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이야기] "부모들만이 자식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 세상, 한 걸음


[사람사는 이야기] "부모들만이 자식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장애인부모회 사무국장 권유상

본문

발달장애를 가진 석범이의 아버지 권유상씨는 한국장애인부모회 사무국장이다. 장애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권유상 씨는 자기 자녀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장애우가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모운동을 모색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발달장애, 흔히 자폐증이라고 부르는 장애를 가진 올해 열 일곱 살인 석범이 아버지는 권유상 씨다. 권유상 씨가 누구냐고? 한국장애인부모회 사무국장이다. 그래도 낯설다면, 근자에 있은 장애우들의 집회를 떠올리면 된다. 밀알학교, 정애학교, 직업재활법 제정 시위, 그리고 엘피지 연료의 정부 지원 촉구 시위까지 마이크를 잡고 앞에서 선동한 이가 바로 그이다.

▲권유상씨
그이는 장애우 부모로서 태생적인 아픔을 갖고 살고 있단다. 그래서 장애우 권익을 위한 집회에 참석하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진단다. 그것 뿐, 자신은 투사이기보다는 부모의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을 뿐이라고 그이는 말하지만 사람들 눈에 비쳐진, 사자후를 토하는 그이는 영락없는 투사다.

그런데 그이가 앞장서서 목소리를 높인 덕분에 생긴 변화가 하나 있다. 바로 장애계에서 보수적으로만 비쳐지던 장애우부모회가 진보적인 단체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부모회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얘기지만, 그 동안 외국의 장애우 부모들에 비해 우리 나라의 부모들은 너무 점잖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흔히 듣는 얘기가 선진국의 장애우 복지는 부모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부모들이 악을 쓰면서 정부를 상대로 싸워 자녀들의 복지를 증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부모들의 역할이 극히 미약했다. 부모들의 연합단체인 장애우부모회가 정부를 상대로 싸웠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부모회는 일 년에 한 번 부모대회를 치르는 그냥 그런 단체로 인식되어 온 게 사실이다. 이런 부모회가 권유상, 그이로 인해 변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그런데 정말 부모들이 변했을까?

 

부모들의 인식전환, 부모회 활동의 활발한 참여로 이어져

그래서 그이를 만나 처음 나눈 얘기는 부모회의 변화였다.

"예전에는 사회 분위기가 부모의 잘못으로 장애아가 태어났고 그게 부모의 업보인 것처럼 생각해서 부모들은 장애아가 있다는 게 외부에 알려지는 걸 꺼려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회분위기가 달라져서 부모들이 "장애아가 태어난 건 내 잘못이 아니다. 장애 자식 둔 게 부끄러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생각들이 바뀌면서 적극적으로 자녀들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고 있는데 아이가 학교를 다니면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특수학교를 졸업하고 복지관에 다니면 복지관에서 부모회를 만들어서 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이런 참여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근래에 활발한데, 시기는 한 사 오 년 정도로 보면 될 거예요. 그리고 지금 또 하나 달라진 점은 그전에는 우리가 지방에 다니면서 "부모회를 만들어서 활동해야 자녀들 문제가 해결된다"고 권해도 부모들이 난 바빠서 못한다 핑계 대고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부모들이 스스로 부모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겠다고 찾아오고 있어요. 제가 구십 팔 년 구 월부터 부모회에서 상근을 했는데 그때 우리 지방 조직이 열 한 개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지방 조직이 마흔 네 개로 늘어났어요. 삼 년 사이에 네 배가 늘어난 거죠. 그만큼 부모들의 참여 욕구가 강렬해진 거죠."

그이는 달변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모로서 가슴속에 맺힌 게 많아 할 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이는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부모운동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한다.

"제 생각에는 그래요. 선진국 보면 일본만 해도 장애우 천국이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장애우들과 부모들이 가만히 있는데 국가가 장애우들의 천국을 만들어 준건 아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장애우 당사자들보다 부모들이 수 십 년간 정부를 상대로 투쟁한 역사가 장애우 천국으로 나타났단 말예요. 결국 우리 나라가 이렇게 복지 후진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그 동안 부모들의 힘이 결집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죠. 부모들이 자기 자식만 생각하고 자기 자식 문제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가 이렇게 복지 후진국으로 나타난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부모운동은 부모들이 자기 자식 문제만 해결하는 게 아니라 큰 틀, 즉 법이나 제도를 움직여 가지고 대한민국의 장애우가 골고루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운동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지 우리 나라도 선진국처럼 장애우 천국이 될 수 있는 거지 부모들이 내 영역 내 자식 문제만 해결하려고 운동을 한다면 장애우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는 거죠."

그이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나 그 동안 부모회가 법이나 제도를 움직여서 운동을 한 사례가 있으면 대보라고 질문을 던졌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이는 올해부터 시행되는 자녀 교육비 공제에 얽힌 얘기를 들려줬다.

"작년에 부모회가 뭘 했느나면 올해부터 특수교육비를 백 오십 만원 소득공제 혜택을 받게 됐잖아요. 저도 우리 애 조기교육 시킬 때 한 달에 이십 오 만원에서 사십 만원을 주고 조기교육을 시켰어요. 그때는 정말 큰 돈 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부모들이 자녀 교육비 때문에 큰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죠. 그래서 정부를 상대로 정책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를 않았어요. 문제가 뭐냐면 단순히 공무원들에게 건의문을 보내 가지고는 형식적인 답변밖에 받을 수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공무원들은 결정권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작년에 제가 국회 제정경제위 소속 국회의원 스물 한 명에게 "장애우 부모들이 이런 어려움이 있으니까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팩스를 다 보냈어요. 그랬더니 단 한 사람 서모 의원 비서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자료를 받았는데 이거 입법을 해야겠으니 자료 보완을 해주십시오." 그래서 제가 자료보완을 해 가지고 보냈더니 국회 법제실에서 전화가 왔고, 또 얼마 안 있으니까 재정경제부 담당 사무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 회장님과 국회의원 37명이 공동 발의를 해서 이 제도가 국회에서 통과됐고 시행되게 된 거예요."

그이는 장애우 복지의 완결편은 장애우 문제가 해결하는 게 아니라 뒤에서 고통받고 있는 부모나 형제 등 가족문제까지 같이 해결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장애우 당사자보다 부모가 고통을 더 느끼면서 살고 있다고 그이는 강조하는데, 그러면 그이는 어떤 과정을 거쳐 부모운동에 뛰어들게 됐을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부모운동에 뛰어들어

서울 장지동에 육영학교라는 발달장애아 전문 특수학교가 있다. 그이의 외아들 범석이가 구십 삼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아이 교육에 열성이었던 그이는 학교에서 아버지회를 만들었고, 구십 육년 회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부모회가 존재하는 지도 몰랐던 그이는 친구의 소개로 발달장애아 아버지 모임에 참여하게 됐고, 거기서 고려대 이만영 교수를 만났는데, 이 교수가 가보라고 한 곳이 부모회였다. 그이는 찾아간 부모회에서 얼마 안가 실행이사가 됐다. 그리고 곧 하던 일을 작파하고 부모회 일에 뛰어들게 되는데, 그 과정에 얽힌 사연이 많다. "어렵게 살다가 그때 구십 칠년에 겨우 든든한 직장에 다니고 있었어요. 연봉 삼천 팔백 만원을 받고 있었는데 부모회에서 서울지역 조기교육센터를 맡아 주기를 권하는 거였어요. 고민이 많았죠.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회사에 사표를 썼어요.

"그래 범석이를 위해 내가 이 일을 내가 해야 되겠다. 나라도 해보자. 그러면 뭔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마음먹고 과감하게 사표를 썼는데, 제가 부모회 일 하면서 집사람과 육 개월간 거의 매일 싸웠어요. 다니던 직장에서 삼천 팔백 연봉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부모회 일을 하면서 월급이 백 만원은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첫 달 월급을 타보니까 팔십 일 만 원 이었어요. 수당을 다 더해도 연봉이 천 이 백 만원밖에 안 되는 거였어요. 그러니 집사람이 가만있겠어요? 매일 싸웠죠. 그때 제가 집사람에게 그랬어요. "자식이라고 범석이 하나밖에 없는데 우리 목표가 뭐냐, 우리 죽고 나서도 이 놈 하나 밥 먹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게 해 주면 그만 아니냐, 우리가 돈 싸들고 갈 것도 아니고, 내가 이런 일을 하면 그 방법을 빨리 터득하는 거다. 부모회 일을 하다보면 뭔가 길이 보일 거 아니냐." 이렇게 설득했지만 설득이 잘 안되더라고요."

어렵게 부모운동에 뛰어든 그이는 조기교육센터 일을 하다가 구십 팔년 구월 당시 엄요섭 회장의 부름을 받아 부모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한다. 당시는 부모회 회장이 현재 김명섭 회장으로 바뀌는 격변기였다.

그이가 부모회 사무국장으로 취임하면서 공교롭게도 밀알학교 정애학교 등 특수교육 학교 설립 반대 사태가 벌어졌다. 그이는 그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시위를 주도해 설립을 관철시킨 것은 앞에서 언급했으니까 생략한다.

그런데 그이는 부모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보람만을 느꼈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이는 회의를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회의를 느낀 때가 이천년 십이월 이었다고 그이는 말한다.

"그때 우리 집사람이 아이를 키우면서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졌어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는데 범석이를 맡길 데가 없어 입원을 못 시켰어요. 정말 그때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느냐는 회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죠. 집사람은 쓰러져서 못 일어나고 입원은 못 시키고, 어떡해요. 내가 애 학교에 보내고 오전에 집사람이 집 가까운 병에서 주사를 몇 시간 맞고, 그러면 내가 오후 세 시 반 되면 아이 학교 가서 아이 손 잡고 집에 데려다 주고, 아이 엄마는 누워있는데 아이는 혼자 놀고 있는데, 아이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서 부리나케 다시 사무실 왔다가 퇴근하면 집으로 달려가서 내가 아이를 보고 이렇게 살았어요. 아이를 맡길 데가 없으니까, 정말 눈물이 다 났어요.

우리 집사람이 뭐라고 하느냐면 당장 때려 치우라는 거였어요. "부모회 사무국장 하면 뭐하냐" 이거죠. "집사람이 다 죽어 가는데 병원에 입원도 못 시키면서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원망이 당연히 나오는 거죠. 그때 정말 힘들었던 게 주변에서도, 부모회 지회 지부에서 주간보호센터나 그룹홈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인원이 찼다면서 맡아주는 걸 거절을 하더라고요.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아이의 교육을 위해 추기경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도

이제 아이 얘기를 해보자. 권범석, 그이의 외아들이다. 서울 신림동 정문학교에 다니는 범석이는 올해 중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부에 진학한다. 장애 상태는 심한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이가 이런 범석이 장애를 안 것은 범석이 나이 네 살 때다. 아이가 소리만 지르고 전혀 말을 하지 않았다. 자폐증이 뭔지 전혀 몰랐던 그이는 집안 어른들이 아이가 말을 늦게 하는 모양이니 기다려보라는 말만 믿고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우연히 한 신문을 봤는데 자폐증 어린이의 언어 치료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기사에서 말하는 자폐증 증상이 범석이 증상과 똑같았다.

병원으로 달려간 그이, 의사로부터 아이가 자폐증 장애를 가졌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때 그이가 한 말이 "어떻게 치료를 해요? 얼마를 치료하면 낳아요?" 였다. 자폐증을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 질병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의사가 대답했다. "치료를 해서 낳는 게 아닙니다. 장애입니다." "아니 그러면 평생 이렇게 말도 못하고 산다는 겁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기 특수교육을 시키면 말을 하는 경우도 있고 낳아질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날 이후 그이의 기나긴 고행이 시작된다. 주위에서 "강남 어디 교육기관에 가면 일대 일로 치료하는데 한 달에 교육비가 사십 만원이다. 치료 효과가 좋다더라." 그러면 솔깃해서 달려가고, 또 누가 "복지관에 가면 오 만 원만 주면 되는데 치료 효과가 괜찮다"고 그러면 복지관으로 달려가고, 복지관에서 "여기 들어오려면 몇 년 걸리니까 사설 교육기관으로 가라"고 하면 다시 사설 교육기관을 찾아 헤매고, 이렇게 아이 교육을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범석이가 특수학교에 들어가게 돼서 한시름 더는가 싶었는데 결론은 그게 아니었다. 또 다른 난관이 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범석이가 특수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그이는 신화적인 얘기를 연출해낸다.

"영등포 우리집에서 장지동에 있는 육영학교까지 가려면, 아침 여섯 시 반에 자는 아이 겨우 깨워서 일곱 시 십 분에 구로공단역 전철역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거기서 지하철 타고 종합운동장역에 내려서 또 버스를 타고 들어가서 내린 다음 다시 이십 분을 걸어 들어가야 했어요. 이렇게 학교 가는데 두 시간 오는데 두 시간 합쳐서 네 시간이나 걸려 학교에 다녔는데, 우리 집사람은 아침도 못 먹고 아이 데리고 학교 가서 수업 끝나길 기다리다가 집에 아이 데려오면 오후 세 시였어요. 아이는 학교에서 점심을 줬지만 집사람은 학교에서 밥 사먹으러 나갈 데도 없었어요. 그러니 아침도 못 먹고 가서 세시쯤 집에 와서 그때서야 밥을 먹는 거예요. 그 짓을 사 년을 했어요. 그리고 타본 사람은 알지만 지하철 이 호선이 얼마나 복잡해요. 출근시간에는 숨도 제대로 못 쉬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루는 지하철 노조위원장에게 편지를 열 여섯 장 써서 보냈어요. "좀 도와달라. 우리 아이가 너무 힘들어한다. 어른들 틈에 끼어 숨 막혀서 학교를 다닐 수 없다. 그러니 구로공단역에서 종합운동장역까지 열차 앞칸이나 뒤칸 승무원실에 타고 가게 해달라. 거기는 좀 넓으니까 아이가 힘든 게 좀 덜하지 않겠느냐." 이런 내용으로 기대도 안 하고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뜻밖에도 노조 사무실에서 답장이 왔어요. "범석이 아버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시민들 중에서 이렇게 고통을 겪으며 지하철을 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는 걸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힘이 될지 모르지만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승무원실에 타고 학교를 다녔어요. 지하철 공사 사정으로 사 개월밖에 타지 못했지만 승무원실에 타고 학교에 다닌 건 우리 아이밖에 없을 거예요."

그이의 적극적인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이는 김수환 추기경에게도 편지를 무려 스무장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왜 우리 아이들이 아침밥도 못 먹고 두 시간씩 학교를 다녀야 합니까! 가톨릭에서 시내 중심가에 장애우 학교를 하나 건립해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그이의 이 편지는 가톨릭 언론에 공개돼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당시 그이의 이런 행동은 주위사람들로부터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이의 소신은 변함없다. "장애아 부모들이 학교가 부족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알아야 무슨 대책이라도 나올 거 아니냐"는 게 그이 말이다.

범석이는 초등학교 오학년 때 신림동에 정문학교가 개교해서 옮겨왔다. 그때부터 지긋지긋했던 통학 전쟁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뿐 범석이 때문에 힘든 상황은 조금도 낳아지지 않고 있다.

범석이는 말을 못한다.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혼자 음악을 듣는다. 그러다 심심하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잡지의 광고면을 찢어서 거기다 크레용으로 칠하며 놀기도 한다. 말썽부리지는 않지만 열 일곱 나이가 말해주듯 사춘기가 되면서 부모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범석이가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족히 한 두 시간을 소리지르면서 운다. 이웃에서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오고, 거기다 자지 않고 새벽에 울어서 그이 표현에 따르면 "부모가 미쳐서 정신병자가 될 것 같다."

그리고 범석이는 키가 백칠십오에 몸무게가 팔십 킬로인 거구의 몸을 갖고 있다. 이런 범석이가 엄마 엄마 그러면서 툭툭 쳐서 아이 엄마는 성한 곳이 없다. 그래도 범석이가 학교 갔다오면 데리고 있어여 한다. 그이가 사는 영등포에는 아이를 맡길 수 있는 주간보호센터가 단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범석이가 체격이 크니까 화가 나면 이제 힘으로 밀어붙여요. 나도 제어를 못하는데 집사람은 더 제어를 못하죠. 이건 사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아이 키우는 재미는 있을 거 아니냐고 묻자 그이가 씁쓸하게 웃는다.

"하나 좋은 거는 아이가 여드름이 덕지덕지 났지만 아이니까 내가 집에 들어가면 부등켜 안고 키스해 달라고 그래요. 키스해주면 자기도 내 뺨에 키스하고, 하루에 키스를 수십 번도 더하죠. 길거리에 나가면 길에서도 날 껴안고 키스해요. 이렇게 항상 어린아이죠. 이게 좋은 건 아니지만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일은 별로 없으니까, 비장애아들 같으면 나가서 싸우고 공부 안 하고 그래서 부모 속 썩이지만 범석이는 그런 건 없어요. 그렇지만 결국 그 자체가 희망이 없다는 거죠."

하나 더 부연하자면 그이는 다른 장애아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명절이나 친척 경조사 등 일이 있으면 아이를 꼭 데리고 다녀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눈치가 보여서 아예 집안 경조사에 참석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명절 때 형님 집에 가면 조카들이 범석이를 우습게 보고 따라다니며 때리고 왜 너는 말도 못하냐면서 놀리는데 그런 모습보고 마음 안 아픈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면 부모들이라도 놀리지 못하게 말려야 하는데 그냥 내버려둬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속상해요. 그래서 명절 때도 어디 가고 싶지도 않고, 자연히 친척들과 멀어질 수밖에 없죠."

그이에게 아픈 질문을 하나 던졌다. 범석이 때문에 고통을 받는데 혹시 범석이를 버릴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

"내 주위 사람이 나에게 왜 사람 구실도 못하는 아이를 버리지 않고 키우냐고 그래서 내가 대판 싸운 적이 있어요. 버리다니, 말도 안 되는 거죠.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버립니까, 사람이 아니죠. 짐승도 자기새끼는 보호하는데 인간이 하물며 어떻게 자식을 버려요. 미우나 고우나 내 자식인데 내가 끝까지 책임을 져야죠."

혹시 범석이를 수용시설에 보낼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까?

"제가 백 몇십 명 아이들이 수용돼 있는 시설에 가본 적이 있어요. 먹는 거나 자는 게 말이 필요 없는 군대식이었어요. 내가 그걸 보고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어요. 내 새끼도 내가 죽고 나면 짬밥 같은 밥을 먹고 저렇게 생활하겠구나. 왜 우리 아이들은 압력밥솥 뚜껑 열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에 김치도 꽃무늬 있는 접시에 담아 가지고 먹지 못해야 하죠? 지금 시설들은 모두 다 사회와 격리돼 있어요. 사람 사는 게 아닌 거죠. 유배나 유형생활을 하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삶인데, 그래서 나는 맹세하지만 범석이를 시설에 보낼 생각이 전혀 없어요."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그룹홈을 준비하는 후원회 조직

그러면 그이는 어떤 사후 대책을 갖고 있을까?

"제가 월급 받아서 범석이 사후대책을 세울 수 형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고민 끝에 우리 아이 개인 후원회를 만들었어요. 내가 작년 이월에 문안 만들어서 돌렸는데, "나는 누구고 내 아이는 이런 장애를 가지고 있고 이 아이들에 대한 대책은 그룹홈이다. 후원해 주면 장애아 네 명이 공동생활 할 수 있는 그룹홈을 만들어서 종교나 사회복지법인에 기증하겠다" 이런 내용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지금 육십대인 부모들이 십 년 후 세상을 떠나면 그때부터 수천 명의 장애아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게 돼있어요.

그런데 지금 별다른 대책이 없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 사후 복지에 백 원이 들면 백 원 전부를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내놓으라고 하지는 말자는 거죠. 부모가 단 오 원 십 원 이라도 공동투자를 하고 모자란 것을 국가나 지방자치4단체가 채워 놓으라고 하는 게 빠르다 이거죠. 그래서 개인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목표가 뭐냐면, 후원회원을 백 명을 만들어서 백 명에게 한 달에 만 원 씩만 후원해 달라고 하자. 그러면 일년이면 천 이백 만원이 모이고 십 년이면 일억 이천만원이 모인다 이거죠. 그러면 서울시내 변두리에 빌라 하나는 얻을 수 있어요. 지금 아이 통장으로 한 달에 삼십 만원이 들어오고 있는데, 나중에 모자라면 제가 보태고 또 범석이와 같이 생활 할 부모들이 보태면 그룹홈 하나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이는 범석이 개인 후원회를 만든 게 단지 범석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라고 강조한다. 그이는 후원회 만든 것을 장애우 운동이라고 강조했다.

"제가 후원회 만들면서 다른 부모들에게 뭐라고 했느냐면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들이 자녀들 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장애우 후원회원이 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한 달에 만 원 이라도 후원하게 되면 우선 장애우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게 아니냐 그러면 최소한 님비현상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그래서 아이 개인 후원회를 만드는 것은 인식개선 운동이이다. 힘든 일이지만 부모들이 얼굴에 철판 깔고 꼭 해야 하는 일이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말하자면 장애우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한 달에 만 원 씩만 후원하면 장애우들이 시설에 가지고 않고 지역 사회에서 살 수 있으니까, 국가 예산 절감으로도 이어진다는 게 그이 말이다.

이렇게 부모회 사무국장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장애우 운동을 하고 있는 그이는 지금 나이 쉰세살이다. 얼마나 더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지 그이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이의 열정을 지켜보다 보면 그이는 어느 자리에 있든 어디에 가있든 부모운동 즉 장애우 운동을 놓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하게 한다.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이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다시 부모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장애우 문제의 전문가는 부모예요. 내 자식 문제를 나만큼 아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요? 아무도 몰라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내가 전문가인 거죠. 즉 모든 부모들이 다 장애우 문제의 전문가예요. 부모들만이 자식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거죠."

 

 

 

 

 

글 이태곤 기자/ 사진 이나라 기자
 

작성자이태곤  webmaster@cowalknews.co.kr

Copyright by 함께걸음(http://news.cowalk.or.kr)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함께걸음 과월호 모아보기
함께걸음 페이스북 바로가기

제호 : 디지털 함께걸음
주소 : 우)07236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22, 이룸센터 3층 303호
대표전화 : (02) 2675-8672  /  Fax : (02) 2675-8675
등록번호 : 서울아00388  /  등록(발행)일 : 2007년 6월 26일
발행 : (사)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  발행인 : 김성재 
편집인 : 이미정  /  청소년보호책임자 : 노태호
별도의 표시가 없는 한 '함께걸음'이 생산한 저작물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by
Copyright © 2021 함께걸음. All rights reserved. Supported by 푸른아이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