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 길고도 짧은 이야기] "이렇게 답답한 세상이 있소?" > 세상, 한 걸음


[가족, 그 길고도 짧은 이야기] "이렇게 답답한 세상이 있소?"

근이양증 장애우 종희네

본문

 수성영구 임대아파트단지, 성냥곽같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그 아파트 가구들 한 구석에 백화선 씨와 그 아들 종희가 산다. 종희는 근이양증 장애우이고, 홀해 18살이다. 아, 주민등록상에는 없지만 할머니도 이 집의 빼놓을 수 없는 식구다. 몸이 약해 하루 종일 종희를 돌보는 일만도 힘겨운 아들 백화선 씨를 대신해 밖에 나가 일을 해서 생활비를 보태고 집을 나간 며느리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할머니는, 그러나 이들과 함께 기재가 되면 이 가구 전체가 생활보호대상으로 지정되지 못한다 해서 서류상으로는 빠져 있는 것이다.
  일을 못해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힘없이 하루하루를 누워서만 생활하는 아들을 보며 아무런 손도 써보지 못하는 무력한 아비임을 한탄하면서 술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된 백화선 씨를 낯선 사람들에게는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러다 종희네를 알게 된 후 자주 찾으면서 종희의 친구가 되어주는 의료자원활동팀(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 의료 특별위원회) 사람들을 만나면서 백화선 씨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이 진료팀의 소개로 이 가정을 알게 된 기자가 종희네를 찾아간 날은 이들 가족에게 특별한 일정이 약속된 날이었다.
  백화선 씨가 결핵을 앓았다는 사실을 한 이웃의 귀띔으로 알게 된 후, 진료팀은 한 가지 불길한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해야 했다. 만일 아버지로부터 아들인 종희에게 결핵균이 옮겨져 있다면 이미 근이양증 장애가 많이 진행된 종희에게 무엇보다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과연 종희도 결핵에 걸렸는지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 모두 보건소에 엑스레이를 찍으러 가는 날이었던 것이다.
  인근 복지관 사회복지사들이나 진료팀원들을 아직 낯설어하는 백화선 씨는 약속을 해 놓고도 그 동안 몇 번 바람맞히기도 했기 때문에 과연 그가 약속대로 집에 있을 것인가 하는 점도 의문이었으나 다행히 그는 집에 있었고, 그래서 보건소로 함께 갔다.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종희를 옮기기 위해 119를 불러 타고 보건소로 가는 길에 기자는 백화선 씨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그러는 동안 종희는 사진기자가 종희 눈에 갖다 대준 사진기 렌즈를 통해 그리고 그 속에 갇힌 창을 통해 열심히 세상을 구경하고 있었다.

 

― 엑스레이 찍은지 오래 되셨어요?
  "6개월은 넘었고 한 1년 가차이 됐을거예요. 이상이 없다고 그러더라고."

― 결핵은 언제 발병하셨어요?
  "결핵은 오래됐는데 나았다가 재발되고 재발되고 그랬죠."

― 다른 데 편찮으신 데는 없으세요?
  "당뇨 검사를 약국에서 사다가 해봤는데 치수가 안나와 버리더구만요. 그 다음에 비싼 검사기구랑 샀는데 요새는 안해 버려요."

― 종희가 근이양증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그건 오래 됐죠. (종희의 장애우 수첩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92년, 얘가 10살땐데 이때는 이렇게 똘망똘망 했단 말입니다. 이때나 지금이나 얼굴은 똑같잖아요. 18살이라 그러믄 키가 여기 앉지도 못하고 커야 하는데.... 그러니까 초등학교를 2학년까진가 다녔는데 뛰는 건 못했지만 걸어다녔다니까요. 그런데 초등학교니까 체육시간이나 조회 같은 때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나오잖아요. 그런데 잘 못 걸으니까 넘어져 가지고 입술이 터져버렸지. 그 다음부터 학교를 못 보냈어요."

― 그 전에는 다른 얘들하고 비교해서 뭐 이상한 점 없었어요?
  "한 세 살 때부터 목마를 태워주는데도 다리를 못 벌려서 잘 못타요. 깽깽이도 못했고, 그래도 클 때는 야무지게 컸어요. 학교도 초등학교 2학년까지 다녔는데 남한테 맞고 돌아다니는 성격이 아니였어요. 깡패 맹키로 지가 쥐어 패지 못하고 기냥 깨물어 버리드라구요. 그래도 애기적에는 너무 너무 예뻤어요. 앨범 보믄 끝내줘. 고모들이고 누나들이고 예쁘다고 막 깨물어주고 난리였어 "

― 종희 때문에 속상해서 술을 조금씩 드셨나봐요.
  "술이야, 맨날 먹는 게 술이니까, 애 엄마도 고생했어요. 아픈 시아버지도 와 있고 얘도 이러니까 돈돈돈 하다가 돈에 못 이겨 그냥 집 나가버렸어요. 그때 애 엄마 있을 때는 어머니 같이 안 살았어요. 그런데 할아버지 땜에도 아니고 나 땜에도 아니고 애 상황이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우리집에 오신 거죠. 아버지는 작년에 병원에서 돌아가셨고."

― 종희 할머니는 취로 나가시나요?
  "어머니는 생보자가 아니께 취로는 못하고 막내 동생이 친구가 그냥 내준 가게 반쪽 얻어서 조그맣게 옷 만드는 공장을 하고 있는데 거기 나가요."

― 종희 할머니 일나가시면 아버님이랑 종희랑 둘이 있겠네요. 아버님 안 계시면 종희는 밥도 못 먹게 되나요?
  "그렇죠, 제가 문 잠그고 나와 버리면 누가 밥도 줄 사람도 없고, 물도 못 마시고 화장실도 못 가죠. 복지관에서 목욕시켜주러 오는데 일주일에 한 번 밖에 안 오거든요. 먹는 건 어머니가 해 놓은 반찬 있는 그대로 있으믄 먹고 없으면 없는대로 먹고 그냥 그래요."

― 아버님도 취로사업 같은 것 하시면 되지 않아요?
  "제 몸도 그렇지만 종희 때문에 못 하죠 어머니가 나가시니까, 둘 중의 한 사람은 있어야죠. 밥 맥이고 화장실 보낼라믄."

  그런데 강남 보건소에 도착해보니 그곳에는 종희같은 일어나 앉기 어려운 사람들이 누운 채로 엑스레이를 찍을 수 있는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연락을 해서 종희는 강남 병원으로 옮겨갔다. 아버지 백화선 씨만 그 보건소에서 찍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백화선 씨가 잠시 쉬면서 씻는 동안 대화는 다시 종희 할머니 정득순(69) 씨와 이어졌다. 종희 할머니와 얘기를 나눈 종희 네 작은방에는 거의 새것이나 다름없는 특수휠체어가 한 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예전에 종희가 이거 타고 나가고 그랬나보죠?
  "예전에 무슨 교횐가에서 대학생 자원활동자들이 와서 한 번인가 두 번인가 타고 나갔는데 누가 태워 주믄 나가죠. 이거 태워주믄 누울 수도 있고 앉을 수도 있고 그랑게. 지가 쑥스러우니까 말은 안해도 사람 오는 걸 되게 좋아해요. 여러 번 보고 그러면 말도 잘하고 웃고 그란디, 그 담에는 누가 태워 줄 사람이 있나, 애아부지도 얘를 혼자 둘지를 못해요. 나도 일나가고 그라니까 그래서 휠체어에 못 태워준께 나가고 잡퍼 하는디 나갈 수가 없잖아요."

― 종희 아버님은 할머님 3남 2년 중에 아들로는 큰 아들이시라구요?
  "예, 둘째 아들은 집짓는디 다닌디 요새는 일이 없다고 놀고 있고, 막내도 사업한다고 중국 갔다가 삼년 만에 빚만 여기저기 엉겨 갖고 거지가 되갖고 그냥 왔단 말이요. 우리 자슥들이 전세에도 못 살고 다시 사글세에 사요. 딸네들도 다 그라고, 하나도 에미 도와줄 자슥 없단 말이요."

― 생활비는 어떻게 마련하세요?
  "종희 쟤가 저렇다고 나라에서 또 얼마썩 주고 그래서 한 달에  (정부에서 주는 수당이) 이십사만원인가 들어온다등가, 그돈은 관리비 내고 세금 내면 딱 맞아요. 그러믄 뭘로 먹고 살겄소. 이 집은 내가 벌어야 묵소. 그란대 내가 작은 아들네 집으로 퇴거를 해부렀당께요. 그전에는 자활(보호대상자) 이었는디 1급(1종 거택보호)으로 만들라믄 내가 있으믄 안된다고 해요. 다른 자슥들이 있어 갔고, 할 수 없이 퇴거를 해 불고 둘이만 1급 했잖아요. 그란지 여섯달이나 됐나 어쨌나, 애는 물 안먹여주면 하루종일 물도 한 모금 못 먹고 있는데, 나가 여기서 새마을일이나 다녔으믄 좋겄구만? 70살 먹은 노인을 어디 가면 일 시켜주요? 내가 젊어서는 아파트 청소하러 다녔어요. 이렇게 험한 세상을 내가 사요. 금매 정부가 없는 사람 도와준담서 어디 그럴 수가 있소."

― 일은 언제 갔다 언제 오세요?
  "일하는 디가 신설동이라 내가 8시반이나 가 갔고는 저녁 8시 반이나 돼서 끝나면 집에 오면 10,11시가 돼요. 몸이 아조 피곤한 날은 거시서 자고 오고 싶은데 그랄 수 가 있나. 그래도 내가 왔다 갔다 하믄서 밥이 없으믄 밥도 해놔야 이 두사람이 밥이라도 먹고 그라지요."

― 종희 아버님은 예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젊었을 때는 타이루(타일까는 기술자)했어요. 그라다가 손발을 못쓰게 된께 일을 못 하잖아요"

― 92년 2월달인가 종희가 장애우수첩 만드렀더라구요. 종희 장애를 알고서 아드님이 술을 많이 드셨고 그래서 종희 어머니가 나가셨나요?
  "수첩 만들고 한 일 년인가 후에 나갔을거요. 젊은 사람이라 통장일 본다고 그러다보믄 술을 좀 묵잖아요. 술을 원래 또 좋아하고, 술묵고 통장일 본담서 벌이 안하고 그러믄서 애기할차 저러고 그러니까 나가버렸는지, 아들이 그런 소리도 없고 저런 소리도 없응께. 그 때 영감이 있을디가 없어서 여기 와 있었는디 천식이라 계속 병원을 가야 됐단 말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두 번짼가 병원에 가야 되서 "며늘아, 나 병원에 갈란다. 병원에 좀 델다 주라" 그랬는데, 어느 날 나가부렀다요."

― 집안에 종희가 앓고 있는 근이양종이라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은 또 없죠?
  "친정이나 시가나 다리 전 사람 하나도 없고, 발 아픈 사람도 없고, 저거 하나 그라잖아요."

― 맨 처음에 어떤 병이라고 들으셨어요?
  "제일 첨에는 별반 데를 다 뎅겼죠. 병원마다 다녀보고 침도 맞고 그랬는데 7만원인가 70만원인가 하는 사진 찍고는 애가 여기 근육이 빠져나가는 병이라고 고칠 수가 없다고 포기를 하라고 그랬대요."

― 아드님이 술을 좀 많이 드시는 것 같은데, 많이 말려보시기도 하셨죠?
  "술 많이 묵어, 시방도 많이 드요, 왜 안 말려 봤것소. 근디 지가 그라요, 엄니, 내가 하루 종일 애 얼굴 들여다 보고 뭘 할거요, 이렇게 답답한 세상에 술이라도 한잔 묵어야제 하더라구요."

― 그래도 종희 때문에 술을 그렇게 많아 안 드시죠? 아버님이 돌봐야 하니까.
  "그저 쪼끔썩 먹죠. 술도 누가 매일 그렇게 준다요? 돈이 있어야 묵제."

― 가끔 아버님이 외출하고 그래서 식사도 제때 못하고 그러는 일도 있나요?
  "가끔 있죠, 술 좀 많이 묵고 들어오면 안 묵이고 그라지."

― 할머니 올 때까지 밥을 안 먹고 있다가 할머니 보면 종희가 배고프다고 그래요?
  "배고프단 말도 안하고 주란 말도 안하고 주믄 묵고 배고프냐 그러믄 배고프다고 하기는 하는데 안 주믄 말고 그래요. 물 한 모금도 빨대 꽂아서 갖다 주지 않으면 못 묵고 아이스크림 같은 건 잘 먹는데 하나나 사다 주면 좋아라 그래요."

― 일 끝나고 들어오시면 종희가 자고 있나요?
  "안 자고 있어요. 종희는 밤새도록 텔레비전 보지 안자요. 잠잘라고 눈이나 감으믄 모를까, 낮에도 외국 방송도 보고 있어요."

― 종희가 텔레비전은 리모콘으로 돌려가면서 본다고 하는데 그럼 텔레비젼 안할 동안은 뭐해요?
  "그냥 누워있죠. 맨날 저렇게 누워 있으니 뭔 소화가 될 것이요. 소화가 안되는지 밥도 잘 못 먹고 변비도 있어서 변비약을 먹어야 똥도 싸요."

― 아버님은 영영 일하시기는 어렵게 되셨나요?
  "저래 갖고 어디일을 할꺼요. 금방 피로해갖고, 좀만 뭐하면 죽을락해요."

― 종희 아버님은 다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힘이 없어져 버렸어요?
  "다친 것도 아니데 다리에 쥐가 잘 내리고 그란다고 해요. 기냥 무담씨 그라잖아요. 원내 폐가 약하다고 그라고 당뇨도 있어요. 근디 뭐 돈이 있어야, 뭐 손에 쥔게 있어야 약이라도 해주지, 어떤 자슥들한데도 도움 받을 수도 없고, 사글세로 저렇게 사니, 내가 뭐 용돈을 주라 하겄소. 지네들도 저렇게 어렵게 사니, 내 수중에 돈이 있으면 내가 주고 싶어요."
  "늙기나 안하고 조금만 젊었으면 뭐라고 할텐데, 나이가 이렇게 먹어버렸으니...." 하면서 안타까워하는 종희 할머니, 그의 절망감은 너무도 현실적이라 가슴을 눌렀다.
  그러는데 머리도 감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백화선 씨가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눴다. 그는 기자에게 하소연을 하듯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이런 아파트 정부에서 준거는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지만 어머니를 보고 자식들이 그렇게 있으니까 용돈을 줄 거 아니냐고 퇴거를 하라고 해서 막내 동생 주민등록으로 옮겼는데, 장남이 부모는 모신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자식들이 용돈을 진짜 쪼금이라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모르지만 어머님이 돈 벌어서 자식들 갖다 보태줄 그럴 형편이거든요.
  여기 92년에 이사와 갖고 한 2년 통장 일을 했는디요. 또 일하러 천호동 쪽으로 다니다가 몸이 완전히 썩어버렸어요. 교통이 굉장히 안좋아서 버스도 천호동으로 갈라믄 몇 번씩 갈아타야 되고, 그란디 금방 일감도 없어줘 버려서 막막해버렸죠. 그래서 새마을일이라도 해볼라고 하면서 동사무소 담당한테 집근처 동네로 일 배치해달라고, 그러믄 내가 한 달에 이십 일이든 열흘이든 일하겠노라고 했다고, 나는 다리도 아프고 하니 한 바퀴 돌아와서 애 점심 주고 같이 밥 먹고 또 한 바퀴 돌아서 애 오줌 뉘고 또 일 나가고 동사무소 나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나보고 차 타고 멀리 나가라는 거예요. 내가 멀쩡한 것 같이 보이니까 같이 취로 일하는 아줌마들도 힘든 빗 자루질은 나보도 다하라고 그러고,
  정부에서 나오는 돈 좀 있지만 어머니가 한 푼 두 푼 보태주니까 간신 간신히 먹고삽니다. 내가 챙피해서 못 살것이요. 생각을 해봐요. 종희 봤죠. 내가 멀리 일하러 가버리면 얘는 누가 볼 것이요. 미치겠어요, 미치겠어. 내가 게을러서 일 안하는게 아니에요."

― 사모님은 찾으려고는 안해 보셨어요?
  "끝났어요. 물론 자기도 양심 없어서 못 들어오겠지만, 이래놓고 어떻게 들어오겠어요. 시아버지 돌아가실 때도 안 왔지. 그 여자가 들어올라믄 진작 들어왔겠지만 딴 남자 만나버린 것 같아요."

― 아까 영동세브란스 병원에도 가셨었다고 그러셨죠, 이번에 우리 나라 근이양증 장애아 한명이 수술했다는 얘기 듣고 가셨었나요?
  "(할머니) 그렇죠. 종희 지도 세브란스 병원에 가자고 밤이나 낮이나 노래를 부르고 그랬어요. 텔레비젼을 보고 지같은 애가 수술받았다고 하니까 거기 가면 산다고 하는데 왜 나를 안 데려다 주냐고, 돈도 안든다고 하는데 부모가 되갖고 자식을 살려야지 왜 데리고 안가냐고 그래요."
  "(아버지) 그런데 갔더니 대뜸 돈 얘기부터 해요. 답이 안나오더라고, 1억이고 2억이고 든다는 거예요. 부분적이라고 수술을 해서 조금씩 좋아지면 좋겄다 싶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거기서 그냥 통틀어서 몇 억 그래버리니까."

― 그럼 갔다 와서 종희 마음의 상처가 더 컸겠네요.
  "지금은 좀 수그러들었어요. 돈이 많이 든다고 하니까, 지는 돈 안들고도 고친다 했는데 가서 돈 몇 천만원씩, 막 억대돈이 든다고 지가 직접 들으니까 인자 그런 말 안해요."

― 병원 갔다 와서 더 침울해 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할머니) 지가 그냥 인정을 해버렸죠. 돈도  그렇게 든께로 포기했는가봐요."
  "(아버지) 나도 안타깝죠. 돈이 뭔가 애새끼 하나 죽이는 것 같고, 진짜 그 서러움이야 누가 몰라요."
  종희 아버지는 방송이라도 나가면 독지가가 돈을 대주지 않을까 싶어서 가수 이문세씨를 찾아가려고도 했다고 한다. 이문세 씨를 비롯한 몇 몇 연예인들이 영동세브란스 근육병 연구소의 후원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백화선 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죄송하지만 종희 장애가 많이 진행이 된 것 같은데요.
  "병원에서 그래요. 한 2년 남았다고, 지 스무살까지 사는 거죠. 얘가 그것도 알아서 2년만 살게 자기를 안 고쳐 준다고 그라믄서 세브란스 가자고 그랍디다."

― 돈도 돈이지만 장애 상태가  아주 가벼운 사람만 수술이 가능하대요. 그리고 그게 시험적으로 그냥 국내 장애우 한 명이 수술한 거구요. 그 효과도 아직 확실할 수 없대요.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기자가 그 의사도 만나봤다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버지 백화선 씨에게는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었다. 돈이 없어 아들을 그냥 죽어가게 한다는 자책과 절망, 그건 돈을 그의 손에 쥐어 마음껏 아들을 위해 써보게 하지 않은 한 풀리지 않을 단단한 응어리가 돼 있을 테니까.
  갑자기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책의 저자 서진규씨가 생각나다. 가발공장 여공이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식모로 또 매맞는 아내로 절망 속에 있었던 그녀가 미군에 입대해 장교로 진급하고 이제 는 하버드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편모로서 혼자 키웠던 딸도 이제 어머니와 같이 하버드대에 다닌다. 미국의 한 사회학자는 다른 소수민족의 편모가정과는 다르게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는 대물림되는 희망의 근거를 이들 모녀를 대상으로 연구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정, 절망이 대물림되어 종희의 고통이 다시 아버님에게로 또 할머니에게로 되돌려지는 현실은 정녕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는 것인지, 종희네 집을 나서면 다만 결핵균이 종희에게 옮겨지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글/ 한혜영  사진/ 김학리 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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