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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사람] 자유이주민연합회 장인숙 회장

"자유이주민을 아십니까?"

본문

 

 이번 만난 사람을 준비하면서 기자는 같은 한반도에서 살다 여러 상황들로 인해 한국에 정착한, 어깨를 한번쯤 스쳤을지 모르는 이들의 삶에 무지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자유이주민들은 어떻게 보면 지금껏 살아왔던 체제와 상반된 생활방식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또 다른 모습의 약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자유이주민연합회 장인숙 회장과 나눈 이야기를 통해 말투가 다르다고, 이 사회의 생존방식에 익숙하지 않다고,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하고 있는 자유이주민의 속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면 한다.

 

▲교육복지연구원이관식에참여한장회장

설문조사 통해  "자유이주민"으로 호칭 결정

 

- 우리는 보통 탈북자라는 표현에 익숙한데, 자유이주민이라는 단어가 탈북자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나요?

"기존에 활동하던 통일준비여성회, 기독자유이주민회, 교원협회, 평화축구단, 자유인동호회가 모여 2001년 12월에 자유이주민연합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연합회를 준비하면서 인터넷과 여러 언론매체의 도움으로 호칭에 대한 설문조사도 병행했지요. 탈영, 탈옥 등 탈자가 들어간 단어가 갖는 부정적인 의미도 고려하고, 우리의 호칭문제는 우리가 결정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도 많았고요. 지금까지는 귀순용사나 월남용사처럼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호칭이 정해진 측면도 많잖아요? 설문조사 결과 북한이주민과 자유이주민으로 하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우리가 왜 북한이주민이라고 하지 않고 자유이주민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는가 하면, 남한도 동서간 갈등이 심한데 거기에 또 남북처럼 지역을 나타내는 단어를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또 북한에서 온 아이들을 보면 꽃제비가 아닌가,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간첩이 아닌가 생각하는 일부 시민들도 있잖아요? 이렇듯 북한 사람들을 이방인 대하듯 하는데 대한민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듯이 우리도 미수복 지역의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그곳이 자유를 억압하기 때문에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왔거든요.

이런 논의과정을 거쳐 자유이주민으로 호칭을 변경하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했는데, 국회 본회의가 열리지 않아 호칭을 바꾸는 일이 미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 우리가 먼저 강연이나 원고에서 우리를 자유이주민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 그럼 장 회장님께서는 창립 초기부터 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셨습니까?

"예. 이전에 저는 진달래회라는 곳에서 활동했거든요. 진달래회는 얼마 전 작고하신 이우정 선생님께서 이사장으로 계셨던 평화를 여는 여성회 내의 한 개 팀으로 발족해 활동하다가 통일준비여성회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저는 그 통일준비여성회의 회장을 맡았었는데 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연합회에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정착 후 북한에서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아 어려움 겪기도 해

 

- 장 회장님은 언제 한국에 오셨습니까?

"97년 9월에 왔습니다. 저는 아들만 넷인데, 큰아들이 소련에 유학 갔다가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될 때 북한으로 오지 않고 한국에 왔거든요. 그 바람에 평양에서 살고 있던 우리 가족은 큰아들이 서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평양에서 추방당해 함경북도에 있는 탄광에서 7년 동안 감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큰아들과 연락이 닿아서 가족이 함께 오게 됐지요. 가족이 함께 온 첫 번째 경우여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어요. 지금은 가족들이 함께 오는 예가 많지만 그때는 드물었거든요. 독일 유학을 다녀 온 후 장교로 근무하던 둘째아들은 큰아들 때문에 제대하고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둘째 아들이 함께 오지 못했는데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지 연락이 닿지 않아요. 지금은 큰아들이 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전투비행기 조종사였던 셋째는 큰형을 돕느라 함께 있습니다."

 

- 막내 아드님은 여기에서 고등학교부터 다녔겠네요?

"아니지요. 지금 나이가 서른 살인데 거기에서 철도대학을 졸업하고 왔어요. 북한 대학은 6년제 거든요. 통일부 장관이 대학을 졸업했다는 인정은 해주지만 북한 대학의 졸업장을 가지고는 한국에 있는 기업에 취직하기가 어렵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진과 컴퓨터를 배운 다음, 다시 대학에 들어갔어요. 지금 3학년입니다."

 

- 장 회장님께서 풍부한 현장 경험을 가지신 토목기사이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북한의 대학 졸업장이나 경험과 연륜이 한국에서의 생활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나 보네요.

"교량이나 건축물을 설계했고, 평양에서 30년 이상 살았기 때문에 평양 시가지에 대해서는 훤하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한국에 온 2000명 이상의 자유이주민 가운데 건축기사가 한 분 계시고 토목기술자는 저 하나뿐이어서 개인의 능력만 충분하다면 다른 부분들은 보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학회나 전문가 집단에서 인터뷰나 강연 요청도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몇 마디 물어본 후에는 그들 편의대로 제가 이야기한 내용을 짜맞추어 그들 필요한대로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어요.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없는가 싶어 많은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표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잊혀지는 것이지요.

제 자신도 사람들이 보여준 행동 때문에 실망한 적이 많았지만, 먼저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필요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한국에 온 지 2-3년까지만 해도 불평불만이 적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한국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만 하더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회원들과도 우리가 지금까지 한국을 위해 기여한 것이 없으니까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곤 합니다."

 

북한이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혹시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것은 없었습니까?

"무엇보다 복잡한 구조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한 언론이 보여주는 사회의 모습도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예를 들어 회의 도중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기도 하고 신문을 읽거나 전화를 받는 등 절제되지 않은 모습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북한에서는 모자를 비뚤게 쓰는 것도 용납되지 않거든요. 뱃지도 잘못 달면 안 되지요. 이런 절제된 규율덕분에 지금껏 북한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적인 기준에 의해 평가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시대에는 얼마나 살기가 힘들었는가? 그런데 지금은 경제가 많이 나아지지 않았는가하는 식으로 평가하거든요. 그러나 이제는 기준을 수평에 놓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비교해 북한 주민의 현실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일반대중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저희도 시대 변화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요."

 

- 고르바초프 이후 개혁과 개방을 가속화하고 있는 러시아와 개방정책을 실시해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있는 중국 등 주변국가의 상황변화도 북한의 집권층에게 많은 부담으로 작용할 것 같은데요.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될 때 김정일이 사회주의는 과학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동구 공산권 국가들이 붕괴된 것은 유능한 지도자와 탁월한 이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북한을 떠나 중국 등 다른 나라를 통해 한국으로 오는 자유이주민의 숫자가 계속 증가하는 것이 김정일이 발표한 논문이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아니겠어요?

한편 북한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한 명의 반역자가 나오면 삼대에 걸쳐 압력을 받고 연대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가족을 생각한다면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지요. 그리고 별장이 주어지고 운전사가 딸린 차가 제공되는 등 김정일 측근들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점도 체제 유지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김정일 체제가 위협받는 것은 곧 자신들의 생활이 위협받는 것과 직결된다고 생각해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거든요. 그렇지만 어쨌든 근래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더라도 북한이 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장애우들은 평양에서 살 수 없어

 

- 장애를 가진 사람이 평양에서 사는 것은 어떻습니까?

"평양에는 장애우가 한 명도 없습니다. 평양에 있는 장애우들은 지방으로 모두 추방을 시킵니다.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조치지요."

 

- 그렇다면 군대에서 복무하다가 다치거나 일하다가 다치는 경우에는요?

"군대에서 다친 영예군인이나 교통사고로 팔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평양에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체장애우나 시각장애우들은 평양 근처 승호구역이라는 주변구역에서 집단적으로 거주하지요. 예전에 승호구역으로 농촌동원을 간 적이 있었는데요. 아, 이곳이 시각장애우들이 일하는 곳인가 보다하고 시각장애우들이 일하는 곳을 지나가면, 거기에서 일하는 시각장애우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보통 발걸음 속도보다 느려지니까 뭘 봐? 여기가 동물원인 줄 알아? 가라 야.라고 말하더군요. 이들은 새끼를 꼬거나 수공예품을 만들어 생활하고 식량은 국가에서 배급하지요. 시설은 아니고 자신들의 집에서 사는 집단 거주촌인 셈인데 시내에는 절대 나오지 못한답니다. 평양은 나라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애우가 살 수 없다고 말합니다."

 

- 평양에서 사는 당 간부의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되는 경우에도 아이와 함께 가족도 평양을 떠나야 하나요?

"그럴 경우 지방에 가면 그곳에서 간부를 할 수 있지요. 정무원에서 근무했던 어떤 사람은 아이가 척추장애를 갖게 되어 평양을 떠나 군 단위의 높은 지위로 부임했습니다."

 

- 그렇다면 장애아동을 위한 특수학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시각장애아동을 위한 학교나 청각장애우를 위한 학교는 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있습니다. 평양에는 장애아동이 없기 때문에 물론 특수학교도 없고요."

 

가족들과 함께 온 아이들에 대한 대책 마련 시급

 

- 요즈음 초등학교에서 왕따 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기도 하는데 어린 나이에 온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기가 어떻습니까?

"많이 힘듭니다. 대부분의 자유이주민들은 2, 3년, 많게는 5, 6년 이상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고생한 다음에 한국에 오거든요. 이 기간 동안 가족들 함께 온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학교에 들어가면 동생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교육내용도 달라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다가 일부 교사들은 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왔다는 것을 노출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북한 아이들은 꽃제비라면서? 너도 꽃제비야?" 이렇게 놀려서 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원에 많이 다닙니다.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같은 반 아이들이 꽃제비라고 놀리니까 이 아이도 화가 나서 따지다가 싸움을 했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싸움을 한 두 아이를 함께 벌을 줬거든요. 그러면 안되잖아요? 교사가 북한에서 온 아이를 꽃제비라고 놀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했다고 같이 벌을 세웠거든요. 그때부터 이 아이가 학교를 안 갔어요."

 

- 교사의 인식에도 문제가 있고, 이 아이들을 위한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연합회로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지도하는 자원활동을 하는 대학생들이 옵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운 가족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학원을 가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부족한 공부를 보충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자유이주민, 사회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있을 때 사회정착 가능해

 

- 자유이주민의 숫자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장 회장님을 비롯해 연합회 차원에서 이들을 어떻게 지원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리고 이를 위해 정부와 사회는 어떤 방법으로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자유이주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또 다른 차별을 경험할 가능성이 많지 않습니까?

"저는 회원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자세를 바로 갖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으로 시작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도 물론 있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더 큽니다. 제 자신만 보더라도 나의 부모형제가 나 때문에 쫓겨다니는 꿈을 많이 꿉니다. 마음이 항상 불안하지요. 나 혼자 밥을 먹고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이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말할 수 없이 외롭거든요. 길이 막혀 꼼짝할 수 없는 추석이나 설에 고향 간다는 사람들을 보면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우리는 동창회나 그런 모임들도 없으니까요. 그래서 연합회를 만들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자유이주민들 간의 다양한 만남의 자리를 마련하고, 오늘과 같은 기회를 통해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만남도 갖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 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한 부분이잖아요? 뿐만 아니라 한국에 막 정착하기 시작한 사람들을 방문하여 상담하기도 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러 이들이 연합회에 찾아오기도 합니다.

불평불만만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자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도와주는 분들도 신명이 나서 함께 할 수 있을테니까요. 이와 함께 자유이주민들이 한국 사회의 당당한 주체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말투가 다르고 이곳의 생활방식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협한 시선도 변화되었으면 합니다."

 

 

대담 김정열 편집주간/ 사진 · 정리 이수지 기자 


 

작성자이수지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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