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하늘공동체 운영하는 함영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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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그이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이가 얼마 전 아이를 입양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입양기관에서 장애우는 입양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입양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이는 근이양증이라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이처럼 심한 장애를 가진 장애우가 아이를 입양했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가로막힌 벽을 깬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함영준 |
삶의 기반 포기하고 공동체 생활 해
충남 공주시 외곽에 가면 홍성골이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이 있다. 하나 둘 마을 사람들이 떠나 지금은 사람이 사는 집 보다 빈 집이 더 많은 곳, 인적 드문 마을에는 황량한 바람이 겨울 들판을 깨우고 있었다.
그 바람을 헤치고 당도한 곳이 마을 초입에 자리잡고 있는 하늘공동체였다. 거기서 낯익은 인물을 만났는데, 바로 함영준 씨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그이는 근이양증장애를 가지고 있고 서울에서 살았었다.
근이양증장애, 몸에서 서서히 근육이 빠져나가 결국은 사망에 이르는 이 장애를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조금 과장하자면, 이 장애는 ‘공포의 장애’로 인식되고 있다. 생각해 보라, 팔을 드는 것도 근육의 힘이고, 호흡을 하는 것도 근육의 힘 때문에 가능한데, 그런데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면서 멀쩡히 걷다가 주저앉게 되고, 그러다가 눕게 되고, 나중에는 호흡도 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장애가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되는 장애이다 보니 근이양증장애는 말 그대로 공포의 장애인 것이다.
그런 근이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 함영준, 그이가 공동체를 만들어 장애우와 더불어 살겠다고 인적 드문 마을에 내려와 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그이 얘기를 하기 전에 기자는 아픈 추억 한 가지를 꺼내든다.
기자가 함영준 그이를 만난 것은 지난 구십년이다. 그때 그이 곁에 또 다른 근이양증장애우가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지금은 고인이 된 김태환 씨다.
그때 기자는 ‘상록수회’라는 근이양증장애우모임에서 시화전을 연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 보라매공원을 찾았었다. 거기서 함영준 씨와 김태환 씨를 만나, 서너 시간을 주로 김태환 씨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랬는데 정확하게 삼일 후 기자는 김태환 씨가 고인이 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정말 당황했다. 기자와 시화전에 대해 얘기했을 때 김태환 씨는 멀쩡했다. 의욕에 넘쳐 있었고, 아픈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랬던 그가 다른 이유도 아닌 장애 때문에 고인이 됐다는 연락을 받고 보니 정말 아찔했던 것이다. 부연하자면 기자는 그때 처음 근이양증장애의 무서움을 알았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른 다음, 기자는 우연히 서울 진관내동에 있는 성민교회라는 장애우 교회를 찾았다가 그 곳에서 출판일을 하고 있는 함영준 씨를 대면했다. 또 몇 번 더 장애우 모임과 거리에서 우연히 그이를 만났고, 몇 해 전에는 풍문에 그이가 결혼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공주에서 그이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안부를 묻고 난 후 어떻게 공동체 생활을 시작하게 됐느냐고 묻자 그이는 “작년 사월 짐을 꾸려서 내려왔다.”면서 말을 꺼냈다.
“제일 친한 친구였던 태환이가 살아있었을 때 약속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우리는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으니까, 어차피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할 테니까 나중에 공동체를 만들어 평생을 같이 살자는 얘기를 했어요. 비록 태환이는 고인이 됐지만 저는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재작년에 성민교회 초대 멤버 중에 이완경씨 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여기서 공동체를 하고 있었어요, 그 분이 몸이 안 좋다고 나 대신 공동체를 맡아줄 수 없겠냐고 부탁해서 두 주 생각하고 내려왔어요.”
그이는 공주에 내려오기 전 서울에서 출판 일을 하고 있었다. 또 초록봉사대라는 이름을 가진 장애우이동을 도와주는 모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집안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즉 서울이 그이 삶의 기반인 셈이었다. 그런데 공주에 내려가는 것은 이런 삶의 기반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공주행을 앞두고 왜 갈등이 없었겠는가.
“무엇보다 걱정인 것이 생계문제였어요. 생계에 대한 두려움이 컸죠. 서울에서는 집사람이 벌어서 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살았는데 막상 내려가면 먹고 살 길이 막막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가게 되면 인생을 걸고 내려가는데 먹고 살 수 있겠느냐고 이완경 씨에게 물었죠. 그랬더니 이완경 씨가 서울에서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생활이지만 여기에서의 신앙생활은 삶의 체험이다. 실질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살아봐라. 그러면 다 채워준다고 해서 그 말 듣고 그냥 내려왔어요.”
“내려오고 나니까 어떤 점이 좋던가요?”
“좋은 점은 제가 원래 조용하게 사는 걸 원했는데, 그게 충족돼서 좋았어요, 공기도 좋고 또 생명력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맛보며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불편한 점은 없나요?”
“있죠. 서울에서 살 때는 선교단체나 봉사단체가 많이 있어서 손을 뻗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여기는 그런 게 없어요.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도 손을 잡아줄 곳이 없는 거죠. 그리고 여기는 예전 칠팔십 년대의 서울 모습을 연상하면 딱 맞는데, 편의시설을 갖춘 시설이 거의 없어요. 장애우도 없고, 제가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모두 쳐다봐요. 한 마디로 장애우복지가 낙후된 곳이죠.”
“아까 먹고사는 것이 걱정이 돼서 내려오는 걸 주저했다고 했는데, 먹고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나요?”
“저희 가족이 기초생활보호대상자이거든요. 그래서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생계비로 먹고 살아요. 명절 때 되면 쌀 가져오는 후원자도 몇 분 있고, 그래서 가난하지만 밥은 굶지 않아요”
그이가 대표로 있는 하늘공동체에는 그이와 아내, 아들, 딸 네 식구와, 서울에서 내려온 정신지체와 정신장애를 각각 가진 오정아 허순만 씨, 그리고 그이가 동생처럼 아끼는 시각장애를 가진 최장원 씨, 이렇게 일곱 식구가 살고 있다. 이중에서 기초생활보호대상자는 그이 직계 네 식구뿐이다. 나머지 가족은 연고자가 있어서 생계비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약 월 팔십 만원이 수입의 전부이고, 식구는 일곱 식구다. 당연히 생활이 빠듯할 수밖에 없다.
“돈을 쓰는 건 밖으로 나가야 쓰는데 나갈 기회가 별로 없으니까 돈 쓸 기회도 없어요. 그리고 불필요한 것들은 사지 않고 절약하며 사니까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장애우는 입양 불가능하다는 편견에 도전
기자가 그이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이가 얼마 전 아이를 입양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입양기관에서 장애우는 입양이 불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어떻게 입양이 가능했을까.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이는 근이양증이라는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이처럼 심한 장애를 가진 장애우가 아이를 입양했다는 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이건 가로막힌 벽을 깬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결혼하면서 집사람과 아이는 안 낳기로 합의했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임신을 해서 태아감별하고 유전자검사를 하고 양수검사도 해서, 병원에서 아들은 괜찮다고 근이양증장애가 유전되지 않는다고 해서 보성이를 낳았어요. 그런데 실은 저는 딸을 갖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여기 내려와서 집사람에게 딸을 입양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죠. 집사람도 동의해서 입양을 위해 여기저기 알아봤어요. 입양 홍보기관에서 강의도 듣고 그랬는데, 입양이 좋은 게 뭐냐면, 사람들은 가정의 의미를 혈연 중심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버려진 아이들은 입양이 안되면 해외로 가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지는데, 비록 엄마 아빠가 훌륭하지는 않지만 아이를 입양해서 울타리가 되어준다는 게 좋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입양을 위해 입양기관 문을 두드렸는데, 이건 제가 장애우라고 말을 꺼내면 말도 못 붙이게 하는 거였어요. 은근히 화가 나서 엠팩이라는 입양 홍보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에 글을 띄었죠. ‘부모들이 건강해야 하고 재산이 있어야 하고 사회적인 안정을 가진 가정만 입양할 수 있다면, 이런 당신네들 기준대로라면 우리 보성이는 절대로 태어나지 말아야 할 아이란 말 아니냐, 그럼 보성이 존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항의했죠. 그랬지만 입양은 허락되지 않았어요. 정작 보경이를 입양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아는 교회 목사님이 소개해줘서 가능했어요. 목사님 소개로 「나주 이화영아원」 이라는 입양기관을 찾아갔는데, 그 기관에서도 저를 보고 난감해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상담은 허락해줘서 사회복지사와 상담하면서 진지하게 제가 장애를 가졌지만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다는 점을 납득시켰죠. 그런 제 모습이 신뢰가 갔는지 다음에 다시 한 번 오라고 해서 갔고, 그때 처음 보경이를 봤어요. 그리고 기다렸죠. 보통 비장애우가정은 상담한 후 한두 달이면 아이를 입양할 수 있는데, 저는 보경이를 입양하기 위해 칠 개월을 기다렸어요. 저는 장애우는 입양이 안 된다는 차별을 깨고 싶었어요. 아마 장애우 중에서 아이를 정식 입양한 사례는 제가 처음일 거예요. 그래서 보경이를 정말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어요.”
지금 이십오 개월이 된 보경이는 하늘 공동체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그이는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삶의 활로를 찾고 있다. 서울에서의 기반을 접고 시골로 내려온 것도 도전이고, 아이를 입양한 것도 하나의 도전이다. 그런데 문제는 도전해도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이 장애다.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는 장애가 그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무기력해요, 아침에 일어나면 근육이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고, 힘이 없으니까 기분이 가라앉아요. 밤엔 잠을 설치고, 근육이 눌려서 아프니까 한 자세로 오래 누워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많이 깨면 하루 열 번도 넘게 깨죠. 깊게 잠을 못 자니까 낮에 피곤하고, 예전에 앉아서 생활했을 때는 혼자서 기어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꼼짝도 못 해요. 당연히 숟가락질도 안돼서 혼자서 밥도 못 먹고....”
“심리적으로 불안할 텐데 어떻게 극복하나요?”
“신앙만으로는 극복이 안돼요. 불안하죠. 지금 제가 느끼는 불안은 아이들 문제예요. 저는 내년이면 사십대니까, 인생의 반을 살았으니까,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것을 믿어요, 그런데 불안한 건 나의 전철을 아들이 밟을까봐, 아들이 나처럼 근이양증장애를 가지게 될까 봐 그게 불안한 거죠.”
“몸에서 근육이 빠져나가는 걸 본인도 느끼나요?”
“아뇨. 못 느끼니까 더 답답한 거예요. 근육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어요. 의식도 못하게, 그래서 일 년 단위 아니면 육 개월 단위로 끊어야 알아요. 몸에서 근육이 빠지는 것을 알면 경각심을 가지고 대처할텐데, 못 느끼니까 답답한 거예요.”
만난 지 일주일만에 프로포즈하고 결혼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화제를 그이 결혼 이야기로 바꿨다. 그이는 아내를 만난 지 일주일만에 프로포즈해서 결혼에 성공한 전설적인 얘기를 가지고 있다. 그이가 결혼한 건 지난 구십팔년 오월이다. 그이의 결혼 스토리를 옮겨보면 이렇다.
그이는 그때 서울 진관내동 성민교회 소유 건물 한 켠을 빌려 출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이에게 책 제작 의뢰가 들어왔다. 노원구에 사는 전신마비 장애우 민경석 씨가 간증집 제작을 부탁해온 것이다. 그러면 지금의 아내는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 다음은 아내 얘기다.
“그때 제 친구가 봉사 서클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민경석 씨가 예술의 전당에 연극 보러 가는 걸 같이 가주기로 했는데 바쁜 일이 생겨서 못 가겠다면서 대신 가줄 수 없겠느냐고 하길래 마침 시간이 남아서 승낙했어요. 그래서 민경석 씨를 만났는데, 민경석 씨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학보사에서 활동한다고 대답했더니 학보사 일 하면 글 잘 쓰지 않느냐고 그러길래 왜 그러세요? 그랬더니 책을 내는데 교정 볼 사람이 없다면서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교정보는 거는 도와줄 수 있다고 했죠. 그때 민경석 씨 간증집 제작을 그이가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일주일을 꼬박 그이와 같이 지내게 됐어요. 책 제작이 끝날 무렵 그이가 프로포즈를 해왔어요. 사귀어보자는 게 아니라 결혼하자는 프로포즈였죠. 망설이지 않고 예라고 대답했어요.”
“만난 지 일주일만에 결혼을 결심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요?”
“그이와 같이 일주일을 작업하면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새벽에는 같이 동네 산책도 하고, 그러면서 저도 그이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어요. 성실하고 착하고 신앙도 같았으니까 한마디로 통했죠. 좋은 느낌을 받았고, 그래서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부모님 반대가 심하지 않았나요?”
“심했죠. 얼마나 심했냐면, 제가 결혼하기 전에 병원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몰려와서 병원을 그만두게 하고 저를 집으로 끌고 갔어요. 그래도 제 마음이 돌아서지 않으니까 아버님이 너 갈 길 가라고 해서 서울 올라와서 그이와 같이 살았어요. 지금도 저만 친정에 가요. 아직 아버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어요.”
“함영준 씨가 심한 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미래에 대해 불안하지 않았나요?”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어요. 제가 간호사니까, 생활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벌면 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미래에 대해 고민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으니까 그냥 하루하루 즐겁게 살아요. 성한 사람도 갑자기 식물인간 되고, 교통사고 당해서 전신마비 되는데, 그에 비하면 그이 장애는 양호한 거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고 생각하고 미래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요.”
이제 함영준 그이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이에게 근이양증장애 증세가 나타난 것은 그이가 초등학교 육 학년에 다닐 무렵이다. 하지만 그때는 걷는 게 조금 힘들었을 뿐 그이는 자신이 장애를 가지게 됐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그이가 자신의 장애를 알게 된 것은 열아홉 살 때다. 그때 그이는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 의사가 병원에 입원한 김에 검사를 받아보자고 해서 검사를 받았고 근이양증이라는 장애판정을 받았다.
그이 회고에 따르면, 무엇보다 절망적이었던 것은 근이양증장애가 치료가 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그이는 장애판정을 받고 다니던 고등학교를 그만둔 후 집에서 침대에 누워서 삼 년을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그때 절망감 때문에 굉장히 많이 울었다는 게 그이 말이다.
그러던 그이가 바깥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이 나이 스물두 살 때 근이양증장애우 모임인 ‘잔디네’를 알고 나서 부터이다. 그이는 이 모임에서 친한 친구 태환이를 만났다, 그리고 나중에 성민교회 목사가 된 이병상 씨도 알게됐다.
그이 나이 스물일곱 살 때 태환이와 독서모임인 상록수회를 만들면서 그이 삶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이는 상록수회 활동을 하면서 비로소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새기게 됐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이는 상록수회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다른 얘기지만 그이 말에 따르면 근이양증장애는 형태가 여러 가지지만 대체로 세 가지 형태로 분류된다고 한다. 근이양증장애 중에서도 디센형은 진행이 빠른 장애라서 일찍 사망하는 경우가 많고, 지데형은 장애가 서서히 진행되며, 안면형은 장수형이라는 것이다. 태환이는 디센형이라서 일찍 사망했고, 자신은 지데형 근이양증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게 그이 말이다.
그이는 한때 전자출판으로 생업을 잇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판 일에 매달렸었다. 말하자면 도전인 셈인데 그런데 출판 일이 생각대로 되어주지 않았다는 게 그이 말이다.
“장애우로서 할만한 일이 없으니까 전자출판에 손을 댔는데, 혼자 하려니까 잘 안됐어요. 디자인 감각이 없는 거죠. 만약 회사에 취직해서 배웠으면 금방 배웠을 텐데 혼자 하려니까 실력이 늘지 않고, 겨우 집에서 타자치는 입력작업만 하는 정도였죠. 그러다가 이병상 목사님이 재활원에 공간이 남으니까 여기 와서 사업을 해봐라 라고 배려해 줘서 교회 건물을 빌려 기획사를 차렸죠. 이 때가 구십오 년인데 거기서 먹고 자면서 이름만 출판사지 도장, 명함, 복사를 취급하는 가게를 운영했어요. 그러다가 민경석 씨 책 제작 의뢰를 받고 집사람을 만나게 된 거죠.”
“동네 사람들하고는 친하게 지내나요?”
“그렇죠. 이제 모두 떠나고 네 가구 밖에 남지 않았는데 노인들만 남았어요. 할머니들이 심심하다며 가끔 놀러 오셔요.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어디 가게 되면 우리 차를 타고 다니니까 모두 한 식구처럼 지내는 셈이죠.”
그이와 얘기를 나누고 난 후 공동체를 나서자 어느새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이는 공동체 앞 넓은 밭을 가리키며 ‘내년에는 사백 평 밭을 빌려 고추 농사를 지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오십 평 남짓한 텃밭에는 지금은 마늘을 심어놨는데 내년에는 감자 고구마도 심을 예정이라고 말하며 그이는 환하게 웃었다.
어둠이 깔린 마을은 그이 웃음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떠나는 것일까.
사람들이 떠나는 곳에 그이는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도전을 성취하기 위해 둥지를 틀었다. 그이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하는 날 바로 여기가 하늘이 되지 않을까, 기자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해봤다.
글·사진/이태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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