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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는 이야기] " 교회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해야죠 "

장성룡 목사

본문

장애우 날에 밝힌 세 가지 소원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 가면 강동교회를 찾을 수 있다. 교회를 모르면 장애우작업장 ‘새누리집"을 찾으면 된다. 길을 가르쳐준 사람이 새누리집도 모른다면 노숙자 쉼터인 ‘내일을 여는 집"을 찾으면 거기 바로 장성룡(61) 목사가 있다. 장 목사는 이 세 기관의 대표다. 그이는 목사로, 관장으로, 운영 책임자로 지금 낮은 곳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한 삶을 묵묵히 살고 있다.
장 목사를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그의 선한 인상에 끌릴 수밖에 없다. 평소에 짜증 한번 낼 것 같지 않은, 늘 웃고 있어서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그의 인상은 자라면서 고생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자라온 사람같다. 과연 그럴까?
장 목사는 평안북도 철산이 고향이다. 즉 실향민이어서 남쪽에서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평북 신의주에서 살던 어린 시절 일본군이 버리고 간 불발 기관포탄을 가지고 놀다가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왼쪽 손이 절단 당해 장애우가 됐다. 그래서 남들보다 더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낙천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무엇보다 신앙의 힘이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어쨌든 그이는 목사니까.
장성룡 목사를 만났다. 그를 만나러 강동교회를 찾은 날 교회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에서는 새누리집 기금 마련을 위한 바자회가 열리고 있었다. 젓갈과 생필품을 펼쳐 놓고 장애우들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대상으로 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장애우들이 눈에 많이 띈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장애우들은 모두 새누리집 소속 장애우들이었다.
장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새누리집은 강동구에서 지원금을 대주는 지체장애우 자립작업장이다. 이름은 작업장이지만 일종의 장애우 복지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기도 하다.
구두와 콘덴서를 만드는 작업장 외에도 목욕탕과 장애우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쉼터에는 갈 곳 없는 장애우들이 찾아와 식사도 제공받고 무료 이미용서비스도 제공받는다. 말하자면 강동구 성인 지체장애우들의 복지센터인 셈이다.
장 목사는 새누리집을 만들게 된 사연을 이렇게 말했다.
“구 년 전쯤이었어요. 하루는 통지가 왔어요. 장애우협회가 만들어지니까 참석해달라고 해서 가봤더니 구멍가게에 장애우들이 모여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모임을 갖고 있었어요. 내가 가니까 당시 휠체어를 탄 장애우가 임시 회장이었는데 나에게 자리를 넘기더군요. 자기는 앵벌이해서 먹고 살아야 되고 또 구청장을 만나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힘들다며 내게 회장 자리를 넘기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하면 그렇게 하겠다고 수락했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장애우협회 회장을 맡게 됐는데 처음에는 사무실도 없었어요. 일단 월 이십만원을 주기로 하고 사무실을 얻었죠. 그런 다음 오년전 사월 이십일 장애우 날에 기관장과 국회의원을 데려다 놓고 행사를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내가 인사말을 하면서 우리 장애우들에게 세 가지 소원이 있다고 말했죠. 한 가지는 월세가 나가지 않는 사무실을 가지고 싶다, 두 번째는 우리는 일하고 싶다. 그래서 작업장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우리 장애우들이 목욕탕 이용을 못하고 있다, 샤워시설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죠. 그랬더니 그 자리에 참석한 국회의원들이 돕겠다고 약속을 하고 구청장도 시설 건립을 약속하고, 구의회 의장은 예산 배정을 약속하면서 곧바로 추경예산 육억 원을 배정해 줬어요. 강동구가 재정 자립도가 채 오십퍼센트도 안되는 자치구인데 새누리집 건립에 육억 원을 배정해준 것은 대단히 큰 지원이었어요. 그 돈으로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새누리집을 세울 수 있었죠."
주목되는 것은 새누리집 건립을 계기로 장 목사가 강동구에 사는 장애우들의 대변자 역할을 맡게 됐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강동구청에서는 장애우와 관련된 문제만 생기면 장 목사를 찾아 자문을 구한다. 그뿐 아니라 장애우들이 특별한 민원으로 구청을 찾으면 일단 장 목사를 만나고 오라는 말을 한다. 이런 구청의 태도는 장 목사에 대한 신뢰가 밑바탕에 깔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교회는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해야


장성룡 목사는 현재 새누리집 외에도 노숙자쉼터 내일을 여는 집의 대표도 맡고 있다. 교회 건물 일 층을 통째로 노숙자들을 위해 내줬다. 구십팔년 십이월에 시작한 쉼터에는 지금 사십여 명의 노숙자들이 기거하고 있는데 탈도 많은 게 노숙자 쉼터 운영이다.
“노숙자들 중에서는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아서 쉼터 운영이 쉽지 않아요. 노숙자들 세계에도 패가 나눠져 있어서 주도권 쟁탈하느라 툭하면 자기들끼리 싸우죠. 싸움나면 파출소 가서 빼내고 병원 가서 치료해 주고 그러는 게 일이에요. 한번은 한 노숙자가 술 먹고 들어와서 자는 사람 얼굴에다 오줌을 싸다가 동료 노숙자들한테 맞았는데, 화가 났는지 교회 종탑 위에 올라가서 교회서 사람 팬다고 고함을 지르면서 뛰어내린다고 위협하는 거예요. 사정사정해서 다행히 뛰어 내리지는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지요."
새누리집과 노숙자쉼터 운영에서도 보듯이 장 목사는 목회 보다는 그늘진곳의 이웃을 챙기는데 더 열심이다. 그래서 강동교회를 설립한 지 십구년째지만 교인수는 백오십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보는 사람 눈에 따라서는 목사가 목회보다 어려운 이웃을 챙기는데 더 매달리는 것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장성룡 목사에게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이는 이 시대 교회의 역할이 “이웃과 고난을 같이 하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단정 짓는다. 교회가 주님의 길을 따른다면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편하게 지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이는 사백평 교회 건물 중에서 예배 공간인 이층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지역사회를 위해 헌납했다. 보육시설인 어린이집이 들어서고 특이하게 노숙자쉼터가 교회 건물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장 목사가 강한 사회참여 신앙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이는 다른 교회에 할 말이 많다. 교회는 민중과 함께 어울려야 되는데 지금 대다수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교회가 지역에서 복지선교에 나서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어려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이고 입히고 자유를 주는 일을 했는데 지금 대다수 교회는 자기 울타리 안에만 있고, 헌금 많이 들어오면 주차장 넓히고, 또 교육관을 짓고 있어요. 저희 이웃에도 큰 교회가 있는데 엄청난 헌금이 들어오는데도 불구하고 사회 환원을 안해요. 그 많은 돈을 교회 주변 연립주택과 개인주택을 사서 주차장만 넓히고 있죠. 이런 교회는 당연히 지탄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21세기는 점점 더 식량사정이 어려워지고 노숙자와 결식아동 문제도 계속될텐데 당연히 교회가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고 예수님처럼 소외된 이웃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역할을 못하면 교회의 미래는 없는 거죠."
그이는 이웃을 위해 사는 것 외에도 사회 문제에 집요한 관심을 가지고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서 왔다. 군사독재로 어두웠던 시절, 그이는 인권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민주화와 빈민, 철거민 문제들을 들고 거리에 나서 여덟 번 경찰서에 붙들려가고 세 번 유치장에서 살고, 삼 개월을 교도소에서 산 경력을 가지고 있다. 각종 시국선언에 그이의 이름이 빠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이는 군사정권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혀 기무사 윤석용 이병이 폭로한 사찰 디스켓에 일천삼십사번이라는 번호표를 달고 등장하기도 했다.
그이는 지금도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활동과 교회협의회 인권위원 활동을 쉬지 않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장애인운동위원회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던 이도 그이다. 장 목사는 자신이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 때문이기도 하지만 밑바닥 생활을 해 어려운 이웃들의 처지를 잘 알기 때문"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게처럼 내 팔도 돋아나나요”


그러면 그이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 왔을까.
“남쪽에 내려와서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부모가 도와줬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벌어서 학교를 다녀야 했죠. 신학교 들어가서는 기거할 곳이 없어 북한산에 있는 땅굴에서 살다가 간첩으로 오인돼 잡혀간 적도 있어요. 신학교를 칠 년만에 겨우 졸업하고 전도사로 나가야 되는데 장애우니까 받아주는 교회가 없는 거예요. 놀다가 한 목사가 소개해 줘서 경기도 안성 양선이라는 동네에 있는 교회에 전도사로 가게 됐는데 가보니까 교인이라고는 청년 두 명과 장년 교인 세 명 합해서 다섯 명밖에 없는 교회였어요. 그 교회에서 한 달에 쌀 네 말만 받고 살았지요.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서 살았어요. 밥을 해먹으려면 연탄은 생각 못하고 솔가지나 갈잎을 주워다가 땔감으로 썼지요. 그래도 나는 땅굴에서 산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는데 아내가 못 견디더라구요. 오 년을 버티다가 아내가 자기가 올라가서 콩나물 장사라도 할테니까 서울로 가서 교회를 개척하자고 해서 올라왔어요. 천호동에서 참외장사, 선지장사 등 갖은 고생을 하면서 돈 만원을 벌어 조그만 건물에 계약금만 걸고 대광교회 간판을 달았죠. 내가 대광고등학교 십일회 졸업생이에요. 그 인연으로 동기생들이 모금 해줘서 얼마 안가 교회 건물을 짓고, 그러다가 당시에는 허허벌판이었던 이 곳 시 채비지 땅을 입찰을 통해 어렵게 샀는데 건물을 지을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폐차직전에 있던 버스를 사서 끌어다 놓고 예배를 드리면서 강동교회 간판을 달았죠. 그 때가 십구 년 전이에요."
여기까지는 그이가 목회자가 되고 난 후의 얘기고, 막상 그이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다 보니 목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도 궁금해진다.
“어렸을 때 내가 싸움을 많이 했어요. 내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 보니 남이 날 무시하는 것 같았어요. 이북 평안도 사람이니까 성격도 괄괄했는데 내가 축구선수였고 박치기도 잘했어요. 그러니까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매일 싸우는 거예요. 오죽하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담임 선생님이 내가 목사가 된게 기적이라고 말했겠어요. 그렇게 망나니로 지냈는데 열일곱살 때 우연히 신당동 교회를 갔는데 마침 부흥회를 하고 있었어요. 그 부흥회에 참여하면서 내가 달라진 거죠. 그때 목사가 되겠다는 마음을 굳혔어요. 앞으로 웃으며 살겠다는 결단, 고난 당해도 끝까지 목회생활하겠다고 마음먹고 신학교에 간 거죠.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열일곱 살 때까지는 내장발생적인 욕구에 의해서 살다가 그 다음부터는 정신발생적인 관심 속에서 살게 됐죠. 뭘 먹을까, 입을까가 아니라 나라가 어떻게 될까, 하는 큰 고민을 열일곱 살 때부터 하게 됐어요. 그때 목회자가 되서 나라가 제대로 서는 데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됐지만 그이는 왼손이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장애는 그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내가 자라면서 형한테 물었대요. 게가 발이 떨어지면 돋아나거든요. 그걸 보고 내 팔이 돋아나느냐고 물었다는데, 이런 식으로 어려서는 사실 장애를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청소년기에는 장애를 인정하게 됐어요. 불가피한 것은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자,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장애를 끌어안고 후회하고 남 원망하면 남도 괴롭히고 자기도 죽는 거라는 생각을 한거죠. 그래서 장애를 일단 접어두고 이 상태에서 내가 어떻게 적극적으로 살아갈 것인가만을 고민했죠. 돌이켜 보면 제가 살아온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어요. 그 도전이 가능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가 큰 힘이 됐습니다."
장애는 지금 그이가 하고 있는 일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이가 장애우기 때문에 일단 다른 장애우들은 그이에게 거부감을 전혀 갖지 않는다. 그래서 새누리집이 생길 수 있었고, 동질감 때문에 새누리집에서는 단 한번도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
이렇게 매사에 적극적으로 살아온 그이지만 세월을 거스를 수는 없나 보다. 그이는 지금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사년 후면 담임목사직을 내놓을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래도 새누리집 관장으로는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다는 게 그이의 바람이다. 그이가 보기에 장애우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직장을 가지고 먹고 사는 건데 그렇게 될 수 있게 현재 새누리집에 있는 자립작업장을 계속 확장해 장애우의 생존권 문제를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서울 강동구는 어떻게 보면 작은 자치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장성룡 목사가 있기 때문에 강동구에 사는 장애우들은 자기 목소리를 제대로 행정관청에 전할 수 있고, 새누리집이라는 복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우리 나라 모든 자치단체에 딴건 몰라도 장 목사처럼 자기를 희생해 장애우 복지에 매달리는 그런 사람이 한 사람씩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새천년의 시작에 가져본다.

 

이태곤 편집장/사진 김학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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