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남 도우며 사는 왜소증장애우 김순자씨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남 도우며 사는 왜소증장애우 김순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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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움 때문에 악착같이 살았지요" 

  추석 전 어느 날의 일이다. 한적한 시골 마을, 경북 의성군 의성읍 치선리에 있는 왜소증 장애우 김순자 씨 집에 한무리 낯선 손님이 찾아 왔다. 이 날 김순자 씨를 찾은 손님은 찾아 왔다. 이 날 김순자 씨를 찾은 손님은 서울에서 내려온 차흥봉 보건복지부장관과 그 일행이었다. 국정 수행에 바쁜 복지부 장관이 먼 곳에 있는 장애우 집을 방문한 이유는 뭘까?
  전날 복지부 장관은 대구에 볼 일이 있었다. 기자의 기억에 따르면 이 날 차흥봉 장관은 대구에서 기초생활보장법과 연관된 정부의 복지정책 시행에 대해 어떤 발표를 했던 것 같다. 그게 신문에 기사화됐다. 대구에서 일정을 마친 장관이 다음 날 찾은 곳이 대구와 이웃한 경북 의성군이었다. 그럼 장관이 의성군을 찾은 이유는? 직접적인 이유는 의성군은 차 장관이 태어나 소년기를 보낸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대구에 일이 있어 내려 왔다가 고향을 찾은 장관은 먼저 김순자 씨 집을 찾았다. 장애우 복지의 책임자가 장애우 집을 방문한 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김순자 씨였을까? 까닭은 장관과 김순자 씨가 초등학교 동창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날 만남은 사십오 년만의 상봉이었다.
  먼 옛날 코흘리개 어린아이였던 두 사람이 이젠 노인이 돼 만났다. 그러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곧바로 두 사람은 한 시간 가까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러던 중 문득 차 장관이 "순자야, 니가 나 보다 낫다. 니가 장관해라"라고 말했다. 김순자 씨는 "오야, 내가 할께. 시켜만 다오"라고 말을 받으며 웃었는데, 두 사람이 주고 받은 이 농담 속에 오늘의 김순자 씨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차흥봉 장관의 나중 설명에 고향 방문길에 어린 시절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김순자 씨가 떠올라 "장애우니까 시골에서 당연히 어렵고 힘들게 살겠지, 위로해줘야겠다." 고 마음 먹고 그이를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만나보니 예상외로 김순자 씨는 그늘없이 밝게 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고 있어 의성군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감격한 차 장관은 부지불식간에 "니가 장관해라"라고 진심이 들어 있는 말을 김순자 씨에게 했다고 한다.
  차 장관의 말대로 복지부 장관을 해도 손색없을, 올해 쉰아홉 살인 김순자 씨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왜소증 장애우다. 그래서 키가 무척 작다. 외모로만 본다면 그이는 장애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을 것 같다. 더구나 살고 있는 곳이 시골 마을이기 때문에, 시골에서는 여성 장애우가 할 수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고, 여기에다 결혼도 하지 않은 그이처지를 더하면 그이가 힘든 삶을 살아왔을 거라고 누구나 짐작 할 수 있다.
  사실 그 짐작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이가 겪어야 했던 어려움은 필설로 다하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이는 그 어려움을 혼자 힘으로 묵묵히 헤쳐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 남부럽지 않게 살고, 이웃에 도움가지 주게 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이의 눈물어린 고생담이 숨어 있다.

 


올케에게 받은 설움 끝에 시작한 미용일

 

  그이는 이남이녀 중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의 유일한 장애우였던 그이는 차흥봉 복지부 장관과 같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는 집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스무살 때 우연히 경북 군위에 있는 시집간 언니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학원 수강생 모집 공고를 보게 됐다.
  군위 기술학원에서 미용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공고였는데 언니의 허락을 은 그이는 육 개월간 언니집에 기숙하면서 미용기술을 배우러 다녔다. 내친김에 양재기술도 배워볼까 했는데 경찰이었던 형부가 전근을 가는 바람에 양재기술 배우는 것은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는 우연히 배운 비용기술이 평생 직업이 될 줄은 몰랐다. 장애우라서 취업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가족 간의 갈등이 그이로 하여금 미용기술을 활용해서 자립하도록 만들었다.
  그이는 가족 중 오빠 아내인 올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이 말에 따르면 올케는 그이를 "우에로 밥을 먹는다"고 매일 구박했다는 것이었다. 그이는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쳤지만 날이 갈수록 올케의 구박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그렇게 그이가 보기 싫다고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던 올케는 어느 날 그이에게 결정적인 말을 뱉었다. 그이가 미용기술을 배우고 집에 돌아온 지 며칠 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그이는 무슨 일인가로 올케와 말다툼을 벌였다. 그 와중에 올케는 그이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번엔 우에든 내가 너 이 동네 못살게 쫓아 낼란다"라고 소리쳤다. 그이는 눈물을 뿌리며 그 날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집에서 쫓겨나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동네에 있는 큰집에 가서 밥을 몇 번 얻어 먹었어요. 그랬는데 올케가 큰집에까지 찾아가서, 질부에게 너 순자한테 밥 주면 너하고 나하고 원수되니까 알아서 해라, 라고 말했어요. 하루는 큰 집에 밥을 얻어 먹으러 가니까 질부가 "아줌마, 이제 우리집에 밥 먹으로 오지 마소",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까닭을 물어보니까 올케가 찾아 와서 원수진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도 안보이는 데서 밥을 주고 올케에게는 안 줬다고 하면 될 것을 질부도 밥 주는 게 아까웠나봐요. 그래서 밥도 못 얻어 먹고 그 길로 큰집을 나왔는데 배는 고프죠 이제는 밥 얻어 먹을 데도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이렇게 살면 뭐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길로 마을 뒷산에 있는 접시골 골짜기를 찾아갔죠. 거기서 죽으려고 나무에 목을 맸어요. 그랬는데 한참이 지나도 죽지 않는 거예요. 그때 드는 생각이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는데, 이러다가 죽지도 않고 살아남아 평생 고생만 하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이 드는 거였어요. 그래서 죽는 걸 포기하고 다시 마을로 왔죠. 그때 멀리 논에서 어머니하고 오빠가 벼를 찧고 있는 모습이 보였어요. 다가갔죠. 오빠가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순자야, 네가 여기서 일하고 있으면 올케 아무 말 안 한다, 잘 한다고 그럴 테니까 아무 말 말고 여기서 일해라, 그랬어요. 그래서 일을 하고 있는데 그때 올케가 새참을 머리에 이고 왔어요. 올케는 나를 보더니 욕부터 했어요. 왜 밥 얻어먹으러 왔냐고, 너 갈 길로 가버리라고, 그러면서 나를 막 밀쳐대는 거였어요. 내가 막 우니까 어머니가 나를 부르더니 순자야, 귀자네 집에 가서 밥 얻어 먹어라, 그러면 내가 쌀 갖다 줄게, 그래서 그 길로 귀자네 집에 가서 밥을 얻어 먹고 살았죠. 그 날 이후로 집에는 못 들어 갔어요"
  대신 그이 어머니가 집을 나왔다. 차마 장애를 가진 자식을 남의 집에서 혼자 살게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쌀 한 되와 보리쌀 다섯 되를 챙겨서 집을 나와 그이 곁으로 왔다. 그러면 그 후 모녀는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그이가 배운 미용기술이 먹고 사는데 밑천이 됐다. 절박한 처지에 내몰리자 그이는 무턱대고 이웃 마을을 찾아가 사람들 머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주로 파마를 해줬는데 이 일도 처음에는 심각한 어려움에 부딪쳤다.
  "사람들이 미리 겁을 내서 머리를 안 하는 거였어요. 돈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머리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믿지 못하겠다는 거였지요. 그래서 내가 처음에는 머리를 거저 해준다고 그랬어요.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해주다보니까 머리한 사람들이 파마 머리가 잘 나왔다고 소문을 내주기 시작했고, 그 소문 덕분에 본격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게 됐지요."
  그이가 미용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약간의 설명이 더 필요하다. 시대적으로 여성들 사이에서 그때 한참 긴머리를 자르고 간편한 파마를 하는 게 유행이었다.
하지만 외따로 떨어진 산골동네에 미용실이 있을 리 없었다. 읍내에 나가야 머리를 할 수 있었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아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유행하는 말로 그이는 그런 틈새시장을 파고 들어서 성공 할 수 있었다. 직접 집을 찾아가서 머리를 해주고, 거기다 비용까지 싸게 받으니까 장애와 상관없이 그이에게 파마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무거운 보따리 하나는 들고 하나는 머리에 이고 사십년을 돌아다녔어요. 이 근처에서 내가 안 넘은 골짜기가 없지요. 힘들어서 헐떡거리면서도 하루에 두세 골짜기를 넘었어요. 옛날에는 차가 없다 보니까 어떤 때는 가다보니 길이 끊어져서 길을 잃어버려 가지고 골짜기에서 밤을 보내기도 하고, 내가 오래도록 집을 비우니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걱정돼서 날 찾겠다고 눈이 무릎 위까지 내린 날 내 발자국 따라 눈길을 쫓아오다가 발이 얼기도 하고,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렇게 고생하면서 근처 마을 사람들 머리를 해주러 다녔지요. 그때 촌 아주머니들이 다 비녀 꽂고 있었는데 내가 다 자르고 파마해줬어요. 많으면 하루에 열명 머리를 해주기도 했어요.” 그렇게 고생 고생하면서 그이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집을 떠나면 한 달도 좋고 한달 반도 좋았다. 골짜기를 넘어 산골 마을을 다니면서 머리를 해 주고 한 주머니 돈을 모아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맡기고 다시 길을 떠나기를 되풀이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가리지 않고 다녔어요. 고생하고 설움받다 보니 어떻게든 잘 살고 싶었지요. 나중에는 돈 모이는 게 재미가 나더라구요. 어머니도 내가 돈 벌어 갖다주면 ‘순자야, 왜 이렇게 사는 게 재미나노’ 그러시면서 좋아했어요.”
  그이는 모은 돈으로 논도 사고 밭도 샀다. 그리고 집에서 쫓겨 나서 머문 귀자네 집을 사서 오두막집을 허물고 번듯한 양옥집을 새로 지었다. 그이는 새 집에 입주하던 날 너무 기뻐서 ‘나는 행복합니다. 정말 정말 행복합니다.’ 라는 노래가 입에서 저절로 나오더란다.
  그렇다고 그이가 돈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었던 건 아니다. 다음은 그이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이는 일화 한 토막이다.
  그이 친구 중 한 명이 관절염을 앓아 하반신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방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친구가 불쌍했던 그이는 친구를 찾아가 “언제든지 필요하면 날 불러라. 너 하나라도 내가 와서 머리 해줄게” 그랬더니 친구는 잊지 않고 그이를 불렀다. 그이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악취가 진동하는 친구 방에서 머리도 해주고 위로도 해줬다. 그랬더니 친구 장애가 나아져 휠체어를 타더니 나중에 목발을 짚고, 이제는 걸어다닐 수 있게 됐다. 중요한 건 친구가 그이가 베푼 선행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친구는 요즘 아들 딸이 좋은 미용실 가서 머리 해준다고 해도 “얘들아, 나는 순자가 나한테 베푼 은혜를 잊지 못한다. 나는 그 친구 오거든 머리 할란다.”며 거절한단다.

 


돈벌어 모두 남 위해 쓰고 자신은 빈손

 

  그이가 베푸는 선행은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제 먹고 살만해진 그이는 현재 돈을 받지 않고 무료로 미용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 산골마을 가서 할머니들 머리 커트 해주면 할머니들이 수고했다고 돈을 줘요. 그러면 내가 받지 않아요. 할머니, 나 돈 벌어서 사는 데 걱정 없어요. 이젠 나도 봉사 좀 합시다. 그러면서 사양하죠."
  말하면서 웃는 그이를 이제 의성군을 중심으로 근처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미용사 김순자" 는 지역에서 꽤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 그이가 최근 다시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이가 파마를 해 주며 다녔던 마을 사람들을 단체로 관광 보내 주는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용사로 머리하러 다닐 때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하 잔 사라. 한 턱 내라고 졸랐어요. 그렇지만 그때는 모른 체 했죠. 대신 사람들에게 내가 성공하면 그냥 안 있습니다. 두고보세요. 라고 대답했죠. 그때는 모두들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했어요. 한두 동네도 아니고 내가 다닌 마을이 워낙 많았으니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죠. 하지만 전 약속을 지켰습니다. 얼마 전에 내가 다녔던 마을 중에 열한 마을 사람들을 전세버스를 불러서 관광 보내줬어요. 지리산, 덕구, 수안보온천 등으로 관광을 보내줬는데 사람들이 정말 좋아했어요."
  한 마을은 관광을 가는 대신 그이가 준 돈으로 시끌벅적하게 동네 잔치를 벌였다. 동네 입구에는 "미용사 김순자 여사님 파이팅!" 이라고 쓴 현수막이 내걸렸고,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그이는 정말 가슴 뿌듯했다.
  "아직 관광 보낼 마을이 더 있어요. 또 보낼 거예요. 이젠 예전의 은혜를 갚은 거죠. 그동안 제가 폐 많이 끼쳤거든요. 내가 다녔던 곳의 마을 사람들이 내게 도움을 준 만큼 나도 형편 닿는대로 도움을 주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아 참, 그이의 선행을 얘기하면서 빼먹은 사실이 하나 있다. 그이는 최근 마을 경로당 짓는데도 돈을 보태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복지부 장관이 태어난 곳인데 그이는 "내가 많이는 못하지만 조금 보태겠습니다" 라고 약정했다.
  그이가 베푸는 선행을 놓고 보면 그이가 미용사일을 하면서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였구나, 라고 오해하기 쉽다. 답을 결코 아니다. 사실 그이가 지금까지 번 돈은 집 짓고 먹고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그이가 남에게 선행을 베풀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을 위해서 돈을 거의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이는 요즘도 차비가 아까워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닌다. 옷도 사 입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관광 보냈지만 정작 자신은 돈이 아까워 놀러 다닐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삐딱하게 말해 구두쇠, 좋게 말해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런 그이가 하나도 아까워하지 않고 펑펑 쓰는 돈이 있다. 앞서 언급한 이웃에게 베푸는 것 말고 그이가 사는 재미로 여기며 쓰고 있는 돈은 바로 조카들 학비를 대주는 데 쓰는 돈이다.
  그이는 지금 다섯 명째 조카 대학 등록금을 대주고 있다. 자신에게 설움을 준 올케 딸도 등록금을 대줬고, 대구 사는 남동생 자식 세 명의 대학 사년 등록금을 대준 당사자도 바로 그이다. 올해도 그이는 어김없이 조카 등록금으로 무려 육백이십만 원을 지출했다. "조카들 학비 대주는 건 정말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게 거듭된 그이의 말이다. 이렇게 조카들 학비를 대주면서 그이가 키우고 있는 꿈이 하나 있다. 조카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머리는 좋은데 가난해서 대학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싶다는 게 생전에 남은 그이의 꿈이다.
  인터뷰 말미에 그이에게 설움을 준 올케를 이제는 용서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이는 눈물을 훔치더니 "용서가 잘 안돼요. 올케에게 받은 설움은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지요. 내가 구박을 받아 죽으려고 했을 때 내 마음 누가 알겠어요. 하늘이나 알고 땅 이나 알겠죠." 라고 말했다.
  그래도 올케 덕분에 악착같이 살아 지금 자 살게 된 게 아니냐고 이어 물어보자 그이는 미소를 띠며 "그 말은 맞아요. 올케가 나한테 설움을 줬기 때문에 내가 이를 악물고 살아서 오늘날 내가 있는 거죠. 올케가 나한테 잘 대해줬으면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았을 거예요. 그런 면에선 올케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이는 지금 큰집에서 덩그마니 혼자 산다. 십오년 전에 어머니를 먼저 보내고 쭉 혼자 살아 왔는데, 그 동안 남동생이 같이 살자고 수 차례 권유했지만 짐이 되기 싫다며 그이는 혼자 사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그렇지만 혼자 살면서도 외로워할 틈이 없다는 게 그이 말이다. 그이는 요즘은 미용사 일을 하지 않는다. 대신 농사일에 매달려 있다. 마늘 파를 재배하고 논농사도 짓고 있다. 논과 밭에서 수확물이 생기면 모두 언니와 동생들 집에 보낸다. 이렇게 가족들을 위해 사는 삶 속에서 그이는 큰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다.
  "요즘도 별 보고 집을 나가서 별 보고 집에 들어와요. 언니는 논밭일은 남한테 주라고 그러지만 그러면 내가 심심해서 못 살기 때문에 농사를 짓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고생도 많이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정말 행복해요."
  사람들에게 여전히 "치선리 미용사 김순자 씨" 로 불리는 그이, 그이에게서 장애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글/ 이태곤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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