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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명예학교 교장에서 물러난-강성숙 수녀, 세계 밀알 연합회 회장-이재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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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


"한 알의 밀 알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명혜학교 교장 물러난 강성숙 수녀

 

  지난 9월 1일 퇴임 식을 가지고 명혜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강성숙(64세)수녀는 우리나라 특수교육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강성숙 수녀는 무려 36년이라는 긴 세월을 장애우 교육을 위해 헌신해 왔다. 말이 쉬워 36년이지 그 긴 기간을 외길을 걷는 다는 것은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특별한 사명감과 희생이 없었다면 그 길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성숙 수녀가 특수교육계에 몸담기 시작한 때는 195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평양에서 1.4후퇴 때 월남해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 소속 수녀로 있던 강 수녀는 그 해 국립맹농아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청각, 시각 특수학교인 충주성심학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강 수녀가 부임했을 때 당시 성심학교에서는 전교 학생이 단 7명뿐이었다. 우선 학생 수를 늘리는 게 급선무라고 판단한 강 수녀는 직접 각 가정을 방문해 장애아 내놓기 싫어하는 부모들을 설득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들을 모은 강 수녀는 곧바로 학교시설의 현대화에 매달렸고, 교장 재임 기간까지 합쳐 26년을 성심학교에 재직하는 동안 강 수녀는 뜻한 바대로 현대식을 갖춘 성심학교를 일구어 낼 수 있었다.
  1985년 강 수녀는 경기도 광명시에 있던 지체장애 특수학교인 명혜학교 교장과 장애우 수용시설인 명휘원 원장으로 부임한다. 명혜학교에서도 강 수녀의 추진력은 빛을 발해 중등부 6학급만 있던 학급을 고등부 6학급으로 늘렸고, 명혜학교의 안산시로의 이전을 무사히 성사시켰다. 그런 다음 정년퇴임 1년을 앞두고 이번에 자발적으로 교장직을 물러난 것이다.
  36년을 장애우 교육에 헌신하면서 1천여명의 장애우를 교육시킨 강 수녀는 "집에만 있던 장애우들이 교육의 혜택을 받은 후 변화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날 때 제일 기뻤다"며 "학교를 거쳐간 아이들이 어느덧 장가가고 시집가서 아들, 딸 낳고 살며 나를 어머니로 모시겠다고 명절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데 이게 내 생의 가장 큰 보람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번 강 수녀의 퇴임은 특수교육계 뿐만 아니라 장애우계에서도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자리에 연연해하면서 자발적으로 물러나는 풍토가 실종된 장애우계에서 강 수녀의 퇴임은 귀감으로 꼽힐 만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이런 여론에 대해 정작 당사자인 강 수녀는 "평소에 물은 흘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명혜학교도 10동안 괸 물이 한번은 맑은 물로 변해야 되겠다는 판단을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 하고 있다.
  교육 신조로 인내와 집념을 꼽는 강 수녀는 "그동안 마음 속에 어느 선까지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명혜학교 교장에서 물러난 강 수녀는 당분간 명휘원 원장으로서 맡겨진 일에 전념할 예정을 밝히고 있다. 10년을 명휘원 원장을 겸임하면서 시급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는데 다름 아닌 지체장애우를 위한 그룹 홈 설립이다.
  "명휘원에 수용돼 있는 중증장애우들이 걱정하는 게 있어요. 원에서 나가야 되는데 갈 데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장애우는 무려 10년을 넘게 원에 수용돼 있기도 해요. 이런 중증장애우들이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그룹 홈을  만들어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입니다."
  또 하나 강 수녀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북한 선교이다. 고향이 평양이고 오빠와 어머니 등 가까운 식구들을 그곳에 남겨놓고 내려온 강 수녀는 이미 85년 남북 교류단의 일원으로 북한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 목격한 북한 실상에 가슴이 아팠다는 강 수녀는 "젊었을 때는 명절 때만 고향이 생각났는데 나이가 60이 넘으니까 지금은 고향이 가깝게 생각된다"며 "남은 생을 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 알의 밀 알이 썩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36년간 썩었으니까 이제 열매가 생길 때 도 됐죠. 그 열매를 지켜보며 살겠습니다"
  강성숙 수녀의 입가에는 인자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태곤 기자

 

 

"남은생도 장애우들을 위해 살 것입니다"
세계밀알연합회 회장 이재서 박사

 

 

  우리는 종종 푸른 하늘을 보면서 아름다움과 절대성의 경이를 체험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체가 언제나 완전할 것이고, 이 상태로 자신은 영원(?)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길을 걷다 장애우와 마주칠 때, 언론을 통해 장애우에 대한 기사를 볼 때, 또는 전철 안에서 구걸(?)하는 장애우를 만나며 많은 것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의 가슴은 불쌍과 연민으로 그들을 보게되면서 상대적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도 사실이다.
  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소아기적 편견인가!
  약 3주간에 걸쳐 겨우 연락이 되어 만나게 된 이재서 박사도 조금은 특별한 사람임에 분명했다. 시각장애우란 어려움을 이기고 미국 유학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아 모국으로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방배동의 한 커피숍에 아내의 팔짱을 끼고 나온 이재서 박사는 우리들에게 쉽게 망각된 편견의 그늘을 없애주기에 충분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재서 박사는 1952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보통의 시골아이들처럼 국민학교 시절을 보내고 중학교에 다니던 중원인 모를 열꽃이 온몸에 퍼져 2년여간의 고생을 했음에도 아랑곳없이 실명의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지금도 열병으로 힘들었던 2년의 시간은 악몽 같았다 고 이재서 박사는 전한다.
  하지만 이 박사는 자신의 신체가 변했다는 사실을 비교적 빨리 인정했다. 오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바로 서울맹학교의 문을 두드리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시각장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대학에 진학을 해 국문학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정이 어려워 아예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여의도 빌리그레함 목사의 집회에 참석하면서 예수를 만나 신앙의 눈을 떴다. 이후 자신의 삶에 대한 계획을 수정하고 순천으로 내려가 소설을 써 신춘문예로 등단할 각오로 글을 써 출품을 했지만 낙선을 한다. 자신이 체험한 신에 대한 소개 글 을 쓰려했지만 성경을 잘 몰라 원하는 글을 쓸 수가 없었다. 결국 시골교회의 아는 전도사를 통해 순천의 성서신학에 입학, 공부를 하여 자신은 자신과 같이 소외된 삶을 사는 장애우들에게 선교를 하며 일평생을 살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러한 각오로 총신대 신학과 에서 공부를 하던 중 원주의 시각장애우 마을로 봉사활동을 갔다가 「함께 하는 삶」의 의미를 체험하고 79년 전도, 봉사, 계몽의 3대 정신을 펼쳐나갈 한국밀알선교단을 창립하게 된다. 일개 대학생 모임에 "한국"이라는 거창한 규모를 붙인 것에 어떤이는 비웃기도 했지만, 이재서 박사에 따르면 당시의 이름은 미래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이후 보다 체계적인 활동과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밀알의 세계화를 그리며 미국유학을 결심, 도미해서 필라델피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현재는 성균관대, 총신대 등 사회복지학과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며 O.H.P로 시각장애의 한계를 딛고 강의에도 힘쓰고 있다. 하지만 강의보다는 밀알선교단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과 기대를 두고 있는 이 박사는 장애우 복지와 선교를 위해 장애우 스스로의 인식개혁도 필요하지만 정부와 비장애우의 편견불식과 제도적 보완도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장애우선교를 통해서 사회와 교회의 장애를 치유하는 운동이고,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재서 박사는 올 3월 뉴욕에서 세계밀알연합회를 창립하고 지금은 조직확대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박사는 자신에게 있어 이 일은 장애우를 선교하고, 세계교회를 완성시키는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한편 이 박사는 83년에 결혼해서 현재는 2남1녀(태은, 진성, 진영)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이재서 박사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가치는 생명 있는 자의 노력과 열심히 얻어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곱씹게 된다.

 

 

강희석 / 객원기자, 현재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에서 인권사업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성자이태곤, 강희석  webmaster@cowalk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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