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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지체·시각 중복장애우 김용권 씨

럭비공 같은 내 인생,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본문

 

▲김용권씨

그이의 살아온 얘기를 들고 있노라면,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예측불허의 사건들이 끼어들어 번번히 삶을 기운빠지게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이는 세 살 때 소아마비로 왼쪽다리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던 중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안 해 본 일없이 인생의 바닥까지 경험하기도 했다. 국가공무원으로 합격하고 어여쁜 아내를 만나 행복이라는 걸 경험해보나 했더니, 이번엔 부하직원의 과실로 해임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갖은 고생 끝에 건강보험공단에 합격되고 한숨을 돌리고 나니 나이 사십 문턱에서 RP-망막색소변성증 이라는 시각장애의 짐을 하나 더 지게 되었다. 

물론 그간 삶이 보여준 굴곡으로 단련되어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어쨌든 그이는 고된 삶의 과정을 통해 삶의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작은 기쁨을 즐길 줄 아는 혜안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갑작스런 죽음으로 가족 생계 책임지게 돼

김용권 씨를 아는 사람이라면 동감할 얘기지만 그이는 참 성실하다. 사실 성실함이라는 것이 요즘같은 디지털시대에는 맞지 않는 처세술일지 모른다. 요즘은 성실한 사람이라 하면 자칫 아둔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곡해되는 경우가 허다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이가 삶의 상처들과 맞서 이겨낼 수 있었던 삶의 키워드는 바로 이 성실함이었다.

서울 장충동에서 태어난 그이는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성적이고 유난히 책읽기를 좋아했던 그이가 순탄하게 자랐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정해진 방향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그 시절에 유치원을 다니고, 국민학교 땐 바이올린을 배웠을 정도로 집안이 부유했어요. 큰 아들이어서 집안식구들 귀여움을 한몸에 받고 자랐지만 너무 곱게만 커서 국민학교 때 생활기록부에 보면 감수성이 예민하고 유약하다고 씌여 있었지요. 그런데 국민학교 4학년때 갑자기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어머니가 오셨는데, 그 일이 내성적이었던 저에게는 너무나 충격이었고 참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게다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한 충격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그 잘 살던 집안이 하루 아침에 망했거든요. 장충동 큰 저택에서 정릉산동네로 이사가서 굉장히 어렵게 살았어요. 

 

밀가루 사다가 수제비 해먹고 봉투 붙여서 먹고 살고 그랬어요. 집안형편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중학교 3학년 때는 1년 휴학을 했을 정도니까요. 갑자기 부잣집 큰아들에서 어머니와 동생 넷이 딸린 소년가장으로 돌변한 거죠. 고등학교 입학해서는 학생들 과외도 하고 닭을 키워서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했어요. 그러면서도 참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이미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을 갈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으니까요. 그런데 공부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남들은 대학가면 4년동안 공부할 수 있지만, 난 고등학교 시절이 마지막으로 공부할 기회니까 그때만이라도 여한없이 공부해보자’고마음먹었던 것 같아요.”

 

양돈하며 한국 제1의 축산왕 꿈꿨지만 콜레라로 키우던 돼지가 모두 죽어버려

어떻게든 동생들 굶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그이는 정릉 집터에서 양돈을 하기로 결심했다. 양돈이라고 해봐야 돼지 열댓마리 키우는 일이었지만, 당시에는 한국 제1의 축산왕을 꿈꾸기도 했다고 한다. 새벽 네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정릉에서 광화문까지 나와 식당을 돌면서 잔반을 수거해 집까지 끌고가 돼지들을 먹였다. 그렇게 3년이 지나는 동안 그런대로 일이 잘 풀려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이가 스물두살 되던해 그이가 키우던 돼지들이 콜레라에 걸려 죽어나가면서 양돈에 대한 꿈을 접었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키운 짐승들이 어느 한순간 그렇게 쓰러져 나가는데 미칠 것 같더라구요. 그렇게 양돈에서 손 털었어요. 양돈이 자본과 노동력 축산에 대한 전문 지식, 이 모든 것이 갖춰져야 가능한 일인데 당시에는 꿈만 가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아주 영세하게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양돈 실패하고 나서 교회를 나가게 되면서 처음 나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인 것 같아요. 그 전에는 역사가 내 중심으로 창조된다고 느낄만큼 자신만만하기만 했었거든요. 물론 그런 믿음이 어려운 상황에서 나를 지탱해주기도 했지만결국 무모한 용기는 생명력이 길질 못하더라구요.”

그후 그이는 서울의 마장동과 성수동 일대의 철조망 공장, 모자공장, 아이롱공장, 기타공장 등지를 돌아다니며 막일을 했다. 그 무렵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여동생의 입학금 없어서 새벽같이 헌혈원에 가서 300cc씩 두 번 피를 팔아 입학금을 마련하기도 할만큼 암담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2년을 지내고 보니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 인생을 이렇게 접을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그래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죠. 처음에는 목표가 7급공무원 이었어요. 난 대학을 안 갔으니까 4년이라는 기간동안 9급 공무원을 2년만 에 보고, 4년 안에 7급 공무원에 붙는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76년 1월 1일에 목표를 세우고 76년 4월에 연습삼아 총무처 9급시험을 봤는데 그냥 붙어버렸어요. 고등학교 졸업한 지 6년만이었지요. 고 3때 열심히 공부했던 덕에 석달동안 공부하고 합격하지 않았나 싶어요.”

 

공무원 시험합격은 내 인생의 첫 번째 홈런

그이는 공무원시험을 합격한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첫 번째 홈런이 아니었나 생각된다고 했다. 체신부 의정부우체국으로 발령을 받은 그이는 말 그대로 혼신을 다 바쳐 열심히 일했다. 그 당시에는 의정부우체국에서 남양주, 구리, 동두천, 포천 지역을 다 관할할 때라 처리해야할 일들이 이만 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전화가 흔치 않던 그 시절 전화가입계로 부서배치를 받은 그이는 그야말로 일복이 터진 셈이었다.

"총무처 40명 신규발령자 중에서 두명이 의정부 우체국 전화가입계로 발령을 받았어요. 그때는 전화가입계는 소위 노른자 자리였어요. 일이 많기는 하지만 그만큼 로비도 많이 들어오는 곳이라 그 자리에 1년 있기가 힘들 정도였지요. 전화 한 대 놓는데 200만원씩 하던 때였는데 전화 가입구역 제외지역을 가입구역으로 편입시켜 주면 주민들이 돈도 갖다주고 그랬어요. 그런 자리에서 4년 6개월동안 일을 했어요.

남들은 그 자리에서 돈도 많이 벌었다는데 저는 그러지도 못했어요. 공무원은 국민들의 손과 발인데 그런 봉사를 하면서 월급을 받아가는 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다가 81년 한국통신공사가 생겼어요. 그때 근무희망지를 체신청으로 쓰면 그냥 남는 거고, 한국통신공사를 희망하면 그쪽으로 가는 거였는데 저는 우체국에 남겠다고 썼어요. 저는 공무원은 국민에게 봉사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10년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마음 먹었죠." 그것이 그이가 체신부에 남았던 이유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 갈 무렵, 스물아홉의 그이는 스물두살된 어여쁜 처자를 만나 한눈에 반해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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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있는 처가집에 인사를 가는데 아내의 오빠가 해남까지 나왔더군요. 제가 가면 집안에서 살인이 날지도 모르니까 돌아가라고 하더라구요. 그후 서울에 살고 있던 처형이 아내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어요. 처형 집으로 찾아가서 말씀드려봤지만 반대는 여전했어요. 그래서 아내에게 화장실 가는 척 하고 나오라고 신호를 보냈지요. 그 길로 택시 잡아타고 정릉으로 와서는 결혼식할 때까지 여관에서 지내게 했어요. 혼자서 청첩장 찍고 작은 교회로 예식장도 정하고, 만난지 3개월만인 12월 29일날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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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83년에는 승진하면서 양평우체국 업무계장 발령을 받았다. 그 사이 딸과 아들도 낳아 이젠 더 이상 남부러울 게 없겠다 싶었다.

 

부하직원의 과실로 해임된 후 계속되는 사업실패로 빚만 늘어

그러나 85년 양평우체국 예금보험계장으로 재직하던 중 부하직원의 과실로 사직서를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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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한 채 없도, 그렇다고 특별한 기술을 배워둔 것도 없는 형편에 장애를 가진 서른 두 살된 그이가 다시 취업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부동산중개사 자격증을 취득해 일을 해보기도 하고, 약초재배를 해보기도 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84년도에 약초농사를 지었는데 1000만원 정도 사기를 당했어요. 제가 약초농사를 잘 모르니까 기술지도를 해주면서 함께 일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제 땅을 자기 것처럼 해서 다른 사람과 동업을 해버렸더라구요. 그런데 그 해 농사가 안돼서 결국 그 사람도 망한거죠. 3년동안 전세금도 다 날리고 약초농사에 투자한 천만원과 동업한 사람 보증서준 천만원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어요.

87년 즈음엔 먹을 것이 없어서 남의 땅에서 1년 동안 황기농사를 짓고 그해 먹을 것이 없어서 빌린땅에다가 도사견을 길렀어요. 양평에서 닭장사를 하던 그 땅 주인이 아침마다 개먹이라고 닭내장을 가져다줬거든요. 하도 먹을 게 없어서 그땐 개 먹이라고 주면 간이랑 염통을 잘라서 구어먹고 일하곤 했어요. 저는 비위가 좋아서 잘 먹는데 아내는 그걸 먹질 못하더라구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모님 소리를 듣던 아내가 젊은 나이에 오일장을 쫓아다니며 인삼장사를 해서 생활비를 버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가슴이 메어져왔다. 보다 못해서 육촌형들이 취직시켜 주겠다고도 하고, 예전에 체신청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전화번호부 주식회사에 취직시켜준다고 했지만, 그렇게 편법으로 쉽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절실하다면 자신의 힘으로 이 난국을 개척해야 한다는 게 그이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이는 의료보험조합 시험을 목표로 삼아 1년동안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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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자 발표날 부부는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실패와 도전을 지켜봐준 아내가 이제는 단순히 아내라는 느낌보다 전쟁터에서 함께 싸워온 전우처럼 느껴진다”고 그이는 말했다.

 

RP는 어릴적부터 지고 온 장애가 하나더 보태지는 것에 불과

그렇게 아파트를 마련하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한숨을 돌리나 싶었다. 그런데 나이 마흔의 문턱에서 이번에는 RP라는 시각장애라는 짐이 하나 더 지워졌다.

RP라는 장애는 눈의 망막세포가 줄어들면서 점점 시야가 좁아지다가 결국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된다고 한다. 마흔 해가 넘도록 눈으로 세상을 익혀온 사람이 하루 하루 시력을 잃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고통일 것이다, 매일 읽던 문서 속의 글자가 한두자씩 사라질 때의 과로움과 좌절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91년 오토바이 면허를 따기 위해 시야측정검사를 받았는데 내 시야가 좁다고 알려줬어요. 그 당시엔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런데 비가 많이 오는 날 퇴근하려고 회사에서 나서는데 갑자기 눈 앞이 캄캄한 거예요. 그 길로 서울에 있는 안과에 갔더니 RP라고 하더군요 이 질환은 진행성이고 예후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데다가 실명에까지 이르게 되는 무거운 짐이라는데 어쩌면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어요."

마흔 무렵 찾아온 RP를어릴 적부터 가지고 살아온 장애에 하나를 더 보태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반환점을 돌았으니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 하는 안도감일까. 아니면 26년 전에 만난 예수 때문일까. 그이는 정말 진행성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모니터는 보여요. 그런데 서류가 잘 보이지 않아서 확대경을 놓고 일을 합니다. 전산 입력시키는 작업 같은 경우에는 실수하면 안되니까 혼자 남아서 늦은 시간까지 일하거나 쉬는 날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기도 하죠.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업무를 못하겠다고 말하기 싫더라구요. 앞으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스스로 내 책상을 찾아갈 수 있는 날까지는 최선을 다해 일할 겁니다."

 

인생 말미를 멋지게 장식할 세 번째 홈런 구상중

요즘 그이는 인생의 말미를 멋있게 장식할 세 번째 홈런을 구상중이다. 보이는 범위가 작아지는 만큼 혼자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함께 하는 일들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가지가 바로 장애우들과 함께 일하는 소규모 작업장이다.

"앞으로 5년 정도는 더 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후에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해봤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시각장애우들과 작업장을 만드는 일이에요. 봉투 만들어서 납품을 한다던가, 공항 세관에서 압수된 고급물건들을 입찰받아서 판매하는 일 등을 생각하고 있어요. 한명 두명과 같이 일을 해도 장애우들이 이런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모델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니까, 어느 정도 규모가 성장한다해도 더 이상을 키우지 않으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어떤 크기를 만들었을 때 자꾸만 확장하기 때문이거든요. 규모가 커지면 시설같은 느낌이 들까봐 다섯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구요. 될 수 있으면 중증여성시각장애우를 우선 순위로 삼으려고 해요. 시각장애애우 쪽에서는 작업장운동 움직임이 거의 없거든요. 가급적이면 위치도 시내에서 가까운 곳으로 정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삶의 행복이 오로지 육신의 편안함과 근심없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분주함과 긴장의 시간을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는 설명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김용권 씨 역시 그런 기준에서라면 세상에서 둘도 없이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일과시간에는 직장에서 정신없이 주어진 일을 해야 하고 퇴근 후에는 새벽시장으로 일하러 나가는 아내를 대신해 집안일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뿐인가. 주말이나 시간이 날 때면 그이가 회장을 맡고 있는 시각장애인연합회 양평군지회 일을 챙겨야하고, 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작업장 만드는 일을 구상하는 것까지 몸이 열이라도 모자랄 형편이다. 그런데도 그이는 요즘 사는 일에 신바람이 난다고 한다. 몸은 점점더 바빠지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여유롭고 넉넉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람은 우주의 중심이잖아요. 마음을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세상의 중심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이젠 소유보다는 보고 즐기는 기쁨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 제일 가고 싶은 곳이 덕수궁이예요. 덕수궁 석조전 건너편에 벤취가 있는데 노란 단풍이 들 때 거기에 앉아 있으면 환상적이거든요."

듣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하는 그이의 달변에 나도 모르게 차츰 빠져가고 있었다.


글 · 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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