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긴 겨울 지나 내 인생은 지금, 봄날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긴 겨울 지나 내 인생은 지금, 봄날

금춘가족 만드는 근이양증장애우 권오웅 씨

본문

  안동에 가던 날은 봄이었다. 열어놓은 버스 유리창으로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과 따스한 볕에 고스란히 몸을 맡겨본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향내가 참 좋다. 무릇 봄이란 눈이 먼저 주워담기보다는 섬세한 우리의 살갗이 먼저 짐작하는 것인가보다.
온 우주의 생명체들이 그 부드러운 햇살과 바람 속에 생명의 씨앗을 여는 계절 봄. 오늘 내가 만나러 가는 권오웅 씨는 더 이상 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말못하시는 아버지와 근육병을 앓다 돌아가신 어머니, 진행성 근이양증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형님과 자신, 그리고 가난. 이 정도의 이력만 들어도 그에게 봄날이 쉽게 찾아오지 않았을 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이는 지금 이 순간이 분명 봄날인 사람이다. 긴 겨울을 지내고 봄날을 맞은 권오응 씨를 만나보았다.

 

금춘가족 만들기 6년,

금춘가족들과 나누는 희망 이야기

권오웅 씨 집 앞에는 명패대신 금춘가족이라는 큼지막한 현판이 달려 있다. 금춘가족 그이가 6년 동안 만들어온 소식지 이름이다. 그리고 봄을 맞은 그이의 삶을 말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금춘가족들과나누는희망이야기
1996년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 기성이의 가족신문만들기 숙제가 금춘가족의 시작이 되었다. 처음 가족신문을 만들 때만 해도 아들의 숙제를 도와보자는 소박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만들다보니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고, 기왕 만드는 거 한번 잘 만들어보자로 생각이 바뀌어 갔다. 무엇을 하나 생각하면 별로 망설임 없이 실행하는 성격인 데다가 컴퓨터자격증이 서너 개나 되고 초등학교 특별활동시간에 컴퓨터를 가르칠 만큼 컴도사였던 그이는 밤새워 가족신문을 만들었고 그렇게 혼자 금춘가족을 꾸려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런데 두 번, 세 번 회를 거듭해 가족 신문을 만들어 내면서 그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금춘가족 속에서 자신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장애를 가진 이웃들과 정말로 가족이 돼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다행스럽게도 그이와 뜻을 같이하는 장애우들과 비장애우들이 금춘가족이 되기를 자처했고, 그렇게 새로운 공동체가 태어났다.

"금춘 가족은 말 그대로 지금은 봄날. 즉 하루 하루를 늘 봄날처럼 즐겁게 꿈을 가지고 행복을 가꾸며 살아가는 가족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근육의 힘이 조금씩 빠지면서 마비되어 가는 장애를 가지고 있기에 말로는 다 못하는 장애우들의 고단한 삶을 잘 알고 있어요. 저를 비롯한 장애를 가진 분들과 함께 희망을 나누고 싶었던 거죠."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이는 식구욕심이 많은 가장처럼 금춘가족을 한호 한호 만들면서 착실히도 가족을 불려왔다. 애초의 목적이 가족 수를 늘리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234명이라는 식구들이 그이와 함께 봄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춥고 긴 겨울날들

그이는 1960년 봄날, 말 못하는 아버지와 근육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동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산속마을에서 소작토지 몇뙤기로 겨우 삶을 연명했던 집안살림 탓에 어린시절부터 가난을 몸에 익히고 보리밥에 감자수제비 한번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자랐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한 불행의 그림자가 찾아온 건 그이가 열 살 되던 해였다. 한평생 가난에 찌들어 고생만 하셨던 어머니가 병원은커녕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리고 4년 후 어머니의 빈자리를 대신해 주던 누나마저 그의 곁을 떠났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어머니가 아파 누우시면서부터 전혀 움직이질 못하셨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는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서 어떤 병인지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근육장애를 가지고 있으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그렇게 어머니가 세상 떠나고 4년 후에 누나도 급성신장염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다같이 배고팠던 그 시절에 멀리 떨어진 학교를 다니던 내가 배고플까봐 자기 몫의 삶은 감자를 기꺼이 내주던 따뜻한 누나였는데 그렇게 제 마음속에 묻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누나를 먼저 제 세상으로 보내면서 그이는 두 사람이 다 하지 못한 몫까지 열심히 살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그 무렵 그의 삶은 산에 사는 철쭉과도 같았다. 산에 사는 철쭉은 제 키보다 몇 곱이나 되는 큰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탓에 키를 높이 뻗어 볕을 쬐면서 살아남는다고 하지 않던가. 딱히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던 그 역시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학교에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이를 부지런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손수 밥을 끓여먹으며 이십리나 떨어진 중학교를 힘든 줄도 모르고 다니면서 영어단어들을 암기하고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풀어 선생님들의 칭찬을 한 몸에 받았던 그다. 학교가 파하면 숙제할 시간도 없이 들로 나가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불평 한번 해보지 않았다.

이쯤에서 그이가 견뎌야할 겨울날이 끝났으면 좋으련만 이번엔 그의 몸에 진행성 근육디스트로피라는 장애가 찾아왔다.

"중학교 2학년 되던 봄날이었어요.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축구를 하다가 땀을 식히려 쉬고 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다가와서 내 교복 벗을 팔을 보면서 웅아, 너는 왜 여기가 더 작니?하고 묻더라구요.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내 오른쪽 팔이 왼쪽보다 작아져 있더라구요. 그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는지 하늘이 빙빙 도는 것 같았어요. 이미 형님은 그 당시 걷는 모습이 좀 불편해 보일 정도로 근육장애가 진행되어 있었거든요. 그렇게 날이 갈수록 근육세포가 파괴되어 급기야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니 덜컥 겁이 나더라구요. 오로지 죽는 것만이 그 모든 걸 해결해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세상구경이나 좀 해보고 죽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떠났죠."

그 해 늦은 봄, 그이는 그렇게 가족들 곁을 떠나왔다.

 

죽기로 결심하고 철로길로 마냥 걷기도 해

죽음을 생각하며 집을 떠나온 그이는 안동, 춘천, 삼척, 서울 등지를 떠돌면서 중국집 배달원에서 가구점, 제과점, 신문팔이, 버스 계수원 등 그이는 안 해본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그렇게 3년 가깝게 떠돌이로 살아왔다. 가슴 한 쪽엔 지워지지 않는 한이 늘 똬리를 틀 듯 아로새겨져 있었고, 또 다른 한구석에 박혀 있는 삶에 대한 애착은 늘 바람처럼 쉼없이 떠돌게 했다. 참으로 굴곡 많고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농사는 것만 보고자란 탓인지 몸으로 일하지 않으면 살길이 없다는 생각에 집에서 나와 바로 안동에 있는 식당, 가구점에서 일을 했어요. 그땐 음식배달통이며, 장롱이나 가구들을 싣고 자전거를 타고 다닐 만큼 힘도 썼죠. 그곳에서 일하면서 돈도 좀 모으긴 했는데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 자면서 일을 하다보니 몸이 많이 안좋아지더라구요. 죽기 전에 바다나 한번 보자는 생각이 들어 그때까지 모아놓은 돈을 가지고 삼척으로 떠났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마음은 항상 몸이 좀 못해질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면서도 또 그만큼의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해지는 거예요.

삼척에서도 결국 죽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하다가 춘천 조양동에 있는 제과점에 취직을 했지요.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제빵기술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열심히 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이의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왔다. 그이가 일하던 제과점은 3층에서 빵을 만들면, 하루에 두번씩 쟁반에 가지런히 담아 1층에 있는 가게로 가지고 내려왔다. 매일같이 빵을 만들고 그 일을 했었는데 5개월쯤 지난 어느 날인가 쟁반에 빵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손에 힘이 빠지면서 쟁반을 떨어뜨린 것이다. 잘 부푼 빵들은 모두 바닥에 쏟아졌고 더 이상은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너무 속상한 마음에 그냥 뛰쳐나와버렸다. 그리고 또 다시 생각했다. 벌어놓은 돈으로 서울 구경이나 하고 죽자고.

"제과점에서 일하면서 모아둔 2만원을 가지고 무조건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 주변에 여인숙방을 하나 얻었어요. 그리고 라디오를 하나 샀지요. 살아있는 며칠동안이라도 세상소식을 듣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의 그런 행동들은 살고 싶다는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 후 100원짜리 공기밥이나 70원짜리 수제비로 끼니를 이으면서 며칠동안 걸어서 서울 구경을 다녔지요. 그리고 주머니에 남아있던 마지막 40원으로 경춘선에 있는 평내역까지 차표를 끊었어요. 춘천에서 기차 타고 서울로 오면서 보니 기차길에 터널이 많더라구요. 기차터널에서 죽어버리자고 마음을 먹고 평내역에서 내려서 무조건 철길을 타고 서울쪽으로 걸어가면서 터널을 찾았죠.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터널 속에서 기차를 만나면 무조건 죽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터널 안에 들어가니 옆에 기차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은 거예요.

그렇게 걸어서 퇴계원쯤 왔는데 그때는 정말 굉장히 긴 철교가 있더라구요. 그 시간쯤이면 열차가 올 시간도 됐다 싶어서 거기서 결심을 했죠. 철교를 건널 때까지 기차가 오면 죽는 거고, 그걸 무사히 넘기면 열심히 살아보겠노라고 살려고 그랬는지 지친 상태로 느릿느릿 걸었는데도 철교를 다 건널 때까지 열차가 오질 않았어요. 새벽까지 걸어 다시 서울로 돌아왔지요."

 

버스계수원하면서 누명쓰고 몰매 맞기도

서울로 돌아온 그이는 시장 근처에서 썩은 과일을 주워먹고 밤에는 짐꾼들이 세워둔 리어카 틈 속에서 자면서 며칠을 지내다가 방범대원 눈에 뜨여 종로6가 파출소로 잡혀갔다.

 파출소에서 이런저런 사정 얘기를 했더니 경찰관들이 안쓰러웠던지 하루에 천원씩 줄 테니 돌아다니면서 나쁜 짓 하는 사람 있으면 와서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그 당시엔 잘은 몰랐지만 지금생각해보니 어른들이 흔히 말하던 형사잡이였던 것 같다고 그이는 기억을 더듬었다. 한동안 그 일을 하면서 종로거리에 있는 앵벌이들의 거처를 알아내 파출소에 얘기하겠다는 욕심에 그들을 따라가 며칠동안 고생만 하고 어렵게 도망을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파출소에서 일하다가 버스를 타기만 하면 월급을 준다고 하기에 버스회사로 찾아갔어요. 그때 처음 간 곳이 휘경동에 있는 삼흥운수였는데 교통량 조사원이라고 흔히 계수원이라고 하는 일이었어요. 쪽지하나 주면 정류장마다 내리고 타는 사람 수를 적는 일이었는데 궁극적으로는 운전사와 버스 안내양이 몰래 돈을 빼돌리는 일을 감시하는 게 제 일이었어요. 1년 가까이 그 일을 하면서 서울시내는 다 돌아다녀서 지금도 서울의 전체적인 윤곽은 잊어버려지질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운수회사 간부들이 계수원들을 모아놓고 일체점검을 할테니 가지고 있는 돈이나 소지품들을 모두 간부들에게 맡겨 놓으라고 하더라구요.

계수원하면서 1500원 모아놓은 게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맡겨놓으면 돌려 받을 수 없을 것 같아 맡기질 않았죠. 그런데 며칠 후에 정말 주머니부터 옷을 샅샅이 검사를 하는 거예요. 내 몸에서 1500원이 나오니까 처음에는 안내양하고 짜고 빼돌린 거라고 누명을 씌웠어요. 그런데 안내양들한테 다 알아보고 돈을 맞추어봐도 제가 빼돌린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지니까 나중엔 같이 일하는 계수원 친구의 돈을 훔친 거라고 누명을 씌우더라구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난로 피우던 연탄집게로 때리고, 연탄재를 집어던지고, 정신을 잃으니까 찬물을 끼얹기까지 어차피 죽으러 다녔으니 그냥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더라구요. 결국에는 그 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허위로 자백서 쓰고 쓰러졌지요. 그렇게 일주일 후에 몸을 좀 추스르고나서 버스 계수원을 그만뒀어요."

3년 동안 객지에서 일자리를 옮기며 사는 동안 그이 몸의 근육세포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떨어져 나갔다. 오른팔이 얇아지고, 왼팔이 얇아지고 가슴팍의 근육까지 자꾸만 빠져나갔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이는 3년만에 시골집에 편지를 썼는데 막내여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그때 생각했다. 차마 삶을 포기할 수 없다면, 막연히 자유를 찾아 떠돌아다닐게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삶의 터전을 가꾸어야겠다고.

 

잡지에 실린 권오웅 씨의 영농수기 읽고 무작정 찾아온 한 여자

돌아온 집에서 그이를 맞아준 건 10년은 더 늙어버린 것 같은 말 못하는 아버지와 장애가 심해져 걷지 못하는 형, 그리고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도 그만두고 끼니를 걱정하는 열세살된 여동생과 가난뿐이었다.

그때부터 그이는 아버지를 도와 악착같이 농사일에 매달렸다. 고추를 따고 누에를 치며 참깨를 수확했다. 밤을 새워 고행의 토질에 맞고 수익성 높은 작물이 어떤 것인지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작물실험재배도 하면서 수확량을 늘려갔다. 그렇게 농사에 매달리기 3년, 그이의 참깨밭에서는 말 그대로 참깨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참깨 농사는 그이이게 봄날을 가져다 주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느낀 경험과 당시 심경을 그대로 적어 참깨가 쏟아지는 땅이라는 제목으로 새농민이라는 잡지에 보냈는데 그 글이 잡지에 실리게 됐어요. 그 글을 쓸 무렵 이 글로 인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정말 그 글이 인연이 돼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됐어요."

아내 이화숙 씨는 그때 경주에서 살면서 집안의 살림을 돕고 있는 수물두살된 처녀였다. 그런데 우연히 새농민지에서 그이의 글을 읽게 되었고, 무작정 짐을 싸서 안동으로 찾아온 것이다. 어떻게 얼굴한번 보지 못한 사람과 함께 살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아내 이화숙 씨의 이야기는 이렇다.

"지금 생각해도 이상해요. 이 사람이 쓴 글을 읽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서는 저보고 따라오라고 하는 거예요, 산길을 따라 한참을 갔더니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는데 그리로 들어가라고 자꾸 손짓을 하더라구요. 꿈에서 깨어나서도 한참 생각을 했어요.

마침 잡지를 다시 펼치니 이 사람이 쓴 글이 보이지 뭐예요. 다시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한테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바로 나라는 생각으로 무조건 보따리 싸서 나왔죠."

 참 말이 쉽다. 처녀가 얼굴 한번 보지 않은 남자에게 시집가기로 마음먹고 집을 훌쩍 떠나기가 어찌 이리도 간단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튼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집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동네 아저씨가 아버지한테 빌린 돈이라며 10만원을 주고 갔고, 그 돈으로 차표를 꾾어 화숙 씨는 권오웅 씨를 찾아왔다.

 

아내는 나에게 봄을 가져다 준 사람

그이는 그 무렵, 형과 함께 읍내에서 시작한 신발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누가 찾아왔다는 전화를 받고 고등어 한손을 사가지고 왔는데 통 못 보던 젊은 여자가 동생과 함께 자기 집인 양 메주를 만들어 메달고 있지 않은가.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이화숙이라는 여자가 들이닥친 거예요. 처음엔 그저 돌려보낼 생각에 설득 많이 했어요. 그래도 절대로 가지 않겠다고 해서 그럼 일주일만 살아보고 결정하라고 했죠. 그때 제 생각엔 일주일 지내고 나면 집에 가지 말라고 말려도 집으로 가겠지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안가겠다는 거예요. 덕분에 저는 연애한번 재대로 못해보고 졸지에 장가들게 된 거죠. 결혼 하기 전에 장모님이 아내를 데리러 오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어떻게든 다시 도망 나와 나에게로 오는데 어떻게 마다합니까? 죽자살자 같이 살자고 해서 얼결에 결혼하게 된 거지, 이 여자가 첫눈에 좋았다는 건 아닙니다."

 이 대목은 두고두고 권오웅 씨가 큰소리 치는 것 중의 하나다. 옆에 있던 아내 역시 이 부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굳이 누가 먼저 사랑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다. 그이 역시 아내가 자신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던 희망이라는 씨앗에 물을 주고 정성으로 가꿔준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집안에 여자가 있다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하는 걸 결혼하면서 알게됐어요. 아내의 손길이 닿는 곳은 거짓말처럼 환해지는 걸 느꼈거든요. 아내가 얼마나 알뜰한지 결혼식 축의금으로 농약 치는 기계를 살 정도였어요. 이 사람 만나기 전까지 제 인생이 겨울이었다면, 이 사람이 저에게로 온 다음부터 제 인생의 봄날이 시작된 거라고 봐요. 조금씩 약해지는 근육 때문에 농사도 점점 힘에 부치고 나 하나만 바라보는 식구들 때문에 많이 지친 상태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오고나서부터 희망이 보이더라구요. 가난에서 벗어나 생활에 안정을 찾은 것도 그렇고, 큰딸 선예를 아들 기성이를 낳아 차츰 미래를 꿈꾸게 됐어요. 이 사람하고 사는 동안 내 인생은 항상 봄날에 머물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이가 금춘가족 이라는 이름으로 세상 사람들과 함께 희망을 나눌 수 있게 토양을 만든 건 바로 아내 이화숙 씨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둡고 추운 겨울의 밑바닥에 있던 그이에게 봄을 가져다준 장본인 아니던가.

그런 귀한 아내를 한순간에 잃어버릴 뻔한 일이 있었다. 구인사에 불공을 드리러 가던 차가 사고가 난 것이다. 일행 12명중 9명이 사망하고 아내를 포함한 세명만이 살아남은 큰 사고였다. 열달동안 병원에서 아내를 간호하면서 새삼 그이는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가 없으니까 집안이 온통 아수라장이 돼버리더라구요. 텃밭의 호박은 썩어버리고 아이들은 수두에 걸려 사경을 헤매고 모든게 뒤죽박죽 이었어요. 이 사람이 없으면 못살겠구나 싶었죠."

 아내가 조금씩 건강을 회복할 무렵, 그이는 병상에서 미미의 봄이라는 동화를 써 곰두리문학상에 당선되는 것과 동시에 장애인기능경기대회에서 컴퓨터프로그래밍부문 금매달을 수상해 아내에게 기쁨을 선물했다.

혼인한지 20년. 부부는 요즘 제2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형님이 늦게나마 결혼을 해 분가하면서 아버님도 형님댁으로 거처를 옮기셨고, 아이들은 학교 때문에 안동 시내로 나가있기 때문이다.

권오웅 씨는 여전히 바쁘게 산다. 워낙 호기심 많은 성격이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까닭이다. 집에 딸려 있는 작은 오락실에서 아이들에게 동전을 바꾸어주는 일, 가끔씩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도장을 새겨주는 일, 동네 아이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일, 금춘가족들을 돌보며 소식지를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이 그의 하루 일과 속에 담겨 있다.

 

누군가가 그랬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장미는 가장 춥고 가장 어두운 시간인 자정에서 새벽 2시 사이에 가장 향기로운 향을 뿜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인생의 향기도 가장 극심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중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절망과 고통의 겨울에 있을 때 비로소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꿈꾸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돌아오는 고속버스에서 그이 부부가 출출할 때 먹으라며 싸준 쑥떡 봉지를 열어보았다. 쑥의 쌉쌀음한 향내가 코끝에 퍼져온다. 그이 부부는 나에게도 그렇게 꿈같이 달콤한 봄날을 건네주었다

 

 

 

 

 

글 · 사진 이나라 기자(n2906@hanmail.net)

작성자이나라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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