  "지금 정식품에 다니는 친구들도 특별한 기술은 없어서 제가 기술을 갖고 있는게 많이 부럽대요. 저랑 같이 빵만드는 거 배웠던 친구들 보다 제가 좀 나은 것은 제가 그만큼 노력을 했기때문이에요. 충분히 저처럼 할 수 있으면서 노력을 안했기 때문에 , 저나 나나 똑같은 사람인데 왜 같아질 수 없겠여요. 단지 노력하면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런거지."

 

 

"나도 참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운전면허 학과시험에는 떨어졌지만 오토바이는 몰줄 안다. 애마인 오토바이를 탄 채 바람을 가르고 집에 돌아와 어쩌다 차분히 음악을 듣게 되는 날이면 자신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그렇게 음악 들으면서 가만 생각해보면 아, 나도 참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힘들었지만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도 다 복이구나 하는 생가도 들고, 무어서보다 태극당 형이 아니었으면 제가 이 자리에 오지도 못했겠다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대산으로 옮겨간 태극당 형을 찾아가 본지도 오래 됐네."
  어느 덧 그도 삼십을 훌쩍 넘겼으니 하나의 가정을 꾸릴 나이가 어쩌면 지났는지도 모른다. 태극당에서 일하다 알게된 한 여성을 향한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는 아직 미혼이다. 길거리 가다가 다정한 여인이나 아이 손을 잡고 가는 젊은 부부들을 볼 때마다 부럽기만 하지만 좀 더 여러 가지를 준비한 후 결혼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이 빵을 만들고 아내는 카운터를 지키며 자그마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들어 파는 제과점을 운영하는 것이 그이 소망이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님이 어떤 분일지, 궁금하기 보다 부모님이 아니라 친할머니든 외할머니든 한 분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자식노릇 제대로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는 다른 가족들을 보고, 부모님과의 갈등을 겪으며 네가 오히려 행복한 줄 알라고 형들이 하소연을 들으면서 자신이 고아라는 처지도 그다지 한스럽게 생가하지는 않는단다. 명절이면 같은 시설 출신 친구나 동생들이랑 놀러도 가고 재활원에 가고 그러면서 지낸다.
  어엿한 제과제빵 기술자가 세 명 배출되면서 충북재활원에도 작지 않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 재활원 아이들에게 닮고 싶은 선배들이 생기고, 그들처럼 되고 싶은 꿈을 갖게 된 것이다. 장애가 좀 심한 아이들도 꿈이 뭐냐고 물으면 그룹홈 나가 살고 싶다고 하고, 성철이 형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성철이형, 성철이오빠는 이들에게 정말 희망이다.
보다 구체적인 변화도 있다. 다른 제과점에서 일하던 다른 두 명의 원 출신 장애우가 정식으로 채용돼 충북재활원내 요셉의 집과 마리아의 집 장애우 이백칠십여명은 모두 이들이 만들어 내는 빵을 아침식사로 먹는다는 점이다. 그 선배들을 따라 벌써 기술을 배우는 후배원생도 있는데, 재활원에서는 아예 제과제빵 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담당 교사는 서울 남부복지관이나 서울 복지관 같이 먼저 제과제빵을 시도하고 있는 기관도 방문해 제과는 유통기간이 그래도 하루 이틀 길어 장기적으로 볼 떄 수지가 더 맞다는 등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미 기능보강 명목의 국고지원으로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고 곧 오븐이나 냉장고, 가스시설 같은 설비도 완비할 것이다. 일단은 안정적으로 인근 특수학교 급식시간에 이들이 만들어내는 빵을 주문하도록 적극적으로 판로도 개척해 나가겠다는 구상이다.
  십여명의 장애우들에게 제과제빵 기술을 가르치고 또 납품용 빵을 대량을 만들어내려면 현재우 두 명의 기술자 말고 사람이 더 필요한데 여러 모로 보나 성철 씨가 적임자라고 재활원쪽에서는 생각하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그에게 요구는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기에는 그가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저도 들어가면 동생들도 잘 따르고 다들 아시는 선생님들이라 편하고 좋지유. 그렇지만 보수 부분이 걸리니까 저도 쉽게 결정을 못내리겠어요. 저도 제 인생이 있으니까요. 아직 확실히 결정한 것은 아니에요.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보고 결정은 그때 돼봐야 알겠어요."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재활원에 대한 "배은망덕"이라고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그는 어엿한 생활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준비를 착실히 해가고 있는데 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에 맞는 보수를 요구 할 만큼의 실력을 갖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짱"을 튕기는 그가 어쩐지 더 자랑스러워진다.       

 

 

글/ 한혜영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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