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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이 사람의 푸르디 푸른 도전

최초의 뇌성마비 서울대 졸업생 정훈기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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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훈기 씨(28세)는 한동안 각종 일간지 지면을 장식했던 유명인사다. 그가 "역사이래 처음으로 서울대에 들어간 뇌성마비장애우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대통령의 축하 격려전화를 받고 각계의 장학금 지원이 이어졌는가 하면, 컴퓨터를 기증 받고 한 기업의 이미지광고에까지 출연하기도 했다. 해마다 오천여명이 서울대에 입학하지만 그의 입학을 이렇게 세상이 남다른 눈으로 바라본 것은 다른 설명을 제치고라도 이 사회 장애우의 현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구십팔년 팔월 그는 졸업을 했지만 그의 뒤를 잇는 서울대 입학 장애우에 대한 소식은 아쉽게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정훈기씨
장애를 가진 후배세대들에게 그는 여전히 선망의 대상이었을까.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이번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직업위원회 직업탐색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장애청소년들 모임에서 주최한 "선배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그는 초대됐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뇌성마비장애를 가진 후배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던 그 자리에서 그는 스스로 그렇게 당당하게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 후배들의 관심의 초점이 자신들에게 막막하기만 한 졸업 후 진로문제이고 선배인 훈기 씨로부터 시원한 해결방안등을 듣고 싶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그는 인사를 하며 "취업을 했으면 지금 명함을 돌렸을텐데..." 라고 말끝을 흐렸다. 몇 개월 전 자신을 인터뷰한 기사 말미에 "현재 무직"이라고 쓰여 있던 그 글자도 한 동안 그의 눈과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쏟아지는 주위의 시선을 견디다 못해 자신을 특별하게 보지 말아달라고 하는 주문을 여러 사람에게 했었던 그이다. 그러나 그가 직업을 얻는 과정에서 그리고 직업을 갖지 못한 현재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만의 것이 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장애후배들에게 그리고 그 부모님들에게 곧바로 감염될 아픔이다. 후배 장애우들이 그를 불러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평범할 수가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취업 못한 이유요? 정보가 부족했죠"

 

학과 친구들의 취업사례들에 비춰봐도 지금 자신이 자존심 상하는 상황에 놓여있고 그리고 그것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나 불합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의 답변은 길었다.

"화곡동 집에서 학교까지 오고 가는 일 뿐만 아니라 강의를 듣는 일만으로도 저녁이면 녹초가 될 정도였어요. 물론 대학 신입생 때는 학과 엠티도 쫓아가고 등산에도 따라가고 그랬는데 일단 체력의 차이 때문에 제가 친구들을 따라 갈 수가 없더군요. 어딜 가든 "조금만 가면 돼"하고 말하는데 나중에 보면 저는 녹초가 될 정도의 거리였어요. 게다가 수업 시간 필기를 빨리 하지 못하니 그거 보충하는 일도 따로 시간을 쏟아야했죠. 또 과외아르바이트도 하느라 수업 진도도 따라가기 바빴는데 자연히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못하게 되더군요.

그랬더니 막상 졸업을 앞두게 됐을 때 취업에 필요한 공부가 무언지에 대한 정보가 저한테는 하나도 없었어요. 사학년이 다 됐을 때 친구들이 말끝에 토익 어쩌고 하길래, 제가 "토익이 뭐냐"하고 물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회사에서 요구한 지원서를 보면 대부분 토익같은 공인된 영어 점수를 요구하는 거예요. 그게 없으면 아예 지원도 어렵게 돼 있구요. 그래서 일반 기업체에는 정식으로 지원도 못해봤어요. 그러니까 취업을 못한 것은 결국 제가 취업에 필요한 정보가 부족했다고 볼 수 있죠."

 

집에서도 맏이였고 대학 동아리활동도, 학과 내 이런 저런 학회활동도 못하고 그는 혼자 학과공부에만 매달려왔다. 시험문제에 대한 정보도 그런 모임이나 술자리에서 오가고 취업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나 선배들의 사회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그런 모임에서 자연스럽게 듣게 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을 때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허덕이며 학교생활을 해야했던 큰 이유가 결국 장애로 인한 체력의 문제였나 보다고 되물으니 그는 "휠체어장애우들도 대학생활 잘 하는 걸 보면 저는 할 말이 없죠"라며 애써 고개를 젓는다.

 

드넓기로 소문난 서울대 캠퍼스, 그런데 첫 해에는 멋모르고 원하는 강의대로 신청했다가 수업시간에 이리 저리 옮겨다니느라 아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강의실 봐가며 비슷한 건물에서 몰아서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강의계획을 짜게 됐다.

자연스럽게 자가운전에 대한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드려 봤지만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하셨다. 특히나 견인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수없는 교통사고를 목격하다 보니 더욱이 장애를 가진 아들의 운전을 몹시 반대하신 것이다. 물론 전셋집을 전전하는 가정형편도 말못할 반대이유가 됐을 것이다.

 

그러다 뜻하지 않게 광고출연을 하면서 갑자기 눈먼 돈이 생기자 그는 조금 더 당당하게 부모님께 운전에 대한 필요성을 설명하고 어렵게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 가기만 하면 오늘 집에 어떻게 가나, 하는 걱정을 하며 이년여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지칠대로 지쳐 쉴 겸 한 학기 휴학을 한 김에 운전을 배우고 언어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아는 친지의 주선으로 중고차를 한 대 마련할 수 있었다.

"운전을 하게 되니 의외로 아버지가 더 좋아하시더군요. 아무튼 차를 운전하고 다니게 되니까 강의도 원하는대로 들을 수 있고, 도서관에서 밤늦게까지 책 읽다가 열 권 정도씩 빌려서 레포트도 더 열심히 썼죠. 피로감도 덜 하고 가끔씩 친구들 태워주기도 하니까 전체적으로 생활하는 데 자신감이 더 생기더라구요. 지금도 왜 더 일찍 운전을 하지 않았을까 안타까울 뿐이에요."

 

덕분에 졸업까지 평균 비학점 이상을 유지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이제 취업이 문제였는데 그래도 졸업 당시 영한번역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모 벤처기업에 취업해 육 개월여 다니기도 했다. "아는 사람에게 거의 어거지로 떼를 써서" 취업한 거라고는 하지만 신문 사회면에 최초의 뇌성마비 장애우 입학생이었던 정훈기 군이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서울대 졸업을 맞았으며 극심한 취업난 속에 취업에까지 성공했다는 내용의 짤막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전문직도 아닌 일반 사무직이었고 수습 육개월을 거쳐야 해서 하루 종일 서류복사같은 잔심부름만 해댔다.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그는 당연히 그곳을 평생직장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그는 뇌성마비복지회에서 권유를 받아 일본에서 아시아지역 젊은 장애우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더십 연수프로그램에 참가, 일년간 연수를 마치고 왔다. 체류기간에 비해 비교적 뛰어난 일본어실력을 갖게 돼 귀국 후 일본책을 한 권 번역할 정도가 됐으니 그로서는 소득이 많은 연수였다.

 

"저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최근 그는 도전만이 희망이다 (현재출판사)라는 제목의 책도 한 권 냈다. 입학 후부터 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라는 측면을 강조하는 듯한 출판사들이 책을 한 번 내보지 않겠느냐는 요구가 심심치 않게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멀리뛰기 선수들처럼 앞으로의 도약을 위해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려고 뒷걸음치는 쳐 힘껏 도약하는 것처럼 지금,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은 훈기 씨 자신에게 늘 그래왔듯이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가 기어다니다 걷고 뛰고 하는 모든 과정이 다 도전이고,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이 도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 두려움은 없다. 물론 남들보다 더욱 더 도전하는 사람이어야만 했기에 그에겐 도전이 더욱 익숙한 것이 됐는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 산소 공급의 부족으로 뇌의 신경이 손상당했고, 숨도 쉬지 않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이는 네 시간만에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너 살이 되도록 걷지 못하고 말문을 떼지 않자 병원에 데려간 부모님은 아들 훈기가 뇌성마비장애라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됐다. 대부분의 장애 가정들이 그러하듯 그의 부모님도 그를 고쳐보겠다고 하다가 그나마 가지고 있던 재산도 많이 날리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한 쪽 다리가, 그리고 두 팔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아 그는 곱은 손에 볼펜을 끼워 필기하며 학교를 오갔다. 그래도 그의 부모님은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를 택했다.

"이런 말하면 웃으실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그런 말 했죠.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실은 저도 그랬어요. 학교에 가는 게 신났던 이유 중의 하나가 공부를 잘 하니 장애 여부를 떠나 선생님이나 주위 친구들의 인정도 받을 수 있었죠."

 

그러나 기억 속의 한 장면을 그는 결코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 성적이 반에서 이등이어서 그는 성적순으로 반장, 부반장이 결정됐던 관례에 따라 부반장이 됐다.

그가 부반장이 된 것을 못내 못마땅하게 생각하셨는지 담임선생님은 훈기 씨와 동점자가 있다는 사실을 며칠 후 알자마자 조회 시간에 훈기씨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그리고는 정말 부반장을 할 수 있겠는지를 재차 물어대는 것이었다. 부반장을 하느라 겪게 되는 육체적인 고단함을 거의 윽박지르듯이 설명하시면서 말이다.

그가 말없이 서 있는 동안 조회 시간이 길어져 아이들은 투덜거리기 시작하고 그는 결국 "포기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잔인하게도 선생님은 "안 들려, 큰 소리로" 라고 요구했고, 그는 다른 반 아이들 앞에서 다시 한 번 크게 말해야했다. "포기하겠습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 장애로 인해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그것도 자신의 입으로 크게 말하도록 한 선생님. 그는 지금도 아픔 없이 그 순간을 떠올릴 수 없다.

그런 그에게 "넌 공부밖에 없다. 그저 열심히만 공부하렴" 하고 주위에서는 위로, 아니 격려를 했다.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공부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던 학창시절, 다행히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또 문제를 풀어 답을 내고 그것이 맞았을 때 느끼는 재미와 희열이 있어 교과서도 잘 읽고 수업시간에 충실했다. 결국 수업료 때문이라도 서울대에 가야했는데 다행히 그곳을 지원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아시아지역 장애우리더십 연수생으로

 

그 동안 훈기 씨의 서울대 입학사례를 인간승리적인 관점으로 접근해 책을 내보지 않겠냐는 출판사의 제안을 재학시절 내내 꾸준히 들어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최근에 낸 그의 책 "도전만이 희망이다"는 일년간의 일본 연수기간 중 보고 배우고 느꼈던 것들을 정리한 것이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특히나 그 연수프로그램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이 안타까운 그로서는 젊은 후배 장애우들을 만나면 그 연수프로그램에 대해 매우 진지하게 설명하곤 했었는데 아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성장시켰는지에 대한 내용 뿐만 아니라 자신이 경험한 한국 사회의 장애현실은 어떠한지, 앞으로 장애우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눈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반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바를 모두 담았다.

 

그가 참여한 연수프로그램은 아태지역 장애우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는 부제가 달린 제일기 스킨리더십연수다.(http://www.narmanet.ne.jp/~duskin/english/index_e.html).

일본 더스킨기업이 세운 더스킨아이노와운동기금과 일본재활협회에서 아시아 지역의 이십오세 미만의 젊은 장애우들을 국가별로 한 명씩 선발, 일년 동안 체류하는 비용과 언어 및 일본 장애우복지기관에서의 연수비용을 지원하여 일본과 각국의 장애우복지에 대한 정보와 장단점을 연구, 교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자신들의 나라에 돌아가서 다음 세대 장애우복지현장을 이끌 젊은 리더로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다. 훈기 씨에 이어 한양대 서민수 (지체장애)학생도 연수를 받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이상하게도 지원자가 적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곳 직원들을 봤기에 그는 그 프로그램을 더 열심히 홍보하고 싶어진다.

 

나라별로 한 명씩 일괄적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치도록 해서 훈기 씨가 포함됐던 일기는 모두 다섯 명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온 휠체어장애우인 린탕, 미얀마에서 온 시각장애우 메이, 베트남에서 온 시각장애우 봔, 태국에서 온 청각장애우 무니브, 그리고 훈기 씨였다. 다들 서류검사를 거쳐 일본에서부터 각각의 나라로 면접하러 온 면접관들로부터 간단한 외국어테스트와 연수에 대한 계획과 포부 등이 포함된 구두심사를 마쳐 선발됐다. 훈기 씨는 면접을 위해 파워포인트까지 준비해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해 면접관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단다.

 

결국 그가 연수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케이비에스에서는 그의 연수과정을 촬영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구십구년 오월, 촬영팀과 함께 일본땅을 밟은 그는 처음 삼개월 동안은 전국신체장애우종합복지센와 국립재활센터 등지에서 생활하며 다른 연수생들과 함께 일본어 수업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막혔던 한자어읽기는 자막으로 나오는 야구선수들의 이름의 한자를 등판의 로마자와 비교하며 조금씩 익혀나가는등 그는 나름의 순발력으로 차근차근 일본어실력을 쌓아갔다.

 

일본어연수 과정 후 연수생들은 각각의 희망분야에 따라 장애우복지기관이나 시설에 배치돼 그 곳에서 연수를 받게 됐다. 그가 간 곳은 태양의 집이라는 장애우복지공장모델의 직업시설인데 그곳의 장애우들과 똑같이 일하면서 찬찬히 그들의 생활을 살피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됐다.

 

태양의 집에서 일하는 장애우들이 자립하는 방법은 이랬다. 먼저 태양의 집에 입소를 하면 훈련생 신분으로 태양의 집 안에 있는 소니태양이나 오므론태양같은 합작공장에서 일을 한다. 그리고 몇 년 뒤에 어느 정도 자격이 되면 태양의 집의 협력회사에서 치르는 사원 자격심사를 받는데 합격하면 정식사원이 된다. 사원은 훈련생의 몇 배가 넘는 월급을 받는데 그렇게 돈이 모이면 기숙사를 떠나 자신의 집을 얻어 독립된 생활을 하는 것이 그곳의 자립코스였다.

 

그러나 회사가 요구하는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몇 십년 동안 훈련생 조끼를 벗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가동한지 이십년이 넘은 생산라인에 사원은 달랑 한 명을 뽑았다는 협력회사도 있었다.

 

손기술이 있는 장애우들은 거의 다 사회로 빠져나가 뇌성마비나 척수손상같은 중증장애우들만 태양의 집에는 남아 있다는 것도 그 한 이유가 되긴 했다. 그런데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삼십년째 이차산업을 고집하고 있는지라 태양의 집은 근로장애우들의 고령화와 중증화로 작업능률이 많이 떨어져 최근 일감이 줄고 있다는 고민을 안고 있었다. 이삼십년 전 의지의 장애우들이 모여 일본 최초로 휠체어장애우 시의원을 배출하기도 했던 태양의 집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점차 장애우들의 공장이 아닌, 장애우 복지시설이 되어 가는 모습을 그는 안타깝게 지켜봤다.

 

그리고 처음에는 일본식 자립생활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혼란이 왔다. 훈기 씨 생각에는 자립이라고 하면 일을 통한 경제적 독립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수당을 받아 생활하는 구조라면 어차피 종속적인 삶을 사는 게 아닌가, 라고 생각됐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그리고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대다수의 중증장애우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장애연금을 요구하게 됐고 그것이 받아들여지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투쟁을 거쳤는지 일본의 장애우들은 설명해주려 애썼다.

 

장애연금을 받고 우리 나라의 유료 가정도우미제도와 같은 개호인제도를 통해 당당하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자신의 일상을 적절하게 꾸려나가는 일본 장애우들을 실제로 만나보면서 그도 조금씩 생각이 다듬어졌다. "우리 나라 같으면 집이나 시설 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일 일이급 중증장애우들이 마을에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보니 대단해 보이더군요. 특히나 정부를 상대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서 관철시켜나간 그 과정이 새삼 놀라웠죠."

"자기 의지대로 자율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연금으로 생활하든 개호서비스를 받든 자립생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던 일본 장애우들의 말을 이제 그는 그 말을 깊이 이해한다. 그래도 일을 하든, 자립생활을 하든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기에 충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본의 장애복지현장을 둘러 본 그의 결론이었다.

 

연수기간 중 특히 그가 나름대로 주안점을 두고 또 하나 배우고자 했던 것은 바로 수영이다. 이제껏 그가 한국에서 수영을 배우는 데에는 아픔이 있었으니 당장 장애우가 들어가면 안전사고에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출입을 막았고 들어가게는 하더라도 강습을 받겠다고 하면 수익성 운운하면서 비싼 개인 교습을 받으라고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일본에서라도 수영을 배울 욕심에 "수영을 배우는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이며, 건강관리방법에 대한 연수"라는 나름의 의미를 들어 연수프로그램에 수영이 포함되도록 애썼다.

 

결국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지역 스포츠센터에서 지도강사를 대동해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동행하는 보호자의 입장료는 무료이고, 장애우가 들어간 레인은 그 즉시 장애우전용레인으로 바뀌어 남의 방해를 덜 받으면서 수영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안간힘을 쓰며 평형을 시도하는 그를 보고 누군가 배형을 권했고, 결국 배형으로 이십오미터를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누가 안 된다고 했어? 배형은 되잖아..." 누구를 향해서랄 것 없이 비죽 이 말을 내뱉게 되던 순간 그의 눈에는 눈물이 솟았다.

 

"장애우를 위해 일하고 싶어요"

 

그는 책을 낸 것이 이 연수프로그램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다는 의미 외에 이제까지 주위에서 부추기는 바람에 스스로 조금 갖고 있었는지도 모를 엘리트의식같은 것들을 모두 쏟아내 말갛게 비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과 장애우복지현실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는 그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단다. "보수가 박한 것"은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슬쩍 떠봤지만 괜찮다고, 장애관련 기관에서 처음부터 배우는 기분으로 일하고 싶다고도 했다.

 

서울대를 졸업한 그가 결국 전공분야도 아니고 세속적으로 영광의 길도 아닌 장애관련 기관에서 일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 물론 일본에서의 연수경험이 넉넉한 자양분이 되기도 했겠지만 - 물론 반가운 마음도 한 편으로 없지는 않지만 복잡한 심경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흔히 소수의 선택받은 장애우들이 같은 장애우들에게 갖는 소명의식이랄까, 그 비슷한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을 많이 목격해왔던지라 훈기 씨의 앞날을 주목하게 되리라고 예감한다.

 

그 동안 영어능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절감했기에 요즘은 모자란 영어공부를 하며 앞날에 대한 이런 저런 구상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는 지금의 현실이 몹시 막막하긴 하다. 장남으로서 또 나이 서른을 앞두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집에서 노는 것이 괴로운 이유는 남다른 그의 경험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기 중에는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놀았지만 방학 때까지 그를 불러내 함께 놀아주는 친구들은 없었다.

 

온 종일 집안에만 있어야 했던 방학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단다. 그런데 지금 어찌 보면 그런 지겨운 방학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는 인터뷰를 많이 당하면서 앞으로의 계획같은 것을 물으면 기자의 눈치에 맞춰 그럴싸하게 지어서 한 마디 해주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제 그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주위의 눈에 휩쓸리지 않는다"는 삶의 원칙을 지난 경험에서 체득했기 때문이다.

 

훈기 씨는 실은 고등학교 졸업하던 첫 해에는 서울대에 지원해 쓴잔을 마신 적이 있다. 그러나 후기대학을 정할 때 남들처럼 성적만을 놓고 마음대로 지원하지 못했다. 장애우인 자신이 지원하면 받아줄 것인지의 여부를 대학마다 일일이 알아봐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것이 K대. 일반적인 후기명문대가 아니어서인지 거기서 과수석을 했다.

 

그러다 "그냥 다닌다면 계속 미련이 남을 것 같아" 한 학기 지나서 그는 다시 대학입시에 도전을 했고 다행히 두 번째 지원에는 서울대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는 "그냥 K대에 계속 다닐 걸 그랬어요" 한다. 그의 말대로 잘못된 자의식을 탈탈 비우고 자신을 마주했던 시간을 가지면서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아닐까 대견하면서도 "자랑스러운" 그의 학벌이 한편으로는 가볍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돼 왔던 것이 떠올라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기자로서는 그저 "그래도 역사에 이름이 남지 않았느냐" 라고 말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글 한혜영 객원기자

작성자한혜영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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