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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그래도 나는 행복한 장애우"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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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행복한 장애우"
최진섭

 

 최진섭 시가 누워산 지는 올해로 이십일년을 헤아린다. 그 오랜 시간동안 그에겐 좌절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좌절의 시간들을 그림을 매개로 해서 벗어났다. 이제 한사람의 장애우 화가로 새 삶을 사는 그, 그의 삶을 엿보았다.

    

 

  올해 서른여덟 살인 최진섭 씨는 척수장애우이다. 척수장애는 어떤 장애인가, 경추라고 부르는 목 신경에 손상을 입어서 전신마비가 되는 무서운 장애이다. 최진섭 씨는 지금으로부터 이십년 전인 칠십오년 팔월 칠일 경추 육, 칠번에 손상을 입어서 전신마비 장애를 가지게 됐다.
  최진섭씨는 지금도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 그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최씨는 안양 시내에 살면서 남산공업고등학교 이학년에 다니고 있던 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이 되자 그는 더위를 식히려고 친구들과 함께 관악산 안양유원지에 놀러갔다. 그 시기 안양유원지에는 물이 가득 고여있는 계곡이었다. 그런데 이계곡은 그에게는 낯선 계곡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 삼막골 이라고 부르는, 안양유원지 근처에서 살았던 그는 이계곡에 자주 와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계곡이긴 했지만 별다른 위험성을 느끼지 못했다.
  화근은 그가 계곡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의 깊이를 오인한 데서 촉발됐다. 그가 알고 있는 웅덩이 물깊이는 삼사미터였다. 그러나 당시 웅덩이에는 가뭄의 영향으로 일미터 오십센치 밖에 물이 차지 않았다. 그걸 모르고 그는 친구들보다 앞장서서 계곡에서 웅덩이로 뛰어들었다. 사고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다. 그의 머리가 낮은 웅덩이 바닥에 닿아 목이 꺽여진 그 순간, 그는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짙은 상실감을 맛보아야했다. 그래도 다행히 의식은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팔을 뻗어 눈에 보이는 튜브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팔이 뻗어주지를 않았다. 그는 속수무책으로 물밑으로 가라앉아야 했다.
  그를 구한 것은 그처럼 더위를 식히려 나온 피서객들이었다. 피서객들은 그가 의식이 살아있었음으로 그 즉시로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대신 정신을 차리라고 인공호흡을 시킨 다음 그의 몸을 주물러댔다. 그래도 그가 일어서지 못하자 그를 둘러메고 계곡 아래로 내려와 브리사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호송했다.
  그가 처음 간 병원은 그가 살던 동네근처에 있는 작은 의원이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를 놀라서 달려온 그의 가족들에게" 물을 먹어서 그러니까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의사 말과는 반대로 그가 계속구토를 하고 사경을 헤매자 의사는 시내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라고 말했다.
  가족들은 큰 병원에 가기 전 그를 평소가족들이 자주 이용하던 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알고 지내던 의사가 외출을 하고 없었다. 그는 꼼짝없이 서너 시간을 병원에 방치돼 있어야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외출에서 돌아온 의사는 황급히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그러더니 "척수를 다쳤으니까 빨리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가족들은 의사가 지시한대로 그를 서울대학병원으로 데리고갔다. 그런데 서울대학병원에서는 병실이 꽉 차 그를 받아 줄 수가 없다고 난색을 표명했다. 별수 없이 가족들은 그를 다른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간 병원이 한강성심병원이었다. 그는 그 병원에 가서야 비로소 간단한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쯤 그의 몸 상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태가 된 후였다.
  이런 것을 두고 운이 나빴다고 하는 걸일까.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그가 다쳤을 당시 곧바로 큰 병원에 옮기고, 목을 잘 만져주기만 했어도 장애가 훨씬 가벼워 질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운명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고, 이젠 견딜 수 없는 회한만 가슴을 적실뿐이다.
그로부터 이십년이다. 무려 이십년이라는 세월을 그는 세상과 담을 쌓은채, (아니 격리되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세월의 무게에 진저리치며 누워서만 지내야 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우리나라처럼 장애를 국가가 책임져주지 않는 사회에서 뜻하지 않게 집안에 장애우가 생길 경우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동소이하다. 고통은 철저하게 가족들 몫인 것이다. 어떻게든 장애를 고쳐 보겠다고 치료를 위해 집을 파는 등 재산을 탕진하고, 결국에 가서는 한숨으로 날을 지새는, 그 가혹한 시련에서 비껴갈 수 있는 가정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의 가정도 그랬다. 사형제 중 차남인 그가 다쳐 중환자실에 입원하자 버스 한 대를 굴리며 운수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그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전 재산인 버스와 집을 내놓았다. 그래도 치료비가 부족하자 병원에 입원한지 한달 보름만에 눈물을 머금고 병원에서 퇴원해야했다.
  병원에서의 퇴원은 그에겐 사형선고를 의미했다. 무엇보다 척수장애우가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물리치료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서 장애가 나아질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렇지만 별수 없었다. 치료비가 없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부터 그는 산송장처럼 누워서만 지내야했다. 하지만 시련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뒤이어 덮쳐오는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여야했다.
누워서만 지내다 보니 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래서 감기를 앓으면 폐렴이라는 합병증이 오고, 소변을 제대로 누지 못해 방광염을 앓아 끝내 신장하나를 떼어내야 했고, 욕창과 등창이 생겨 죽을 고비를 넘나들고....
  이런식이었다. 그는 늘 죽음과 가까이서 위태위태한 나날들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이렇듯 고통에 찬 나날들을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사지를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그가 자살을 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식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굶으면 죽겠지,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에도 불구하고 끼니를 거부했다. 하지만 죽는 게 어디 그렇게 쉬운가,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순간적으로 단숨에 삶을 끝마칠 수도 있겠지만 팔 하나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에게는 자살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는 결국 며칠을 굶어 기운만 떨어진 상태에서 자살도 포기해야 했다.
  다시 무의미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그가 장애를 가지게 된지 오년이 지난 팔십년 봄, 그는 신을 찾게 된다. 그 과정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내가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 더욱 고통스러웠던 것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내가 집에 누어있자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많던 친구들도 다 떨어져 나갔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는 자신의 장애가 굳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초기 의사도 "한참 자랄 나이니까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희망을 준 바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장애는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쁜 상태로 진행되고있었다.
그는 당연히 현대의학에 절망했다. 그건 과학에 실망했다는 것과 동의어다. 그는 어쩔수 없이 과학의 반대편에 있는 신을 떠올렸고, 신을 의지해 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러자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된 게 청소년기에 신을 부정했던 것에 대한 벌이 아닐까 라는 생각까지 하게됐다. 그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신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자 어머니에게 부탁해 집 근처 교회에 신자로 등록을 했다.
  비록 장애 때문에 교회에 다닐 수는 없었지만 일단 신을 받아들이자 그의 생활에는 여러 가지 긍정적인 변화가 생겼다. 무엇보다 교인들이 수시로 그를 찾아오게 되면서 바깥세상과 연결이 됐다는 것이 매우 큰 기쁨이었다.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즐거웠다. 사람들을 만나며 삶에 활력이 생기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라는 즐거운 고민까지 하게됐다. 그 고민 끝에 그가 택한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사실 척수를 다쳐 전신마비가 된 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활동의 제약 때문에 컴퓨터 작업과 문학, 그리고 미술 밖에 없었다. 이 세 가지 일 중에 그는 미술을 택했다. 다행히 그림 그리는 작업은 그에게 낯선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 잠시 집에 세 들어 살던 이름없는 화가에게 미술을 배웠던 전력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적 일을 떠올리고, 일단 미술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자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팔을 사용해 일단 붓을 잡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그는 붓으로 이름 석자를 쓰는 연습을 무려 한 달여 했다. 그러자 팔 근육이 조금씩 살아났다. 그는 내친 김에 마음이 급해 아는 교인에게 "화가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글을 가르치려 홍아무개씨라는 화가가 한달에 서너번 그를 방문하게 됐다. 하지만 그 화가는 그의 장애가 예상외로 심해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해서인지 몇 달 오다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는 별수 없이 혼자 책을 보며 그림을 공부했다. 그러기를 십 여년 그는 열심히 화폭에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고독하게 지속했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그는 고통을 잊었다. 그리고 신앙의 힘으로 마음의 안정까지 찾아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이런 대목에 어울리는 것일까, 혼자서 작업하던 그는 스승 금영보 씨를 만나게 된다. 당시 금씨는 홍익대 미대 사 학년에 다니고 있는 학생이었다. 그는 금씨에게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게된다. 소일거리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순수 회화를 비롯해서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또 한가지, 그의 치료비로 전 재산을 날렸던 아버지가 재기에 성공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게 된 것도 그에겐 행운이었다.
그는 금씨에게 그림을 배워 구십이 년에 안양시내에서 전시회를 가진다. 금씨가 가르치던 구족화가 임인석씨와 그, 그리고 금씨 삼인전이었던 이 전시회에 처음 "소울음"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소울음이란 단어는 우리말로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 전시회는 예상외로 반응이 좋았다. 매스컴의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한사람의 화가로 자리매김 됐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삶에 열정이 생긴 그는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신촌세브란스 재활 병동에 입원했다.
  신촌세브란스에 척수장애우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재활병동이 생긴 것은 팔십팔년이었다. 그전에는 우리나라에 이런 재활병동이 없었다. 그는 혹시나 일어설 수 있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이 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나서 일년, 그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훨체어에 앉아서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늘 누워서만 지내야 했던 그에게 앉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변화였다. 그는 치료 결과에 전적으로 만족했다.
  그로서는 실로 십팔년만에 앉아 보는 휠체어였다. 그리고 십팔년만에 대하게 되는 바깥세상이었다. 그는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서 세상이 모두 자기 것 인양 기뻐했다. 다시 전시회를 가지고 난 후인 구십삼년 그는 내친김에 여행을 떠났다. 위로는 삼팔선에서부터 아래로는 부산, 대구까지 안가본데 없이 그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자신의 손으로 사진을 찍고 담아온 풍경을 직접 그리는 과정이 그렇게 신이 날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 관심이 있는 장애우들을 모아 그림 모임 "소울음"회를 만들었다. 아버지에게 떼를 써 지금 살고 있는 명학역 부근건물 이층 한켠을 화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그는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을 불러모아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살다보니 내 욕심만 앞세울게 아니더라구요. 내 욕심은 열심히 그림공부를 해서 비장애우들과 마찬가지로 화단에서 인정 받는 것이 목표였어요. 실제로 혼자서 시간을 많이 투자하면 될 것도 같아요. 하지만 사는 게 그게 아니잖아요. 전시회를 계기로 많은 장애우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희망을 나누면서 같이 발전을 하는 게 사는 보람이 더 있을 것 같아요"
  현재 "소울음" 화실에는 다섯 명의 장애우들이 그림을 배우러 나온다. 매주 화․목요일이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날이다. 그는 후배들과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옆에서 조언을 해주고, 가르쳐 주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얼마전에는 회원들을 데리고 대부도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렇듯 그의 요즘은 하루 하루가 재미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회원들과 노래방도 가고, 여행도 갔다오고, 식사도 하면서 지내기 때문에 외로워 할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고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심각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 바로 장래문제다. 그의 수발을 들어주고 화실에서 회원들 뒷치닥 거리를 도맡아서 해주는 어머니는 올해 예순살이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지 요즘들어 어머니는 자주 "힘이 부치다"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해결책은 그가 결혼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그는 "수녀가 되려는 분이 있으면 결혼하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희망을 피력한다.
결혼을 위해 기도도 많이 한다는 그,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그는 웃는다. 결혼이 피상적인 꿈이라면 그의 구체적인 꿈은 같은 처지의 장애우들과 함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그의 공동체에 대한 바람은 회원들이 중증장애우이다보니 오고가기가 무척 힘들다는 실정에서 착안됐다. 그래서 지금 있는 화실 옆에 침대를 들여놓고 회원들과 같이 지내고 싶지만 역시 문제는 재정이다.
  "돌이켜보면 꿈같은 세월이었어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소일거리를 못 찾아 하루하루를 지옥처럼 보내는 장애우들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행복한 장애우죠"
그는 자신이 행복하단다. 휄체어에 앉을 수 있게 됐지만 아직도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만 지내야 하는 그가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언젠가 그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그에게 정색을 하고 물어볼 일이다.

 

글․이태곤/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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