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천희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시인 천희

詩는 장애로 움추렸던 나에게 숨통을 틔워준 분출구

본문

천희 씨의 시에는 자신의 굴곡 많았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교통사고로 가지게 된 장애로 인한 좌절, 저승으로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무너져버린 가정에 대한 상처까지…
장애로 인해 한없이 움추려들었던 그이에게 시는 세상을 향해 다시 말문을 열게 해주었고, 새롭게 삶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솟대문학 가을호에 3회 추천을 받으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시인 천희 씨의 굴곡 많았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시인천희씨
사고 후 3개월 간 혼수상태, 깨어보니 모든 상황이 최악이었다
1995년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그이는 그야말로 30대 초반의 잘 나가는 회사원이었다.
대학 졸업 후 1200명의 직원이 일하는 경인전자에 품질관리사로 입사해 대리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재일교포 사장에게 일본어실력을 인정받아 6개월 동안 일본으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고, 그런 경력 덕분에 사내에서 일본과 관련된 업무는 대부분 그이가 관장할 만큼 인생은 막힘 없었다, 아마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어엿한 중소기업의 과장 자리정도는 문제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간만에 회사에서 휴가를 받아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를 모시고 원주에 있는 베론 성지로 가던 중 빙판 길에서 미끄러지는 교통사고로 그이의 인생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때가 아마 구정 무렵이었을 거예요. 어머님께서 경남 거창에 있는 친정집에 가보고 싶다고 하시더라구요. 운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먼 길을 떠나는 게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그리도 원하시는데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가는 길에 원주에 있는 베론 성지에 들렀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베론 성지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난 겁니다. 터널 안 빙판길에서 차가 미끄러져 방향을 잃고 휙 돌았던 것까지만 기억이 나요. 그리고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군요. 온몸이 붕대로 감겨져 있는데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꿈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눈을 감고 여러 번 잠을 청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깨어나자마자 가족들에게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모두들 어머니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고만 얘기했습니다. 어머니가 사고 당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는 건 1년이 넘은 후에야 알았어요.”
어릴 적 동네에서 우는 아이 소리가 나면 사람들은 의례 ‘또 천희가 사고 쳤구나’할 정도로 그이는 싸움꾼이었다. 그런 말썽장이가 착실한 사회인으로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항상 곁에서 따뜻한 사랑으로 보듬어주신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자신이 운전하던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사고 후 몸을 추스른 후, 어머니의 첫 기일에 산소를 다녀오면서 그이는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리움을 ‘母親에게’ 라는 시에 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는 길
이별이란 잠깐이지만
만남은 영원하다고 했지요

 처음에도 그랬듯이
모르던 중에 만났듯이
이번에는 이별을 알고
만남은 어렴풋이 확신하니

 만나는 그 순간까지
앞길을 아름답게 걸어갈게요.

 ―‘母親에게’ 全文―

  

가족 부양할 자신 없어 처자식 버리고 꽃동네 찾아가려고 마음먹기도
병원 측에서는 3개월 동안이나 혼수상태로 누워있던 그이가 의식이 돌아온 것만도 기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고로 인해 손과 다리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언어장애, 부분적인 기억력 상실과 판단력 약화라는 커다란 짐이 지워졌다. 스스로도 불편한 다리와 어눌한 말, 기억력과 판단력이 약화된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사고 후 1년이 지난 96년 그이는 퇴원했지만, 회사에서는 강제퇴사 통보가 날아왔고, 묵묵히 병상을 지켜주던 아내도 조금씩 지쳐 가는 모습이 역력했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성실한 회사원으로 차곡차곡 꿈을 향해 살던 그이의 삶은 교통사고와 함께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말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절망스러웠어요. ‘내가 이런 몸으로 처자식을 부양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에 가족을 두고 음성에 있는 꽃동네에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도 다섯 살 된 딸을 두고 그럴 수는 없더라구요. 그래도 살아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장애인고용촉진센터에 찾아갔지요. 누구든지 불행이 닥쳐오면 자신의 것이 가장 절박하고, 커다란 것처럼 느끼잖아요. 저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장애인고용촉진센터에서 많은 장애우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삶의 의지가 생겼어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하고, 취업을 위해 교육받는 분들이 저에게 자극이 된 거지요.”
그렇게 그이는 그곳에서 사고 후 2년이 지난 97년 4월부터 10월까지 컴퓨터교육을 받았다.
“문서작성은 물론이고 캐드, 액셀도 능통해지면서 컴퓨터 실력을 통해 다시 취업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컴퓨터에 재미가 붙으면서 글이 되는 것은 뭐든지 컴퓨터에 옮기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시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았을지도 모르는 제가 시를 쓰게 된 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하사관 시절 군에서 GP에서 근무할 때 혼자서 너무 적적하니까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거든요. 그때 그 책들이 시를 쓰는 자양분이 되었던 것 같고, 또 한가지는 컴퓨터를 배우면서 연습 삼아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끼적였던 글들에 자신감이 생기면서 시를 본격적으로 쓸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그이는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시 세상을 향해 말문을 열었고, 농부가 땅의 숨결을 놓치지 않는 귀를 지닌 것처럼 세상이 자신에게 전해주는 희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직장을 구했지만 IMF 칼바람 앞에 장애우는 구조조정 1순위
컴퓨터교육을 받고 난 후 그이는 매우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에 나섰다. 사람을 뽑는다는 광고만 보면 하루에도 수십 군데씩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이의 이력서에는 대학시절 따 놓은 품질관리사 자격증, 3년 동안 독학으로 일궈낸 능숙한 일본어회화, 7년 동안의 직장생활 경력, 컴퓨터 교육 수료 등 각종 자격증과 경력사항이 빼곡했지만 취업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97년 그이는 금세공회사 생산부에 입사한다.
“우선은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너무 행복했어요. 사고 후 2년 10개월만에 다시 얻은 직장이었으니까요. 회사에서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일본에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우연히 그 전화를 제가 받게 됐어요. 일본어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통화를 했는데 그 일로 일본어 실력을 인정받아 생산부에서 관리부로 전격 이동하는 행운을 거머쥐었어요. 이제야 내 인생에 역전의 기회가 오는구나 싶었지요.”
그러나 입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IMF가 터졌고, 회사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IMF 칼바람 앞에 장애우인 그이는 구조조정 1순위로 적용되고 말았다. 회사에서는 경영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부르겠다면서 그이에게 무급휴가를 주었지만 다시 부를 것 같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일하던 동료사원이 사장에게 “저 병신은 가만히 놔두고 왜 사지 멀쩡한 우리만 내쫓느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는 스스로 사직서를 내고 나왔다.
“그 동료 직원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건 그 얘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그 때만해도 제가 지금보다 훨씬 장애 정도가 심했어요. 말하는 것도 많이 어눌했고, 몸의 움직임도 굼떴지요. 게다가 순간판단력이 흐려서 업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일이 어렵기도 했습니다. ‘사고 전처럼 건강했다면 내가 구조조정 대상자였을까’하는 생각도 들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는데 왜 나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건가 하는 마음에 세상에 대한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우선은 장애를 이겨내는 게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이는 직장을 그만 둔 후 동아일보에서 공공근로를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언어장애를 호전시키기 위해 매일매일 신문을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지하철이든, 버스 안이든 닥치는 대로 소리나게 읽었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새로 구하는 직장에서 또 한번 그런 상처를 겪지 않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노력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를 통해 장애로 움츠려든 마음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사고 후부터 가끔씩 시를 쓴답시고 끄적거리기는 했지만 실직 후에는 본격적으로 열심히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라도 표현해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 후부터 시는 내 생활이 되었어요. 시를 통해 내 스스로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하기도, 삶의 에너지를 얻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내가 무언가 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삶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으로 변하게 되더라구요.”

 시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언어
올 가을에는 솟대문학에 시를 3회 추천 받으면서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했으니 이젠 정말 시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시를 통해 삶의 희망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자연에 대한 아름다움도 노래하지만 그이가 초기에 썼던 시들은 주로 사고 후 저승으로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아내에 대한 사랑, 장애로 인한 좌절 등 시 한편 한편에 절절한 사연들이 깃든 생활시들이 주를 이뤘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걸으려 할 때
언제나 가만히 속삭여주고
나의 어리석음을 올바르게 일깨워주며
아름답지만 아름다움을 뽐내지 않으며
자신의 고상함도 감추고 묵묵히 걸어가네
외로이 걷는 발자취를 보며 생각할 제
당신의 내가 되지 못하고
나의 당신이 된 것을 탓하지 않으니 고맙기 그지없네
―‘나의 당신’全文―

 ‘나의 당신’은 사고 후 자신의 곁에서 용기를 주며, 자리를 지켜준 아내에 대한 믿음과 고마운 마음을 담은 시이다.
그이는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와 주변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목소리를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 전하기 시작했다. 사고로 인해 갑자기 엿가락처럼 꼬이기 시작한 인생, 다시는 예전에 삶에서 느꼈던 사소한 행복들을 되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시는 그이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불붙이게 되었다.
“시는 나에게는 세상에 대한 구원이었어요. 장애라는 굴레로 움츠렸던 나에게 숨통을 틔여준 분출구였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시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언어였던 거죠. 시를 통해 세상과 화해하고 대화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이는 시를 통해 자신의 상처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장애로 인해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 상대방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기를 얘기하기도 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이의 생활은 훨씬 더 분주해졌다. 근로자예술제나 출판사 등을 방문해서 자신의 작품을 알리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공공근로를 하면서 틈틈이 모은 돈으로 「조그마한 속삭임」이라는 시집을 출간하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시작했다.

 소중한 가정, 반드시 지켜내고 싶었지만 결국 아내와 헤어져
그렇게 시를 쓰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새로운 직장을 구해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내가 일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가장으로서 가정을 꾸려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이는 항상 가방에 적당한 일자리가 있으면 즉시 내밀 수 있도록 이력서와 일본어로 작성한 자기소개서, 틈틈이 지은 자작시를 몇 장씩 꾸려 넣고 다녔다.
공공근로사업이 잠시 중단된 동안에는 장애인쉼터를 찾아가 그곳에서 강의하는 컴퓨터교육에 참석하기도 하고 취업정보 게시판의 구인란도 꼼꼼히 챙겼다.
그러나 그이의 아내는 그런 불안정한 생활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아내하고는 스무 살 무렵에 성당에서 만나 8년 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어요. 결혼하고 바로 딸아이를 낳았는데 정말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을 만큼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사고로 장애를 가지게 되면서부터였어요. 사실상 사고 후에는 아내가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게 되었거든요. 아마 아내도 사고 후 5년 동안 많이 힘들었을 테지요. 아내가 어느 날 이혼하자고 말하더군요. 사고로 몸이 다친 건 이해하지만 머리가 다친 사람과는 같이 살지 못하겠다고요. 가정을 꼭 지키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합의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아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가정이라는 껍데기를 계속 유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딸아이는 집사람이 키우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살고 있던 전셋집을 아내에게 주고, 저는 안산에 있는 누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사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담담하기만 했던 그이가 아내와 딸 이야기를 꺼내면서 눈빛이 흔들리고, 감정이 차 오르는지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십 장의 이력서를 들고 동분서주했던 것도, 방송통신대에 편입해 일어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도, 수십 편의 시로써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쏟아냈었던 것이 어쩌면 조금씩 무너져 가는 가정을 고스란히 되돌리기 위한 노력은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이제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 딸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주지 못한 게 미안하죠. 작년까지는 제가 서울에 살았으니까 명절 때나 딸아이의 생일날 찾아가 선물도 사주고 했지요. 그런데 올 초에 천안으로 직장을 구해 내려가면서 자주 만나질 못해요. 가끔씩 메일을 주고받는데 얼마 전에는 영어어학경진대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기쁜 메일을 보냈더라구요.”
딸 이야기를 하면서 그이의 얼굴이 꽃처럼 피어났다.

 어렵고 힘든 지난 시절 통해 나눔과 배려의 마음 배워
굽이굽이 한없이 휘어진 강원도 길을 가본 사람이라면 동감할 것이다. ‘이 굽어진 길만 돌면 곧은 길이 나오는 건가’싶으면 또 다시 그 길이 모서리가 되어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 그런 길을 갈 때의 막연함을 말이다.
그이가 살아온 모습이 쉼 없이, 끝도 없이 이어진 그런 길을 닮아있다. 그런데도 그이는 자신의 처지에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힘든 지난 시절 속에서 나눔과 배려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고 전에는 나밖에 모르는 외골수였어요. 친구가 무슨 소용이 있나 생각하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였던 거죠, 그런데 사고 후에 곁에서 돌봐준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고가 나에게 많은 시련을 준 건 사실이지만 그 대신 나눔과 배려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됐어요. 요즘은 몸도 마음도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어요. 올해 초부터 천안에 있는 세풍정밀에서 일하고 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거든요. 도시가 아닌 지방에서 사니까 확실히 삶에 여유가 생겨요. 자연으로 눈이 가서 시를 쓰는 소재가 풍성해지는 것 같고, 퇴근 후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 실컷 책을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하구요.”
어렵고 힘든 지난 시절이 아름다운 지금을 만들어주는 모양이라는 그이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박노해 시인의 ‘굽이 돌아가는 길’의 한 소절을 조용히 읊조려보았다.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것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글·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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